기필코 인연 / 조혜경
까칠한 감촉에 놀라 잠을 깼다. 추위에 오그라든 몸에서 두 손은 양쪽 팔꿈치에 닿아 있었다. 사방이 흰색으로 둘러쳐 있었다. 우둘투둘 주름진 팔꿈치를 껴안고 잠깐 잠들었었나 보다. 줄을 주렁주렁 단 기계들의 규칙적인 소리만이 정적을 깨트렸다. 무릎 아래에 걸쳐진 담요를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훈기가 목덜미를 감쌌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수술실과 중환자실에서 2일을 버틴 후, 입원실로 왔다고 물기 가득한 얼굴로 남편이 울먹였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휴대폰 시계가 새벽 4시를 알리고 있었다.
여전히 세상은 어두웠다. 하늘도 칠흑이었다. 그 가운데 밝게 빛나는 별 두어 개가 없었다면 지옥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둠이 두어 바퀴 감싼 채 병원 건물을 포위하고 있다. 가로등 두어 개가 감옥을 도망치는 탈옥수처럼 희미한 첫발을 떼고 있는 모습이 창문 한 귀퉁이로 보였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늦가을, 내게 온 핏덩이는 영겁의 인연이었다. 하늘의 별들은 여력이 다할 때까지 하얀 불을 밝혔다. 허공으로부터 온갖 생명의 기운을 모았다. 그 기운으로 지상에 영롱한 이슬방울 하나 맺었다. 이슬은 간신히 가지 끝에 매달렸다. 밤샘 진통이었다. 어쩌면 땅에 떨어져 흔적없이 흙 속에 묻힐 수도 있었다. 우연이 아닌 기필코 인연이었다. 기적이 일어난 밤이었다. ‘축복’이라는 말뜻을 비로소 실감했다. 아침 물안개를 헤치고 동쪽 하늘로 솟아 나오는 햇빛을 품었다. 햇살의 열정과 가지 끝을 흔드는 질투의 바람을 버티며 매달렸다. 세 번째 삼신 할멈의 '점지'였다.
산모는 밤새워 뒤척였다.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울음이 가늘게 유리창을 울리는 것을 들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기도 온 힘을 기울여 버둥거렸다. 엄마의 숨소리가 가늘어지는 만큼, 심장에 전달되는 진동은 커졌다. 두 낮과 밤 동안 가끔 기운을 차려질 때, 두 손의 감각이 흐려질 때까지 산모는 침대 난간을 쥐었다.
창밖에는 공포의 떨림처럼 거친 바람이 불었다. 낙엽 덩이가 이리저리 그 날개로 대지를 쓸었다. 11월 마지막 주였다. 안간힘으로 매달렸던 단풍잎도 하나둘 그 끈을 놓고 있었다. 입원실을 들여다보던 잣나무 푸른 잎이 산모의 두 주먹에 온 힘을 몰아 주었다. 숨을 몰아쉬며, 안도와 불안의 호흡이 반복되었다. 첫 출산의 길에 있던 산모는 생명을 잉태하고 잘 키워 이 세상으로 보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혼절을 반복했다.
분만실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모두 손에 땀을 쥐었다. 산모는 자신의 몸이 어찌 되던 아기를 지키려고 이를 악물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두 눈엔 안쓰러운 불안으로 얼굴빛이 창백했다.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산모는 아기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금요일 밤 11시였다. 퇴근했던 의사들이 긴급 호출을 받았다. 가족들은 감히 신음 하나 내지 못하고 얕은 숨만 헐떡였다. 심장이 멈출 것 같았으나 아무도,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두 달보다도 더 긴 이틀이었다. 마취 주사액과 온갖 약물이 가는 튜브를 따라 부지런히 몸 안으로 들어갔다. 수혈된 붉은 피가 핏줄을 따라 돌면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분투를 시작했다. 산모는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환청처럼 들으며 수면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남편은 몇 번이고 지옥의 문턱을 오갔다. 흐린 눈 때문에 거듭되는 수술 서약서에 서명조차 하기 어려웠다.
동굴을 헤매는 꿈에서 눈을 떴다. 얼마나 기다렸던 만남이었던가? 산모는 아기의 열 달을 지키며 참 긴 시간을 보냈다. 먹을 것도, 행동도, 보는 것조차 조심하였다. 배를 쓰다듬으며 이번만은 건강하게 이 세상과 만나길 기도했다. 감사의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달력에 예정일을 동그랗게 칠해 놓고,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양말과 이렇게 작은 옷이 맞는 생명이 있다는 걸 신기해하며 베넷 옷을 샀다. 아기가 오는 날을 학수고대했다. 세상과 만나는 그날을 아기도 간절히 기다렸을까? 천지가 개벽하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아기의 첫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이슬은 탄생을 준비했다. 솟아오르는 햇살이 둥근 무지개를 만든 날이었다. 간밤에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꿈을 꾸었다. 맑은 강물과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꽃잎 따라 콧노래 흥얼거렸다. 아침 안개가 피어올랐다. 자작나무 가지 위에는 새들이 목이 쉬도록 축가를 불렀다. 그래도 산모는 그들의 축하조차 아기의 울음으로 들렸다. 엄마의 품을 애원하는 칭얼거림으로 다가왔다. 만남으로 이별을 예고하고 그리워만 하다가 멀어져 갈 수는 없었다. 간절한 기도처럼 아침은 오고, 기다림만큼 고운 이슬이 탄생했다. 아기는 긴 밤을 잘 견뎌주었다.
사방이 온통 흰색이었다. 아기 이불의 오리만이 둥근 부리를 딱딱이다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태어난 지 삼 일만에 엄마 곁에 누운 아기도 새 삶의 기적을 이룬 맑은 눈을 몇 번 껌뻑거리더니 잠이 들었다. 창밖의 단풍잎들이 말을 건네려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칼바람에 사운거리는 억새들의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미라처럼 마른 엄마는 새근대는 아기의 숨소리를 확인하느라 귀를 아기에게 더 기울였다.
하나둘 새벽 불이 켜졌다. 줄지어 선 자동차들이 시동을 걸며 하품을 했다. 엉덩이를 빨갛게 물들이며 강변도로에 들어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못 잔 잠으로 졸음이 뚝뚝 떨어졌다. 새벽을 푹 눌러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긴 암흑의 어둠을 잘 뚫고 왔는지 남편이 병실 보조 의자에 누워 코를 골았다. 강을 따라 안개가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강 위의 징검다리가 여명에 굶주린 표상처럼 안개를 밀어내고 있었다. 아기의 말간 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첫댓글 이슬처럼 긴 밤을 쭗고 나온 인연이 된 생명에 경애를 보냅니다.
한 생명이 태어는 것은 우주가 다시 태어나는 일입니다
나를 포함한 생명이 얼마나 귀중한지, 탄생이 곧 축복임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