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님:
대체적으로 성자나명상가 수행자들의 공통된 진리가 나에서너로 너에서나로 모아지는걸 알수있읍니다
다시말해 사람과사람에게 진정한자유로운 이로움이 향해있다는것이지요
불교의 개념은 정확히모릅니다만 연기와조건을 제가바로 이해했다면 세상에 단열명이존재하든 100억명이존재하든 그렇게선명한 독립적개체라야 제1차적 과제가풀리게됩니다
그래야만 먹을것걱정없이 불안한요소없이 온전한추구가 있다할것입니다 다시말해1차적으로 사람과사람이 온전케됨에 가장값진 진리란것이 되는거지요
시공간을넘어 해탈적(불교에서말하는해탈은 정확히모름) 사람을뛰어넘는 그어떤 초월이있다면 개인적으론 크나큰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방문객님:
저는 "진리"란 표현을 즐기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습니다.
어떤 이치가 있다면...그 이치를 드러내면 족하지, 그 이치에 굳이 "진리"란 이름을 가져다 붙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불자는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불자가 진리를 떠벌이면, 정정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수행하는 불자는 방편이란 이름으로 족합니다.
저는 "상생"이란 이름도 즐기지 않습니다. 다행히도...불교는 "상생(相生)"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이버상에서의 글질은 물론 일상에서도 역시...의미가 모호한 "상생"을, 주장할 일도 없고 주장하는 일도 없습니다.
원래 "오행에서의 상생"은 아주 구체적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종교 일부가 생뚱맞게 상생이란 이름을 가져다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민족종교가 주장하는 "상생"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오행의 논리에 따른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던 중 정치꾼들이 "상생의 정치"라는 모토를 곧잘 거론했고 거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언론에서도 "상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오행의 상생"과는 그 의미가 다른 신조어가 생긴 겁니다. 결국 일반인도 상생이란 표현을 곧잘 사용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신조어인 "상생"의 사용례를 보면...
"오행의 상생"과는 다른 의미를 담아 "상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오행의 상생"이 가지는 뭔가 있는 듯한 뉘앙스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뉘앙스에서 느낌이 일어나거든요. 뭔가 있는 듯한 뉘앙스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유쾌한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상생"이란 이름을 사용하여 어떤 주장을 하면...상대방이 곧잘 동조하게 됩니다. 끌린단 말이죠. 그러다보니 "신조어인 상생"이 일종의 "명칭사기"에 곧잘 애용됩니다.
상생을 무자게 많이 사용하는 민족종교는 자신이 명칭사기를 하는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살펴 봐야 합니다.
종교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일종의 블랙코메디가 곧잘 연출됩니다.
예를 들자면...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정당한 주장을 펼치는 것을 막기 위해, 가해자측이 "상생"을 들고 나오는 식입니다. 하지만 상생이 입을 막는 것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상생이 면책특권도 아니거든요. "신조어인 상생"은 "함께 살자"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함께 살려면...가해자는 불이익을 받아야 하고, 피해자는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함께 살자, 더불어 살자"등의 표현은 저도 곧잘 씁니다. 거품이 빠져 있으니, "함께 살자, 더불어 살자"등의 말을 가지고 진리등을 상상할 일도 없습니다. 그만큼 불자의 입장에서 유익합니다.
글자만으로 진리등을 상상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자에게 권해지는 일이 아니거든요.
언어...위에서 [조삼모사는 일상의 언어와 그 언어를 접하고 일어나는 자신의 느낌 속에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불자는 주변정리를 합니다.
청소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느낌에 휘둘리기만 해서 스스로를 혼동상태로 형성하지 않도록, 자신의 생각에서 드러나는 개념등도 경계한다는 뜻입니다. 최소한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바로 불교의 수행입니다.
"오행의 상생"으로 보자면, 상생이 있으면 상극이 있습니다. "오행"에서...상극이 없다면, 상생은 파괴적인 작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생과 함께 상극도 있기에, 음양오행의 조화가 가능한 겁니다.
"자연과 사람의 상생"에서의 "상생"이 "오행의 상생"을 의미한다면, 상극도 있어야 조화 즉 질서가 유지됩니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야 "태극"인 거예요. "태극"이기에, "역"이 성립합니다.
만약 [자연과 사람의 "상생"]에서 "상생"의 의미가, "오행의 상생"이 아닌, "신조어인 상생"이라면...[자연과 사람의 "공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구체적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은 환경과 공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인간의 조건에 있어...호의적인 환경이냐,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이냐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 논의에서의 "자연" 내지 "환경"이, "(인간) 본성" 내지 "초월자"를 의미하더라도, 동일한 설명이 가능합니다.
자신을 본다..."자신을 보라"는 글자 없이 지식만 나열되어 있어도, ["구체적으로 드러난 자신을 보라"고 속삭이는 글]은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K님의 신념" 그 자체]는, 제 알 바 아닙니다. 저의 입장에서...["K님의 신념" 그 자체]는 수용의 문제를 발생시킬 뿐, 토론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하지만 ["K님 신념"의 드러남]에 있어서는 개입의 여지가 발생합니다.
["신념" 즉 "꿈"]은 ["질료"를 획득함으로써, 있음으로 드러나고 펼쳐지는 까닭]입니다.
즉 [토론의 대상]은, ["K님의 신념" 그 자체]가 아니라, [K님이 스스로의 신념을 있음으로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질료"]입니다.
그렇기에...[다른 신념을 가진 이와의 토론에서...불자는, 앎을 추구할 뿐, 설득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표현도 가능합니다.
불자의 비판은 배척이 아닌 겁니다.
불자는 "위 없는 방편"을 일으키신 [부처님의 "크나큰 슬픔"]을 알기에...밖에서 초를 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꺼이 "상대방의 꿈" 그 안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불자는 배척하기 위해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용한 일입니다. 불자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몇가지 상황상, 외형적으로나마 배척이 두드러지는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그러한 선택을 할 때마다,
스스로 폭력적 상태를 형성한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선택합니다.
그와 같은 경우...[일차적인 "수행의 구체성"]은, ["그러한 기억"과 함께 드러나는 것]이지, ["선택을 드러내는 내용"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성은 행위에 있습니다. 선언에 있는게 아니예요.
"음양에서의 조화"가 "태극"이라면, "오행에서의 조화"는 "상생과 상극(상살)"입니다.
음양오행에서..."조화"는 곧 "역" 즉 "질서"입니다. "상극(상살)에 대한 부정적 느낌"은 "K님의 일일 뿐"입니다. 오행의 일이 아닙니다.
오행은 상생과 함께 상극이 있어야만 조화가 가능한데, 오행이 상극에 부정적일 수 있겠습니까?
오행이라는 꿈을 빌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함에 있어, K님 자신이 일으킨 긍정적 느낌과 부정적 느낌에 휘둘린 나머지, 오행이라는 꿈을 파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앎"이란..."꼴리는 대로"의 이름이 아닙니다. "꼴리는 대로"만 하면, "혼동"만 자아내거든요. 결국 신념이 아니라 모순만 꿈꾸고 드러낼 뿐입니다.
첫댓글 용수님이 극악인을 이야기하듯,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스스로의 꿈안으로도 들어가 보려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알아차림등도 그런 것일테구요... 애초에 불법이, 불자 스스로의 모습도 다루고 있죠.
오...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