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가수 '고복수' 선생이 부른 '짝사랑'(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다. 그 첫머리는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한다. '으악새'가 아주 구슬프게 울어대는 것을 보니 벌써 가을이 온 것이 아니냐'는 애절한 심정을 담고 있는 가사이다. 이 노래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이 노랫말을 읊조리며 깊은 상념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이 노래를 애창하는 사람들도 정작 '으악새'가 어떤 새인지 잘 모른다. '으악새'가 어떤 새냐고 물으면 그저 '으악, 으악'우는 새가 아니냐고 반문하기만 한다. 새 이름에는 그 울음소리를 흉내낸 의성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으악새'를 '으악, 으악'하고 운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는 것도 크게 잘못은 아니다. '뻐꾹, 뻐꾹' 울어서 '뻐꾹새'이고, '종달, 종달' 울어서 '종달새'가 아닌가. 문제는 그러한 새를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으악, 으악'하면서 우는 새를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흔든다. '으악새'의 정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으악새'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도 생소하다. 그래서 이 노래에 나오는 '으악새'를 새 이름이 아니라 풀이름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사실 필자도 그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으악새'가 포함하는 '새'가 '풀'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실제 '으악새'가 '억새'라는 풀의 경기 방언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 그 강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으악새'를 '억새'로 보는 사람들은 "으악새 슬피 우는"이라는 구절을, 억새가 가을바람에 물결치듯 흔들릴 때 우는 듯한 마찰음이 나는데 그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설명한다. 억새가 소슬바람에 스치는 소리는 정말로 스산하고 처량하다. 그래서 그 소리를 얼마든지 풀이 우는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 표준어인 '억새'가 아니라 방언인 '으악새'로 표현한 것은 노래의 가락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시적(詩的) 해석으로 말미암아 이 노래는 더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데 정작 이 노래 속의 '으악새'가 '억새'라는 풀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일 뿐이니 어찌하랴. 이 노래의 작사자는 노랫말을 쓴 배경을 설명하면서 '으악새'를 뒷동산에 올라가 보니 멀리서 '으악, 으악' 우는 새의 소리가 들려 붙인 이름으로 설명한다. 그럼 이 '으악, 으악' 울던 새는 어떤 새였을까? 딱히 그 새의 종류를 말할 수는 없지만 '왜가리'였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지역에서 '왜가리'를 '으악새'니, '왁새'니 하기 때문이다. '왜가리'의 울음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으악, 으악'으로 들리 수도 있고, '왁, 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으악, 으악' 우는 소리를 근거로 '으악새'라는 명칭이 만들어지고, '왁, 왁' 우는 소리를 근거로 '왁새'나 '왜가리'라는 명칭이 만들어질 수 있다. '으악, 으악' 우는 소리와 '왁, 왁' 우는 소리는 그렇게 다른 소리가 아니다. '왜가리'라는 새의 울음소리를 지역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들을 수 있다면 '으악새'니, '왁새'니, '왜가리'니 하는 서로 다른 명칭이 나온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래 속에 나오는 '으악새'가 새 이름이라는 사실은 그 노래의 제2절을 들어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제2절은 "아~ 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한다. '으악새'와 대응되는 '뜸북새'가 조류 이름이기에 그에 대응되는 '으악새' 또한 조류 이름인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따라서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는 '으악새라는 새가 슬피 울어대니 가을이 아닌가요'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으악새'를 '억새'로 풀이할 때의 시적 이미지는 싹 가신다. 그러나 어찌하랴. '으악새'는 풀이 아니라 새인 것을. **이게 제일 그럴듯하긴 한데 … 문제는 원 작사자가 김능인이 아니라 박영호라는데 있다. 박영호가 월북 인사라서 김능인으로 바꿨다는데, 1953년에 죽은 작사자가 과연 배경 설명을 했을까? - 하나만더 **‘짝사랑’을 작사한 박영호 ‘짝사랑’의 작사자를 김능인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대하는 대부분의 가요곡집에도 작사자가 김능인으로 표기되어 있다. 기존의 노래책에서 곡을 선별하여 편집한 우리들의‘한밤의 사진편지 독자 함께 걷기 노래책’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작사자는 엄연히 박영호이다. 왜 작사자가 바뀌었는가하면 박영호가 월북 작가였기 때문이다. 6.25 사변 이후 월북한 예술가들의 작품은 시, 소설, 노래 할 것 없이 남한에서 소통되지 못하도록 했다. 노래는 작곡자가 월북한 것은 물론 작사자가 월북한 것도 금지되었다. 노래의 3 당사자 즉, 작곡자, 작사자, 가수 중의 어느 한분이 월북했다면 어김없이 그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던 것이다. 월북 작가의 금지곡은 작곡가보다도 작사가에 의한 노래가 많았다. 작사가들은 대부분 문학가이었기에 이들의 문학작품이 금지되면서 노래도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사랑을 받던 노래를 살리기 위해서 작사자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고 가사를 약간 바꾸거나 하여 노래를 살리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금지곡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월북 전까지 가장 많은 노래 말을 지어 내었던 조명암(본명 조영출, 예명 이가실, 김다인, 김운탄, 1948년 월북)과 박영호(다른 이름, 처녀림, 1946년 월북)가 작사한 노래였다.‘알뜰한 당신(이부풍 작사)’ ‘고향초(김다인 작사)’ ‘고향설(추미림 작사)’ ‘꿈꾸는 백마강(김용호 작사)’ ‘목포는 항구다(박남포 작사)’ 등은 조명암이 작사한 것이고, ‘연락선은 떠난다(박남포 작사)’ ‘짝사랑(김능인 작사)’ ‘번지없는 주막(추미림 작사) 등은 박영호가 작사한 것이다. ‘짝사랑’은 작사자가 월북작가 박영호이어서 당연히 금지곡으로 되었어야 했지만, 고복수가 처음 부른 후 계속하여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 노래를 살리기 위해, 음반사를 비롯한 이해 관계자들이 작사자를 1930년대 말에 이미 사망한 김능인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위에 있는 추미림, 박남포는 반야월(가수 진방남)의 다른 이름이고, 김다인은 조명암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박영호도 김다인이라는 이름을 썼던 경우도 있었기에 가요계에서는 박영호와 조명암이 작사한 곡을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곡이 몇 곡 있어 밝혀야 할 과제로 두고 있다고 한다. **박영호(1911-1953)는 강원도 통천군 출신으로서 원산에서 성장하였다고 하나 상세한 기록은 없다. 북한에서 간행된 최창호 저“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이 책은 2000년 서울에서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일월서각)라는 이름으로 출판됨)에서는 원산에서 광명보통학교를 마쳤으며, 와세다 대학 문과 강의록으로 대학과정을 터득하고 문학창작의 길에 나섰다고 한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프롤레타리아 연극활동을 하였고 이 때문에 구속되기도 했다. 원산의 프로연극 단체 조선연극공장에서 ‘팔백호 갑판장’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0년대 초, 중반에 연극시장, 신무대. 조선연극사, 연극호, 황금좌 등의 단체를 거쳤고, 1930년대 중, 후반에는 청춘좌, 성군, 고협 등에서 활동했다. 그는 1930년대 중, 후반을 대표하는 몇 명의 중요한 대중극 작가에 꼽히며, ‘산돼지’ ‘등잔불’ 등의 대표작들을 발표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친일목적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중가요 가사는 1932년 ‘세기말의 노래(이경설)’로부터 시작하여 ‘짝사랑(고복수)’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울어라 문풍지(이난영)’ ‘오빠는 풍각쟁이(박향림)’ ‘유랑극단(백년설)’ ‘번지없는 주막(백년설)’ ‘망향초 사랑(백난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냄으로써, 조명암과 함께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사사가로 손꼽힌다. 해방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에 둘째 부인인 작가 이선희와 함께 월북했다. 월북 후 조선연극동맹 초대위원장을 지냈으며, 6.25 사변 때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1953년 3월에 종군작가 활동 중에 전사했다. 폐결핵을 앓던 중에 1952년에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 (이영미 외,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최창호,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 일월서각, 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