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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거듭되는 복수
노명성은 구천인을 보자 급히 일어나 읍을 하고는 웃는 낯빛으로 말했다.
"구 방주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 이 누추한 뚝배기점에를 다 오셨습니까?"
"노 장로가 즐기는 음식을 나라고 싫어 하겠나!"
그는 의외로 쌀쌀맞게 한마디 뱉고는 맞은편 탁자에 가 앉았다. 수하 넷은 구천인 뒤에 병풍처럼 둘러서서 노명성을 노려보았다.
"듣자 하니 노 장로는 식솔이 없다면서?"
구천인은 웃는 낮으로 물었다. 그러나 그 얼굴엔 적이 냉기가 감돌았다. 의외의 질문에 노명성은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내 그 여인이 자기에 관한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쳐 웬지 석연찮은 감이 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여인은 자기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었다.
"청평채(淸平寨), 운가교(雲家橋), 녹보(鹿堡)……."
여인은 그때 예사스럽게 이 몇 마디 말을 내뱉었지만 그 말에 노명성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몸둘 바를 몰랐었다.
개방에 들기 전에 그는 강호의 녹림대호(緣林大豪)로 가만히 앉아서 장물을 나누어 가지는 도적의 우두머리였다. 그러나 강호의 여느 사람은 그 내막을 감감 모르고 그저 사람들을 위해 선뜻 자산을 털어 다리도 수리해 주고 길도 닦아 주는 자선가로만 여기고 있었다.
노명성은 장년에 이르도록 아내를 얻지 않았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양갓집 미녀나 명문 규수와 다리를 놓아주며 어떻게든 맺어 주려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명성은 늘 '물동이는 우물에 부딪혀 깨지기 쉽고, 장군은 전장터에서 죽게 마련이다'라는 말을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녹림대호로서 주변에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만일 어느 날 자기에게 복수의 손길이 뻗친다면 그 혼자만
이 아니라 온 식솔의 운명이 처참해지리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노명성은 바로 그 때문에 가정을 이루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끝까지 녹림대호로 살아간다면 필시 끝이 사나울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해 늘 좌불안석, 마음이 불안하던 차에 마침 범장천과 뜻이 닿아 둘 다 재산을 나눠 주고 개방에 가담한 터였다. 그런데 워낙 강호에 이름이 자자하여 개방에 들자마자 금세 5대(五袋) 제자가 되었고, 또 몇 년 못 가서 개방 10대 장로로 추대되니 명
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러나 지난날 저질렀던 피비린내 나는 그 일들이 끈질기게 마음속에 달라붙어 한시도 떠나지 않고,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벌떡 일어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녹림 총표파자(總瓢把子)로 있던 노명성은 수하 십일장검(十一長劍)에게 명해 청평채 채주인 등문수(鄧文水)의 식솔 열 일곱을 몽땅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 시체는 이레 동안이나 그대로 매달려 있었는데 그 위로 까마귀가 새까맣게 날아들고, 송장 썩는 악취가 인근 십여 리까지 코를 찔렀다. 이렇게 되자 청평채는 자연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운가교는 부유한 곳이었다. 절강 일대 큰 도박꾼들은 모두 운가교에 모여 도박을 놀았다. 운가교는 삼면이 산에 둘러싸여 있고 앞 쪽으로만 강이 하나 흐르고 있어 그 강의 다리를 건너야 운가교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해, 노명성은 역시 십일장검을 데리고 부호집 재산가로 분장하여 운가교로 들어가 도박을 노는 척하다가 중도에 괜스레 트집을 잡아 술상을 뒤엎고 주사위 알을 던지면서 장원 주인에게 싸움을 걸었다. 주사위 알은 장원 주인과 그 수하 두 사람
눈에 정면으로 날아가 박혔다. 세 사람은 단박에 눈이 멀어 버렸다. 십일장검들은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 운가교 남녀노소 백여 명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렇게 되어 노명성은 운가교에서 굉장히 많은 재물과 돈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게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한편 녹보의 보주(堡主)는 원래 대도(大刀) 육청평(陸淸平)이었다. 그의 자식 둘은 기무학문(棄武學問) 시와 부(賦)를 짓기 좋아했다. 녹보에 값비싼 골동품과 금은보화가 가득하다는 정보를 입수한 노명성은 십일장검들을 데리고 또 녹보를 기습했다. 육청평의 두 아들이, 육씨네 집 후대나 잇게끔 어린애들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도 노명성은 악독하게 젖비린내 나는 애기들마저 몽땅 죽여 없앴다.
그러나 강호 사람들 중에 그가 개방에 가담하기 전에 자행한 이 악행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고, 대부분은 오히려 재물을 탐내지 않는 선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다.
노명성은 문득 그때 여인이 내뱉은 그 세 마디가 머리 속을 스쳐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구천인은 착 가라앉은 소리로 주점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뚝배기 요리를 가져 오게! 요리란 요리는 한 가지씩 있는 대로 다 가져 와. 나는 원래 여기 있는 이 노 장로처럼 아끼는 습성이라곤 생판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의 말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 뚝배기점의 요리란 모두 이름난 뚝배기국이었다. 남과 북의 유명한 요릿감으로 뚝배기를 끓이는데 오래 끓여야 제 맛이 난다. 비록 자운재나 호숫가의 주선루(酒仙樓), 낙사거(樂士居)나 홍글루(鴻雁樓) 등 경도 임안에서 이름난 명소에는 못 비기지만 맛만큼은 일품이었다.
사환이 구천인 앞에 각기 크기가 다른 뚝배기 사발 세 개를 가져왔다. 제일 작은 것은 술잔만했는데, 물고기 눈알 몇 개와 지느러미 몇 개가 동동 떠다녔다. 구천인은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그저 맛만 두어 번 보고는 한켠으로 밀어 놓았다. 그 다음 큰 것은 사람의 주먹보다 좀 작을까 한 것이었는데 남방의 부채(腐菜), 부간(腐肝) 그리고 콩알 같은 것을 한데 넣어 끓인 것으로 남모르는 조미료를 넣어 아주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구천인은 그것도 그저 몇 입 뜨는
시늉만 하고 한켠으로 밀어 버렸다. 세 번째 뚝배기는 주먹보다 좀 컸는데 두부를 끓인 것이었다. 뚝배기 안에서는 아직도 두부가 펄펄 끓고 있었다. 구천인은 대수롭지 않게 젓가락으로 두부를 집어 쓱 입으로 가져 갔다. 입이며 식도가 다 익어 버릴 만큼 뜨거운데도 구천인은 낯색 한 번 변하지 않고 펄펄 끓는 두부를 연신 입에 집어 넣고 우물거렸다. 그것만 봐도 구천인의 무공이 매우 고강함을 알 수 있었다. 노명성은 내심 흠칫 놀랐다.
사환은 이번엔 좀전의 것보다 각기 조금씩 더 큰 뚝배기를 세 개 또 가져 왔다. 이번에도 좀전처럼 뚝배기 크기에 따라 제가끔 맛이 달랐다.
구천인은 노명성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이 야밤에 노 장로가 여기 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소이다. 하나 뚝배기국을 한 가지만 먹어서야 어디 재미가 있겠소? 자, 이 뚝배기국이나 한번 맛보시오?"
그러더니 가운뎃손가락을 가볍게 퉁겨 개중 제일 큰 뚝배기를 노명성 앞으로 휙 날려보냈다. 노명성은 오늘 저녁 구천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함을 확연히 알아차리고는 급히 젓가락 두 개를 들어 그 뚝배기 사발을 막아냈다. 그러나 날아오는 힘이 어찌나 센지 뚝배기 사발에 부딪히자마자 젓가락은 뚝 하고 두 동강이 나고 노명성은 그대로 국물을 옴팡 뒤집어썼다. 급히 얼굴을 돌리긴 했으나 그의 오른쪽 뺨은 그대로 뚝배기 국물로 범벅이 되어 국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구천인 뒤에서 있던 철장방 무리들은 킥킥킥 키들거렸다.
노명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탁자를 뒤엎으려고 양 모서리를 딱 잡았다가 간신히 참았다.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구 방주님의 배려,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재간이 없어서 방주님의 맛좋은 요리를 먹을 수가 없었군요. 허허……."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구천인 뒤에 서 있던 넷이 급히 내달아 문을 막아서며 노명성을 에워쌌다. 일이 예사롭지 못함을 느끼면서도 노명성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구천인에게 말했다.
"구 방주님도 개방을 도모하고자 하고, 개방 장로인 나도 방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데 무슨 일로 제게 노여움을 사셨는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노 장로가 날 노엽게 해서야 안 되지. 그랬다면 벌써 죽은 목숨인걸. 지금은 그게 아니야. 그대는 내가 아니라 한 여인을 노엽게 했어!"
그 말에 노명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기와 범장천이 홍칠을 만나 같이 개방을 다시 진흥시킬 일을 논의한 것은 셋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한 사람 더 알고 있다면 출수표 노경……. 그러나 그는 믿을 만한 인물이다. 한데 그 이야기가 어떻게 벌써 그 여인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일까? 뿐만 아니라 철장방 방주 구천인까지도 알고 있다니……. 노명성은 반신반의하며 짐짓 능청을 떨었다.
"구 방주님께서 무슨 악몽이라도 꾸신 게로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를 의심……."
"노 장로를 믿지 않는 사람이 내게 시켰네. 후에 악행을 저지르기 전에 미리 없애라고!"
구천인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천천히 뚝배기 두 개를 들어올려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놀림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러나 뚝배기 두 개엔 장풍의 힘이 실려 노명성을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거기에 일단 얻어맞았다 하면 상해도 보통 상하는 게 아니리라 직감하고 노명성은 급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쭉 뻗쳤다. 그리고는 악 소리를 내질렀다. 두 사람의 장력이 맞닿아 뚝배기는 공중에서 딱 멎었다.
"이 쥐새끼 같은 녀석! 언감생신 내 장풍을 막으려 들다니!"
구천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천인의 만중에는 단황 나으리, 황약사, 서독 구양봉을 내놓고는 누구도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감히 그깟 개방 장로 노명성 따위가 자기와 맞서려 하자 분기탱천하여 이빨을 악물었다.
한편 노명성은 등골에 식은땀이 쫙 내배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구천인이란 놈은 천하 악인 중의 악인이다. 철장방이 지독하다는 것은 세인이 다 알고 있는데, 까딱 잘못하다가는 이 놈 손에 목숨을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
노명성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손바닥에다 온 힘을 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뚝배기 두 사발은 차츰차츰 노명성 쪽으로 움직여와 급기야는 그의 가슴 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노 장로, 그렇게도 뚝배기국을 좋아한다면서! 내 오늘은 실컷 먹게 해 주겠다는데도!"
구천인은 크게 웃어제치며 마지막 힘을 가해 뚝배기를 노명성 앞으로 쓱 내쳤다. 다음 순간, 노명성은 뚝배기 두 사발을 가슴에 안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는 뜨거운 뚝배기에 두 손이 데고, 얼굴에선 식은땀이 송송 내돋았다.
그때 철장방 수하 넷은 이미 노명성 뒤쪽으로 옮겨 와 빙 둘러서 있었다. 이제 노명성은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진퇴양난으로 좌우를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철장방 무리들이 뛰어들었을 때부터 뚝배기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하나 둘씩 슬금슬금 빠져 나가 지금은 이 뚝배기점에 오직 구천인과 철장방 무리 그리고 노명성만 남아 있었다.
"구천인, 사람을 이토록 못살게 굴고도 후환이 두렵지 않소!"
노명성은 노호하며 마지막 힘을 짜내 두 손바닥을 힘껏 밀었다. 그는 무슨 수를 써도 구천인을 당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뚝배기 두 사발을 구천인에게 들씌워 그를 비 맞은 수탉꼴로 만들어 놓아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노명성이 쌍장에 힘을 주자, 천만 뜻밖으로 갑자기 연이어 퍽퍽 소리가 나며 뚝배기 두 사발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구천인이 노명성보다 먼저 손을 쓴 것이었다. 그 바람에 오히려 노명성이 온몸에 뚝배기 국물을 뒤집
어쓰고 비 맞은 수탉 꼴이 되고 말았다. 노명성은 얼굴이고 가슴이고 두 다리고 할 것 없이 몽땅 뜨거운 국물에 데어 온 데가 쓰리고 아렸다. 다행히 가을날 깊은 밤이어서 옷을 껴 입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심하게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노명성은 악에 받쳐 악다구니를 썼다.
"네 놈이 나를 이렇듯 업수이 여긴단 말이냐. 좋다! 내 목숨을 내걸고 너와 싸우리라!"
그리고는 주먹을 휘두르며 날쌔게 구천인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구천인만은 못해도 노명성의 무예는 개방에서도 으뜸으로 일점지 나장태, 부귀산인 범장천과 견줄 만했다. 그는 온몸에 힘을 모아 구천인의 앞가슴을 냅다 갈겼다. 한데 구천인은 산더미처럼 꼼짝도 않고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노명성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도 다시금 구천인의 앞가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바로 그때, 구천인이 움찔하는 듯싶더니 잽싸게 그의 주먹을 덥석 쥐었다. 노명성은 그
에게 주먹이 꼭 쥐인 채 빼내려고 온몸을 바둥거렸다. 그러나 구천인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의 주먹은 옴쭉달싹도 하지 않았다. 구천인은 서서히 서서히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명성은 얼굴빛이 점점 창백해져 가고 우지직우지직 소리가 나면서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다섯 손가락은 뼈마디가 다 으스러져 몇 십 개로 조각이 나고 그의 얼굴에선 비 오듯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세상에 나한테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애석하게도 네 녀석은 아니닷!"
구천인은 노명성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노명성은 소리를 지르려 해도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노 장로, 네가 그 여인을 배반한 죄 실로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여인은 하는 수 없이 네 놈을 죽이는 것이지만 나는 진작부터 네 놈을 죽이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네 놈은 우리 철장방의 원수다!"
노명성은 그 말에 언뜻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그가 개방 장로가 된 이후에 그는 수하들을 데리고 철장방과 한 번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노명성은 철장방 열 몇 명을 단번에 쓰러눕혔다. 그 싸움에서 노명성은 큰 승리를 거뒀고 그로 인해 개방에서 위신도 높아졌다. 벌써 수년 전의 일인데도 구천인은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니……."
"이번 이 한 장(掌)은 그때 죽은 우리 철장밖 형제들을 대신해 복수하는 거다."
구천인은 팍 하고 장풍을 한 번 날렸다. 삽시간에 노명성의 왼쪽 귀가 뚝 떨어져 나가고 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노명성의 눈에서 번쩍 살기가 튀었다. 그는 맞받아 또다시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구천인은 이미 으스러질 대로 으스러진 노명성의 주먹을 한 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조각난 뼈들이 비수처럼 살을 파고 들었다. 노명성은 악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왼팔에서도 기운이 빠져 나가고 내치던 주먹은 털렁 무릎께로 떨어져 내렸다.
"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되니 또 왼손을 휘둘러? 내 왼손마저도 가루를 내놓겠다. 그때 가서 네 놈이 어쩌는지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구천인은 노명성의 왼손까지 텁석 틀어쥐고는 얼굴이 파르르 떨리도록 주먹에 힘을 주었다. 노명성은 왼손마저도 으스러져 버렸다. 부서진 뼈 조각들이 삐죽삐죽 살가죽을 뚫고 비어져 나왔다.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노명성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명성은 머리에 무엇인가가 철썩철썩 들씌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번쩍 정신이 들었다. 철장방 무리들이 탁자 위에 남아 있던 뚝배기 국물을 모조리 쓸어 모아 그의 머
리 위에 퍼붓고 있었다. 그는 그 국물을 옴팡 뒤집어써서 얼굴이 온통 찐득찐득하고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구천인 이 놈! 사지를 찢어 죽일 수는 있어도 이렇듯 모멸감을 주는 법은 천하에 없다. 죽이려거든 깨끗이 죽일 것이지 이런 능욕을…… 처, 천하에 모, 몹쓸 노옴……."
"하하하, 아직 입은 살아 있군 그래. 두 손은 다 요절나고, 귀까지 하나 덜렁 떨어져 버렸는데 이제 누가 너를 청한자자라고 하겠느냐? 영락없이 문전걸식 떠돌아다니는 거렁뱅이 꼴이다, 으하하하……."
"네 놈의 만행은 꼭 보응을 받고야 말리라."
노명성은 칠을 질질 흘리며 쥐어짜듯 내뱉었다. 구천인은 순간 웃음을 딱 멈줬다.
"그으래? 그렇담, 좋다?"
그리고는 대뜸 노명성을 향해 한 주먹 힘껏 내리쳤다. 노명성은 턱이 탁자에 짓찧이며 이빨이 하나 툭 분질러져 나갔다. 구천인은 사이를 두지 않고 그의 등허리 대혈을 번개같이 내지르고는 그의 뒷다리를 움켜잡고 종아리와 발뒤축에 손가락을 푹 찔러 넣어 힘줄을 뚝뚝 끊어 버렸다. 노명성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소름 끼치게 비명을 내질렀다. 귀신의 호곡이 꼭 그러하리라.
구천인은 뚝배기점이 떠나가라 웃어제쳤다.
"어쨌든 목숨은 살려 주겠다. 이만하면 대단히 사정을 둔 것이니 가서 너네 그 새 방주를 모시고 어디 한번 우리 철장방을 집어삼켜 봐라!"
구천인은 노명성을 한 번 걷어차고는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뚝배기점을 걸어 나갔다.
범장천은 그의 숙소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삼십육식 탈혼장은 일종의 음유(陰柔)한 내력으로 그 장력이 신기하고 법수가 변화무쌍했다. 그리하여 범장천은 매일 무예 수련을 할 때마다 반드시 음초지맥(陰焦之脈)과 소음(少陰) 양처의 경맥을 연마하여 음유가 하나로 통하도록 내력을 형성시키곤 했다. 그가 금방 수련을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요?"
"방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대청으로 좀 오시랍니다."
범장천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돌아가 방주님께 아뢰게. 내 바로 간다고."
범장천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혹 흠잡힐 만한 점이 없는지 두루 두루 생각해 보았다. 그럴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암청자(暗靑子)를 매고는 옷을 갖춰 입은 뒤 선뜻 문을 나서 앞뜰에 있는 대청으로 걸어갔다.
가짜 미립은 대청 복판에 앉아 있었다. 여인은 범장천을 보자 얼굴에 꽃 같은 웃음을 방글거리며 그를 맞아들였다.
"뭐 긴한 일이 있어 부른 건 아니에요. 긴긴 밤에 혼자 심심해서 범 장로와 그저 한담이나 하려고 부른 겁니다."
'이런 화냥년같으니라구. 밤낮 사내들을 껴안고 음탕하게 뒹굴다가 맥이 빠지면 수하 남자들을 불러 한담이나 하겠다고? 이런 계집이 대체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범장천은 속으로 계집을 욕하면서도 사뭇 정중히 응수했다.
"방주님께서 그러시다면 저 역시 마다하겠습니까?"
여인은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레 말했다.
"범 장로께서도 미 방주의 딸 미립을 보셨겠지요?"
범장천은 흠칫 놀랐다.
"예, 보긴 보았습니다만……."
기실 미립을 본 사람은 범장천만이 아니었다. 미립이 그때 용골묘에 뛰어들어 자기가 진짜 미운산의 딸 미립이라고 하면서 그 당장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펼쳐 보였을 때 개방 상하가 다 두 눈 멀정히 뜨고 번연히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오늘 이 계집은 생뚱맞게 이 말을 꺼내는 걸까? 범장천은 사뭇 긴장했다.
가짜 미립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난 내가 진짜 미립이라 하고, 그 여잔 자기가 진짜 미립이라고 하지만 진짜가 가짜가 될 수 없고 가짜도 진짜가 될 수 없는 일 아니에요? 범 장로같이 총명한 분들은 모두 그 여자가 가짜이고, 내가 진짜 미립이란 걸 믿고 있겠죠?"
여인은 또 호호호 요염하게 웃어댔다. 범장천은 이 계집이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았다. 이 계집은 마음속 깊이 홍칠을 연모하고 있다. 그러기에 진짜 미립을 더 더욱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립을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남들이 자기 미모가 진짜 미립을 능가한다고 여기길 바라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장천은 공손히 말했다.
"방주님은 능력도 미모도 모두 그 계집에 비해 훨씬 월등합지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허허허……."
그러자 가짜 미립은 또 한 번 살짝 웃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짐짓 비통한 기색으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범 장로님,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아아, 할 수 없이 말해야겠군요……."
"방주님께선……."
범장천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감히 더는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 버렸다.
"어제 임안성 동사조항 돌다리 옆 범 장로의 집에서 범 장로의 가솔 다섯이 그만……."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장천은 벌떡 일어섰다.
"뭐라구요?"
지략이 뛰어나고 담대한 범장천이건만 임안성 동사조항 돌다리 옆의 집이라는 말이 여인의 입에서 흘러 나오자 숨이 탁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아아 범 장로님, 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식솔들은 모두 죽고 오, 오직 어린애 하나만 도망쳐 나왔는데……."
범장천은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사정없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목이 막혀 꺽꺽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그…… 그게……아니, 그게…… 저, 정말……."
가짜 미립은 매우 비통한 기색으로 천천히 말했다.
"내가 개방 장로 출수표 노경을 시켜 급히 달려가게 하였지만 그 땐 이미 때가 늦어 오직 그 집 손자만이……."
범장천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의 두 눈에선 소리 없이 눈물 방울이 주르륵 굴러 떨어졌다. 범장천은 동사고항 집에 있는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이 피 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각별히 몸조심하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신신당부했었다. 그런데 그 악몽이 바로 현실이 될 줄이야……."
"내 소, 손자가 아직 살았다구요? 지, 지금 어디 있소?"
범장천은 맥없이 물었다. 그러자 개방 장로 출수표 노경이 어린애 하나를 부축해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는 범장천을 보자 쏜살같이 달려와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도 죽고 엄마도 죽었어요……. 동생들도 모두……."
범장천은 손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재산을 나눠 주고, 집을 버린 채 개방에 가담한 것은 오로지 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였다. 오늘에 이르러 이렇듯 가솔들이 모두 비명에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다행히 창천이 보우하사 손자 하나는 살아 남아 범씨 후대는 잇게 되었다만……."
범장천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손자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 엄마는 어떻게 죽었느냐? 어느 놈들이 죽였지?"
어린 손자는 흐느끼면서 그때 일을 두서 없이 늘어놓았다. 뒤죽박죽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범장천은 대강의 경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아이의 말을 듣건대, 그 복색은 개방 사람들임이 분명하고, 홍칠의 수하들의 악행임에 틀림없으나 그건 결코 아니다. 홍칠은 나와 대사를 의논하고 서로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그런 악행을 자행할 수 없다. 홍칠의 수하 사람들이라면, 건강 분타 타주 나대통과 절강 분타 타주 노유각일텐데 이 둘은 모두 그런 유의 강간과 살인을 절대로 범하지 않을 올곧은 사람들이다. 그들 입으로 직접 자기네가 일점지 나장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지만 실상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개방 중에서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 오직 이 가짜 미립…… 이 년의 수하 놈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개방을 가장한 딴 놈들의 소행……."
지모가 뛰어난 범장천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면서도, 십중팔구는 이 악독한 여인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 쥔 근거가 없으니 함부로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터, 그는 솟구치는 비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었다.
"범 장로님, 홍칠은 정말 극악무도한 인간입니다. 하나 홍칠에게 보복하는 건 잠시 훗날로 미루고 범 장로님께선 일단 집으로 돌아가셔서 후사를 처리하십시오."
"그래야겠습니다!"
범장천은 의언히 대답하고 손자를 데리고 대청 밖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여인은 생긋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얘야, 할아버지를 따라가지 말고 나와 함께 여기 있는 게 어떠냐?"
범장천은 흠칫 놀랐다. 이 계집의 손에 손자를 맡겨 놓고 가다니, 그럴 순 없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그 여인을 본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내 범장천이 백치가 아닌 이상 네 년의 지독한 심보와 악독한 수단을 모를 리 없다. 하나 앞날을 기약하려면 하는 수 없지.'
범장천은 웃는 낯으로 손자에게 말했다.
"그래, 너는 여기 남아 있거라. 저분이 개방 방주님이시다. 너를 극진히 아껴 주실 게다."
손자를 두고 나오자니 범장천은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여인에게 그런 속내를 들킬까 봐 손자의 손을 놓고 황급히 대청을 걸어 나왔다.
범장천은 숨이 턱에 닿도록 한달음에 내달아 황망히 동사조항 돌다리 옆에 있는 자그마한 집에 당도했다. 관 네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뜨락은 쥐죽은듯 조용했다. 뜨락을 휘둘러보고 나서 범장천은 관을 지키고 있는 개방 사람 몇에게 소리쳤다.
"내 친히 할 일이 있으니 너희들은 대문 밖에 나가 파수를 서도록 하라. 어느 놈이건 내 명도 없이 들어왔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이 달아날 줄 알아라!"
그는 마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식솔을 해친 원수이기나 한 것마냥 두 눈을 부릅 뜨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은 흠칫 놀라 벌벌 떨며 쫓겨가듯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범장천은 대문 빗장을 지르고 뜨락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지난 날 즐거운 웃음 소리가 흘러 넘치던 뜨락, 화기애애하던 집……."
심정이 울적해질 때마다 그는 이 동사조항 돌다리 옆에 있는 이 집으로 와서 마음속의 우수를 털어 버리곤 했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세 손자를 거느리고 여섯 식구가 마음 편하게 담소를 나누던, 이곳은 범장천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듯 피바다가 되어 버리고, 식솔 모두 비명 횡사를 하다니…… 더욱이 요행히 살아 남은 손자 하나마저 그 계집의 손아귀에 앗겨 버려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범장천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한 기분이었다.
그는 관 앞에 서서 두 손으로 관 뚜껑을 짚고 슬픔에 잠겨 말했다.
"얘들아, 모두 내 탓이다. 나 때문에……."
그리고는 두 손에 힘을 주어 관 뚜껑을 밀어 열었다. 그 안에 아들이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소년 상부(少年喪父), 중년상처(中年喪妻),노년 상자(老年喪子), 이 세 가지를 가장 큰 불행으로 여긴다. 그리고 누구나 노년에 이르면 아들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범장천은 아들 범옥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 있다가 그는 눈시울을 닦고 아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록 사람들이 아들의
얼굴을 대강 닦아 놓기는 했으나 아직도 얼굴 여기저기에 흙 모래가 묻어 있었다. 그는 아들의 시체를 우물에서 건져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사람을 이렇게 우물 안에 처넣어 죽이다니…….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두 번째 관을 열어 보다가 그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 온순하고 착한 며느리, 며느리는 지금 옷 한 가지 걸치지 못한 채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저 시체를 거둔 사람이 급히 가져다 덮어 놓은 듯 천 조각 하나만 덜렁하니 국부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범장천은 악이 치받쳐 자기도 모르게 발뒤축을 쿵쿵 굴렀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놈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에 갈기갈기 찢어 죽였으리라.
범장천은 성마르게 관 뚜껑을 와락 당겨 닫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세 번째 관을 열어 보았다. 열두 살 어린 손자가 마치 잠든 것마냥 조용한 낯빛으로 누워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자의 입가엔 시뻘건 선지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늘 이 일의 내막을 밝히지 않고서는 내 어찌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으리!'
범장천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손자의 시체를 안아 관에 기대앉혔다. 아이는 힘없이 손가락을 내려뜨린 채였고, 눈동자에선 검푸른 빛이 돌았다. 그는 의아해졌다.
'내가 개방을 배반하고 미운산 방주을 살해하는 데 공모했다고 하여 개방이 우리 가솔을 몰살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걸 보아하니 다른 어떤 놈의 소행임에 분명하다. 과연 누굴까?'
그는 자기와 원수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꼽아 보았다. 그러나 딱히 누구라고 짚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눈물이 글썽 차오르며 손자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얘야, 나도 차마 네 여린 몸에 칼을 대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고는 머리를 숙이고 손자 애를 반듯이 땅에 눕혔다. 그는 손자의 웃옷을 쭉 찢고는 장화 안에 꽂고 다니는 칼을 휙 뽑아 손자의 가슴을 쿡 찔렀다. 자기 가슴을 찌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와락 밀려왔다. 범장천은 하늘을 우러러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꾹 감았다. 그는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손으로 어린 손자의 가슴을 짝 짜갰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린애의 심맥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철장방이다! 철장방!"
범장천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며 불꽃이 파팍 튀었다. 그는 남이 들으면 큰일나겠다 싶어 황급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골몰했다. 내막을 확연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천인의 수하 놈들이 겁 없이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건 반드시 그 여인이 배후에서 모종의 지시를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계집은 벌써 자기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밀고를 한 놈은?…… 그는 또다시 의문에 빠져들었다. 범장천
은 천천히 도포를 벗어 손자의 시체를 싸서는 관 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는 관 앞에 꿇어앉은 채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주르르 주르르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되풀이 되풀이 곱씹었다. 그는 너무나 절통하고 기력이 쇠잔하여 네 번째 관은 열 힘조차 없었다.
대문 밖으로 쫓겨나 있던 개방 사람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범장천이 나오지 않자 그가 너무나 비통하여 자살해 버린 것은 아닐까 덜컥 의심이 났다.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문을 두드렸다.
"범 장로님! 범 장로님, 문을 여시오. 어서 문을 여시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다급해진 개방 사람들은 그대로 문을 부숴 버리고 화들짝 뛰어들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우르르 몰려 들다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모두들 그 자리에 엉거주춤 멈춰 섰다. 범장천은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도포는 걸치지도 않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 퍼질러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불현듯 벌떡 일어서더니 정신없이 이리저리 오락가락했다. 그의 눈에선 소름끼칠 정도
로 광기가 번뜩였다. 한순간 범장천은 우뚝 멈춰 서서 발뒤축을 구르면서 소리쳤다.
"아…… 나도 가자. 천당을 가든 지옥을 가든 나도 너희들을 따라가겠다!"
그는 미쳤음에 틀림없었다. 개방 사람들은 넋나간 사람마냥 멀거니 서 있다가 와락 달려들어 그를 잡아 끌었다.
"이 놈들, 이 무슨 무엄한 짓인고! 날 내버려둬! 내버려둬!"
범장천은 몸부림을 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개방 사람들은 넙죽 꿇어 엎드려 통사정을 했다.
"범 장로님, 고정하십시오! 제발 정신차리십시오. 그래도 아직 손자님이 한 분 계시지 않습니까? 앞으로 손자님이 커 가는 걸 보시면서……."
범장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말에 귀기울이더니 외쳤다.
"손자? 손자? 그래 내 손자! 내 손자 어디 있어? 지금 어디 있나 말이다?"
그는 개방 사람을 덥석 붙잡고 어서 자기 손자를 내놓으라고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개방 사람들은 무서워서 와들와들 떨며 소리쳤다.
"아이고, 개방 총부에 있어요. 안심하세요! 방주님이 데리고 계시잖아요……."
그러자 범장천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더니 고개를 돌려 관 네 개를 바라보며 마치 나들이 가는 사람마냥 태연히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다. 잘들 있거라."
그는 이제 눈물도 말라붙고 슬픔도 다해 버린 듯했다. 개방 사람들은 이 미친 범장천이 혹 거리에서 개방 망신을 시키면 어쩌나 염려되어 황상을 옹위하듯 좌우 앞뒤를 에워쌌다. 범장천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문을 나서고 돌다리를 건너 동사조항을 떠나갔다. 거리로 들어서자 그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내 손자, 내 손잔 지금 어디 있단 말이냐? 어디에?"
늦은 시각이라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간간이 지나가던 사람들은 서로 수군덕거리며 손가락질을 해대면서 범장천 쪽을 힐끔거렸다. 개중에 한 노파가 어린애를 안고 서서 혀를 끌끌 차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범장천은 노파와 눈길이 마주치자 팔죽지를 잡고 있는 개방 사람들을 휙 뿌리치며 갈지자걸음으로 노파에게 헐레헐레 뛰어갔다.
"오오, 여기 있구나! 내 손자, 내 손자 여기 있었구나!"
산발을 한 사람이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자기 쪽으로 달려들자 노파는 혼비백산하여 아이를 꼭 끌어안고 횅하니 줄행랑을 쳤다. 그러자 범장천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거리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서더니 앙천대소를 했다.
"허허허허…… 손자 놈이 달아났다. 내 손자 놈이 달아났어……. 내겐 이젠 손자가 없다, 손자가 없어!"
그러더니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범장천이 개방 사람들에게 끌려 개방 총부로 돌아왔을 때 가짜 미립은 대청에 앉아 있었다. 그 좌우로는 여인을 따르는 자들이 둘러서 있었다. 범장천은 대청에 누가 누가 있는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듯 모둠발로 통통 뛰며 제 소리만 쥐어짰다.
"아이고 죽었다, 내 손자가 죽었다. 내 손자 모두 죽었다!"
가짜 미립은 범장천을 유심히 쏘아보았다. 영민하기 그지없던 그가 삽시에 저토록 미치광이가 돼 버리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도무지 성한 놈의 짓거리는 아니었다.
"범 장로께서는 너무나 비통하여 정신이 돌아 버린 모양이다. 저 지경이 되면 미쳐 버릴 수밖에 없겠지……."
가짜 미립은 가볍게 탄식을 하고는 두 수하에게 범장천을 데려다가 쉬게 하라고 명했다.
두 사람은 범장천을 부축하려고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범장천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며 그 두 사람에게 장풍을 날렸다. 삼십육식 탈혼장 중 암연소혼이라는 법수였다. 다행히 앞가슴을 맞지 않아 경상을 입었을 뿐이지만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단박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미처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개방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범장찬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정신 이상이 된 상태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구천
인은 가짜 미립 곁에 앉아 내내 냉담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그의 두 대혈과 혼수혈(昏睡穴)을 연거푸 찍었다.
"이 놈, 이 놈……."
범장천은 구천인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다가 쿵 쓰러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자, 이젠 범 장로를 모셔다가 쉬게 하라."
여인이 침통하게 명했다. 수하 몇은 범장천을 총부 뒤채로 들고가 침대 위에 눕혔다.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문득 웃으며 구천인에게 물었다.
"구 방주님 생각엔 범 장로가 정말로 미쳤다고 보세요?"
구천인은 씁쓰레한 미소를 떠올리며 뇌까리듯 말했다.
"난 종래로 철장방 방주로 있으면서 수하 사람들을 믿어 본 적이 없소……."
여인은 방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게 누구 없느냐?"
여인이 소리치자 시녀 몇이 달려왔다.
"범 장로님께서는 일시 상심하셔서 정신이 돌아 광기가 생긴 것 같다. 혹 범 장로 손자를 데려다 보이면 정신이 맑아질지 모르니 너희들은 어서 가서 손자를 데려다 보여 봐라."
시녀들은 허리를 굽실하고는 급히 물러갔다.
여인은 구천인을 돌아보며 깔깔 웃었다. 구천인도 따라서 쩔쩔 웃어젖혔다. 자못 득의 양양한 웃음이었다.
가짜 미립의 명을 받들어 시녀들은 범장천의 숙소로 그의 손자를 데리고 갔다. 그 아이는 범장천의 큰 손자였다. 열대여섯 소년이라 웬만큼 철이 든 아이였다. 할아버지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허둥지둥 따라왔다. 시녀 하나가 문 밖에서 소리했다.
"범 장로님, 범 장로님네 공자 분이 오셨습니다."
방안에선 응대가 없었다. 시녀들은 잠시 기다리다가 대답이 없는 그대로 범 장로의 손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범 장로는 침대 위에 앉아서 이불을 이리저리 들추면서 자락 자락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방안에는 천 조각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시녀들은 어리벙벙해서 서로 마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범 장로님, 범 공자께서 장로님을 뵈러 오셨습니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실성한 모습을 보자 목이 메어 울부짖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범장천은 눈을 부릅 뜨며 소리쳤다.
"뭐,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니! 내가 무슨 네 할아버지냐?"
손자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도 죽고 어머니도 죽고 동생들도 모두 죽은 터에 할아버지까지 이렇게 실성을 하시다니, 아이는 가슴을 뜯으며 소리쳤다.
"아이고 할아버지, 저예요, 저예요오……."
그러나 범장천은 손자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희멀건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기들이, 범장천이 정말로 실성한 것인지 그 진위를 염탐하러 왔다는 것도 잊은 채, 시녀들도 그 광경을 보고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범장천은 계집아이들이 훌쩍거리자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져서는 개중 하나에게 와락 덮쳐 들며 으르댔다.
"울긴 왜 울어? 울긴 왜 우냔 말이야?"
시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울먹였다.
"범 장로님, 난…… 난 울지 않았어요……."
"하하하…… 울지 않았다고? 울지 않았다고? 거짓말 마라! 방금 전에 울었잖아? 울었지, 울었지, 엉?"
그는 뒤룩뒤룩 눈망울을 굴리며 시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일순 기괴하게 웃음을 흩뿌리며 입고 있는 옷을 훨훨 벗어부쳤다. 그리고는 짧은 속곳바람으로 침대 위로 훌쩍훌쩍 뛰어오르며 주절주절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난 개방 방주가 되련다, 개방 방주! 흥, 노명성 놈? 나장태 놈? 그따위 거렁뱅이 놈들이 방주 자리를 넘봐? 어림도 없는 소리! 개방 방주는 내가 된다, 내가 돼! 으하하하하……."
시녀들은 어리벙벙하니 보고 있다가 서로 귀엣말을 속닥이고는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그녀들은 그 길로 곧장 대청으로 뛰어갔다.
가짜 미립은 거만한 얼굴로 시녀들이 달려 들어오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녀들이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자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며 의미 심장하게 물었다.
"그래, 어떻더냐? 미친 게 분명하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범 장로님은 확실히 미쳤습니다. 자기 손자도 못 알아보고…… 그리고 또……."
시녀는 범장천이 짧은 속곳바람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종종걸음을 치면서 허튼소리를 주절거리던 모습이 생각나 말을 잇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그녀는 가짜 미립과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입을 싸쥐었다.
"네 말이 사실이렷다? 만의 하나 잘못 본 거라면 네 목숨은 없다는 걸 알렷다!"
가짜 미립의 말에 그 시녀는 흠칫 놀라 읍을 하며 다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소저가 보기엔 범 장로는 확실히 미친 것 같사오나 방주님께서 미심쩍으시다면 다시 한 번 시험해 보시옵소서……."
그 말에 가짜 미립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럴 새가 어디 있느냐? 미쳤으면 미친 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녀는 표독스럽게 웃어젖혔다. 범장천과 노명성이 이미 자기를 배반한 이상 두 놈은 이미 무용지물이요, 뿐더러 큰 장애물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노명성은 병신이 되었고 범장천 또한 실성했으니 자잘한 근심 걱정은 얼추 사라진 셈이었다. 그녀는 시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분부했다.
"네가 수하의 시녀들을 배치해 돌아가며 매일매일 범 장로 시중을 들게 하라. 아무데도 나가지 말게 해야 한다. 달아나서 길거리에서 미친 짓을 하면 우리 개방의 대 망신이다!"
며칠 전부터 경도 임안에 귀가 하나 날아가고 형색이 볼품없이 남루한 거지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절뚝절뚝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그 몰골에 보는 사람마다 혀를 끌끌 찼다. 거렁뱅이 개방 사람들도 누군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는 이 거지, 이 거지는 바로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청한자자 노명성이었다. 그는 문전걸식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부잣집 대문 앞에서 엎드려 새우등으로 추운 밤을 지새고는 동녘이 희부여니 밝아올 무렵이면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또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워낙 거렁뱅이였던지라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내밀어도 주저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혹은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혹은 몇 전 집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는 그 돈으로 저잣거리에 가 호떡 몇 개를 사서 배를 불렸다.
그날도 그는 한 골목을 찾아 들어 잠자리를 찾았다. 마침 적당한 데를 골라 누우려 하니 거기엔 이미 거렁뱅이 둘이 누워 있었다.
"자리 좀 내주게나."
노명성이 청하니 두 거렁뱅이는 두말없이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조금 틈을 비워 주었다. 세 거렁뱅이는 추위를 이겨 보려고 서로 몸을 바싹 달라붙였다. 깜박 잠이 들려 하는데 두 거렁뱅이 중 하나가 노명성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소곤거렸다.
"노 장로님, 누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노명성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알고 있네."
"노 장로님, 난 노유각이외다."
"그것도 알고 있었네."
노명성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이번에는 노유각 옆에 있는 사내가 말했다.
"나는…… 나대통이외다."
"그것도 알고 있어."
노명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대통과 노유각은 노명성 곁으로 더욱 다가붙으며 물었다.
"노 장로님을 해친 놈이 대체 누굽니까? 노 장로와 범 장로가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게 이미 발각된 게 아닙니까?"
노명성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가만히 말했다.
"그런 것 같진 않네. 발각되었으면 놈들이 잡아다가 신문을 할 터인데 그러진 않고 다짜고짜 죽이려고 들겠나. 듣건대는 놈들이 일점지 나장태 수하 사람들로 가장하여 범 장로네 손자만 하나 남기고 네 식솔을 모조리 도륙했다고 하더군."
그 말에 노유각과 나대통은 절통하여 가슴을 쳤다. 노유각은 가까스로 격분을 억누르고 진중한 기색으로 속삭였다.
"노 장로님, 이 골목을 빠져 나가면 끝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습니다. 그걸 타고 가십시오. 우리 개방의 은거지로 데려다 줄 겁니다. 가셔서 몸을 보전하십시오."
그러자 노명성은 갑자기 번쩍 두 눈을 뜨고 노유각과 나대통을 노려보았다.
"날 해친 놈을 아직 죽이지 못했는데, 가긴 어딜 가!"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리 권해도 소용없으리라 생각하고 나대통과 노유각은 그 얘긴 접고 다시 물었다.
"놈들이 어떻게 노 장로님을 해쳤는지 소상하게 알려 주십시오!"
노명성은 목소리를 낮춰 냉랭한 어조로, 구천인에게 당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서 침울한 어조로 덧붙였다.
"보아하니, 놈들은 아마 나와 범 장로의 계획까진 모르되 우리가 홍칠을 만난 일은 알고 있는 모양이네. 그러지 않고서야 그 계집이 이렇게 마수를 뻗칠 수야 있는가. 그 계집년은 홍칠을 만나고도 잡아 오지 못한 것 하나만으로도 이런 짓을 능히 저지르고도 남을 년이네. 구천인 독단적으로는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는 터, 필시 그 계집이 개입되어 있어!"
"잘 알겠습니다. 우리 둘이 가서 방주님께 이 일을 알리겠으니 노 장로께선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노유각이 가만히 말했다.
그때 골목 초입으로 거렁뱅이 둘이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복색은 거렁뱅이나 의연히 머리를 쳐들고 흔들흔들 활개를 치며 걸어오는 품이 단순한 거렁뱅이 같지는 않았다.
"자네들 둘은 어서 여기를 떠나게."
노명성이 말했다. 노유각과 나대통은 급히 몸을 일으켜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노명성은 절룩거리며 그자들을 맞받아 걸어갔다.
"형제들, 돈 몇 전…… 사정 좀 봐 주게……."
그 두 사람은 노유각과 나대통이 사라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속이 탔다. 개중 하나가 목을 빼들고 계속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주시하면서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며 귀찮다는 듯 뇌까렸다.
"에잇, 성가셔. 옜소!"
노명성은 손가락 마디가 다 으스러져 버려 미처 그것을 받아 쥐지 못했다. 동전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또르르 굴렀다. 그는 급히 쭈그리고 앉아 동전을 줍느라 여념이 없었다. 참으로 가련한 몰골이었다. 두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노유각 등이 사라진 쪽으로 다급히 뛰어갔다. 두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노명성은 동전을 주워 들고 도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정신을 가다듬으며 운기(運氣)를 시작했다. 그는 이젠 주먹과 발을 도저히 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장차 한 번은 꼭 써 먹으리라 다짐하고 동전을 암기(暗器) 삼아 새로운 무예를 연마하는 중이었다. 그는 늘 손에 동전을 가지고 놀았다. 이번에도 그는 그 조막손으로 동전닢을 던져 올렸다 받곤 하면서 연마에 열중했다. 그의 손놀림은 정확했다.
경도 임안 거리 어느 골목 작은 뜨락, 일전에 홍칠이 찾아갔던 바로 그곳에 살고 있는 오의파 장로 나장태는 지금, 눈시울을 내리깔고 침대에 걸터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예의 그 개잡이꾼이 들어왔다
"맏형님, 아홉째가 벌써 돌아왔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일점지 나장태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일점지는 아무 말 없이 손사래를 쳤다. 사설은 생략하고 앉으라는 뜻이었다.
그들 셋이 앉자 나장태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소식인가?"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소씨 거렁뱅이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뿐이라 강을 따라 내려가며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소씨 거렁뱅이를 봤다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걸 보면 이미 죽은 게 분명한 성싶습니다."
일점지 나장태는 기쁜 기색도 아니요,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무표정하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일곱째한테 눈길을 돌렸다.
"맏형님, 전 범장천에게 가 보았는데 두 계집애가 곁에서 수청을 들며 여러 가지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심드렁할 뿐, 그 고운 계집들을 한 번 끌어안지도 않으니 실성을 해도 단단히 실성한 모양입니다."
그는 일점지 나장태의 기색을 흘낏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맏형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이 범 장로는 언제나 여자를 끼고 놀기 좋아하는 풍류객인데 지금은 이쁜 처녀 애들이 벌거벗고 달려들어도 그저 멍청하니 앉아 있기만 하니 글쎄 아무리 봐도 실성했다니깐요."
일점지 나장태는 무표정하니 듣고 있다가 문득 물었다.
"그래 범 장로는 손자는 만나 보았겠지?"
"만나는 보았지만 제 손자인 줄도 모르더란 말입니다."
일곱째 말에 나장태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 묻지 않았다. 나장태가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자 아홉째가 한마디했다.
"노명성 역시 매일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문전걸식만 하는데, 그 얼굴엔 비분강개하는 기색도 없고 아무 표정이 없습니다. 그저 동전 몇 닢을 얻어 가지고는 어느 집 대문통에서 하룻밤을 새우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 말에 나장태는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노명성은 하루에 동전을 몇 닢씩 얻어 가지던가?"
아홉째는 말문이 막혀 즉시로 대답을 못했다. 그가 하루에 동전을 몇 닢이나 구걸해 가지는지 그것까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홉째는 은근히 화가 났다. 나장태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사람을 풀어 노명성을 후려패고 온몸을 다 뒤져 지니고 있는 것을 몽땅 이리로 가져 와! 상처는 입히지 말고!"
아홉째는 나장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 맏형님이 금의파와 오랫동안 등지고 살아오더니 노명성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사정없이 몰아세우기만 하겠다는 건가?'
아홉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장태의 분부인지라 거역할 수도 없어서 무뚝뚝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가 보지요."
"안 돼! 지금 당장 갔다 와! 자네들이 누군지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게끔, 그저 개방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처럼 교묘히 꾸미고! 자, 어서 지금 당장!"
나장태는 자못 결연했다. 아홉째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하는 수 없이 꾸뻑 절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노명성은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맞은편 쪽에서 조무래기 거렁뱅이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고 개중 하나가 소리쳤다.
"날 붙잡아 봐야 소용없어요. 난 돈이 없다니깐요."
그 뒤쪽으로 쫓아오던 거렁뱅이 하나가 맞받아 소리쳤다.
"이 놈, 게 못 서느냐? 빨리 가진 거 다 내놔! 가진 거 내놓으란 말야! 동전 한 닢 없다는 게 말이 돼?"
조무래기들은 점점 더 노명성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일은 거지들 사이에선 다반사였다. 그러나 자칫 휘말려들었다가는 다치기 십상이었다. 노명성은 얼른 길 옆으로 피하려 했다. 그런 데 피한다는 것이 그만 조무래기들을 바로 뒤따라온 거렁뱅이 사나이에게 부딪혀 그는 쿵 넘어지고 말았다. 거렁뱅이 사나이는 대뜸 노명성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따위가 다 있어, 이거? 왜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게야?"
두 눈을 부릅 뜨고 으르대더니 사내는 갑자기 소리쳤다.
"앗, 여기 돈이 있다! 어서 와서 빼앗아라!"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조무래기 거렁뱅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노명성을 깔고 앉아 주먹질을 해댔다.
"이 놈 몸을 뒤져라. 발칵 뒤져 봐. 행색은 별 볼일 없지만 돈깨나 있는 품세다!"
조무래기들은 노명성의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몽땅 꺼냈다. 서른여섯 개나 되었다. 그것에 족하지 않고 조무래기들은 땅에 떨어진 것들도 모조리 주워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더 샅샅이 뒤져 봐. 어디 또 돈이 있을지 모르니까. 있는 대로 몽땅 꺼내, 하나도 남기지 말고."
한 놈이 또 소리쳤다.
노명성은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심히 수상쩍기도 하였다.
'옛날 내가 장로로 있을 때, 이 거렁뱅이들은 나를 보기만 하면 장로님, 장로님 하며 허리를 굽실거리고 내가 지나가고 나서야 발을 떼던 놈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 지경이 되니 별 딱정이 새끼같은 거지 애들마저 날 이렇게 능멸하다니……."
노명성은 손을 쓰려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망치고 만다. 그는 그저 고개를 가슴에 틀어박고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척했다.
"자, 술값도 톡톡히 벌었으니 가서 술이나 실컷 마시자."
사내들은 희색이 만면하여 히히덕거리며 조무래기들을 끌고 어디론지 급히 사라졌다.
노명성이 품에 지니고 있던 물건들은 반 시진도 못 되어 일점지 나장태의 손에 들어갔다. 나장태는 거렁뱅이들이 가져 온 물건들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살펴보다가 동전 서른여섯 개를 골라냈다. 일점지 나장태는 이 동전들을 유심히 살펴 보면서 물었다.
"이것말고 또 없던가?"
아홉째는 크게 허리를 꺾으며 대답했다.
"이젠 더 없습니다요."
일점지 나장태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동전 서른여섯 개를 하나하나 줄지어 늘어놓고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노명성은 지금 기한(飢寒)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는 한심한 거렁뱅이에 불과했다. 잘살면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자가 나타나는 법이지만 가난하면 저잣거리에서도 알은척하는 사람 하나 없다는 말도 있지만, 노명성은 달랐다. 개방 장로로 수하에 거느렸던 사람도 많고, 재산을 흩어 주고 개방에 가담하면서 구해 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노명성이 이지경이 되자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가져 오고 은이 있는 사람은 은을 가져 오
고 또 집까지 마련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건만 그는 그것을 단호히 사절하고, 오로지 매일매일 구차하게 구걸하여 얻은 몇 푼으로 근근이 목구멍에 풀칠을 해 가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그 연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점지 나장태는 각상 위에 놓인 동전 서른여섯 개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명성은 하루에 동전 몇 닢을 써먹지?"
"어떤 사람 말에 의하면 그는 하루에 그저 호떡 두 개만 사는데 그것도 국물도 없이 맨떡으로만 먹는답니다."
아홉째가 대답했다.
"이것 좀 보게, 이 동전 서른여섯 개! 하나하나가 모두 반들반들하지 않은가? 노명성은 이 동전 서른여섯 개를 그냥 주머니에 넣고만 다니는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러는 걸까? 이걸 지니고 다녀 무엇을 하겠다고?"
일점지 나장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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