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칭 : 도은정(島隱亭)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산해2리 182
건 축 주 : 박언필(朴彦弼)
건축시기 : 1907년(융희1)
중건시기 : 2009년(중수)
소 유 자 : 박재기
도은정(島隱亭)은 조선 중기 중종대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낸 도은(島隱) 박언필(朴彦弼)을 추모하고자 지은 정자이다.
박언필은 조선시대 명종~선조 연간에 벼슬을 그만두고 산해리에 은거하면서 마을 북쪽
반변천에 우뚝 솟은 초선도(招仙島)를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러한 조상의 덕을 기리고자
1907년(융희1)에 박언필의 후손인 박동면(朴東冕), 박동섭(朴東燮), 박동희(朴東熺) 등이
선생의 추모하기 위한 건물로 지은 것이 도은정이다.
도은정은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방에 담장을 두르고, 정자의 좌측
에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하게 하였다. 반변천이 굽이쳐 흐르는 절벽 위에 북동쪽을 바라
보고 세워져 있다. 정자는 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둔 이른바 ‘중당협실형
(中堂挾室形)’ 구조이다. 일반적인 정자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전면에는 퇴칸을 두고, 계자각
을 세운 난간을 설치하였다.
현판
도은정(島隱亭)
亭子前面
초선대(招仙臺)
堂 前面
초선도(招仙島)
堂 右側
원운(原韻)
도은주인(島隱主人) 박언필(朴彦弼)
차운(次韻)
약봉선생(藥峯先生) 김극일(金克一)
도은정기(島隱亭記)
통정대부(通政大夫) 행홍문관시강겸지제고(行弘文館侍講兼知制誥) 문소(聞韶) 김홍락(金鴻洛)
근기(謹記)
- 누정이야기
박언필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면서 북서쪽으로 손에 잡힐 듯이 반변천 속에 솟아오른
초선도(招仙島)를 보며 때때로 그 경치를 보며 떠오르는 시상을 견딜 수 없어 한 수 짓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직접 그곳에 올라 울울한 심사를 토로하였다. 박언필의 이 마음을
벗인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도 ‘초선도에서 노닐다가 돌아갈 생각도 잊었
노라.’라고 차운하여 표현하였는데, 선생과 김극일의 심경이 드러난 다음의 두 시를 통해
그 당시 두 사람의 심경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招仙臺 一稱島原韻
化翁粧小勝 화옹(化翁)이 작은 승경을 단장하고
豪士卜淸遊 호사(豪士)가 터 잡아 청유(淸遊)하였네.
笙鶴何年去 피리불고 학을 탔던 이 언제 떠났나.
波鷗此地留 물새들만 이 땅에 머물러 있도다.
紅塵雲外隔 속세는 구름 밖에 가려 있고
白酒雨中酬 한 잔 술을 우중에 서로 나눈다네.
臺下淸江水 대 아래 흐르는 맑은 강물 빛에
分明是十洲 저 수많은 모래톱이 비춰지누나.
-도은주인 박언필
次招仙臺韻*
金氣初傳爽 더운 기운 비로소 서늘해지니
仙**臺訪舊遊 초선대로 오랜 벗을 찾아 나섰다네.
蘋風吹暑退 풀바람은 더위를 날려 보내고
松雨阻人留 솔비는 사람 걸음 멈추게 하네.
珍果山童獻 맛난 과실 산 아이가 바치고
芳醪野客酬 좋은 탁주로 손님과 수작하네.
每來忘返馬 매번 와서 돌아갈 생각 잊었는데
山日下汀洲 해는 모래톱 아래로 지는구나.
-약봉 김극일
* 『藥峯先生文集』에서는 「超仙臺卽事贈主人」이라고 되어 있다.
*『藥峯先生文集』에서는 ‘高’라고 되어 있다.
관련인물
- 박언필(朴彦弼)
박언필은 춘천박씨(春川朴氏)로 자는 몽뢰(夢賚)이고, 호는 도은(島隱)이다.
문의공(文懿公) 박항(朴恒, 1227~1281)의 후손이며, 조선시대 중종연간에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평소에 도를 가까이하고 후학을 권면시켜 정진하게 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향당(鄕黨)의 자제들을 가르치니 학문을
성취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고, 낡은 옷에 다 떨어진 신을 신고
산천을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아 속세를 떠난 기상이 엿보였다. 뒤에 진보현 북쪽(지금의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초선도(招仙島)의 빼어난 경치를 좋아하여 호를 도은(島隱)
이라고 하였다.
- 김극일(金克一, 1522∼1585)
김극일은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자는 백순(伯純)이고, 호는 약봉(藥峯)이다. 조선시대
중종 연간에 이조판서를 지낸 김진(金璡, 1500~1580)의 맏아들로 내앞마을(지금의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기상과 총명함을 갖추어
신동이라 불리었고, 네 아우와 함께 퇴계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김씨오룡(金氏五龍)’
이라는 칭송이 있었다고 한다. 25세때인 1546년(명종1)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司憲府監察),성주목사(星州牧使),밀양부사(密陽府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목민관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문장이 뛰어났고 시에 능하여 남길 글이 많았다고
하나 화재로 소실되고 남은 글들이 『연방세고(聯芳世稿)』에 실려 있다.
입암 소나무 숲에 숨어사는 은자의 정자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반변천이 북쪽에서 남서쪽으로 감싸고 유유히 흘러가는 절벽위에
자리잡은 도은정(島隱亭)은 박언필(朴彦弼: 생몰년 미상)의 후손인 박동면(朴東冕),
박동희(朴東熺) 등이 선생이 초선도(招仙島)에서 수양하며 남긴 뜻을 추모하고자 지은
건물이다.
정면3칸, 측면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굽어보는 반변천의 경관은 매우
아름답다.
도은정은 마을 밖에서는 절벽 주변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마을 밖에서는 도은정의 풍광을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도은정에 올라서는
정자 앞에서 굽이쳐 흐르는 물결과 멀리 보이는 초선대, 그리고 도은정이 모여 이루는
그림같은 경치를 본다면, 그저 바라만 봐도 흐뭇해질 것이다.
도은정기(島隱亭記)
진안(眞安)의 예로부터 산수지향(山水之鄕)으로 이름난 것은 그 북쪽에 초선도(招仙島)가
있기 때문이다. 충만하고 우뚝한 기운이 태초에 맺어져 몇 천 백년을 기다려 석인(碩人)이
벼슬하지 않고 한가롭게 노니는 곳이 되었으니, 어찌 우연이리오?
국조(國朝) 명종(明宗) · 선조(宣祖) 년간에 도은(島隱) 선생 박공(朴公)이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일세에 알려졌으나 일찍이 공께서는 과거시험을 그만두시고 산림에 은거하며
선왕들의 시가(詩歌)를 읊으며, 후생(後生)들을 권면함을 가계(家計)로 삼았다.
일찍이 이 섬의 빼어난 경치를 애호하시어 늘그막에 학문을 닦을 곳으로 삼고, 이로 인하여
자호(自號)하셨다. 나의 백선조(伯先祖) 약봉(藥峯) 선생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시며, 답답한
수심(愁心)을 토로하여 창수한 작품이 많았다. 선현의 남겨진 아름다운 자취와 남겨진 향기가
지금에 이르러도 의연하여 오히려 사람들에게 상상하여 추모하는 마음이 그치게 하지 못함이
있다.
이에 그의 후손인 동원(東冕), 동섭(東燮), 동희(東熺) 등이 종중에서 의논을 합하여 날짜를
정하고는 재목을 모아 초선도(招仙島)에서 동남쪽으로 수 백보 떨어져 있는 용당(龍塘) 가에
몇 칸의 집을 지으려 꾀하였다. 일을 이미 마치자 그들의 족인 동건(東鍵)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니, 나는 견해가 얕고 아는 것이 적으며, 지금 공과의 세월이 너무나도 멀어서
공양전의 문사로써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는데, 동건이 사계(事契)의 중대함을 들어
책임지웠다.
내가 마침내 일어나서 거듭 그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현인과 군자를 이 세상에 내셔도 간간
이 진실로 조정에서 쓰이지 못하면, 그들로 하여금 물러나 암학(巖壑)에서 머물게 하거나 숨
겨진 땅에서 나라를 맡거나 은둔의 정취를 이루게 함으로써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을
성함을 드리울 수 있게 하였으니, 하늘이 공에게 누리게 해주는 까닭이 어찌 이것에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공의 후손된 자들은 공이 당일에 가졌던 뜻을 힘껏 본받아 능히 생각하고 능히 공경함
을 꾀한다면 변치 않을 것이니, 근본을 잊지 않고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이 크게는 그대들이
함께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늙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곳에 올라 평소에 보고 싶은 소망을 풀어보고자 하였지만
진실로 바랄 수가 없었다. 인하여 부용산(芙蓉山)으로 돌아가는 구름이 아침저녁으로 들어
가고 주렴 사이에서 비친 기천(沂川)의 밝은 달이 긴긴 밤 난간 속에 듦을 생각하니, 스스로
마음이 달려 신에게 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그의 청을 들어주고, 기문을 쓴다.
병자년(1636) 청명절(淸明節)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홍문관시독겸지제고
(前行弘文館侍讀兼知制誥) 문소(聞韶) 김홍락(金鴻洛)은 삼가 쓴다.
경북 영양군의 춘천박씨 인물
박경문(朴慶門, 생몰년 미상)
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미상, 호는 삼산(三山). 문학과 의를 행함으로써 향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봉람서원(鳳覽書院) 건립시 그가 소유했던 서숙(書塾)을 출연하여 도왔다.
박봉(朴熢, 생몰년 미상)
본관은 춘천(春川). 자 회숙(晦叔), 호는 표암(票巖).
그는 생원시(生員試)하고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지냈으며, 만년에 수비면으로 옮겨 살았다.
박봉우(朴逢雨, 생몰년 미상)
본관은 춘천(春川). 자 · 호는 미상. 관(官)은 만호(萬戶), 예천군 용궁면에서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에 이주하였다. 현재 그의 후손들이 입암면 삼산리에 살고 있다.
박상범(朴尙範 , 1588~1913)
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稼隱),
박진수(朴鎭壽)의 아들로서 입암면 삼산리에서 태어났다.
1890년(고종 27년) 문과에 급제하여 1819년(고종 28)에 승문원정문자(承文院 正文字)에
제수되었다. 1901년(고종 38년)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에 올랐고 또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1902년에는 다시 지제고(知制誥)를 겸했다.
1904년 러 · 일전쟁이 일어나자 우주감조관(虞主監造冠)에 임명되고, 1905년 다시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직을 받았으며, 9월에 연주감조관(練主監造冠)을 제수받았다. 그 해 10월
에 일본이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통곡하며 상소장을
올리기도 했다.
계속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렇게 상소를 올리는
중 장남의 참사 소식을 받고 귀가했다. 귀가 후 두문불출하고 자연 속에 묻혀 지냈다.
그는 스스로 가은(稼隱)이라고 호를 짓고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통곡하고 침식을 전폐한
채 두문불출하다 1911년 산에 들어가 정사(精舍)를 지어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내다가 망국의
한을 지닌 채 59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옥서일록(玉署日錄)」은 박상범(朴尙範 ; 1855~1913)이 신축년(1901년) 12월 7일
홍문관시독(弘文館侍讀)에 제수되어 업무를 보는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문집인
『가은선생문집(稼隱先生文集)』 권 3에 수록되어 있다. (1936년 발행)
홍문관시독에 제수된 날로부터 이듬해 12월 그믐까지 약 1년간 홍문관에서 있었던 일이나
자신의 업무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옥서(玉署)는 홍문관의 별칭이며, 옥당(玉堂)
혹은 영각(瀛閣)이라고도 부른다.
홍문관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 때문에 자주 왕에게 조정의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간언하는
입장이었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계(合啓)에도 왕이 그 간언(諫言)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을 합하여 3사가 합계로 간언하였다. 연산군 때 잠시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
1506년(중종 1)에 복구하였고, 1894년(고종 31)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經筵院)이라 개칭하였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쳐서 칙임관(勅任官)의 대학사(大學士)ㆍ학사ㆍ경연관(經筵官), 주임관(奏任官)의 부학사(副學士), 경연관ㆍ판임관(判任官)의 시독(侍讀)을 두었다.
박상범의 초명은 제원(悌源),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稼隱), 본관은 춘천(春川)이다.
아버지는 진수(鎭壽), 어머니는 함양오씨 한근의 딸과 고령신씨 증도의 딸이다. 189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국정이 문란해지자 고종임금에게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흥학교(興學校 : 학교를 진흥시킬 것)ㆍ수군정(修軍政 : 군정을 개수할 것)ㆍ절재용(節財用 : 재정을 절약할 것)ㆍ
택민목(擇民牧 : 목민관을 잘 뽑을 것)ㆍ균부세(均賦稅 : 세금을 균등하게 부과할 것)의 5개 조목을 진상할 만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박언필(朴彦弼, 생몰년 미상)
본관은 춘천(春川). 자 몽뢰(夢賚), 호는 도은(島隱). 중종대에 가선첨추(嘉善僉樞)를 지냈다.
그는 후학 지도를 그의 임무로 자연의 풍미 속에 묻혀 지냈다.
진보(眞寶) 현북(縣北)(지금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초선도(招仙島)의 기경(奇景)을 음미하여 그의 호를 정했다고 한다. 이 곳에 그의 후손들이 추모하여 지은 정자를 세우고 사림(士林)들이 수계(修稧)하였다. 1972년 그의 시여계(詩與稧) 2첩이 정서하여 간행되었다.
박정기(朴貞基, 생몰년 미상)
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덕구(德久).
그는 인정 많고 후덕하여 평소에 궁핍한 자를 구휼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었으며,
수재를 당해 유실된 봉강(鳳江) 하류역의 보(洑)를 사재를 털어 복원하였다.
현종조 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 용양위 부호군(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다.
박치강(朴致康, 생몰년 미상)
본관은 춘천(春川). 호는 괴은. 영해 괴시리에서 출생하여 1820년(순조 20) 경 후손이 영양으로
이주, 수비면 오기리 및 군내에 살고 있다. 1456년(세조 2) 성균진사시에 합격. 김종직과 교유한 사실이 점필재 문집과 예림서원(밀양 소재) 중간본에 기록되어 있다.
박함(朴涵, 생몰년 미상)
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미상, 호는 국와(菊窩). 박언필(朴彦弼)(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이다.
선조조 때 판관을 지냈으며,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