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 CLASSIC 091
유계자 시집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출간
J.H CLASSIC 091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유계자 시집
발행 : 2022년 12월 15일
규격 : 135x210mm (양장)
정가 : 11,000원
도서 출판 지혜
주 소 34624 대전광역시 동구 태전로 57, 2층 도서출판 지혜 (삼성동)
전 화 042-625-1140
팩 스 042-627-1140
카 페 http://cafe.daum.net/ejiliterature
이메일 eji@ji-h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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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하여
어제는 청각이 마비된 오류투성이/ 서문을 지나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면// 헤어진 적 없는 너에게 안녕을 보낸다/ 오래 지속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싱거운 다음 페이지를 기억하려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뉘엿뉘엿/ 하루가 저문다 // 어긋난 날들이 잠복을 하고/ 틸란드시아 긴 수염은 이승의 그늘진 무대 뒷면까지 자란다// 주섬주섬 발을 빼고 소품을 챙겨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난색에도/ 어린 숨소리까지 줄로 재는/ 뜨끔거리는 기침 하나 한 번의 눈웃음까지도/ 극으로 치닫고/ 그리운 것들은 모두 난독이 된다/ 다시 불이 꺼지고 그림자들이 멀어졌다// 큐!//사람의 히스토리는 한 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각본은 오늘도 방문을 연다//
- 「연출자」 전문
「뿌리」라는 시에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뿌리보다 달콤한 열매에 현혹되는 세상에 주목한다. 땅속으로 뻗는 뿌리가 부실하면 당연히 열매 또한 부실할 수밖에 없다. “나무의 뿌리도 지하로 내려가고/ 삶의 뿌리도 바닥을 더듬는다”라는 시구에 표현된바, 시인은 삶의 뿌리와 바닥을 하나로 잇고 있다. 삶의 바닥이란 삶이 끝나는 장소가 아니다. 바닥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달콤한 열매를 낳는 뿌리에 닿을 수 있다. 지상이 있으면 지하가 있고,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으며, 날숨이 있으면 들숨이 있는 법이다. 열매의 달콤함에 빠진 사람들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이 힘을 모른다.
바다 쪽에서 꽃무늬 몸뻬 바지 할머니들 몇 올라와
당산나무 그늘에 젖은 바다를 말린다
바다가 내어준 한 끼 조촐한 찬거리를 손질하며
나뭇가지 닮은 손가락을 무디게 움직인다
관절들 삐걱대는 폐선의 노 젓는 소리 당산나무에 매어놓고 들고 나온 밀가루 반죽을 힘껏 치댄다
양은냄비에 바지락이 끓고 일흔다섯의 막내가 토각토각 밀가루 판을 썰고 물이랑 드는 입술을 오물거리는 팔순이 간을 본다
수십 년 지기 과부들 단단히 굳어버린 슬픔도 바지락칼국수에 풀어먹으며
꽃무늬 환한 문장 하나씩 되씹다가
서방 복 없는 년 자식 복도 없다며
어귀에 들어서는 노란 봉고차를 보고 막내가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킨다
당산나무 밑에 여자아이 하나 부려놓자
함마 함마
할머니도 엄마도 아닌 함마를 부르는 아이 손을 잡고
낡은 노구 한 채 기우뚱
당산나무 그늘을 털고 차례로 일어서는 오래된 꽃잎의 문장들, 폐선을 끌고 삐거덕 멀어진다
- 「꽃무늬 환한 문장」
몸빼 바지를 입은 할머니들이 당산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가 내어준 한 끼 조촐한 찬거리를 손질”한다. 나뭇가지를 닮은 손가락에 이 할머니들이 살아온 내력이 담겨 있다. 밀가루 반죽을 힘껏 치댈 때마다 “관절들 삐걱대는 폐선의 노 젓는 소리”가 당산나무 주변을 맴돈다. 막내인 일흔다섯 할머니가 밀가루 판을 썰면,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간을 본다. 오래전에 남편을 떠나보낸 여인들이 모여 “단단히 굳어버린 슬픔”을 가만가만 바지락칼국수에 풀어놓는다. 혼자서 견디는 슬픔만큼 아린 게 어디 있을까? 제 처지를 이해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위안을 얻는다. 할머니들은 그런 마음으로 당산나무 아래 모여 칼국수를 먹는다.
칼국수를 먹으며 할머니들 저마다 풀어놓는 삶의 이야기를 시인은 “꽃무늬 환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그들이 정말로 환한 삶을 산 것은 아니니라. “서방 복 없는 년 자식 복도 없다며” 몸을 일으키는 한 할머니는 지금도 “함마 함마”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늙은 몸으로 손자까지 떠안은 이 삶에 그 누가 꽃무늬 환한 문장을 덧붙일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일어서자 다른 사람들도 나무 그늘을 털며 차례로 일어나 폐선과도 같은 몸을 부여잡고 저 멀리 사라진다. 시인은 그늘을 털고 일어서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다시금 “오래된 꽃잎의 문장들”을 엿본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삶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시 세계를 유계자는 그리고 있다. 시 문장은 관념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감각이 없는 문장은 한 편의 시로 거듭날 수 없다는 말이다. “당산나무 그늘에 젖은 바다를 말”리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그려 보라. 시인은 바다를 통해 할머니들의 삶을 엿보고, 당산나무를 통해 할머니들의 삶을 엿본다. 바다와 당산나무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제 삶을 묵묵히 살아왔듯, 할머니들 또한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제 삶을 묵묵히 살아왔다. 이런 삶을 꽃무늬 환한 문장이 아니면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까? 문장은 이미 삶 속에 깃들어 있다. 시인이라면 그것을 본능처럼 들추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물겹은 둥글다
번지고 번지는 동그라미들
헤아리기 전에 겹치고
겹치다가 흩어진다
부드럽게 돌을 쓰다듬어 휘돌고
물고기의 비늘도 깨진 병 조각도 핥아준다
백사장에 밀려온 물겹
갈매기 발목을 맴돌다가
모래밭에 둥글게 장문을 짓기도 한다
작년 여름
소(沼)에 살던 물겹
그 소용돌이에 휩쓸린 적이 있다
물겹의 완강한 고집을 꺾고
빠져나오기까지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물겹은 부드럽고 말랑한
물의 고리로 이어져 있지만
그 고리를 끊어내려면
죽을힘이 필요하다
- 「물의 고리」 전문
할머니들이 내보이는 “꽃무늬 환한 문장”이 위 시에서는 물결이 겹치고 겹친 “물겹”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물겹은 둥글게 번져 겹치다가는 이내 흩어진다. 물겹은 부드럽게 돌을 쓰다듬고, 물고기의 비늘을 쓰다듬으며, 깨진 병 조각을 핥아준다. 백사장으로 밀려와 갈매기 발목을 감싼 물겹은 모래밭에 둥글게 장문을 지어 자기를 확연히 드러내기도 한다. 물겹은 한 자리를 고집하지 않는다. 한 자리에 머물면 물겹은 더 이상 흐를 수 없다. 흐르지 않는 물이 어떻게 부드러운 힘으로 온갖 사물을 품어 안을 수 있을까? 물겹에 서린 이 부드러움에서 시인은 환하게 빛나는 문장을 본다.
물론 물겹이 마냥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작년 여름 소(沼)에서 일렁이는 물겹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적이 있다. 물겹은 완강하게 시인의 몸에 들러붙었다. 한참을 허우적거리고 나서야 시인은 겨우 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겹은 분명 “부드럽고 말랑한/ 물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물속 생명은 그것을 알기에 아무런 저항 없이 물에 몸을 맡긴다. 하지만 물에 익숙하지 않은 생명이야 어디 그런가. 죽을힘을 다해 그 고리를 끊어내야 비로소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 당산나무 아래서 바지락칼국수를 먹는 할머니들이야말로 이러한 물의 고리를 죽을힘을 다해 끊어내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들의 몸을 환히 밝히는 문장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흐르는 물겹과 자연스레 이어지는 셈이다.
유계자의 시는 이렇듯 우리네 삶 곳곳에 스며든 물겹을 꽃무늬 환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목수」에 나오는 내장 목수는 “수십 년 못을 맞았으니 맷집이 생길만한데/ 박힌 데 또 못이 박힌다며” 한탄하듯 말하고, 「연출자」에 나오는 화자는 “사람의 히스토리는 한 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라며 “내가 모르는 각본”을 찾아 오늘도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다. 목수에게 환한 문장은 박힌 데 또 박힌 못일 테고, 연출자에게 환한 문장은 오늘 들은 누군가의 각본일 터이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물겹을 이루고 그 물겹이 하나하나 풀어지면 한 편의 시로 새로이 탄생한다.
---- 유계자 시집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 11,000원
저자 소개
유 계 자
유계자 시인의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고, 2016년 『애지』로 등단했다. 첫 시집으로는 『오래오래오래』(2019년 세종문화재단 창작지원금수혜)가 있으며, 2013년 웅진문학상(시부문)과 2021년 제8회 애지문학작품상을 수상했다.
유계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은 오홍진 비평가의 말대로 “바닥에서 피어나는 환한 문장”으로 되어있다고 할 수가 있다. 유계자 시인은 타인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보기 위해 기꺼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모험을 감행하며, 사람들 저마다의 삶에 드리워진 여백을 꽃무늬 환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타자의 아픔에서 상련相憐을 느끼는 시 정신은 유계자 시인의 시를 가로지르는 힘이다.
첫댓글 유계자 시인님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시집 출간을 축하 드립니다
최윤경 드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두 번째 시집 출간을 축하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