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천적으로 호전적好戰的이다. 싸움을 건다는 것은 나의 본능의 하나이다. 적이 될 수 있다는 것, 적이라는 것, 그것은 아마 천성이 강하다는 것을 시사해주며, 또 어떤 경우에도 모든 강한 천성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싸움은 삶의 본능이고, 모든 스포츠와 놀이마저도 싸움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학교도, 회사도, 정당도 싸움의 장소이며, 심지어는 친목단체와 장례식장과 국립묘지도 싸움의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발언권을 강화하고 가장 좋은 자리를 잡는 것,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고 만인들의 존경과 찬양을 받는 것, 언제, 어느 때나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좋아하면서도 그 모든 욕망을 다 비운 성자처럼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그 모든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고, 싸운다는 것은 잘 살고 있다는 것과도 같다.
아버지가 모든 좋은 음식을 다 먹으면 아들이 싫어하고, 날이면 날마다 놀고 먹으면서도 돈을 달라고 하면 아버지가 싫어한다. 언제, 어느 때나 엄마로서의 미모와 그 인자함만을 자랑하면 딸이 싫어하고, 소위 그토록 아름답고 예쁜 딸이 사시사철 바람기를 잠 재우지 못하고 싸돌아다니면 엄마가 싫어한다. 어떤 인간의 초고속 승진과 그토록 엄청난 부의 축적을 마냥 좋아만 할 친구도 없고, 더없이 부끄럽고 치욕적인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사건마저도 그녀의 동생인 박지만에게는 더없이 고소하고 기쁜 일일 수도 있다. 싸움은 축구장에서도 일어나고, 싸움은 가족의 밥상머리에서도 일어난다. 싸움은 장기자랑 시간에도 일어나고, 싸움은 코미디 극장에서도 일어난다. 싸움은 신성한 예배당에서도 일어나고, 싸움은 단체여행 중일 때도 일어난다. 싸움은 일이 되고, 싸움은 돈이 된다. 싸움은 사랑이 되고, 싸움은 아이가 된다. 싸움의 가장 멋진 쾌감은 황홀함이며, 그 황홀함의 중독성은 남녀의 성교와도 같다. 우리는 싸움 속에서 태어나고 우리는 싸움 속에서 자라난다. 우리는 싸움 속에서 일을 하고, 우리는 싸움 속에서 죽어간다. 싸움은 삶의 본능이며, 모든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이 전면적인 싸움들이 그토록 잔인하고 처절한 피비린내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투쟁 속의 조화는 자연의 법칙이며, 그 어떤 인간도, 그 어떤 사물도 이 자연의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 밤 하늘의 별들이 그토록 아름답고 찬란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별들간의 인력의 싸움도 대폭발이 일어날 만큼 치열하고,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들마저도 그 나무와 나무들간의 싸움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낮과 밤의 싸움도 마찬가지이고, 물과 불의 싸움도 마찬가지이다. 선과 악, 진실과 허위, 남과 여, 물과 기름, 전쟁과 평화, 여름과 겨울 등----이 모든 것들의 관계도 싸움이며, 이 싸움들이 최종적인 파국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투쟁 속의 조화’라는 ‘게임의 룰’(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호전적好戰的이다. 싸움을 건다는 것은 나의 본능의 하나이다.”
늘, 항상 최종적인 승리자는 호전적인 자이고, 이 호전적인 자만이 그 왕관을 머리 위에 쓸 수가 있다. 그 왕관의 명칭이 황제의 그것이든, 대사상가의 그것이든, 대서사시인의 그것이든지 간에, 아무튼 그 모든 왕관은 피비린내 나는 잔혹극의 승자만이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나 역시도 선천적으로 호전적이다. 미국의 제국주의를 베어버린다는 것, 일본의 제국주의를 베어버린다는 것, 니체를, 쇼펜하우어를, 칸트를, 부처를, 예수를 베어버린다는 것만큼 더 기쁘고 신나는 삶의 기쁨도 없다.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