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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9. 22:40http://cafe.daum.net/la-shmunhak/sFv/5012
37. 나짱 마제스틱에 놀란 사연
차가 시내에 진입하는 순간 나는 흐뭇했다, 롯데마트가 눈에 바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롯데마트는 시내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도 한류열풍인가,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주차한 오토바이가 왕성한 현재를 바로 느끼게 한다. 차가 큰 대로를 지나 우측으로 핸들을 꺾자 해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변도시 나짱, 해변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는 바로 해변 가가 그 중심가다. 부산 해운대도 그렇고 대천해수욕장이 또한 그렇다. 물론 앞으로 갈 다낭도 마찬가지다. 생각보다는 번화한 제법 호텔이 많은 나트랑이다. 먼 아저씨는 천천히 차를 몰아 겨우 우리의 숙박지 마제스틱 호텔을 찾아냈다. 반대편은 바로 바다인 관계로 해수욕을 즐기는 인파와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해변도로는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먼 아저씨가 폴리쯔 폴리쯔 노! 노! 하며 X표 손짓을 하는 게 차를 정차 시간이 길면 경찰이 온다는 말 같았다. 우리는 30분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그와 헤어졌다. 벨 보이가 짐을 옮겨주었는데 나는 노란 색 여행 책을 들고 왔기에 짐 위에 그대로 올려놓았었다. 그런데 막상 올라와보니 책이 없다. 그 책의 사진이 우리를 이끌 가이드나 다름없는데 큰일이다 싶었다. 이를테면 먼 아저씨와 소통은 책에 나온 사진을 짚으면 직방이지 않겠는가. 홧김에 팁을 안주고 로비에 돌아와 한참을 찾았다. 벨 보이는 계속 억울하단 표정이다. 그런데 그 젊은 친구가 영어를 아주 잘 한다. 그래도 당장 안내가 걱정이니 참 안타까운 상황이다. 다행히 일행이 로비에 다시 모일 때쯤 그 책은 다시 돌아왔다. 그렇겠지 그들에게 한국 책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나짱성당내 무덤
벨 보이에게 그때서야 비로소 팁을 주고 미안한 의미를 담아 인삼사탕도 건넸다. 활짝 웃는 그 친구, 마침 잘 됐다 싶어 현재의 위치와 씨 푸드 전문점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의 영어 실력 덕분에 금세 상황파악이 가능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먼 아저씨가 나타나지를 않는다. 만약을 몰라 그의 휴대폰을 찍어 두었었다. 그에게 전화를 했다. 1분만 써도 돈이 엄청 불어나는 국외 요금, 왜 안 오느냐 , 어디냐, 마제스틱 모르냐, 아무리 말을 해도 그가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겨우 하는 영어, 못 간다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왜 못 간다는 것인지 정말 난감 했다. 그렇게 세 번인가 전화 통화를 했다. 여행초보도 아니고 미리 돈을 다 주었다고 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만약 그가 안 돌아온다면 하는 가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공금이 얼마나 남은 거지. 입이 바싹 마르고 한 숨부터 나왔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싶었다.
당황하면 답답한 마음에 조급해지고 생각이 여물지 못한다. 그때 순간 떠오른 생각, 벨 보이의 영어,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영어로 상황 설명을 하고 상황파악부터 하려다 그래봐야 의미도 없고 말을 바꿔 이곳으로 빨리 와줄 것을 전하라고 그에게 휴대폰을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나타난 먼 아저씨. 아니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그의 잘못이라 하기도 뭐한 그런 더러운 상황, 그 해변 가는 마제스틱 호텔이 두 개나 있었던 것, 그는 두 번 째 호텔에 가서 우리를 찾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숙소까지 올라가 보았다는데 나로서는 억측을 한 것이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는 생각만큼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 하였기에 여행책자를 피고 갈 곳 사진을 콕 찔러 그에게 내보였다. 사진을 보자 바로 오케이 하는 먼 아저씨. 벨 보이 그리고 노란 여행 책. 여행에서는 의외의 도움을 주는 존재가 있다. 이게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맛이고 생각의 폭도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날 나는 똑같은 경우를 당했다. 혼자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 나짱의 재래시장인 덤시장을 찾았다. 생각보다 먼 거리, 돌아올 때 어쩔 수 없어서 택시를 잡아탔는데 마제스틱이 둘이 있다는 것을 그만 깜박하고 마제스틱 호텔이라 했더니 두 번째 마제스틱에 나를 내려 주었다. 그런데 입구부터 로비도 똑같은 쌍둥이라 나는 9층 방까지 바로 올라갔었다. 그런데 복도 모양이 좀 다르다. 이상타 싶은 그쯤 나는 잘 못 온 것을 알아차렸다. 먼 아저씨와 똑같은 상황을 나도 맛을 본 셈이다. 우리의 오늘의 행선지는 롯데마트가 포진한 시내 안쪽, 롯데마트에서 꼭 사야할 것이 있는 김 이사님을 우선 생각했다. 아니 시간이 지체하여 조금 떨어진 곳은 가는 타임이 어정쩡했다.
그런데 이 동네는 무슨 러시아 사람이 전세를 냈는지 열 명중 여덟이 그들이다. 벽에 부친 글도 러시아 말, 비키니 차림으로 또는 웃통 벗고 담배 뻐끔뻐끔 피워 대가며 버릇없이 활보하는 사람도 모두 그들이다.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그 이전 이곳은 미국의 해군기지이고 보급부대가 꽉 들어찼던 곳인데 흡사 점령을 하여 러시아함대가 들어온 것 같이만 느껴진다. 누군가 돈이 없는 사람은 나짱을 가고 돈이 있으면 속초와 해운대에 일본(무로란 - 아오모리- 니가타 -가나자와)을 찾고 돈이 많으면 지중해안을 찾는다더니 바로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사실 이웃한 나라와 사이가 안 좋아도 한 다리 건너면 달라지는 게 지구촌 사정이 아닌가.
이곳 나짱은 빈펄랜드가 유명하다. 요즘에야 그 열기가 식은 감이 있지만 불과 2-3년 전만해도 나짱하면 빈펄랜드를 이야기했고 호치민에서 빈펄을 가자면 차량으로 10시간 아니면 항공을 이용하여야 함에도. 자주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근래 들어 호치민 근교에 빈펄랜드에 버금가는 대남파크가 들어서고 시내 쪽의 몇몇 놀이동산들이 대폭 업그레이드를 하는 바람에 요즘은 찾는 이가 드물어졌다지만 그래도 그 명성은 아직도 여전하다 한다. 더욱이 수 km에 이르는 바다위로 늘어선 케이블카로 인하여 그 재미를 맛보려는 이들은 여전히 빈펄랜드를 찾고 계시고 특히 현지인들에게 여전히 인기 절정이다. 특히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의 경우엔 더 말할 나위 없다. 놀이동산. 워터파크. 아쿠아리룸. 전용 전문 쇼핑 몰 등등. 하지만 한국인의 한국적 시야로는 조금 그렇다. 이미 다 겪어 본 곳들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 빈펄랜드 이야기를 꺼냈나. 베트남과 러시아 양국은 1950년 국교수립을 시작으로 구소련 시절부터 전통적인 우방국가로 인식하고 있던 차에 2012년 양국 관계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으며, 특히 에너지 및 군사 분야에서 많은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 2016년 4월 누적 기준, 러시아의 대 베트남 투자건수는 113건, 총 투자금액은 약 11억 달러로, 대 베트남 투자국 114개국 중 23위에 올라 있으며 특히 러시아는 베트남의 석유 및 가스 개발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하였다. 베트남-러시아 합작기업인 Vietsovpetro는 양국 간 에너지 분야 협력을 대표하는 베트남 석유개발 선도 기업으로서, 2015년 1~6월까지 석유는 2억1500만 톤, 가스는 300억 입방미터를 개발하여 총 66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을 한 상황이니 그들의 관계를 알만하다.
그런데 말이다. 약 4만 명의 베트남 공무원 및 민간 전문가들이 구소련 에서 유학을 하였고 러시아 연방 출범 후에도 베트남에 대한 교육 지원은 지속됐으며 2011년 345명의 베트남인이 러시아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2015년에는 795명의 베트남인이 러시아에서 학위를 수여받았다. 지금 현재 러시아 내 베트남인 유학생 수는 약 5천여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유와 관계로 베트남 민간경제 부문에서 많은 러시아 유학파 출신들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Masan Group(베트남 최대 식품 기업) CEO인 Nguyen Dang Quang, Eurowindow Holdings(베트남 최대 건자재 기업) CEO인 Nguyen Canh Son, 그리고 VPBank(베트남 상업은행) CEO인 Ngo Chi Dung 모두 러시아 유학파 출신들이다. 러시아 유학파 기업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베트남 최대 부동산기업 빈(Vin) 그룹 CEO인 Pham Nhat Vuong인데 대표적인 러시아 유학 성공 사례로서 그는 베트남 최초의 ‘포브스(Forbes) 선정 세계 억만장자’에 껴 있다.
그의 순자산은 17억 달러로 추정되는데 그는 1968년 하노이 태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북부 베트남 공군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어머니는 길거리에서 조그마한 차(tea)가게를 운영했었다. 그의 유년 시절은 베트남 전쟁 등의 영향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으나, 머리가 비상하고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러시아 유학을 갈 수 있었고, 1993년 모스크바 지질학 탐사 기관에서 소재추출경제학 학위를 받은 인재이기도 하다. 그는 1993년 졸업 후 구소련 국가들의 시장경제 체제 전환에서 오는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해외에 남기로 했고,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그의 첫 베트남 레스토랑을 오픈하였었다.
이후 그는 ‘Mivina’브랜드의 인스턴트 면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2004년 우크라이나 인스턴트면 전체 시장의 97%를 차지했고 급성장을 거듭하더니만 우크라이나에서 벌은 돈으로 베트남에 투자를 하기 시작한다. 그의 베트남 첫 프로젝트는 바로 이곳의 ‘냐짱 빈펄리조트’로써, 베트남 휴양도시 냐짱(Nha Trang)에 럭셔리 리조트를 개발한 것이다. 이후 하노이, 호치민, 하롱베이, 푸꿕 등 다양한 지역에서 상업시설, 레지던트, 호텔, 리조트 등 각종 부동산 분야 투자를 확장하고도 있다. 베트남 여행 시에 마주하는 기업 이름 Vinhomes(고급 레지던트 부문), Vincom(프리미엄 상업시설 부문), Vinpearl(고급 호텔 및 리조트 부문)은 모두 그 소유임을 알아야 한다. 현재 빈 그룹은 유통(VinMart, VinPro, VinDS, adayroi.com 등), 헬스케어(VinMec), 교육(VinSchool), 엔터테인먼트 및 케이터링(Almaz 레스토랑, 컨벤션센터 등) 등등 다양한 분야에 손을 안 뻗친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런 분위기이니 자연 러시아사람들이 넘쳐날 수밖에는 없다. 우리는 맨 처음 나짱 성당으로 갔다. 그런데 아쉽게 예배를 본다고 출입을 사절한다. 할 수없이 우리는 정문 앞에서 인증 샷만 하고 돌아섰다. 건물은 스페인 톨레도에서 마주했던 알카사르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성당 정면을 장식한 스티플, 첨탑이 똑같은 형태다. 다만 톨레도는 양 쪽 대칭인데 이곳은 정면만이 첨탑이 있다. 사이공에 있는 로마네스크 형 Nha Tho Duc Me(성모 마리아 성당)하고는 타입이 틀리지만 아름답기는 그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보기는 이게 더 근사하다. 알다시피 로마네스크는 12세기 고딕이 나오기 전 많이 유행한 타입으로 초기형식이 아닌가. 133년 된 건물이니 프랑스 시대에 지음 건물인데,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아,입구에서부터 약간 오르막길을 따라 언덕을 반쯤 돌면 본당이 나오는데, 오르는 길도 의미 깊게 다가온다. 입구에서부터 가브리엘과 미가엘 두 천사가 반겨주고 쭉 따라가며 11사도와 여러 성인들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성당 입구에 위치한 무덤, 누구의 무덤일지 꽤 궁금했다. 아마 선교당시 무덤이 아닐까.
우리는 이어서 롱썬 사원으로 향했다. 나짱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사원이다. 반 프랑스 운동을 주도했던 승려 틱응오찌가 1889년에 건설했다 하니 어느 시점인지 짐작이 간다. 대웅전은 2층 팔작지붕으로 처마가 날렵하다는 그대로의 전형적인 베트남 사원이었다. 오르고 또 올라 연꽃 대좌위에 모신 대형 불상 앞에 섰다. 하양 불상은 나짱 시내의 모든 사람들을 굽어 살피는 듯 맨 꼭대기에 앉아 하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곳에서는 나짱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바다도 보이고 아파트도 보이고 베트남 치고는 화사하다 하였지만 하지만 닳고 단 우리네 여느 해안 도시와 다를 바 없었으며 달랏 같은 자연에 어우러진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탄이 수없이 떨어져 거의 다시 짓다시피 한 나트랑이 아니던가.
이 슬픈 기억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리 보이는 바다가 푸르디푸르다. 실제 나트랑에서는 보트를 타고 냐짱 주변 섬 네 곳을 둘러보는 보트 투어가 여행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라고 했다. 좀 큰 배를 빌리면 배에서 춤도 추고 스노클링을 할 수도 있다는데, 7인용 보트를 반나절가량 대여하는 데 우리 돈으로 약 9만원 쯤 한다니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한 살만 덜 먹었어도 하는 마음이 굴뚝이다. 바다는 왜 그렇게 늘 생동감 넘치게 출렁이는 것일까.
나짱에 가면 큰 롯데마트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출발했었다. 다낭을 이미 다녀온 김이사님은 아마 다낭 롯데마트에서도 그러했듯 베트남 커피를 꼭 사가려나 보다. 나는 인터넷에서 우리 입맛과 아주 맞는다는 비폰 쌀국수, 호앙지아를 점찍어 두었었다. 그리고 식당은 락칸을 꼭 가보라는 말도 나는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트에서 40분 자유시간을 즐겼다. 김이사님은 커피포대로 12봉지나 샀다. 엄청난 양이다. 그는 포장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주는 비닐가방에 담고는 청 테이프로 칭칭 동여매면 된다. 그런데 찾는 테이프가 없다. 나 역시도 찾는 쌀 국수라면이 없다. 다시 들를 마켓도 시간도 없다싶어 그냥 쌀라면 한 박스를 통째로 들고 나왔다. 20개가 우리 돈을 쳐 4천5백 원. 나중 귀국하여 직원들이 다들 베트남 커피가 맛있다고 찾아서 나는 김 이사님을 찾아가 동냥을 하여야 했고 기껏 사온 라면은 그들 특유의 냄새로 지금도 방치 된 상태로 주인을 못 찾고 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일행 중 한 명이 바다가재를 꼭 먹어야 한다 하니 당초 생각한 음식점 대신 ‘응억쓰엉’이라는 씨 푸드 전문점을 급히 섭외했다. 벨 보이는 씨 푸드 하니 나가서 왼쪽으로 가라고 하였는데 응억쓰엉은 오른쪽 방향이었다. 나중 새벽에 시장을 가다가 왼쪽 방향 씨푸드 점 가격표를 보니 고급스러운 만큼 엄청나게 비싼 집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 음식점은 문을 닫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근처 큰 씨 푸드 점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먼 아저씨도 잘 찾아와 우리는 바다가재 조개 새우 갑오징어로 배 채우며 흥겹게 마시고 놀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그놈의 마제스틱 지하에서 나와 김 이사는 그렇게 찾던 테이프를 찾을 수 있었다. 먹고 마시고 등등이 주종인데 희한하게 테이프가 그 틈에 껴 있었다. 지금도 이해가 안가는 그 느낌이다. 덕분에 마제스틱에 당한 마음이 좀 풀렸다. 파도소리에 밤거리도 따라 춤추는 거리, 생음악 연주하는 곳에서 나는 쿵쿵 소리, 맥주 생각이 간절해진다. 생음악 하는 곳을 발길 따라 찾았다.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 사람들, 나는 그들 춤이 보고 싶었는데 나이 드신 분들의 취향은 아닌 듯 나가자 하여 그냥 나오고 말았다. 나이 들면 감흥도 점점 적어지는가.
차분한 맥주 집, 바닷바람이 오늘 낮의 일과를 말끔히 씻어간다. 그래 그 친구가 그럴 사람은 아니었어. 마제스틱이 둘일 줄이야....점점 깊어가는 밤. 그런데 호치민에서의 마제스틱도 당시 베트남 전쟁 때 꽤 악명으로 유명하였던 곳인데 또 그 마제스틱이라니. 이번 기행 글 3번 축구선수 쯔엉에 나오는 대목,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사이공이 함락되었을 때 한국 대사관 직원 몇몇은 미처 베트남을 빠져 나오지 못했었다. 교민들을 LST에 승선시키다가 뒤 미쳐 버린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대용 공사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국정원 출신이라 상황이 심각했었다. 당시 사이공의 마제스틱 호텔은 북한 공작원 3 명이 503호와 504호에 자리를 잡고 상주하는 곳이었는데 북한에 포섭되어 활동하는 사람도 있어서 우려한 상황은 바로 발생되었다. 한국 교민의 동향을 밀고 받은 북한 공작원들은 이 정보를 월남 비밀경찰인 안닝 노이찡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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