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묵돌선우(재위 : BC 209년 ~ BC174년)
진나라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몽염 대장군에게 북방 수비를 맡겨 흉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후 진시황이 죽고, 몽염도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죽게 되자, 흉노의 지도자 두만선우 頭曼單于는 오르도스 지역(황하의 서남쪽 사막지대)을 회복하고 다시 이 일대를 누비게 된다.
묵특 冒頓은 그의 맏아들이다.
이때 두만에게는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두만은 애첩의 말을 듣고 묵돌 대신에 이 막내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려고 묵돌(묵특)을 서쪽의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와 전쟁을 일으켰다.
비정 非情한 아버지다.
하지만 묵돌은 월지에게 살해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 이에 두만은 어쩔 수 없이 묵돌에게 태자에게 주게 되어있는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 대장으로 삼았다.
'용감한 자'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묵돌의 지위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이에 묵돌은 반란을 도모하였다.
묵돌은 소리가 나는 화살인 명적 鳴鏑을 가지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의 기병을 훈련시켰다.
훈련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적을 향해 활을 쏘면 모두가 그 표적을 향해 활을 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어기고 쏘지 않는 자는 반드시 목을 베었다.
처음에는 그는 자신이 아끼고, 늘 타고 다니던 명마 名馬를 쏘았다.
몇몇 부하가 따라 쏘기를 주저하기에 가차 없이 목을 벤 후, 이번에는 자신의 애첩 愛妾을 향해 활을 쏘았다.
이번에도 몇몇 부하가 주저하기에 또다시 목을 베었다.
그 후로는 모든 부하들이 일사불란하게 묵돌의 화살 방향에 맞추어 한치의 어김도 없이 활을 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냥터에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두만 선우를 향해 활을 쏘았다.
1만 명의 기병은 한 명도 주저 없이 두만을 향해 활을 쏘았고, 두만은 수많은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 모양으로 생을 마감한다.
묵돌이 두만을 대신해 선우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기원전 209년)
예로부터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 東胡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묵돌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인다. 동호의 왕은 처음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 千里馬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돌은 같은 동이족이라며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돌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도 많은 신하가 반대하였으나 묵돌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다시, 동호 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돌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돌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꾸짖은 후,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돌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흉노 묵돌선우는 이미 동남쪽의 동호국과 서북 방면의 월지국을 병합하여 중앙아시아 전역을 석권한 기세를 몰아 한나라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한편, 유방은 나름대로 자신보다 이전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을 거울삼아 북방의 유목국가, 특히 흉노를 멸하고 중국 중원을 넘어 천하를 ‘통일’ 統一하려는 야욕에 불타 있었다.
“흉노족은 짐승처럼 모여 살다가, 새처럼 흩어지는 속성이 있어 이들을 뒤에 쫓는 건 그림자를 치는 것과 같다. 지금 폐하의 성덕으로 흉노를 친다 해도 신은 속으로 위험한 일로 본다”라는 호군중위 진평 陳平의 진언에도 불구하고 흉노를 토벌하기 위하여, 유방은 32만 대군을 직접 지휘하였다.
흉노가 마읍 馬邑에서 한왕 신(韓王 信 :대장군 회음 후 韓 信과 同名異人)을 공격하자, 한신은 흉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태원에서 항복하고 만다.
백토 白土의 만구 신과 왕 황도 옛 조나라의 장수였던 조리 趙利를 왕으로 세워 모반했다.
분노한 고조가 몸소 32만의 대군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쳤다.
- 사기. 고조본기 高祖本紀
5. 유인 誘引
때가 겨울이라 몹시 춥고 진눈깨비가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상으로 손가락을 잃은 사졸들이 열에 두세 명은 되었다.
이러한 혹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방으로서는 아주 무모한 공격이었고, 묵돌에게는 유방의 군대를 흉노 특유의 유인 전술로 칠 호기를 맞았다.
유방은 몇 번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자신감을 얻은 유방은 계속 진격 명령을 내린다.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간다. 보급 지원군은 자꾸만 뒤처진다.
흉노 묵돌선우의 용병술은 탁월하였다.
유방은 흉노족이 유인하는 전술에 완벽히 속아, 한나라의 최북방 태원 太原 북쪽 평성의 백등산에서 본대와 지휘부가 분리되어 버렸다.
본대와 차단당한 상황에서 흉노와 조선족의 연합군 40만 정예기병에게 보급품이 끊긴 체 7일간이나 포위되었다.
* 지도 - 백등산 위치
유방과 한의 지휘군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나라 군대는 흉노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백등산 평성에 갇힌 체 오도 가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살을 파고드는 추위 속에서 식량도 보급품도 지원받을 수가 없었다.
서쪽에는 백마 白馬, 동쪽에는 청마 靑馬, 북쪽에는 흑마 黑馬들 탄 흉노군, 남쪽에는 적황마 赤黃馬를 탄 조선군 기병이 백등산을 포위하였다.
네 가지 색깔로 나누어 배치된 질서 정연한 흉노와 조선 연합군 기병대의 모습은 한나라 병사들에게는 가히 심장이 섬뜩한 모습이었다.
몇 번이나 포위망을 뚫고자 시도하였으나, 어림도 없었다. 용장 勇將 주발도 수차 례 돌파를 감행해 보았지만, 수하 병졸만 잃었지,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물론 포위망 밖에 있던 한군 역시 서로 협력하여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지만, 묵돌선우는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칠 주야간 물 샐 틈 없이 유방의 주력부대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외부와 연락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간이 길어지자, 이제 추위와 식량 공급이 문제가 되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얼어 죽거나, 굶어 죽게 될 판이다.
이때 호령군 중위의 직책으로 유방을 수행하고 있던 진평 陳平이 계책을 내었다.
묵돌의 황후인 연지(閼氏 : 알지)에게 많은 금은보화와 귀한 노리개 등을 선물로 주고, 아주 예쁜 궁녀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한나라에는 이런 예쁜 여자가 부지기수다, 만약 묵돌선우가 여기서 한 황제를 죽이고, 한나라를 점령하고 중원의 황제가 된다면 이런 예쁜 여자가 많은데, 굳이 연지님을 찾을 까닭이 있겠습니까?”하고 여인의 질투심을 건드리는 심리 전술을 곁들었다.
“그리고 양측이 원만히 타협된다면 더 큰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이에 혹한 연지는 묵돌을 설득한다.
“양국의 군주가 서로를 곤궁한 지경에 몰아넣어도 되겠습니까?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고 해도 선우께서는 그곳에 살 수 없습니다. 또한, 한나라의 왕에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것 같으니, 선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일개 여자의 말에 수십만 대군을 물리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묵돌선우도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다. 당초에 협력하기로 약조했던 한신 왕 휘하의 왕황과 조리의 군사들이 이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변심하여 한나라와 다시 손을 잡고, 아군의 뒤통수를 치게 되면 상황이 나쁜 쪽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동맹군인 조선군의 예평 대장군이 유방과의 옛일을 거론하며 목숨만은 살려주자고 건의 한다.
한 고조 유방의 천재 지략가 장량은 동이족으로 알려져 있다.
예평 장군은 장량과의 친분을 무시할 수 없어 묵돌선우에게 재차 건의한다.
묵돌선우는 굳이 무리수를 두지 않고, 예평 장군과 연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만 노골적으로 포위를 완전히 푼 것은 아니고, 한쪽의 포위망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남쪽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동맹군인 조선군이 포위망을 슬그머니 늦추는 것을 외면해 버린다.
- 3. 元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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