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녀님의 기도
최 화 웅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 7)
고희(古稀)를 맞으면서 가져야할 것만 갖기로 마음 먹었다. '살 집'이 아니라 ’살다 죽을 집‘을 짓겠다는 것이 나의 과제였다. 그로부터 몇 해에 걸쳐 병원과 성당, 지하철역이 가까운 곳에 집을 지을만한 80여 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설계도를 마련하여 건축허가를 신청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않은 민원이 뒤따라 허가절차 보다 까다로운 현실이 맞닥뜨렸다. 그러는 동안 나의 날이 다한 듯 의식을 잃은 채 죽음의 길을 오가는 극심한 수난을 겪었다. 병원에서는 기다릴 뿐이었다. 의식을 찾은 뒤 가족들의 권유로 집짓기를 그만두고 새 아파트로 이사하자는 말에 순순히 따랐다. 나의 일과가 된 투석치료는 이사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발을 묶었다. 그 일이 있고 이사를 했다. 이사한 곳은 앞이 훤히 트인 거실 창으로 수평선의 양끝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바다다운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곳이다. 일렁이는 수평선 끝에 내리는 붉은 노을이 대양으로 가는 뱃길을 품고 바다를 거슬러 온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크고 작은 요트와 형형색색의 윈드서핑이 파도를 탄다. 주위에는 부산의 바다 전망이 좋다는 황령산과 밤이면 별빛이 쏟아진다는 금련산이 작은 산맥을 이룬다. 오른편에 용호동 이기대로부터 왼편의 해운대 동백섬 사이에 펼쳐진 바다에는 진종일 윤슬이 피고 해조음(海潮音)이 머문다. 매일 아침 해돋이가 마음에 깃든다. 먼동이 트는 아침놀에 자연의 신비가 무르익는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아침 해가 광안대교 주 탑 위에 새봄을 펼친다. 이 찬란한 아침은 하느님의 작품이리라.
금련산맥 자락에 다소곳이 엎드린 광안리 하얀 수녀원은 순결하다. 그 수녀원의 수필동인(同人),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이 새로 나온 산문집『기다리는 행복』을 보내셨다. 어느 날 아내가 그 책을 읽다 나를 향해 “우리가 수녀님의 기도로 살아가군요.”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수녀님은「또다시 새봄을 맞으며」라는 글에서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던 바다와 수평선이 잘 보이질 않아 답답하다. 그러나 수십 년간 내가 누리던 행복에 감사하고 지금의 답답함을 불평하지 말자. 수녀원 앞에 새로 짓고 있는 30층도 넘는 그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오게 될 주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니 좀 더 가볍고 편한 마음이 된다.”라고 썼다. 나는 수녀원의 시야를 가로막은 문제의 아파트 20층에서 고희를 맞은 착한 아내와 등을 대고 산다. 오늘도 나는 덤으로 사는 기분으로 창가를 서성이며 앞으로 바다와 뒤로 수녀원을 번갈아 바라본다. 봄기운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꿈과 희망을 속삭인다. 몇 해 전 유대성, 조성기, 김형종이 함께 쓰고 픽셀하우스가 펴낸「광안리 하얀 수녀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부산본원 다시 짓기」를 읽을 수 있었다. 집짓기의 기록이 아니라 수녀회의 살아 있는 역사를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1931년 9월 스위스 캄의 성 십자가 수녀회 수녀 6명을 만주 연길교구에 진출시킴으로써 시작되었다. 6.25 이후 피난한 수녀님들이 부산에 모여 성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고 본원공동체 터를 잡았다. 이해인 수녀님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68년 이곳에서 서원하셨다.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그 뒤 수녀원에 ‘해인글방’이라는 창작둥지를 틀고 쉬지 않는 수도자의 삶을 꾸리고 있다. 내가 수녀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2003년 길동인 창립 때다. 그 뒤 2008년이던가? 지리산 초입 중산리에서 열린 제5회 천상병 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해 수녀님의 수상을 축하하게 되었다. 그 뒤 몇 차례 길동인 모임을 ‘해인글방’에서 가질 때는 수녀원 미사에 참례하고 봄가을이면 문학기행을 함께 했다. 수녀회의 미사는 어느 미사보다 밝고 맑아 청정하다. 수녀원의 전망을 가린 아파트 주민을 위해 기도하시는 수녀님과 나 같이 않은 사람들이 하는 기도 속에서 만나 일치를 이루는 기회를 가진다. 1965년 수녀회에서 스위스 건축가 프리츠 도스왈드의 설계로 광안리에 하얀 성당을 지은 지 반세기다. 수녀회 성당을 스위스 사람이 설계한 것은 1931년 연길교구에 스위스 캄의 성 십자가 수녀원으로부터 출발한 데 인연한다. 수녀원을 지은 지 50년의 세월이 지나 건물이 나이를 먹어 낡고 손을 봐야할 곳이 드러났다.
몇 차례 설명회에서 건축가들은 낡은 수녀원을 헐고 새로 짓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성당 전체 건물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만 고치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잘 한 일이다. 이웃에 사는 딸, 사비나가 안부를 물어왔다. 가족끼리 통화할 때는 스피커폰으로 주위의 소음까지 전하며 할 말을 다한다. 아내와 딸은 수녀님의 산문집『기다리는 행복』의 내용을 나누는 모녀간의 대화가 정겨웠다. 그리고는 “그 페이지를 휴대폰으로 찍어서 보내겠다.”며 생활 속의 작은 행복을 나누었다. 나는 오늘도 뒷방 창으로 눈에 익은 수녀원 전경을 바라보며 화살기도를 쏘고 성모송을 바친다. 기도(祈禱)를 국어사전이나 천주교 용어사전에서는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를 이루기를 빎, 또는 그 의식”이라고 풀이하고 성서적 차원에서 기도란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의 대화”라고 정의하고 “하느님과의 영적 만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오늘도 수녀원 공동체는 ’기도하고 읽고 일하라‘는 수녀회의 올곧은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다. 기도는 일방적인 바램보다 버림과 비움, 참음의 고행으로 이어지는 거룩한 삶이다. 기도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이리라. 나아가서 기도는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완성하는 성찰의 과정이다. 오늘도 수녀님들은 수녀원의 건물에 나있다는 1,333개의 창(窓)으로 하늘을 행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호흡하며 386개의 문(門)으로는 세상을 만나고 헤어지는 살아있는 기도를 계속하리라. 우리는 유혹에 흔들리고 곧잘 넘어지는 일상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려는 다짐으로 삶의 기도를 이어간다. 기도는 침묵하는 이웃의 고독까지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와도 소통해야한다는 설레임이 도사린다.
산자락에는 신록의 계절로 가는 푸른 잎새들이 수녀원의 잔디정원을 좁히고 있다. 창문을 연다. 복더위에 씻는 바람이 통한다. 하얀 성당 종탑 옆으로 난 회랑의 장독대가 햇살을 받아 검은 보석들처럼 빛난다. 광안리 하얀 성당이 인류 구원의 파스카신비를 준비하는 거룩한 이 시기에 우리에게 회개(悔改)와 희생(犧牲), 그리고 극기(克己)의 정신을 가다듬는다. 부활성야 빛의 예식 때 짙은 어둠을 깨치는 긴 부활 찬송,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 환호하라, 하늘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소리.”로 시작하는 엑술떼(Exsultet)의 감동으로 마음의 등불을 밝힐 때다. 생명은 축복의 빛이지만 언젠가 멈추고 마는 운명의 굴레가 아닐까? 오늘도 귀 기울이면 금련산 기슭에 엎드린 광안리의 하얀 수녀원으로부터 새벽 6시와 낮 12시, 그리고 저녁 6시 만종까지 하루 세 번 치는 성당종소리를 듣는다. 삼종 종소리를 듣고 봉송하는 기도라고 해서 우리는 삼종기도라 부른다. 삼종기도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한 사건을 기념하여 바치는 기도다. 저녁 6시에 울리는 만종(晩種)은 하루를 마감하는 삶의 종소리다.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여, 마치 바다의 파도가 일렁이듯 들린다. 이같은 맥놀이와 함께 긴장감도 팽팽해진다. 수녀원에서 하루 세 번 울리는 종소리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끈다. 하늘의 빛은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로 이어지리라.
첫댓글 때론 리볼레이션이 아니라 리노베이션이 얼마나 적절한지 잘 언급해 주신 것 같습니다.
오래간만입니다. 그리움님!
글쟁이는 역시 글판에서 살아야 진면목이 살아나죠?
죽어야할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살집을 짓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판단에 실수를 하신 것 같군요!
사무엘 울만의 "청춘"을 늘 기억합니다.
변함없는 열정으로 이 카페에서 자주 차 한잔 같이 하기를 바랍니다.
일전에 소식 전하고 먹고 사느라 다시 안부가 뜸했습니다.
빠른 시일내 뵙기를 희망합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죽을 집'과 '살다 죽을 집'은 다르답니다.
오늘도 새벽 6시에는 그 하얀 성당의 삼종 종소리가 세상을 향해 울려퍼집니다.
이 험한 세상에 사랑 가득한 하루되십시오
이 찜통같은 더위에
한줄기 바람같은 글을
올려 주시니 반갑고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바다물빛이 바뀌고 있습니다.
가을이 머지 않았나 봅니다.
그동안 그리웠던 그리움님의 글을 다시 대하는 기쁨을 맛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투병 중에도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으시기를 기도중에 기억하겠습니다.^^
저에게는 오늘도 사는 게 투병입니다.
그르려니 합니다.
국장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한 번 찾아 뵙지도 못하고 죄송합니다.
힘든 투병 중에도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은혜의집은 우리 부산친교회 월모임 장소로 빌려 쓰기도 했던 고마운 인연이 있는 수녀원입니다.
성당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명당으로 이사하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올 여름은 유별나게 더워서 건강한 저희도 힘든데 국장님 건강 조심하시고 자주 뵙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종소리의 맥놀이가 한결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지난번 흰샘 이규정 회장님 장례미사에 갔었습니다.
그때 망미본당 교우님들을 만나뵈었습니다.
수녀원과 성당 모습이눈에 선합니다
매일 매일이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
매일 새벽 6시 첫종이 울릴 때 저의 하루도 시작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