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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최영은 평장사 유청(惟淸)의 5세 손이다. 그의 아버지 원직(元直)은 벼슬이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이르렀었다. 최영은 풍채가 헌걸차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 났다. 처음에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 있으면서 누차 왜적을 사로잡아 용맹을 떨쳤으므로 달적(達赤)으로 채용되었다. 공민왕 원년에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은 안우(安祐), 최원(崔源) 등과 협력해 그들을 모조리 처단하였다. 호군(護軍)으로 임명되었다가 3년에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유탁(柳濯)과 함께 원나라 승상(丞相) 탈탈(脫脫) 등을 따라 고우(高郵-중국 강소성 소재지명)를 토벌할 때 전후 27회의 전투를 하였다. 그런데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에 탈탈이 참소를 당해 전투는 중단되었다. 이듬해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莊)에서 여러 차례 전투하였다. 또 사주와 화주(泗州,和州) 등 주의 적이 병선 8천여 척으로써 회안성(淮安城)을 포위하였을 때 최영은 밤낮 용감히 싸워서 물리쳤다. 적이 다시 공격해 오자 최영은 몇 번이나 창에 맞았으나 계속 용감히 싸워 적을 거의 전부 살상 포로하였다. 귀국한 후 인당(印當)과 함께 압록강 서쪽 8개소의 병참을 격파하였다. 6년에 외직으로 나가서 서해(西海), 평양(平壤), 이성(泥城), 강계(江界) 체복사(體覆使)로 되었으며 그 이듬해 왜적이 병선 4백여 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하자 최영은 복병하였다가 싸워 이겼다. 또 그 이듬해에 서북면병마사로 되었다. 홍적이 서경에 침입하자 최영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생양역(生陽驛) 철주(鐵州), 화주(和州) 서경(西京), 함종(咸從) 지역에서 싸워 자못 전공이 있었다. 또 그 다음 해에 평양윤 겸 서북면 순무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전쟁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아서 아사자가 속출하였으므로 최영은 각처에 구제소를 많이 설치하였으며 양식과 종곡을 주어 농사를 장려하고 전사자의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였다.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로 옮겼다. 11년에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경성을 회복한 공이 있어 1등으로 등록되어 벽상에 도형(壁上圖形)하고 토지 및 노비를 주었다. 또 그 부모와 처도 작위(爵位)를 받았다. 그리고 전리 판서(典理判書)로 임명되었다. 12년에 김용(金鏞)이 반란을 획책하고 그의 도당들을 보내 흥왕사의 행궁(興王寺行宮)을 습격하였다. 최영은 사변을 듣고 우제, 안우경(安遇慶), 김장수(金長壽) 등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고 달려가 반란의 무리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 공이 1등으로 평정되어 또 토지와 노비를 받았다. 이어 판 밀직 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하였으며 진충 분의 좌명 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칭호를 받았고 또 평리로 올라 갔다. 어떤 사람이 김용(金鏞)이 가지고 있던 묘아안정주(猫兒眠精珠)를 입수해 도당(都堂)에 보내었던바 좌중이 모두 돌려 가면서 구경하였는데 최영만은 보려하지 않고 말하기를 “김용은 그따위 것 때문에 양심을 잃었다. 여러 분은 무엇을 구경하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어 찬성사로 승진되었다. 13년에 반역자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왔다. 아군이 대전하다가 패하니 적이 승승 장구해 선주(宣州)를 점령하자 전국이 불안에 떨었다. 이때 왕이 최영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임명해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안주(安州)로 가서 전체 군대를 지휘 통제하게 하였다. 최영은 명령을 받고 곧 출발하였으며 장령과 사병들을 격려해 기어히 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하였다. 조정과 민간에서 다 그를 신뢰해 공포가 사라졌다. 최영이 도중에서 도망치는 병졸을 만나 곧 목을 베어 조리돌렸더니 비로소 명령이 엄숙하게 되었다. 여러 장령들과 함께 군대를 나눠 가지고 적을 달천(獺川)에서 크게 격파하고 병마 부사(兵馬副使) 안주(安柱)를 보내 승리를 보고하였다. 왕이 기뻐해 안주에게 말 1필과 은(銀) 2정(錠)을 주었다. 동녕로 만호(東寧路萬戶) 박 백야대(朴伯也大)가 연주(延州)에 침입하자 최영이 부하 장군을 보내 그를 격퇴하였다. 후에 왕이 풍저창사(豊儲倉使) 정득년(丁得年)에게 명령해 내시들에게 쌀을 주게 하였다. 이득년이 그 명령이 양부(兩府)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해 그에게 장(杖)을 쳐서 귀양보내려 하였다. 이때 최영이 말하기를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으며 이득년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어 그를 석방하였다. 14년에 왜적이 교동(喬桐)과 강화(江華)에 침입하였을 때에 최영은 동서강(東西江) 도지휘사(都指揮使)로서 군대를 거느리고 동강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지난날 밀직(密直) 김란(金蘭)이 그의 딸을 신돈(辛旽)에게 준 것을 최영이 책망한 일이 있어서 신돈이 미워하였었다. 그런데 이때 최영이 고봉현(高峰縣)으로 사냥 간 것을 가지고 신돈이 왕에게 참소하였으므로 왕이 이순(李珣)을 보내 최영을 책망하기를 “왜적이 창릉(昌陵)에 침입해 세조(世祖)의 영상을 가져 갔는데 그대는 동서강 도지휘사(都指揮使)로서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또 김속명(金續命)으로 그대를 대신하게 하였는데 그대는 아직도 그 군대를 데리고 때 없이 사냥을 나가니 무슨 일인가 내가 비록 말을 하지 않아도 대간(臺諫)에서 어찌 물의가 없겠는가? 이제 그대를 계림윤(鷄林尹)으로 보내니 이 직무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그 말을 듣고 궁궐을 향해 감탄해 말하기를 “오늘날 죄를 짓고 생명을 보전한 자가 적은데 나는 계림윤으로 될 수 있었으니 임금의 은혜가 두터워라.”고 하고 마침내 부임하였다. 신돈이 또 모함하기를 “최영은 이구수(李龜壽)와 함께 내시들과 결탁해 임금과 신하를 이간시켰습니다.”하고 자기의 당파 이득림(李得林)을 보내 신문하였다. 최영이 거짓 자복하고 말하기를 “속히 처형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3품 이상의 작위를 삭제하고 그의 전민(田民-토지와 그에게 달린 농민)을 몰수한 후 귀양보냈다. 이득림이 최영을 신문할 적에 기필코 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이때 정사도(鄭思道)가 합포(合浦)를 수비하고 있으면서 필사적으로 그 부당성을 주장하였었다. 이득림이 그 사실을 신돈에게 일러 주어서 그 사람도 면직되었다. 최영은 20년에 소환되어 다시 찬성사로 임명되었다. 22년에 6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되어 군호(軍戶)를 등록하고 전함(戰艦)을 건조하였으며 장수를 승급 또는 강직시키고 수령의 죄 있는 자를 독단으로 처리하였다. 이때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최영은 본디 조정 인사들의 소질을 알지 못하므로 인물의 승급 또는 강직에 대해 정확치 못하다.”라고 하였다. 또 나이 70세 이상 된 자에게도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해 군량에 충용하였으므로 고향을 떠나는 백성이 많았으며 원성이 자자하였다. 23년에 경상, 전라,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되자 헌사(憲司)에서 말하기를 “최영이 이전에 도순문사로 되었을 때 6도가 소동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다시 순문사로 임명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어 최영이 왕에게 울며 호소하기를 “저는 진심으로 몸을 나라에 바치고 있는데 이제 이러한 비방을 받게 되었으니 저를 면직시키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최영을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짐짓 대간과 도당에게 대신할 만한 자를 추천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최영의 파면을 논의하였다는 이유로 대사헌(大司憲) 김속명(金續命)을 파면하고 지평(持平) 최원유(崔元濡)를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좌천시켰으며 최영에게는 진충 분의 선위 좌명 정란 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 칭호를 주었다. 명 태조(明太祖)가 임밀(林密) 등을 보내 우리 나라에 대해 제주(濟州)의 말 2천 필을 가져다 보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제주 합적(哈赤)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와 초고독불화관음보(肖古禿不花觀音保) 등이 3백 필 밖에 보내지 않았으므로 임밀 등이 노하였다. 이에 왕은 마침내 제주를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에 최영을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都統使)로, 염흥방(廉興邦)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이희필(李希泌)과 변안렬(邊安烈)을 양광도 원수(元帥)로, 목인길(睦仁吉)과 임견미(林堅味)를 전라도 원수로, 지윤(池奫)과 나세(羅世)를 경상도 원수로, 김유(金庾)를 3도 조전 원수(三道助戰元帥) 겸 서해(西海), 교주(交州)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임명해 큰 병선 3백 14척과 사병 2만 5천 6백 명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교서에 말하기를 “담라(耽羅)는 본디 우리 나라에 소속되어 대대로 조공(朝貢)해 온 지 근 5백 년이다. 근자에 목호(牧胡) 석질리필사와 초고독불화관음보 등이 우리 나라 사절을 죽이고 우리 백성을 노비로 부리니 그 죄악이 실로 크다. 이제 최영에게 절월(節鉞)을 주어 전권을 위임하니 전선에 가서 전체 군대를 지휘 통제해 예정 기한에 적을 섬멸할 것이며 상벌을 책임지고 직접 실시하되 지위가 두둑한 자라도 꺼리지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재추(宰樞)들이 모여 전별하자 모든 장수들은 다 울었으나 최영과 변안렬만은 태연자약하였다. 8월에 군사가 나주(羅州)에 도착하였다. 최영이 영산(榮山)에서 열병하고 모든 장군들과 약속하기를 “각도 선박은 서로 혼동하지 말고 각각 돛대 위에 깃발을 꽂아 표식할 것, 배에는 책임관(官)을 두어 질서 없이 행선하지 말것, 출발한 후에는 각각 대오를 정돈하며 연료와 음료수를 제때에 보급할 것, 만일 왜적과 만나면 좌우에서 협공할 것, 그것을 포로하는 자는 상으로 큰 벼슬을 줄 것이다. 제주에 도착하면 각각 병선을 거느리고 일제히 진군해 누구나 뒤에 떨어지지 말아야 하며 부대는 각각 근거지를 가지고 봉화로써 서로 연락할 것, 전체 부대의 행동은 도통사의 호각 소리에 따를 것이요 조금도 위반하지 말것, 성을 공격함에 있어 주민들 중에 합적에 가담해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군대를 풀어서 모조리 무찌르고 항복하는 자는 추궁하지 말것, 적 괴수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하고 일체 계약 문건과 금, 은으로 만든 패쪽(牌), 도장 및 말 등록부 역시 모두 몰수할 것인바 이것을 얻은 ?悶“?상을 준다. 절(寺), 도전당(道殿), 신사(神社)를 수호하는 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재물을 탐내어 전투에 힘껏 싸우지 않는 자는 처벌할 것이며 재물을 싣고 먼저 도망쳐 돌아 가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왕이 나에게 반역자를 토벌할 책임을 맡겼으니 만큼 내 말은 곧 왕의 말씀이다. 내 명령을 순종하면 일이 잘 성취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장군들이 모자를 벗과 사례하였다. 배가 검산곳(黔山串)에 도착하니 모든 장군들이 말하기를 “배가 떠난 지 이미 오래고 바람세도 점점 높아가니 속히 행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자 최영은 말하기를 “오늘 바람세가 좋지 못하고 근 백척이 되는 서해도의 전함도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찌 먼저 떠나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모든 장군들이 울분하게 여겼는바 보길도(普吉島)에 도착해 정박하였다. 최영은 또 바람이 없으므로 머무르고자 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말하기를 “군사 행동은 속한 것을 귀중히 여기는바 행군을 미루다가 만일 후일에 물의가 있으면 그 허물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라고 하였으나 최영이 불응하였다. 염흥방이 말하기를 “여러 장군의 제의를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최영이 이 말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오(午)시가 되도록 머무적거리며 출발하지 않으므로 변안열의 휘하병사들이 먼저 발선하였다. 최영이 대노해 명령 위반자를 돛대 위에 매달았으나 조금 후에 각도의 배가 돛을 달고 일제히 출발하므로 최영은 부득이 출발을 명령하였다. 서해도의 선박도 따라 왔다. 중도에서 세찬 바람을 만나서 모든 배가 산산이 흩어졌다. 해가 저물어 추자도(楸子島)에 도착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닥쳐 와서 배들이 낭떠러지 돌에 부딪쳐 닻줄이 끊어지고 노를 잃었다. 다음날에 제주에 도착하였다. 최영은 모든 장군들을 배치해 4면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석질리필사와 초고독불화관음보 등은 3천여 기의 병력으로 명월포(明月浦)에서 항거하였다. 최영은 전 제주 목사 박윤청(朴允淸)을 보내 포고문을 발포하였다. 그 글에 말하기를 “이제 군대를 동원해 토벌하는 것은 사정상 부득이한 것이다. 그러므로 적의 괴수를 제외하고 성주(星主)와 왕자(王子), 토관(土官), 군민(軍民)은 응당 이전과 같이 안도할 것이며 비록 적당에 가담한 자라도 항복하면 역시 관대한 처분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역하는 경우에는 대군이 한번 행동하면 자잘못을 가릴 수 없이 모두 소탕될 것이니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영은 전체 장군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하였다. 그때 군대들이 주춤거리며 전진하지 않으므로 비장 1명을 베어 군중에 돌려 보이자 대군이 일제히 전진하였다. 이리하여 좌우로 맹렬히 공격해 적을 대파하고 승리를 이용해 패주하는 적병을 30리 지점까지 추격하였다. 해가 저물 무렵에 명월포로 돌아 와서 해안 지역에서 숙영하였다. 적이 안무사 이하생(李下生)을 죽였다. 모든 장군들은 한라산(漢拏山) 아래에 집결해 군대를 휴식시켰다. 이때 아군은 적의 말을 다수 획득해 모두 기병으로 되었다. 적의 괴수 3명이 도전해 왔다가 거짓 패주하였다. 이것은 앞으로 효성(曉星), 오음(五音) 평야에 유인해 기병으로 반격할 심산이었다. 최영은 그 모략을 알아 차리고 날랜 군사로 급히 추격하니 적은 도주해 산 남쪽 호도(虎島)로 들어 갔다. 이에 최영이 전부령(前副令) 정룡(鄭龍)을 보내 빠른 병선 40척으로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뒤미처 갔다. 석질리필사가 자기 처자 및 그의 도당 수십 명을 데리고 나왔고 초고독불화관음보는 화를 면할수 없을 것을 각오하고 산언덕 밑에 떨어져 죽었다. 최영은 석질리필사를 그 세 아들과 함께 허리를 베어 죽이고 또 초고독불화관음보의 머리를 베어 지 병마사(知兵馬使) 안주(安柱)를 보내 왕에게 바쳤다.
동도(東道) 합적(哈赤) 석다시만조(石多時萬趙) 장홀고손(莊忽古孫) 등은 아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에 의거해 항복하지 않았다. 최영이 장군들을 거느리고 공격하자 패주하였으므로 계속 추격해 포로하고 잔당들을 수색해 모조리 죽이니 적의 시체가 서로 깔리었다. 또 금패(金牌) 9, 은패 10, 도장 30, 말 1천 필을 노획하였다. 도장은 만호(萬戶), 안무사(按撫使), 성주(星主), 왕자(王子)에게 주고 말은 여러 고을에 나눠 주어 사양하게 하였다. 이때 군대 중에서 말과 소를 잡아 먹는 자가 있었으므로 혹은 목을 베기도 하고 혹 팔을 잘라 군사들에게 보이자 모두 공포에 떨며 추호도 범죄하는 자가 없었다. 10월에 최영이 여러 장군과 함께 돌아 오니 왕이 이미 죽었으므로 최영은 시체 앞에서 보고하고 목이 메어 통곡하였다. 신우 원년에 판삼사사로 되었다. 2년에 도당(都堂)에서 왕의 명령이라 하여 귀양살이 중인 강순룡(康舜龍), 정사도(鄭思道), 염흥방(廉興邦), 성대용(成大庸), 정우(鄭寓), 윤호(尹虎), 정몽주(鄭夢周) 등을 석방하고자 이미 결의하였는데 이때 최영은 사냥 나가고 없었으므로 이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돌아 오자 녹사(錄事)가 그 문건에 서명을 요구하였더니 최영은 노해 말하기를 “국가의 중대한 문제는 반드시 대신이 합의한 연후에 시행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미리 알리지 않고 갑자기 서명을 받는가.”하고 마침내 서명하지 않았다. 최영의 조카 사위 판사(判事) 안덕린(安德麟)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양광도 안렴(按廉) 양이시(楊以時)가 구속해 헌사(憲司)에 압송하였다.
이때 최영은 판 순위부사(判巡衛府事)로 있었는바 도당에서는 최영과의 관계를 고려해 안덕린의 죄를 경하게 하려고 순위부로 넘겨 보냈다. 최영이 노해 말하기를 “안덕린이 무고한 사람을 죽였은즉 응당 헌사에서 판결할 것이다. 하물며 내가 순위부에 있으면서 어찌 문초를 추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헌사로 돌려 보냈다. 왜적이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를 무찔렀는데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는 패배해 전사하였다. 최영이 이것을 듣고 토벌을 자청하니 신우는 최영이 늙었다 하여 만류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보잘 것 없는 왜적이 이와 같이 난폭하니 이제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후에는 더욱 대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장수를 보내면 확신성 있게 승리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 휘하 군사도 평소에 훈련이 없으니 쓸 수 없습니다. 저로 말하면 비록 몸은 늙었으나 뜻은 꺾이지 않아 종묘와 국가를 편히 하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일념 뿐입니다. 곧 휘하를 인솔하고 나가 싸우게 하여 주기 바랍니다.”라고 재삼 요구하였으므로 신우가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최영은 밤낮으로 행군하였다. 이때 적은 늙은이와 약한 자를 배에 싣고 곧 돌아 가려는 듯이 보이면서 몰래 용감한 정예 부대 수백 명을 내지로 깊이 침입시켜 약탈하니 가는 곳마다 수수 방관할 뿐이고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었으며 홍산(鴻山)에 이르러서 함부로 살육과 약탈을 감행해 기세가 대단히 강성하였다. 최영은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 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급히 홍산(鴻山)으로 가서 전투에 앞서 우선 요해처에 의거하였다. 그 곳은 3면이 다 절벽이고 오직 길 하나가 통할 뿐이었다. 모든 장수들이 겁을 먹고 전진하지 못하였으므로 최영이 몸소 사병의 선두에 서서 정예를 전부 동원해 돌진하였다.적은 바람에 풀잎이 쓰러지듯 하였다. 이때 적 1명이 숲 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서 입술을 맞혔다. 최영은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안색은 태연자약하였으며 그 적을 쏘니 시위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그런 후에야 맞은 화살을 뽑았다. 최영은 더욱 용감히 싸워 마침내 적을 거의 모두 대파해 포로 또는 살육해 버렸다. 판사 박승길(朴承吉)을 보내 승리를 보고하였더니 신우가 대단히 기뻐해 박승길에게 은 50냥을 주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석문성(石文成)을 보내 최영에게 의복과 술 및 안마(鞍馬)를 주고 또 의사 어백상(魚伯詳)을 시켜 약을 가지고 가서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최영이 개선하자 신우가 재추들에게 명령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고 갖은 놀이판을 차려 놓았으며 그 의식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때와 비슷하였다. 궁중에 들어 가서 신우를 만나니 신우가 주연을 배설하고 묻기를 “적의 수효가 얼마던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 수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여러 재상들이 물으니 “적이 만일 많았더라면 이 늙은이는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공로를 평정해 시중(侍中)으로 임명하려 하였더니 최영이 굳이 사양해 말하기를 “시중으로 되면 제때에 전선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인바 왜적을 평정한 연후라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을 봉하였다. 동시에 다른 장군과 병사들에게도 등분에 따라 상을 주었다. 유영(柳榮)은 최영의 처 조카로서 최영이 그를 사랑하였다. 조정에서 최영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영을 특별 진급시켜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로 임명하였다. 유영은 즉 유수(柳遂)이다. 후에 최영의 휘하가 홍산(鴻山)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는 그림을 올렸더니 신우는 이색(李穡)에게 칭찬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3년에 최영이 이인임과 함께 지윤(池奫)을 처단하였다. 판서(判書) 문천식(文天式)이 원나라 승상(丞相) 납합출(納哈出)을 으레 방문하려 하였을 때 최영이 문천식에게 말하기를 “원나라 승상이 만일 지윤의 죽은 데 대해 물으면 병으로 죽었다고 대답하라.”고 하니 문천식이 말하기를 “제공(諸公)은 다시 이러한 난폭한 일이 없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영은 부끄러워 하면서 그것을 접수하였으며 이어 노병을 칭탁하고 사직하려 하였으나 신우가 허락하지 않았다. 왜적이 밤을 이용해서 착량(窄梁)에 침입해 병선 50여 척을 불살라 해면이 낮과 같이 밝았고 죽은 자가 1천여 명에 달하였으며 만호 손광유(孫光裕)는 화살에 맞고 작은 배를 타고 간신히 빠져 나왔다. 최영이 일찍이 손광유에게 경계하기를 “착량 강 어구에서 관병(觀兵)을 하더라도 아예 바다로 나가지는 말라”고 하였었다. 착량을 막 나서자마자 이날 손광유는 술에 크게 취해 깊이 잠들었다. 이때에 돌연히 적이 침입해 결국 패전한 것이었다. 또 적이 강화부에 침입하였는바 만호 김지서(金之瑞)와 부사(府使) 곽언룡(郭彦龍)은 도망쳐 마리산(摩利山)으로 들어 갔다. 적은 함부로 약탈하고 김지서의 처를 포로해 갔다. 신우가 나세(羅世), 이원계(李元桂), 강영(康永), 박수년(朴壽年), 조사민(趙思敏) 등을 보내 적을 강화도에서 공격하게 하고 최영을 도통사로 임명해 승천부(昇天府)에 주둔하면서 왜적에 대비하게 하였다. 적은 강화도를 떠나서 수안(守安) 통진(通津) 동성(童城) 현들에 침입하였는데 가는 곳마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적이 동성에 이르러 말하기를 “응 수비하는 사람이 없구나 참으로 낙토(樂土)이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경복흥(慶復興) 이인임(李仁任) 등과 함께 경천(敬天)에 가서 방어 대책을 토의하였을 때 최영이 탄식해 “왜적의 횡포 잔악함이 이러하니 원수(元帥)로서 어찌 낯을 들 수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마침내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이때 원수 석문성(石文成)은 다만 가기(歌妓)가 오고 안 오는 데만 관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탄식하기를 “최영과 석문성은 근심하고 즐기는 바가 서로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또 말하기를 “손광유는 내 지시를 위반해 적이 이렇게 함부로 횡행하게 하였다. 처음에 적이 강화에 침입하자 조강 안집사(阻江安集使)가 적이 물러 갔다고 허위 보고해 나로 하여금 제때에 반격할 기회를 놓치게 하였다. 만일 관군(官軍)이 빨리 보고하였더라면 적은 우리 안에 든 범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고 안집사를 순위부(巡衛府)에 가두었다. 김지서가 사람을 보내 최영에게 고하기를 “적이 이미 부녀자와 보물을 실어다 덕적도(德績島)에 두고 다시 병선 37척으로 침입하였으니 응원병을 보내주기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최영이 불응하며 말하기를 “너희 부에는 기병 1천여 명이 있는데 그것을 어데다 쓰려는가? 적이 너의 처를 잡아 갔을 때도 용감히 싸울 대신에 앉아서 강화가 유린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다가 이제 또 군대를 요구하니 아마도 적에게 넘겨 주려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또 여러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먼 지방의 원수(元帥)들은 적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집합 기한을 잠간 어기기만 하면 군법에 부치거든 항차 수도(首都) 근방에서 큰 병선 50척과 전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싸우지 않고 패주한 자를 어찌 그냥 두겠는가. 또 적이 강화에 들어 오기가 바쁘게 군대를 내버리고 강을 건너옴으로 해서 한 큰 고을을 쓸쓸한 폐허로 만든 자를 어찌 그냥 두겠는가? 이러한 것을 처단하지 않고 어찌 지휘 명령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들을 단죄하고자 하나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는 평을 꺼리는 바이다”라고 하고 신우에게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리하여 손광유, 김지서, 곽언룡을 옥에 가두고 이희춘을 강화 만호로, 김인귀(金仁貴)를 부사(府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어떤 아이 하나가 적에게서 도망쳐 돌아 왔다. 여러 장수들이 그를 불러 적의 상황을 물으니 그 아이가 말하기를 “적들은 언제나 제일 무서운 자는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 뿐인데 홍산 전투에서 최만호가 오니 그 사졸들이 앞을 다투어 말을 달려서 유린하였다. 대단히 무섭다 하더라”라고 하였다. 최영이 제의하기를 “교동(喬桐)과 강화(姜華)는 중요한 요해지인데 새력 있는 자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토지를 점유하였기 때문에 군수 물자가 모자란다. 사전(私田)을 없애어 그것을 군량에 보충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이에 동의해 곧 교동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내지로 옮기고 장정만을 남겨 두어 농사를 짓게 하였다. 또 모든 원수(元帥)에게 휘하 사병 10명 씩을 내어 놓게 하고 또 애마(愛馬), 궁사(宮司), 창고(倉庫)의 인원을 군대로 징발해 강화도를 수비하게 하였다. 최영이 군대를 검열하고 그 대오가 정돈되지 못한 데 분격해 사람을 보내 청하기를 “저는 대오 책임자를 처단할 것을 원합니다”라고 하니 신우가 말하기를 “도통사(都統使)가 벌써 죽여 버리지나 않았는가 죄가 중하면 매를 치고 경하면 용서하라”고 하였다. 어느 날 신우가 순위부(巡衛府)에 교서(敎書)를 보내 말하기를 “손광유(孫光裕), 김지서(金之瑞) 곽언룡(郭彦龍)의 죄는 응당 군법에 의해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방금 날이 크게 가무니까 모두 사형을 감해 주고 그 가산을 몰수한 후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김진(金縝)이 경상도 원수로 있을 때에 도내의 이름 난 기생을 많이 모아 놓고 휘하 사관들과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놀았다. 김진은 소주를 즐겼으므로 군대 안에서 그를 소주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사병과 보좌관들이 조금만 자기 비위를 거스르면 곧 후려 갈기며 욕설을 하였으므로 모두 울분과 원망을 품었다. 왜적이 합포(合浦) 병영에 방화하고 약탈하자 군인들이 말하기를 “소주군더러 적을 치게 하라. 우리들이 어찌 싸울 수 있는가”라고 하고 물러 서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으며 김진은 혼자 말타고 도주하였으므로 마침내 대패하였다. 이에 김진을 서민(庶民)으로 만들어 창녕현(昌寧縣)으로 귀양보냈다가 이어 가덕도(嘉德島)로 옮기고 합포 도천호(都千戶) 이동부와 김원곡(金元穀)을 사형하였다. 이 때에 와서 최영은 이 교서를 보고 탄식하기를 “김진, 손광유는 모두 패전한 자로서 응당 사형해 조리돌릴 것이었다. 그런데 전 번에는 법을 굽혀 김진을 용서하고 이제 또 손광유 등을 놓아 주니 형정(刑政)이 이러하고야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우가 또 김진에게 의복과 말을 주고 소환하려 하니 최영이 반대해 말하기를 “김진은 사병을 사랑하지 않았음으로 하여 적을 보고도 동원되지 않은 결과 패전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거든 이제 도리어 후대해 소환한다면 후일에 공을 세운 자에게는 어떻게 대우할 것입니까. 상벌은 임금이 가진 커다란 권한이니 그것을 문란케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소환을 중지하였다. 이때 날이 가물었으므로 기우제를 지냈고 또 여러 절(寺)에서 두루 기도를 하였다. 최영이 도당(都堂)에서 공공연히 말하기를 “현재 정사와 형정이 문란해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지 않고 죄를 지은 자를 처벌하지 않으니 어찌 비가 내리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중들이 단오 명절에 거리에서 시식(施食)이라 하여 아귀(餓鬼)에게 밥 주는 행사를 하였으며 이것을 구경하기 위해 상층부의 부녀들이 모여 들었다. 최영이 보고 중을 꾸짖어 말하기를 “만일 귀신에게 밥을 주려면 산이나 들의 정결한 곳을 택하여야 할 것이지 방금 여름철에 음식을 거리에 버려 놓아 악취를 풍기게 하는가. 이것은 오로지 너희가 아름다운 여자들을 모아 놓고 풍기를 문란케 할 뿐이다. 당장 잡아다 옥에 가두겠다.”라고 하였으므로 중들은 질겁해 뿔뿔이 흩어졌다. 수도가 바다에 가깝다는 이유로 왜적을 염려해 내지로 옮기는 데 대한 가부를 토의하였다. 모두 후환을 염려해 옮기고자 하였으나 최영만은 군대를 징발해 고수할 방침을 말하였다. 그런데 신우가 듣지 않고 궁성을 철원(鐵原)에 신축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최영이 말하기를 “이제 수도를 옮기면 비단 농사를 방해하며 백성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또한 해적이 노리는 기회를 열어 주는 결과를 초래해 앞으로 나라가 날로 더욱 궁박해 질 것이니 이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태후(太后)를 철원으로 옮기게 하고 전하는 여기 머물러 수호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신우가 말하기를 “태후를 옮기고 자식이 어찌 혼자 머물러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태후는 연세가 높으므로 만일 불의의 사변이 일어 나면 거동하기가 더욱 곤란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신우가 그럴듯이 여겨 문제는 마침내 중지 되었다. 최영이 또 제의 하기를 “경성이 광활해 비록 10만의 병력을 가져도 방위하기 용이하지 않으니 내성(內城)을 축조해 불의의 사변에 대비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목인길(睦仁吉)이 “동토(動土)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신우가 말하기를 “기피(忌避)에 구애되어서 축성을 그만 두어도 좋단 말인가? 이 곳을 버리고 어느 곳을 수도로 하려는가? 농한기를 기다려 공사를 시작하라”고 하였다. 4년에 왜적의 병선이 수 많이 착량(窄梁)에 집결하고 승천부(昇天府)로 들어 와서 장차 경성을 침공하겠다고 공언하였으므로 국내가 크게 진동해 계엄하였다. 신우가 모든 군대에게 명령해 나누어서 동서강(東西江)에 주둔케 하고 궁문에 위병(衛兵)대열을 늘어 놓아 적의 침입에 대비히였으며 방리(坊里)의 병정을 동원해 성에 올라 가 망을 보게 하였다. 최영은 모든 군대의 총 사령으로서 해풍(海豊)에 진을 쳤으며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이 그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적이 이를 탐지하고 최영의 부대를 격파하면 경성을 엿 볼 수 있을 것으로 인정하고 다른 진지와는 싸우지 않고 그대로 통과하면서 급히 해풍으로 달려 들어 곧바로 중군(中軍)으로 향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이 이 결전에 달렸다”라 하고 드디어 양백연과 함께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은 최영에게로 집중 공격을 하였다. 최영은 달아났다. 이때 우리 태조(이성계)가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맞바로 달려 가 양백연과 합세해 공격한 결과 적을 대파하였다. 최영은 적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휘하를 거느리고 측면으로 공격해 거의 다 소탕하였다. 적의 패잔병들은 밤으로 도주하였다. 밤에 성중에서는 최영이 도주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들끓었으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신우는 피난할 각오를 하였고 전체 관원들은 짐을 싸 가지고 궁문(宮門)으로 겹겹이 모여 들어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여러 원수들이 사람을 보내 승리를 보고하자 경성의 계엄령을 해제하고 전체 관원이 모두 축하하였다. 조정에서 승리한 것이 최영의 공로라 하여 안사 공신(安社功臣) 칭호를 주었다. 5년에 신정군(新定君) 마경수(馬坰秀)가 그 아들과 함께 양민(良民)을 횡점 은익한 사실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때마침 재변으로 인하여 죄수들의 재조사가 있었던바 여러 재상들이 마경수를 석방하려 하자 최영이 말하기를 “마경수는 양인을 노비로 삼은 것이 30명이나 되고 토지를 점탈한 것은 백 경(頃) 이상이며 지방에서 감행한 위선적 행동을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도당의 관속을 시켜 문건을 작성하였는데 그에 말하기를 “백성을 숨겨 두고 부리는 자 및 사형에 해당한 죄를 범한 자는 그 토지를 군(軍)의 수요를 위하여 귀속시킨다.”라고 하였다. 관속이 최영에게 고하자 최영이 큰 소리로 질책하기를 “이 문제로 말하면 이미 규정된 법이 있는데 그것을 준수하지 않고 어찌해서든지 법을 왜곡해 백성을 숨긴 자를 용서하려 하니 무슨 일인가. 또 범죄자의 토지를 점유하는데 문건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으므로 이인임이 무색해 하였다. 최영이 사평부(司平府)에서 마경수의 죄를 심문해 도당에 보고하였으나 도당에서 미결로 끌면서 판결을 짓지 않으므로 최영이 노해 여러 날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마 경수에게 매 107개를 치고 그 아들 치원과 희원까지 매를 쳐서 모두 귀양보냈던바 마경수는 가는도중에 죽었다. 경복흥(慶復興), 황상(黃裳), 우인렬(禹仁烈)이 최영의 집에 갔다. 이때 정지(鄭地)가 왜적과 순천(順天) 조양(兆陽)에서 싸워서 패전하였다. 이와 관련해 최영이 경복흥 등에게 말하기를 “여러 재상들이 어찌 나라를 근심하지 않고 왜적이 이렇듯이 함부로 횡행하게 하는가 정지가 아무리 용감한들 혼자서 그 많은 도적들을 어떻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재상들이 부끄러운 내색을 하였다. 신우가 여러 장수를 보내 왜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나는 가정에 구애되는 일이 없으므로 적에게 죽는다 해도 한이 없습니다. 다만 나의 이름이 약간 타국에 알려져 있으므로 만일 적에게 죽으면 나라의 위신을 손상할까 염려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적의 침략이 이와 같이 난폭하니 차마 앉아서 백성이 무참히 살상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나의 일거에 달렸으니 휘하 전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도당에서 출정하는 장수들을 전송하였던바 최영만은 이에 참여하지 않고 말하기를 “근자에 문하성(門下省)에서 임금에게 제의해 환영과 전송을 금지하였는데 어찌 재상들이 먼저 그것을 위반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어느 사이에 봉화(烽火)가 두 번째 올랐다. 신우가 말하기를 “외지를 중요시하고 서울을 경홀히 할 수 없다”고 하고 최영에게 나가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최영의 휘하 병사 이인무, 박위 등 30여 인이 호소하기를 “승천부(昇天府)와 서해도(西海道) 전투에서 공을 세웠는데 아직 상을 받지 못하였다.”라고 하자 최영이 외람한 짓이라 하여 모두 사평부(司平府)에 가두었다. 신우가 용서 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최영이 안 된다고 고집하니 신우가 말하기를 “내가 석방하려는데 그대는 어찌 그리 완강한가”라고 하였으므로 최영이 부득이 석방하였다. 정당문학(政堂文學) 허완과 동지밀직(同知密直) 윤방안이 그들의 처를 시켜 신우의 유모 장씨(張氏)를 사촉해 신우에게 참소해 내재추(內宰樞) 임견미(林堅味), 도길부(都吉敷)를 축출할 것을 청하였다. 신우는 임견미 등을 자택으로 내쫓아 출입을 금지하였다. 임견미 등이 최영 및 경복흥, 이인임에게 달려 가 말하기를 “허완 등이 우리 두사람을 죽이려 하는바 결국 여러 분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밤에 허완 등이 임금의 명령으로 사칭하고 최영을 재삼 불렀다. 그러나 최영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염려해 휘하 군대를 거느리고 경복흥, 이인임 등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 회합해 무장한 군대를 대대적으로 배치하고 양부(兩府) 백관과 원로들을 집합시켜 토의한 후 장씨를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신우가 급히 최영을 불렀으나 최영이 거부하며 말하기를 “지금 전국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만일 군중의 의견을 들어 준다면 제가 들어 가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그대가 병으로 여러 날 나오지 않으므로 한 번 볼 겸 실망한 일에 대하여 듣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들어 가려 한즉 여러 재상들이 만류하기를 “간악한 자가 궁중에 있으니 경솔히 들어 가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없으면 군대가 반드시 동요할 것이고 군대가 동요하면 나라가 조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최영이 이것을 접수하였다. 양부 대간이 궁중에 들어 가서 장씨를 심문해 문제를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신우가 듣지 않았으므로 최영 등이 장씨의 친족들인 강유권, 원순, 원보 등을 가두고 문초하였다. 신우가 노해 궁중의 일을 양부와 대간이 알 수 없으며 이것은 필연코 내시로부터 누설된 것이라 생각하고 내시 정난봉을 옥에 가두고 이득분(李得芬), 김실(金實)을 자택으로 쫓아 버렸다. 그리고 최영에게 군대를 해산할 것을 명령해 말하기를 “그대는 어떤 적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켜 두고 있으면서 들어 오지 않는가 그대는 지난 때 자?爛遊酉?충신이라고 하였다. 이제 그 충신의 정신이 어데 있는가”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부름에 따라 들어 가면 병사들이 기여히 따를 것이며 병사를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 가면 제 죄는 사형에 해당할 것입니다. 또한 제가 어찌 들어 가서 전하 앞에서 죽는 것을 꺼리리오만은 아마도 전하의 본의가 아닌가 싶어서 그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몸은 비록 보잘 것 없으나 연관되는 바가 대단히 크므로 만일 간악한 자의 손에 죽으면 국가가 위태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우는 침묵하였다. 이윽고 경복흥과 이인임을 불러 들여 울며 말하기를 “이 여성은 나를 길렀다. 즉 내 어머니이다. 아들로서 어찌 어머니의 생명을 보호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이 이미 나를 임금으로 삼았는데 나만은 유모 하나를 구할 수 없다는 말인가 놓아 두고 죄를 묻지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복흥 역시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우가 사람을 태후(太后)에게 보내 문의하기를 “옛적에도 유모를 쫓아 낸 자가 있었습니까?”라고 하니 태후가 말하기를 “전례의 유모를 논할 것이 있는가 응당 그때에 따라서 적당히 판단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경복흥과 이인임의 대답 역시 태후의 말과 같았다. 그러나 신우는 듣지 않았다. 대성(臺省)과 백관이 장씨를 문초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또 듣지 않고 비밀히 사람을 대사헌(大司憲), 우현보(禹玄寶)에게 보내 말하기를 “백관과 함께 물러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우현보가 말하기를 “나는 물러 갈 수 있으나 백관이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니 속히 장씨를 내어 줄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백관이 장씨의 죄행을 낱낱이 태후에게 말하니 태후가 말하기를 “어찌 한 여자의 잘못 때문에 온 나라의 실망을 사게 할 수 있는가 속히 장씨를 내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씨가 들어 와서 신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신우 역시 차마 내보내지 못하였다. 태후가 신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별궁으로 옮아 가 이런 일을 듣지 않고자 한다”하고 수레를 불러 곧 나가려 하였으므로 신우의 고집이 풀려서 마침내 장씨를 이인임의 집으로 보내면서 죽이지 말것을 부탁하고 국대부인(國大夫人) 작위(爵位)를 삭제하였다. 최영이 궁궐에 가서 사은하기를 “전하가 간사한 자를 물리치고 저를 의심하지 않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를 불충한 신하라고 책망한 것은 실로 의외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歐綬?“일이 다급하여 얼결에 실언해 깊이 후회한다.”라고 하였다. 문하평리(門下評理) 김유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에게 항거하는 것은 어쨌든 옳지 못한 일이 아닌가”라고 하니 최영이 노해 신우에게 말해 김유를 옥에 가두었다가 합포(合浦)로 귀양보냈다. 대간(臺諫), 중방(重房)이 상서해 견결히 주장한 끝에 장씨를 귀양보내고 허완, 윤방안, 강유권, 원순, 원보 및 장씨의 양녀(養女)의 남편 상호군(上護軍) 손원미(孫元美)를 죽이고 손원미의 형 지 춘주사(知春州事) 손원적(元迪)을 매를 쳐서 귀양보내고 이어 장씨를 사형하였다.
6년에 최영에게 해도 도통사를 겸임시켰다. 최영이 신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많은 임무를 책임지고 있는바 이제 또 해도(海道) 도통사로 되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또한 그 곳은 병선이 겨우 1백 척이고 군졸이 3천에 불과 한데 내가 만일 군대를 동원하면 응당 만여의 병력을 요할 것인바 창고가 고갈하였으니 무엇으로 군량에 충당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국방 문제가 긴급하므로 부득이 그대에게 겸임시키는 바이니 굳이 사양하지 말 것이며 또 현재의 군수 물자로써 만 명이 넘는 병력을 공급하는 것은 실로 곤란한 형편인즉 바라건대 그대는 3천의 병력으로 일당백의 힘을 발휘하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늙어서 제때에 와 뵙지 못하다가 이제 다행히 뵙게 된 기회에 간단히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는 항상 방심하지 말고 자기를 반성해 덕을 닦으며 조금도 안일에 흐르지 말 것인바 그것은 온 백성의 운명이 모두 전하의 마음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여러 장수와 함께 동서강에서 주둔해 왜적을 방비할 때 병에 걸렸다. 모든 장수들이 “당신의 병이 위중하다”고 말한즉 그는 말하기를 “장군이 군대를 거느리고 전선에 나온 이상 어찌 병을 염려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의사가 약을 권한즉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내 이미 늙었고 또 사생은 천명에 있는 것인데 구태어 약을 먹고 살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우가 시종하는 하인을 측근 관리로 등용하고자 최영에게 문의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소인(小人)이 벼슬을 얻어 하면 반드시 방자해 지는 법이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신우가 그만 두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세공(歲貢)으로 금, 은, 말, 세포(細布)를 보내라는 독촉이 왔다. 시중(侍仲) 윤환(尹桓) 등이 재상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등급별로 포(布)를 거두어 변통할 것을 제의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지금 관민을 막론하고 다난하며 일이 고되고 생업이 곤란한데 또 포를 징수하면 그 폐단이 이루 혜아릴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명나라 측에서도 강요해 만족할 줄을 모르니 어찌 모두 다 복종할 수 있겠는가. 우선 사절을 보내 공물(貢物)의 액수를 감할 것을 청해 볼 것이며 그래도 부득이한 경우에 윤환의 제의대로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최영의 공적을 평정하고 철권(鐵券)을 주면서 내린 교서에 “내가 듣건대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즉위 벽두에 공로를 보답하는 법을 반포하였으며 태공(太公)을 봉할 때에 공적을 표창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공의 평정에서는 반드시 중한 편을 쫓았으므로 요순(堯舜) 시대와 같은 치적(治績)은 후세에 따라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대는 실로 우리 왕조 역대 공신의 후손으로서 그대의 선조들은 우리의 누대 선왕에게 복무해 문교와 정치 사업에서 모두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의 고매한 소질과 강의한 기개는 일세에 탁월해 전대 역사들에 못지 않으며 특히 군사 상 공훈은 그 유례가 없다. 경인년부터 육지와 해상에서 적을 막아 비로소 그 지혜와 용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우리 부왕이 선발해 시위(侍衛)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서로 더 신임하게 되었으며 호군(護軍)으로 특별히 등용되었다. 역적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자 그대는 적을 막아 공을 세웠고 원나라 임금의 명령으로 선왕이 용사를 모집하자 그대는 선왕의 뜻을 받들어 원나라에 가서 장강과 회수(淮水) 사이에서 결사전을 하여 명성을 중국에 날리고 나라의 위신을 떨쳤다. 홍적이 서부 변방에 침입하자 그대는 선두에서 싸워 승리를 확보하는 공을 세웠으며 또 모든 장수들과 함께 수도를 수복해 나라를 보전케 하였다. 선왕이 흥왕사(興王寺)를 행궁(行宮-임금이 거동할 때에 묵는 별궁)으로 삼았을 때 역적 김용(金鏞)이 은밀히 김수(金守)를 시켜 밤중에 행궁을 침범해 신하들을 살해하자 그대가 희생을 각오하고 충성을 떨쳐 악당들을 모조리 소탕하였다. 역적 최유(崔濡)가 원나라 임금에게 무고해 덕흥군(德興君)을 세우고 선왕을 폐위한 후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침범하자 그대는 명령에 응해 전선으로 출동해 모든 장수들을 지휘 통제해 큰 공을 세웠다. 담라(耽羅) 합적(哈赤)이 관리를 살해하고 반란하자 그대는 명령을 받고 출정해 그 괴수를 섬멸하고 백성들은 초호도 침해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내가 즉위한 이래 왜적이 더욱 강성해 백성의 고난이 전일보다 더 심해지자 그대는 선두에서 싸워 적을 홍산(鴻山)에서 격파하고 서해(西海)에서 그 배를 불살라 적의 기세를 좌절시키고 위력을 시위하니 가는 곳마다 맞서는 자가 없었다. 승천부(昇天府) 전투는 수도에 가까운 곳에서 진행되었으므로 국가와 종묘의 운명에 절박한 위협으로 되었다. 이때 그대가 전체 군대를 지휘하였던바 적은 비록 상륙은 하였으나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곧 섬멸되었으므로 성안은 편안해 적이 온 것을 몰랐다. 양백연(楊伯淵) 홍중원(洪仲元)이 몰래 결당해 나라에 위해를 가하려 하였을 때 그대는 정의에 떨쳐 일어 서서 역적의 무리를 일소해 버렸다. 그 공훈의 크기는 형언할 수 없다. 지금 장수들 중에서 많은 전투를 한 것과 그 공로가 크기로는 오직 그대 한 사람만이 뚜렷이 나타난다. 또 더욱이 충성이 지극하고 정의에 감분해 임금을 존중하며 백성을 보호함에 있어서 재상 중의 참된 재상이다. 토지와 노비를 주어 표창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그대는 천성이 결백해 반드시 굳이 사양할 것이므로 다만 철권(鐵券)을 주고 옥으로 족자(軸)를 만들어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표시한다. 아! 공은 크고 상은 박한 것을 내 계면쩍게 여기노라. 그대가 혹 법을 범하더라도 아홉 번 까지는 묻지 않을 것이며 10번에 이르러도 응당 최종의 형을 감할 것이다. 자손에 대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후대의 임금과 신하는 내 뜻을 체득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7년에 수시중(守侍中)으로 임명하고 그 아버지에게 순충 아량 염검 보세 익찬 공신호(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號),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판 문하사(判門下事), 영 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 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을 추증하고 어머니 지씨(智氏)를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추봉(追封)하였다. 신우가 유람 가려 하였다. 최영이 간하기를 “이제 기근이 자주 들어 백성이 살 수 없는 형편이며 또 방금 농사 시절인데 분별 없이 유람을 즐겨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는 말하기를 “우리 선조 충숙왕 역시 유흥을 즐겼는데 내게 한해 유흥할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선왕 때에는 백성이 편안하고 시절도 풍년이어서 유흥도 할 수 있었으나 오늘에 있어서는 나는 그것이 옳지 않은 줄로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용수산(龍首山)에 놀려 가서 술에 취해 말을 달리다가 떨어졌다. 최영이 눈물을 흘리면서 간하기를 “충혜왕은 색을 좋아 하였으나 그러나 반드시 남이 알지 못하는 밤에 하였고 충숙왕은 놀기를 좋아 하였으나 반드시 시기를 보아 백성의 원망을 사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는 분별 없이 놀다가 말에 떨어져 몸을 상하였으니 제가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사람을 대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신우가 말하기를 “이제부터 고치겠다”라고 하였다. 경성에서 물가가 폭등해 장사꾼들이 털끝만 한 이해를 다투는 형편이었다. 최영이 이것을 증오해 일체 매매하는 물품은 우선 경시서(京城市署)에서 가격을 사정해 세 받은 표식이 있은 후에 비로소 매매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표식이 없는 자는 쇠 갈구리로 등심을 뽑아 죽인다고 공포하고 커다란 쇠 갈구리를 시장에 내어 걸었다. 시민들은 이것을 보고 벌벌 떨었다. 그러나 필경 시행되지 않았다. 이때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옮길 데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최영은 말하기를 “예언서(讖書)에 기재된 바는 지난 일이 모두 맞았으니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속히 옮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옮기기를 곤란해 하므로 드디어 중지되었다. 성문 도감(城門都監)이 5부(五部)의 인부를 동원해 서울의 성을 수축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무너졌다. 최영이 노해 말하기를 “도감은 인원이 많은데 검열과 감독을 이렇게 못하였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윤순(尹順)등을 파면하고 인부들을 돌려 보냈다. 신우가 최영에게 토지를 주었다. 그때 교서에 “지난 연간 왜적이 양광도와 전라도에 깊이 침입하였을 때 그대는 능숙하게 모든 장수를 지휘해 적의 병선을 진포(鎭浦)에서 불사르고 또 운봉(雲峯)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그 공로는 산과 같으며 영구히 잊을 수 없다. 이전에 누차 토지를 주었으나 다 물리치고 그 조세를 받지 않았다. 이제 아버지 분묘 근처인 고양현(高陽縣)의 밭 230결과 장원정(長源亭)의 밭 50결을 준다.”라고 하였다. 8년에 어떤 자가 이인임의 사위 강서(姜筮)의 집에 익명으로 투서를 하였는데 그 투서에 말하기를 “왕의 즉위에 대해서는 혐의가 없지 않으며 왕이 또한 소행이 도리에 벗어 나므로 조민수(曹敏修),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도길부(都吉敷), 문달한(文達漢) 등이 이인임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창군(定昌君) 왕요(瑤)를 왕으로 세울 것을 모책한다”라는 것이었다. 전 판사 김극공(金克恭)이 듣고 다른 사람에게 옮기고 또 그 사람이 임견미에게 일러 주었다. 임견미는 김극공이 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를 잡아 신문하였으며 김극공은 매에 못이겨 거짓 자복하였다. 옥관(獄官)이 김극공의 글씨를 받아 투서의 필적과 대조하니 판이하였다. 이인임은 피뜻 의심하였으며 임견미는 기필코 김극공에게 죄를 씌우려 하였고 옥관은 감히 변명해 주지 못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김극공이 무근거한 일을 조작해 나라를 경동과 미혹에 빠뜨리고 대신을 모해한 죄는 죽여도 부족하며 판사 장자충(張子忠)은 김극공의 말을 듣고 나라에 보고할 대신에 사사로이 정창군에게 말하였으며 전교 부령(典校副令) 정구(鄭矩)는 김극공의 사위로서 역시 알고 고발하지 않았다. 김극공은 응당 그 처자와 함께 사형할 것이며 정구와 장자충은 매를 쳐서 귀양보낼 것이다.”라고 하고 환자(宦者) 김실(金實)을 시켜 신우에게 말하기를 “이제 김극공의 일족을 처단하려 하니 금지하지 말 것이며 정창군 역시 조정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모두 귀양보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해 김극공을 수레로 찢어 죽이며 조리 돌리는 동시에 그 가산을 몰수하고 처자를 노비로 만들었으며 정구와 장자충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경상, 강릉, 전라 3도에서 왜적의 노략으로 인해 백성이 생업을 잃고 아사한 자가 많았다. 최영은 각 도에 명령해 구제소를 설치하고 인정 있고 선량한 자를 선택해 관리하게 하고 국가 양곡으로 죽을 쑤어 구제하였으며 보리가 익은 후에 그만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