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렛 예수탄생예고성당. 성요셉 기념경당.
우리의 다음 여정은 나자렛이었다.
황량한 광야의 쿰란을 뒤로하면서 점차 푸른 나무들을 만나는가 했더니 차는 복잡한 시가지로 들어섰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커피숍, 스낵식품, 관광품가게, 옷가게 같은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상점이 늘어선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길을 가면서 보는 거리는 어딘지 오래된 느낌과 장터같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달동네처럼 높은 언덕위에까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지역이 제법 깊은 산골이 아니었을까 싶다.
성모영보성당의 크고 우아한 건물은 키가 큰 열대 나무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처녀 마리아가 살던 집터위에 “예수탄생예고성당(성모영보성당)”이 있다. 이곳에 처음 성당이 세워진 것은 326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녀헬레나에 의해서였다.
그 후 네 번이나 성당은 파괴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68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지은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성당은 안과 밖으로 현대와 고전이 어우러진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성당의 정면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모습과 네복음사가가 조각되어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대리석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어두운 바닥이 은근한 윤기를 뿜어낸다.
예수님의 생애를 표현한 스테인 글라스 창으로 오후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성당가운데 위치한 돔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성당 지하에 있는 성모님이 영보를 받으신 동굴로 내려갔다. 밝으면서도 분위기있는 조명이 동굴을 비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의 집터였다. 여기서 처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우리는 동굴이 보이는 제대에 둘러서서 미사를 봉헌했다.
“성모영보는 나자렛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육(肉)'이 되셨다, 즉 하느님이신 분이 사멸할 인간이 되심은 성모마리아의 ‘피앗’에서 비롯된 큰 사건입니다.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놀랍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주님’의 뜻이기에 마리아는 순종했습니다. ”
간결하고 힘 있는 신부님의 강론말씀이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준 마리아의 ‘네’를 마음속으로 뇌이며 나 또한 성모님을 본받아 매순간 하느님의 부르심에 ‘네’라고 답할 수 있는 은총을 구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리는 동안 옆에 남여 순례자가 같이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분들이 미사에 참여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진지하고 열심해 보였다.
그분들이 바람이 무었인지 모르지만 소망이 이루어지길 마음으로 기도했다.
미사를 마치고 다시 대성당으로 올라와 성당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정면 제대 양쪽에 있는 작은 경당에서 짧은 경배를 드렸다. 밖에서 보기와 달리 성당은 무척이나 넓고 컸다.
성당밖으로 나왔다.
대성당 정원을 둘러싼 회랑의 벽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성모자 성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각 나라의 특성을 살려 토착화한 성모자 상들은 정말 다양했다.
우리나라의 성모님은 한복을 입고 색동저고리를 입은 어린 예수님을 안고 서있는 모자이크는 우리나라 동양화의 대가이신 월전 장우성 화백(1921-2005)의 작품으로 아래편에 한글로
‘평화의 모후여 하례하나이다’ 라고 쓰여 있다.
성모님의 피앗을 기념하는 성당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화려했지만 어떤 것이 ‘네’라는 응답으로 세상을, 세상을, 나를 구원해 주신 단초를 놓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온전히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성모영보성당 마당을 지나 약 100여 미터쯤 거리를 두고 성요셉기념 성당이 있다.
그곳은 성가정이 이집트에서 돌아와 정착한 곳이면서 성요셉의 목공소 자리이기도 하다.
비잔틴 시대 때 이미 성요셉을 가장 으로 한 성가정을 기념하는 성당이 이 장소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성당은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에서 1914년에 다시 지었다.
성요셉성당으로 들어선 순례자들은 성당 양편에 있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내부를 둘러보게 된다. 곳곳마다 성가정의 일화를 담은 성화와 작은 제대가 놓여있었다.
지하경당의 성당 창문은 모두 성요셉의 일생을 그린 스테인드 그라스로 꾸며져 있었다. 아기 예수님을 돌보는 성요셉, 소년 예수님이 성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옆에서 대패질을 하는 모습, 예수님께서 성요셉의 임종을 지켜보는 모습등, 좁은 실내에 다양한 성화들이 조금은 복잡하게 느껴지기도했다. 계단 마지막 지하에 도착하면 요셉과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셨다는 동굴 터를 만난다.
성요셉기념 성당은 예수탄생예고 성당의 부속건물이라고 생각될 만큼 작고 아담했는데 성당밖에는 두 사람 정도 들어가면 꽉 찰것 같은 성물판매소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버스 정류장에 있는 매점규모와 형태가 닮아 있었다. 이 성물방은 건물벽에 붙어 있는게 다를뿐, 그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린 묵주 사이로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로 성요셉 기념성당은 성모님과 예수님의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셨던 겸손한 성요셉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소년 예수님이 어머니와 함께 물을 길어오기도 하고, 마을 아이들과 뛰어놀았을 장소. 양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다듬으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은총의 땅, 지금은 많은 집들이 늘어선 시가지에 속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평범하고 한적한 산골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곳 지명이 붙은 ‘나자렛 예수‘라는 이름은 후일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구원한 이름이 되었다.
‘요셉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 2,23)‘
성모님과 성요셉의 행복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나자렛 성가정이 누렸던 가난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신 성가정의 소박한 삶이야말로 우리 가정의 근본적인 삶의 태도일 것이다. 나자렛을 떠나면서 세상을 암울하게 만드는 자본과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참된 행복이 뭔지 잃어버린 많은 가정을 성요셉의 가호에 맡겼다.
'성바오로딸 수도회'에서 펌글입니다.
첫댓글 추기경님 돌아가셔서 더 심란한지 잠이 안와 한번 더 둘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