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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과일향♡
오덕호목사/고난 속에 축복을 찾으십시오 (고후 12:7-10)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 가정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서로 축복해주실까요? “성도님의 약한 곳에 큰 축복이 있습니다.”
이솝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슴 한 마리가 물을 마시러 호수로 내려와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몸의 지체 중에 평소에는 잘 보지 못하던 것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뿔이었습니다. 물에 비친 자기 뿔이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뿔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야, 정말 멋있다.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뿔이 있을까!” 그러다가 물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자기 다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삐쩍 마른 나무 막대기 같은 게 참 볼품없었습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내 다리는 왜 이렇게 못생겼어. 정말 보기 싫네.”
이렇게 혼자 자기 모습에 도취되어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데 갑자기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슴은 급히 뛰기 시작했습니다. 뛰면서 생각해보니까 그 볼품없는 다리가 자기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리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 멋있는 뿔은 무겁기만 하지 아무 도움도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리 덕분에 겨우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뿔이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사자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사람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것이 오히려 파멸로 이끌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재물을 자랑하던 사람이 재물 문제로 감옥에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권력을 자랑하던 사람이 권력 때문에 죄를 짓고 파멸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살이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영적인 삶은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교만해지면 반드시 망하고 영적으로 겸손해야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말씀해주셨지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누가복음 18:11-12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게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누가복음 18:13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게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 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리지요. 18:14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망하고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자랑거리는 우리에게 해가 되고 영적인 부끄러움이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꼭 사슴의 뿔과 다리 같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자랑거리를 모두 해로 여겼습니다. 바울의 자랑거리가 뭡니까? 율법에 흠이 없는 모습입니다. 빌립보서 3:5-6입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전부 영적인 자랑거리지요?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모두 해로 여긴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게 예수님을 믿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7-8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왜 영적인 자랑거리가 예수님을 믿는 데 방해가 됩니까? 영적인 자랑거리가 있으면 그것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성도가 죄를 짓지 않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영적으로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것 때문에 구원을 얻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게 영적인 자랑거리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예수님의 은혜를 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롭게 사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좀 덜 입어도 구원 얻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자랑거리가 믿음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인 자랑거리를 해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은 뭐겠습니까? 영적인 자랑거리가 해로운 것이라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은 영적인 부끄러움거리겠지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잘한 것은 신앙생활에 해가 되고 신앙생활을 잘못한 것이 신앙생활에 유익이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신앙생활을 잘하지 말라고 설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에도 자꾸 결석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자꾸 죄를 지으라고 설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적으로 자랑스러우면 해가 되고 영적으로 부끄러워야 유익이 되니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맞는 것 같지만 틀립니다. 영적인 자랑거리가 많으면 해롭고 부끄러움거리가 많으면 유익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못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영적인 부끄러움거리가 많아야 하는데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진짜 신앙생활을 잘하면 영적인 부끄러움거리가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까, 병든 사람입니까? 병든 사람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죄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일부러 죄를 지어야 합니까? 아니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일부러 죄를 짓지 않아도 죄를 너무 많이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뭡니까? 죄를 짓는 겁니까, 지은 죄를 깨닫는 겁니까? 죄를 깨닫는 거지요. 누가 죄를 잘 깨닫습니까?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까, 잘못하는 사람입니까? 잘하는 사람이지요.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죄를 더 많이 깨닫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영적인 부끄러움거리도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자랑거리가 적어지고 부끄러움거리가 많아지려면 신앙생활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자기가 죄인의 괴수라고 하지요. 바울이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이렇게 느끼는 겁니까?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서 이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기의 죄를 더 많이 깨닫고 영적인 부끄러움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히 예수님만 의지하며 귀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영적 여건이 좋아지면 저절로 영적으로 교만해집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영적으로 교만해집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영적으로 교만해집니다. 영적 여건이 좋은데 영적인 겸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감히 이런 사람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울조차도 조건이 좋으면 겸손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바울도 계시를 많이 받으니까 교만해지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의 교만을 막아주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도 이런데 누가 영적으로 좋은 여건에서 영적 겸손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어려움을 만나는 게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죄를 짓고 영적인 어려움에 빠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실수하고 영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에게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영적 겸손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잘 응답이 되는 게 축복입니까, 잘 안 되는 게 축복입니까? 둘 다 축복이지요. 기도가 응답되면 믿음이 체험적 신앙으로 성장되니까 영적으로 큰 축복입니다. 응답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영적인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나는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까?” 그래서 영적인 모든 교만이 무너지고 지극히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이것이 놀라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가 잘 응답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자가 되겠지요. 건강해지겠지요. 출세하겠지요. 우리가 다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까? 기도가 잘 응답되면 세상에서도 잘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으면 가난하고 몸도 약하고 세상에서 잘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면 기도가 잘 응답된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잘되면 영적으로도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잘 안 되면 영적으로도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야 할 때 건강과 물질의 어려움을 주실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는 게 축복입니까, 어려움을 겪는 게 축복입니까? 둘 다 축복입니다. 잘되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면 됩니다. 잘 안 되면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이 성장하면 됩니다. 그래서 둘 다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십니다. 건강이나 물질의 축복을 주시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축복입니다. 물질이나 건강의 어려움을 주시면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어서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산상설교에 나오는 팔복을 좋아하십니까? 팔복 중에 첫 번째 복이 뭡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것은 영적으로 겸손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영적으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축복선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팔계명이라고 하지 않고 팔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축복선포입니까?
여러분 산상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4장에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나옵니다. 4:24-25입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병으로 오래 고생하면 가난해집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은 병과 가난과 온갖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들 생각에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가진 게 없어서 좋은 일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지극히 겸손한 것입니다. 진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지요. 이런 사람에게 심령이 가난해지라고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까? 이미 심령이 가난한데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너희처럼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천국을 받는다고 축복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제발 이 어려움을 좀 없애달라고 애타게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영적으로 겸손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겸손하면 어떤 축복이 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축복이 옵니다. 그러면 믿음을 지키고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입습니다. 그래서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은 내가 원하는 능력과 다른 것일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정말 놀라운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성경을 그렇게 많이 썼겠습니까?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 앞부분을 보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도 바울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말을 들은 사람도 바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교만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무서운 병을 주셨습니다.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치욕스러웠는지 바울은 이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9절 말씀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이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바울의 병을 고쳤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병을 고치는 능력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 능력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그 병을 앓으며 살았습니다. 몸도 괴롭고 영적으로도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울은 오히려 더욱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데는 말할 수 없이 큰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여 병이 낫기도 하고 자녀가 잘 되기도 하고 사업에 축복을 받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더욱 굳게 믿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 됩니다. 정말 기쁘고 고마운 신앙생활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의 소원과 다를 때도 있습니다. 나는 정말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물질의 축복을 달라고 하는데도 하나님이 아직 안 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병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제발 좀 고쳐달라고 기도하는데도 병이 낫지 않아 여전히 고통을 겪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신 겁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응답해주십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능력을 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능력은 나에게 건강과 재물을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갑자기 어려운 병에 걸린 분이 계십니다. 병의 원인도 잘 모르고 입원했는데 치료 중에 아주 희귀한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수술을 받았습니다. 항암치료도 오랫동안 받았습니다. 남들보다 세 배 이상 오래 받은 것 같습니다. 이분은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다. 가족도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분을 심방하러 가면 갈 때마다 큰 은혜를 받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 동안 이 성도님과 우리가 애타게 드린 기도가 병을 당장 고치는 능력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에게 영적 은혜를 끼치는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영적인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병도 낫게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것도 큰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을 누릴 때 하나님을 잘 섬기십시오. 세상에서 잘되고 영적으로 잘 될 때 더욱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리고 받은 축복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착한 일을 많이 하십시오. 하나님이 굉장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혹시 큰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그것도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어도 축복입니다. 죄를 짓고 부끄러워서 하나님은 고사하고 사람을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어도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이 성숙하고 새로운 축복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때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의 고통과 부끄러운 모습만 바라보면 이 귀한 축복이 오히려 파멸의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둘 다 영적으로 말할 수 없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유다와 바울은 모두 예수님을 해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둘 다 말할 수 없이 영적으로 부끄럽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말은 전혀 다릅니다. 유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습니다. 자기의 처지만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책감과 부끄러움 속에서도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이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늘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해서 오늘 본문 말씀처럼 육체의 병으로 더욱 약해져서 오히려 영적으로는 더 큰 능력을 입고 더욱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고통이나 영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어려움과 영적인 부끄러움이 모두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고 의지하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심지어 영적인 부끄러운 모습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모든 어려움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풍성히 이루어드리고 세상에 덕을 끼치며 우리 자신도 보람과 기쁨이 넘치는 복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세상에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며 좋은 것만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기도응답이 늦어지고 영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해도 축복입니다. 이럴 때 더욱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입어 주님의 뜻을 크게 이루어 드리고 여러분 자신도 보람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