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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의 문둥병자를 치료하신 예수님 눅17:11-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역 마을에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께 긍휼을 구하자 예수님께서 저들의 문둥병을 치료해 주셨던 사건은 메시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를 영적 문둥병인 죄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예표한다. 그런데 그들 중 오직 한 명만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와 주님께 감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열 명 모두 구원을 받은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돌아온 이 사마리아인 문둥병자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던 이 의미는 유대인들의 거절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받을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줄 알았던 유대인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뜻밖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던 이방인이 들어갔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세워놓은 구원의 경계를 허무셨으며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진리는 은혜 위에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에는 복받은 땅과 저주받은 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6:7-8) 7 자기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땅을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채소를 내는 땅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니와 8 가시와 찔레(엉겅퀴)를 내는 것은 버려지고 저주함에 가까이 있어 마지막에는 그것이 불살라지리라. 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땅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온 땅을 적시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만 이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서 이 은혜가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땅이 비를 흡수하여 농부들이 원하는 좋은 채소를 내면 그 땅이 복을 받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같은 은혜를 받았지만 결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 요한복음 3:16절도 같은 진리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믿지 않으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주신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만 오직 저를 믿는 자만 영생을 얻게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지만 이 은혜를 어떻게 받느냐에 영생 혹은 멸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분수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물을 나누는 산마루라는 말입니다. 분수령을 사이에 두고 산마루의 왼편으로 떨어진 빗물은 서쪽으로 흘러 서해 바다로, 오른편으로 떨어진 빗물은 동쪽으로 흘러 동해바다로 들어가듯이 떨어진 곳은 비슷했지만 그 도착지는 동해 아니면 서해라는 전혀 다른 곳이 됩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모두 예수님께로부터 깨끗함을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만 그 은혜가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어졌고 그에게만 결국 구원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 말씀에는 그들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함을 입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은혜의 근본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비록 그들이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었더라도, 그들의 삶이 그냥 문둥병자로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감사를 모르고 살았던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았던 것에 대한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알 것 같습니다. 옛날 어떤 임금에게 그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었습니다. 이 신하는 원래 길에서 구걸을 하던 걸인이었던 그를 임금이 불러 자신의 신하로 삼았던 것입니다. 신하는 임금에게 유익한 일들을 많이 해서 신하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는 늘 겸손히 임금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임금은 이런 신하를 몹시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다른 신하들 중에는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충성된 신하가 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궁궐 내의 한적한 곳에 있는 방에 혼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가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마침내 한 신하가 이를 임금에게 고했고 저가 무슨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왕은 신하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문제가 된 이상 확인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 일에 대해 그에게 물으니 신하는 왕을 모시고 그 방 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 안에는 그가 옛날 길에서 구걸을 할 때 입었던 낡고 헤어진 옷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이 방에 들어와 이 넝마옷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구해주신 왕의 은혜를 기억했던 것입니다. 이 신하는 왕을 위해 유익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이제 왕에게 갚을 만큼 갚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속으로 “이제 왕도 내가 없으면 어려울껄?” 하면서 교만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매일 “길에서 구걸하던 걸인”이었던 옛날의 이런 자신을 구해준 왕의 은혜를 되새겼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나”는 없었고, 대신에 늘 왕이 있었으며 이 왕에 대한 감사함만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왕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조차 전적으로 왕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감사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져 갔습니다. 이렇게 처음 은혜를 기억하고 왕께 감사함으로써 그의 인생은 “은혜” 위에 견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으로부터 더 많은 은혜를 입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들을 치료해 주시면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던 말씀은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은 사람들이 해야 할 “최소한의 요구 사항”이며“지켜야 할 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경계를 정하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아마도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깨끗해진 몸을 보임으로써 예수님께서 명하신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이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만 돌아와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의아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만 하셨습니다.“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다른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반문했을 것입니다. “아니 주님, 가서 제사장들에게 저희 몸을 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렇습니다. 이들은 시키는 대로 했고 이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키는 신앙생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마음으로 감사하는 대신, 법을 지켰습니다. 주일 예배도 빠지지 않고, 십일조도 꼬박꼬박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울타리밖에 세워두고 삯을 치르듯 몇 푼의 헌금과 기도문 혹은 주문서를 건넵니다. 이렇게 정해진 최소한의 법들을 지키고, “예수님, 이만하면 됐죠?” 하고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이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끝없는 욕심을 따라 삽니다. 이 끝없는 욕심은 마치 바닥이 없는 깊은 구덩이와 같아서 하나님조차도 이 구덩이를 채울 수 없습니다. 이 욕심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부족함과 불평만 가득하다보니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없으며 유일한 기도제목은 “더 주세요, 더 주세요” 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마리아인 문둥병자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가리켜 “이 이방인”이라고 하십니다. 그는 더 내려갈 곳이 없을 만큼 낮은 자였습니다. 그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다른 아홉명의 문둥병자들과 함께 길을 나셨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자신의 몸이 나은 것을 보게 된 그가 보인 첫번째 반응은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린후 돌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영혼 속이 하나님으로 가득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그의 더럽고 흉한 몸 때문에 늘 얼굴을 가리고 사람을 피해서 살았습니다. 물론 그를 보는 사람들도 그를 외면하고 멀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자한 얼굴을 비추셨습니다. 저주 받은 인생이 은혜 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천국을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인자하게 웃는 얼굴로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이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그에게 깨끗해진 몸을 제사장에게 보임으로써 “문둥병자의 꼬리표”를 떼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온전히 사로잡혔습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예수님께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으로 인해 지금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를, 그리고 이 기쁨과 행복을 주신 예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십니다. 그는 몸이 깨끗해진 것에 더하여 그 영혼이 구원받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임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은혜(grace)란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32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먼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다른 “덜 귀한 것들”을 아끼시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받음으로 이미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를 은혜의 바다로 덮을 만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속에 완전히 잠기게 합니다. 이제는 사는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부족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실제로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고, 가장 귀한 은혜의 선물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아들을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셨다”고 하는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왕이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루 은혜를 베푼다면 그리 비싸지 않은, 기껏해야 몇 만원 짜리 선물 세트를 나눠줄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특별한 사람들에게는 좀 더 비싼 것, 그리고 아주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것으로 베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곧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가장 귀한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아들의 가치에 비하면 다른 선물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정도입니다. 그냥 이 한 가지 은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심지어 이 은혜만 받을 수 있다면 일평생 그것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귀한 은혜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모든 사람들이 받는 은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열명의 문둥이중에 영혼구원을 받은 것을 잘 모르듯이 말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도 처음에는 몸이 깨끗해진 것에 대해 몹시 기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뭐 나만 깨끗함을 받은 것도 아닌데!” 하면서 받은 은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아들을 주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신 은혜의 가치가 조금도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물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지만, 이 선물을 받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특별한 선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연결시켜주는 사다리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이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우리에게 온갖 놀라운 하늘의 선물들을 전달하는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은혜의 기초 위에 든든한 믿음으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매일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가 벗어놓은 더러운 죄의 옷들이 걸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옷들을 벗기시고, 주님께서 친히 그 살과 피로 만드신 하얀 의의 옷으로 우리를 입히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이 처음 은혜로 돌아가 주님께 감사함으로 은혜의 터 위에 견고하게 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잠4;23)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성경을 보면 스스로 주의 종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종이라고 친히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람은 모세 갈렙 그리고 다윗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 자처한다고 해서 모두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제자는 누가복음17장 1-10절에 나옵니다.첫째 형제들 가운데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둘째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고하고 회개하면 항상 용서해야 합니다.셋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넷째 충성을 다한 후 무익한 종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기간 동안 제자의 길을 온 몸으로 배우고 잘 익혀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초기 교회를 책임지는 사도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오늘 말씀 누가복음 17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한가운데로 지나시다 여리고 근처인 한 마을에서 등장인물은 열두 제자와 나병환자 열명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열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유대에서는 나병환자를 부정한 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마을에 들어와 살지 못하므로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며 병낫기를 간구했던 것인데 그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모두 고침을 받은 후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를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고 있었습니다. 병이 나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 안에 임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자세히 예수님의 사역을 감시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눅17:20-21)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왔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듣고 그 실체를 물었으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할 이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며 마지막 날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마지막 날의 시기는 아무도 모르며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24)그러나 그 전에 주의 고난과 죽으심이 있을 것입니다(25).둘째 마지막 날에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고 잃는 자는 살 것입니다(33).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32). 그리고 같은 곳에 있어도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고 두 남자가 들에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 하시니라(눅17:35-36). 이는 세상에 집착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 않는 자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경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을 두가지 비유로 자세히 가르쳐 주십니다.첫째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입니다
(눅18:2-5) 2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불의한 재판관도 이렇게 귀찮아서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탄원을 들으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둘째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눅18:10-13)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귓전에 자신의 의를 들어내기 위한 기도이며 또한 기도를 빙자한 자기 자랑이었던 반면 세리는 가슴을 치며 죄인이다고 기도합니다.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롭다 여김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눅18:14).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를 가르치고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다른 사람들에게 지어 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 없이 어떤 결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인과법칙만 사로 잡혀 있었기에 하나님의 긍휼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 이후 인과법칙은 인간 삶의 중요한 바탕이지만 결코 전부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어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긍휼의 본체이십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죄가 가지고 있는 풍성한 열매를 주목하게 됩니다. 여기 열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다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기전까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오셔야 한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버리움을 당한 이들에게 베푸신 긍휼과 멀리서 기도하는 이들을 알아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여기 열명의 문둥이들에게 한 가지 요구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셨다는 조짐이 드러나기 전에 먼저 주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들이 피부가 깨끗한 살결로 바뀌어지기 전에 그들은 먼저 제사장에게로 가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들의 몸을 보이고 제사장이 낫다고 선언하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아직은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해졌다는 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우리들에게 당신을 믿으며 우리들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 문둥병환자들은 자기들의 병을 가지고 곧바로 제사장에게로 갔었을 때는 마치 자신들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갔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죄인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선 우선 예수님을 믿어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현재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내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비록 아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선한 일을 하셨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을 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예수님께 맡기기 전에는 우리 속에서 어떤 표징이나 증거들을 찾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증거가 나타나면 믿겠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주님은 그대더러 그냥 믿으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명령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문둥병자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검증받으라고 했을 때 자기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검증받으라고 명했으므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명령을 받고 나아갈 때에 온전히 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할 근거는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친히 증거하시기를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다는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은 바로 내죄를 씻기고자 대속의 죽으심을 당했다는 것을 믿어야만 내 죄가 용서받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의로우신 자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여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받지 않을 것이므로 믿는자들에겐 영생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은 자들에게 이러한 부요를 은혜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고후6:1-2) 1 그런즉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기 열명의 문둥병자들은 제사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아직은 치료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들은 치료받은 것을 의식하기 전에 자신들의 행보를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선한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들은 오래지 않아서 그리스도의 복된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지금은 약하고 궁핍하고 내가 어떤 은혜의 공급을 받게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공중나는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나도 먹이실 것이고 또 나를 벌거벗은 상태로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입혀주실 것이고 내 생명을 주님께 맡겨진다면 죽음의 포구들 사이에서도 나를 지키어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문둥병자들이 한 것처럼 그대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경말씀을 믿고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는 신앙과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착하는 믿음은 정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은혜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었듯이 영광을 위하여 주님을 믿는다면 머지않아 그의 가장 부요한 약속들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귀하게 들어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마음도 혼도 영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특히 겪으면서 듣는 자는 더욱 깊이 느끼며 듣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해야 영적으로 들리고 실감나게 들립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잘해 줘도 그 심정과 마음을 몰라줍니다. ‘나도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인데 하나님은 인생들을 향해서 오죽하시랴.’ 대부분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그때만 잠깐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지만 그때가 지나면 잊습니다. 은혜를 너무 모르고 자기에게 잘해 주기만을 원하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삽니다. 보낸 자와 믿는 자들이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한다.’ 하고 알려 주면 사람들이 받아들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소금이 되어라.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그들이 하나님과 나 예수를 믿고 섬기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하나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때가 되면 공의로운 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한 날에 꼭 하십니다. 사람이 은혜를 크게 입어도 그때만 잠깐 반응을 보이고 곧 그 마음이 변하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고선 또 받기만을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는데, 단 한 명만 예수님께 감사하자 왔습니다. 극단적인 대조는 사마리아인을 부각시켜 유대인들의 편견을 깨뜨리려는 것이고, 하나님께 가장 큰 은혜를 입어 마땅히 감사해야 할 유대인이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하고 배은망덕하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쉐마교육을 철저히 받았고 각종 절기를 지키면서 감사가 습관이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전문가들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인데 이들은 죽을병이 나았는데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도 안 나오고 고쳐주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했다는 말도 안 나온다. 사마리아인만 유일하게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나았는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참된 구원자이심을 몰라본 것이다. 아마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완치판정을 받고 정결 예물을 드림으로써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들은 가다가 치유받았지만 아홉 명은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확인받고 공동체로 복귀하기 위해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감사, 나아가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인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없다면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아홉 명의 유대인은 예수님이 참된 제사장이요 참된 성전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돌아오지 못했고 결국 그들은 참된 구원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다. 유대교에는 구원이 없다. 성전과 제사장에게 달려간 9명의 유대인들은 참된 구원에 이르지 못했으나 참 성전이시며 참 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경배하며 감사했던 사마리아인만 구원을 확증받았다. 예수님이 참 성전이요 참 제사장임을 알아보는 사마리아인의 영적 통찰력과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감사는 온전한 구원으로 연결된다. 이 사마리아인의 반응은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본이 된다. 사마리아인은 나병에 걸리기 전부터 이방인으로서 온갖 멸시 천대를 받던 사람인데 문둥병까지 걸렸으니 고통이 가중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 10명의 나병환자 그룹 내에서도 편견으로 인한 차별을 경험했다가 유대인들과 동일한 은혜를 입고 병이 나았으니 예수님의 차별 없는 은혜에 더 큰 감사와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불치의 문둥병과 이방인이라는 이중적인 핸디캡으로 인해 그에게 구원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은혜를 알고 우선순위를 알았던 사람이다. 그는 먼저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경배하며 감사를 표현했다. 그는 이제 인간 취급을 받게 된 것보다도, 사회 복귀 증명을 받는 것보다도,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도 먼저 그 모든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게 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와 주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예배를 드린 이 이방인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영혼의 구원까지 받았다. 그는 감사로 기도 응답만을 기뻐하는 수준을 넘어 자기 삶에 개입해 도우시는 주님 자신을 기뻐하며,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가는 더 온전한 영적 지식에까지 나아갔다. 사람은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인식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불쌍한 존재인지를 인식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은혜에 더욱 깊이 감사하게 된다. 감사가 구원과 연결된다면 감사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죄에 대한 영적 감각이 민감하지 못하고 감사와 은혜의 날이 무뎌져 가면 영적인 문둥병자다. 나쁜 짓 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감사하지 않는 것도 무서운 죄다.
하나님은 “은혜를 잊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관계성이 끊어집니다. 하나님이 땅의 사람들을 통해 은혜를 베풀었는데, 은혜를 받고도 잊으면 은혜가 끊어져 버립니다. <은혜를 잊는 이유>는 받는 고통이 없어서 다른 생각을 편하게 하면서 거기 빠져 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를 보면, 이들이 은혜를 일부러 잊으려 함이라 하였다.(벧후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지옥으로 가서 고통받을 자가 사망의 권세에서 나오게 되고 고통의 세계에서 나오게 되고 죄악의 세계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사랑하며 그 은혜를 갚으며 살 때 이 땅에서 일생을 살지만 영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자로나 그 믿는 자들을 통해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은혜 생활은 은혜를 베풀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무익한 자는 쫓아낸다.’ 하셨습니다(마25:30).은혜도 복음 전하듯이 하면 은혜의 역사가 세상에 전해져서 그 공적으로 계속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하나의 재산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가 남아서 값없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목적을 두고 주신 것입니다. 고로 달란트 남기듯 남겨야 합니다.은혜를 주는 것은 계절 따라 비 오듯 눈이 오듯 때 되면 당연히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사 이로 영생을 얻어 살고 영생을 얻은 자들은 더 이상 없이 그 희망대로 하나님과 같이 살자고 큰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고 문제가 해결됐으면 그 은혜 생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으로 생명을 구하며 약한 자와 시험에 고통받는 자들을 잘 살펴주며 사는 것입니다. 모두 은혜받기를 원합니까?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 생활을 하면 됩니다. 농사를 지을 때, 때 되면 열매 연 것을 거둠같이, 하면 됩니다. 은혜의 농사를 짓는 것은 힘들지만 은혜가 풍부하고 충만해집니다. 은혜도 배워야, 알고 받기도 하여 귀히 여기고 또 은혜를 나눠 주어 가물지 않고 늘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때에 합당한 자에게 꼭 주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십니다.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잘 모릅니다. 자기 생활 중에 우연히 얻은 것으로 알거나 혹은 사람들이 베풀어 준 것으로만 압니다. 사람도 은혜를 주지만 하나님이 본인에게 직접도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를 통해 은혜를 갚도록 사람을 통해서도 주십니다. 어떤 자는 하나님의 ‘은혜 심부름’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으로도 계시하시고, 영들로도 사역자를 삼으십니다. 이같이 구원자와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합당하게 은혜를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아벨 자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먼저 선조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은 후손에게도 계속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손들인 이삭, 야곱, 요셉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어디를 가든지 잘되고 형통하였습니다.(창17:6-7)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신약시대 때도 2000년 동안 환난 핍박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받고 형통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시대 사명자를 따르는 모든 자들도 사명자를 따라 예수님을 믿고 따라오니 모두 그 후손까지 형통케 해 주십니다. 그러하니 여러분도 은혜받고 은혜 생활을 계속하면, 잘되고 형통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그것이 은혜인지를 모르고 교만하여서 자기가 잘하여서 받는다고 생각하고 살면 은혜가 끊어집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절대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잊지 않도록 늘 깨어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