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샘 (푸른제천 11월호)
세종대왕은 백성이 곧 나라였다 (2)
최길하
지난 10월 호는 연재하던 제천의 천문사상 윷판석 암각화를 쉬고, “한글날”을 맞아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에 나타난 문자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어떤 분이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훈민정음 원본에 ‘상형이 자방고전(象形而 字倣古篆)’이라는 부분을 질문했다. "글자의 모양을 옛 전(篆)자를 본떴다.”로 해석 되고 '고전(古篆)'은 한자의 전서를 뜻하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자방고전(字倣古篆)’이, 이 뜻이 아니면 옛 “가림토문자가 훈민정음 자음과 모음 비슷한데 이를 모방했다는 뜻 아니냐?"고 물으셨다.
또 하나 의문은 훈민정음이 “언해” 즉 한자의 발음기호라는 설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셨다.
학자들이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여 이런 오류의 이설이 학계 강단 지식인들 사이에 많이 오르내린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이는 훈민정음을 명쾌하게 해석하여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11월 호는 이 의문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상형이 자방고전(象形而 字倣古篆)"을 직역하면 옛 한자의 ‘갑골문=그림문자’를 모방했다로 해석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자방고전이 나오는 쪽) 훈민정음을 몇 장만 넘기면 제자해(제자원리,제자기준,자음체계,모음체계,음상)등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모음의 하늘 땅 사람(ㆍㅡㅣ). 자음(ㄱ,ㄴ.ㄷ,ㄹ,ㅁ,ㅂ,ㅅ…)의 모양을 고전자(古篆字)처럼 모방했다는 뜻이다. 모음의 하늘 땅 사람(ㆍㅡㅣ)은 그 이미지 상형(象形)을. 자음(ㄱ,ㄴ.ㄷ,ㄹ,ㅁ,ㅂ,ㅅ…)은 소리를 낼 때 구강의 모양 혀 입술 어금니 등에 닿거나 음이 부딪칠 때 그 변화를 그렸다는 뜻이다. 이렇게 친절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을 “상형이 자방고전(象形而 字倣古篆)”만 가지고 단순 해석했기 때문에 심각한 오해를 범하는 것이다.
또한 자음과 모음 자소(字素)의 모양 일부가 ‘가림토 문자(고조선시대 문자로 추정)’와 비슷하거나 같은 모양이 있더라도 그 구성 원리가 다르고, 쓰임이 다르기에 가림토문자가 훈민정음에서 말하는 자방고전이 될 수 없다.
또 하나의 질문, 한자의 발음을 위한 언해(諺解)라고 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창제후 곧바로 한자발음사전인 "동국정운"을 만든다. 이 사전은 한자발음사전이다. 훈민정음을 잘 살펴보면 한자의 음을 달아놓은 것 외에도 우리말을 훈민정음 문자로 문장을 꾸미고 있다. 이것으로 훈민정음이 한자의 발음기호용이라고만 하는 것은 잘못 된 해석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문장을 보면 더욱 명확해 지지 않는가?
집현전 대학자 김수온의 형 "신미대사"가 "범어"에 능통하여 그 분이 훈민정음을 창제 했다고 하는 이설도 있다. 이것도 잘못이다. 우리 말이 범어에 뿌리를 둔 것이 많다. 그렇다고 제자원리가 범어라는 것은 너무 멀다. 세종대왕은 신미대사로 하여 불경을 언해 즉 훈민정음으로 풀어쓰게 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훈민정음은 대석학 신숙주 정인지의 도움을 받아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가 확실하다.
훈민정음은 하늘, 땅, 사람 삼태극의 원리로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을 분별하여 조화시키고 목화토금수 오행(五行)의 관계로 정밀하게 구성했다. 획이 추가되면서 함축된 기(氣)=음압(音壓)의 강도가 높아지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로 창제되었다.
소리가 여러 음으로 변하며 구성될 때 말이 이루어진다. 이 음가는 두 부분의 인체 구조에 있다. 소리가 구별되지 않는 음통(音筒)인 목구멍(ㅇ) 소리와, 소리의 음가가 구별되어 조음(調音)을 이루는 혀(ㄴ)다. 훈민정음은 이를 음양인 물(ㅇ)과 불(ㄴ)의 조화로 해석하고 있다. 천지자연의 이치나 관악기의 음정 음색 기능과도 일치한다. 훈민정음의 철학성 과학성은 이렇게 정교하다.
언어는 곧 사회의 꽃(華)이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마음을 조율하는 호흡과 정화의 힘을 가졌다. 성음(聲音) 성조(聲調)는 사회과학이다.
우리말과 우리글의 음조는 마음을 추슬러주고 순화시켜준다.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을 알고 잘 쓰면 저절로 정적인 사회가 된다. 반대로 언어가 거칠면 사회도 거칠어 진다. 싸움을 할 때 언성이 높아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15세기(훈민정음 창제 시기) 우리언어는 둥글고 부드럽다. 불어가 그렇다. 그래서 예술이 발달했다. 지금 우리 언어는 15세기에 비해 많이 격음화 되었다. 그러니 사회도 정적인 사회에서 메마른 사회가 되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백성이 곧 나라였다. 과학, 영농(농사직설, 농가월령가 등)은 물론, 훈민정음 창제로 심청이 아버지 눈 뜨듯 문맹 백성들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하루만 익히면 터득할 수 있는 문자이니 말이다.
세종대왕은 음악(정간보 향악 종묘악 영산회상 등)과 시가(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등)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통합하고자 했다. 모두 자립의지의 표본이었다.
우리가 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교육의 힘이다. 그 교육은 한글, 문자의 힘이다.
<훈민정음 제자해(모음 자음을 만든 원리) 부분>
첫댓글 많은 생각을 하게되네요 훈민정음 오묘한 원리를 헤아려 보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