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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하나님의 언약궤 / 사무엘하 15:24-29
사람의 됨됨이는 어려울 때 알 수 있습니다.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려울 때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려워도 잘 참고, 뜻을 세우고 나가는 사람은 진짜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노예로 팔렸지만 망가지지 않습니다. 뜻을 버리지 않고 잘 견디었습니다. 친구의 우정은 어려울 때 알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사귄 친구는 다 떠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해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돈이 떨어지자 돈으로 사귄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다 떠났습니다. 밥 사구고, 술 사주고 얻은 친구는 친구도 아닙니다. 진짜 친구는 어려울 때 목숨이라도 대신합니다. 의리가 있는지도 어려울 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손해 보아도, 신의를 지키면 의리가 있습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면 의리가 없습니다. 자기 이익과 환경에 따라서 처신하면, 열 번이라도 마음을 배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지도 어려울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약속은 잘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었을 때 약속을 지키는가가 문제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울 때 신앙생활 어떻게 하는 가를 보면 됩니다. 힘들고 바쁠 때 주일성수 계속합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생활이 어렵고 직장을 잃고, 사업이 부진할 때 십일조로 섬기고, 물질로 섬기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어려울 때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욥처럼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찬송할 수 있다면, 신앙의 사람입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가져갈 때가 문제입니다. 세금 낼 때 왜 그렇게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까? 주름살이 늘고 머리카락이 희어질 때, 왜 슬픈 생각이 듭니까? 가져갈 때 잘 내어 놓아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가져가실 때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서, 궁궐을 비워두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에게 반역을 당해서, 피난길로 오르는 왕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거역해도 견디기 어렵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해를 끼치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수치와 슬픔으로 울며 가는, 다윗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전부 다 맡겼습니다.
다윗 왕은 나이 30세에 남쪽 유다에서 왕이 됐습니다. 7년 후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통일 왕국의 왕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다윗 왕의 치적은 영광스럽고 화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하는 일을 형통하게 하셨고, 주변 국가들에게 눌려 살던 이스라엘이었지만, 다윗은 치르는 전쟁마다 승리를 거두어, 군사적으로도 안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어디에 가서든 전쟁을 치를 때,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으므로, 작은 약소국가인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을 지배하는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다윗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태평 천하를 이룬 다윗은, 그만 죄의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으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고의적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침상의 요가 흠뻑 젖도록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지만, 사탄이 다윗을 괴롭힐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죄를 너무나 가볍게 여깁니다.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회개만 하면 된다는 잘못된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이 살던 율법시대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은혜시대는 상황이 다르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어준 은혜시대라고 해서, 죄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음란죄와 살인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회개하였지만, 사탄이 그를 괴롭힐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줌으로, 그가 저지른 살인죄 때문에, 그의 인생에서 칼이 떠나가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고, 다윗의 여인들 중에 백주에 강간을 당하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나단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죄를 범한 까닭에 죄의 대가로 어떤 고통을 겪게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비단 다윗의 일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일평생 몇 차례 죄를 범한 일을 빼고는, 그는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상황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는 것이, 자연적 반응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만이 보일 뿐이고, 모든 관심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에 집중되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어떤 상황이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배후에 계신 상황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고통과 실패든, 아니면 성공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을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찾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과 길을 모색할 것이며, 그것은 결국 인간의 정성과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행위로 나아가게 될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과연, 그러한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를 의지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자신이 의도한 대로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맡긴 채, 하나님이 하신 대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신앙이며, 다윗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4절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이 성에서 도망을 칠 때, 제사장인 사독과 레위인들이 예루살렘 성에서 언약궤를 메어 나와, 다윗과 함께 하려고 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들은 다윗을 지지했었던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사독과 레위인은 언약궤를 보호하기 위해 메어 나왔다기보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상징물인 언약궤를 다윗에게 둠으로써, 모든 상황을 다윗에게 유리하게 하고,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만약 다윗이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힘을 썼다면, 언약궤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분명 향후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25절에서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는 말을 함으로써, 언약궤가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을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언약궤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다윗의 이러한 모습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이 언약궤를 성으로 돌려보내는, 그 마음을 생각해 봄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것은, 일단 언약궤를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을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삼거나,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일쑤입니다. 자신을 버리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세상에서 굳게 세우기 위한 기도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독과 레위인이 언약궤를 메어 온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며, 언약궤와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삼고자 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것은, 언약궤가 자신과 함께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행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5절 중간에 보면 다윗은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이 말은 언약궤가 자신과 함께 한다고 해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이 자신을 언약궤가 있는 성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언약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를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이것이야 말로, 진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성도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다시 성으로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고는, 하나님께 달린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성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니고,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26절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다윗의 이 말은 참으로 대단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기해 버린 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하신다면, 그 말씀대로 자신에게 행하시라고 말씀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만약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든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기를 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라고 말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면, 그대로 행하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만 높이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는 무엇일까요? 우린 분명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저 깊은 내막까지, 그 선하신 속 뜻까지 알 수 없는, 생각이 얕은 존재입니다.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둘러싸인 우리들의 소견으로, 어찌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믿을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시고, 사랑이시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내가 어떤 상황으로 걸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불안해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상황임을 안다면,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설사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면 내게 행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모든 일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탐욕일 뿐입니다. 그러한 인도는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곧 자신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억지일 뿐이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여러분이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종교 행위, 곧 예배, 기도, 헌금, 성경 읽기 등등의 행위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언약궤를 앞세워 하나님을 도움을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린 너무 쉽게 하나님이 나 자신을 기뻐해 주실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을만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진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셔도, 사실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에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네게 행하시옵소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범죄를 돌이켜 생각한다면, 분명 자신은 하나님은 기뻐하심을 입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지 않으심으로, 성에서 쫓겨나 평생 나그네로 유리하며 산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선함이라면, 그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성도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겸손이 없습니다. 죄인이라 하면서 자신의 악함을 보지 않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죄인이라 하면서도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한대로 되어지기를 원하는, 욕심을 벗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쥐고 있으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 소식과 이스라엘 백성의 인심이, 압살롬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은, 다윗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에 위협을 느낀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포기하고 떠나자는 말에, 신복들은 왕이 하고자 하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다윗은 이제 도망자라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신하들과 블레셋 사람 잇대와, 소수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문을 나섰을 때, 사독과 레위인들도 여호와의 궤를 메고 따라 나섰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신앙의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을 따라 진행할 때, 여호와의 궤를 앞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궤를 모신다는 것은,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상징이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독과 레위인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자원하여 다윗을 따라 나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다윗과 함께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의로운 신앙의 사람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범죄의 결과, 도피의 길을 떠나게 된 자신과 함께 유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이며, 나아가 다윗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장소나 물건에 제한되어 계신 분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궤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을 때, 나단을 통하여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이 사실을 확연히 깨달은 듯합니다. 그는 아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의 역사와 자기의 체험들을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에게 여호와의 궤가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의 유무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실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이르기만 한다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신앙으로 언약궤를 돌려보낸 것입니다.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다윗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것에서,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어 지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되어 지는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불안과 근심이 아닌 믿음과 평안 속에 살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내 입장에서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함을 이루시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