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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님의 문화재탐사 스크랩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탑 - ?화강암으로 이렇게 화려한 조각을....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34 14.08.02 12: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화강암으로 이렇게 화려한 조각을-충주 청룡사 보각국사탑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 32번지 일대에 있는 폐사지로, 조선 초기에 건립된 주목할 만한 부도와 탑비가 남아 있다.

그동안의 지표조사와 여러 관련 기록에 의하면 청룡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고 사지에서는 여러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석종형부도에서 내려다본 청룡사지-뒷쪽 잔디밭처럼 보이는 곳이 청룡사지이다

 

보각국사의 부도터는 청룡사지 북서쪽에 형성된 산능선에 일정한 공간을 조성하여 장대석으로 기초를 견고하게 한 후 석등·상석·부도·탑비를 나란히 배치하였다.

 

중간에 1단의 석축을 두었으며, 여러 조형물이 나란히 배치된 것으로 보아 왕릉의 석물 배치법과 유사한 측면을 보이고 있다.

보각국사 혼수가 국사를 역임한 승려였으며, 태조 이성계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왕릉의 석물 배치에 준하는 배치법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승려의 사리탑, 탑비, 석등을 나란히 세우는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인데 현재 많은 폐사지에 가보면 부도와 부도비가 이런저런 사유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곳 보각국사 부도는 1976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부도탑과 탑비 그리고 석등이 한자리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부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2010.11.01 문화재청은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을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탑'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새롭게 정비된 문화재(부도) 명칭 부여방식은 소재지역명(충주) 사찰명(청룡사) 그리고 부도의 주인 시호(보각국사)만 사용하며 탑 이름(정혜원륭)은 제외하기로 하고 지금까지 붙여쓰기 하던 명칭을 띄어쓰기 원칙에 따라 쓰기로 하였다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보각국사 혼수(混修1320∼1392)의 부도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쳤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고려 말기 공민왕과 우왕으로부터 국사로써 높은 예우를 받았으며   1392년 7월 태조 이성계의 즉위에 축하를 표하고는 곧바로 병을 핑계 삼아 충주 청룡사로 내려왔다.

 

조선 태조 원년1392년 9월 18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세수 73세, 법랍 60세)하였는데, 이에 문도들이 연회암(宴晦庵) 북쪽 산기슭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수습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보각국사의 부음을 듣고 내신(內臣)을 보내서 조문하고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탑의 이름을 ‘정혜원륭(定慧圓融)’이라 하였으며 탑은 1394년에 완성하였다

 

 

 

부도탑은 상륜부 일부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부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크게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지대석) 위에 아래(하대석)·가운데(중대석)·윗받침돌(상대석)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탑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하였다.

 

1976년 복원 당시 지대석 하부에서 석실(石室)이 발견되었다. 즉 보각국사 유체를 화장한 후에 유골을 수습하여 지대석 하부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대석은 평면 팔각의 상면에 단판 16엽의 세련된 연화문을 장식하여 공양의 의미를 더하였으며 연화문 안에는 좌우 대칭형의 별도 화형 문양을 장식하여 화려함이 돋보인다.

 

중대석의 사자상

 

중대석의 용화문석(구름속에 노는 용)

 

중대석은 평면 팔각으로 각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안에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雲龍紋)과 사자상을 교대로 조각하였다. 4구의 사자는 모두 다른 모습인데 특히 앞발을 들어 새끼사자와 유희하는 모습도 있어 매우 흥미롭다.

사자상과 운용문은 돋을새김이 강하여 생동감이 있으며 수호의 의미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상하로 대칭되도록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상부에 높은 팔각의 갑석형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석을 받치도록 했다.

 

 

  

팔각의 면 모서리 우주에는 하늘로 승천하려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양쪽 신장상 사이)

 

팔면의 탑신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석은 상대석 상면에 팔각의 홈을 마련하여 삽입·고정되도록 했으며, 평면 팔각으로 모서리에는 용(龍)이 기둥을 감싼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둥은 중국에서 원나라 이후 유행하기 시작하여 명대(明代)에 크게 성행한 양식이었다.)

탑신석 각 면에는 1구의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는데 두꺼운 갑옷에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부도에 대한 강한 수호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탑의 옥개석

 

내림마루와 서까래

 

 옥개석 내림마루의 용머리(위)와 봉황머리(아래)

 

추녀의 연화문과 주두,점차

 

옥개석은 하부에 넓은 받침과 추녀와 사래가 새겨져 있으며 주두와 점차가 표현되어 목조 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따랐고, 처마를 치켜 올려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낙수면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처마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내림마루는 높게 돌출시켰는데 윗쪽에는 용두(龍頭)를  아래쪽에는 봉황(鳳凰)의 머리를  새겨 마치 용이 마루를 타고 하강하는 듯한 형상이며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어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하다.

이와 같이 마루부에 용두가 새겨진 경우는 조선 초기 무학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국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승려들에 한하여 나타나고 있다.

옥개석 상면에는 단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고 했다.

 

 

 탑의 상륜부

 

상륜부는 일부 부재가 결실되어 원형을 알기는 어렵지만, 보륜과 화염형 보주 등이 남아 있어 원래는 여러 부재들이 결구되어 상당히 고준하고 장엄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태조 3년(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부도는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되는 부도 가운데 하나로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 대리석이 아닌 화강암에 이렇게 정교하게 조각을 한 장인의 솜씨는 놀랍기만 하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조각. 공포의 새김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당시의 건축과 비교하여 감상할 만하다.
또한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있으며,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일뿐 아니라 조선 건국 직후 건립된 부도로서 전환기의 부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보물 656호)

 

 

 

사자석등은 부도와 상석(床石)이 있는 석축단 앞쪽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석등은 크게 기단부·화사석(火舍石)·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아래쪽에 사각형의 대석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자상을 놓아 석등을 받치도록 했는데 이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석등에서 기단부에 사자상을 배치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일부 석등에서 채용된 수법이었다.

 

사자상 위에는 사각형 낮은 간주석(竿柱石)을 받치기 위한 별도의 받침대를 마련하였다.
간주석은 사각형으로 각 면에 안상을 조식하였다. 상대석은 8엽의 앙련문(仰蓮紋)이 장식되어 있는데, 돋을새김이 높아 우수한 기법을 보이고 있다.

상대석 상부에는 별도의 갑석형(甲石形) 받침을 사각형으로 마련하였다.

 

 

 

 

화사석은 4각으로, 네 모서리를 둥근기둥처럼 조각하였고 앞뒤 면은 사각형의 화창(火窓)을 뚫어 관통되도록 하였으며 모서리에는 굵은 원주형 기둥을 세웠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워 고려시대의 지붕돌 양식을 잘 보여준다.

 

석등의 옥개석

 

옥개석은 하부에 낮은 받침과 추녀를 새겼으며 처마부를 치켜 올려 경쾌한 인상을 주도록 했다. 옥개석 상면은 볼록하게 호형(弧形)을 그리도록 치석하였고 마루부는 반원형의 돌기대(突起帶)가 돌출되도록 했다. 옥개석 상부에는 상륜부가 결구된 홈이 시공되어 있다.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와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석등의 사자모양의 하대석(정면)

 

석등의 사자모양의 하대석(옆면)

 

석등의 사자모양의 하대석(뒷면)

 

석등의 하대석(下臺石)은 희귀한 예로서 경주(慶州) 남산(南山) 천룡사지귀부(天龍寺址龜跌)와 같은 형식으로 한 마리의 사자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다.

간주석을 비롯하여 화사석, 옥개석은 네모모양으로 고려 이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조형미가 부도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석등은 1392년 12월경 부도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석등의 구체적인 건립 시기를 알 수 있어 편년 기준 석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높다. 

또한 석등의 하대석을 조선 초기에는 보기 드물게 사자상을 배치하였다는 점에서도 장인은 중앙정부에 소속된 우수한 석공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고 또한 장인이 심려를 기울인 탑이라 짐작할 수 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보각국사 탑비는 보각국사의 부도 뒤편에 세워져 있으며 보각국사의 행적과 부도 건립에 따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부도와 탑비가 한 쌍으로 건립되는데, 부도는 승려 입적 직후 건립되고 탑비는 비문을 찬하는 기간이 다소 걸려 한참 후에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비분은 거의 같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받침돌은 아무런 문양 없이 윗면에 2단각형의 괴임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있는 간결한 양식이다.

긴 네모모양으로 만들었고, 길이 157㎝, 높이 23㎝이며, 4변을 접은 형식을 보여준다.

 

비신도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높이 235㎝, 너비 115㎝, 두께 20㎝이며, 덮개돌 없이 비의 윗면 좌우 양측을 잘라낸 귀접이 형태의 비로서 한국 전통 양식의 석비 틀에서 벗어난 극히 간결한 수법의 석비이다.

제액은 ‘보각국사지비(普覺國師之碑)’라 횡서하여 전자로 쓰고, 비제는 ‘유명조선국보각국사비명병서(有名朝鮮國普覺國師碑銘竝書)’라 했다.

탑비는 태조가 문인선사 희달에게 명하여 건립했으며, 비문은 양촌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이후까지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인다

 


 

석종형부도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불교계는 위축되었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중창되게 되었고, 승려들의 위상도 높아져 중앙이나 지역사회에서 높은 예우를 받게 되었다. 또한 높은 지위를 역임하지 않아도 사후 기념적인 조형물로 부도의 건립이 일반화되었다.
이에 따라 특정 사찰에서 오랫동안 주석하였거나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을 경우 그것을 기념하여 부도를 세워주었다.

 

석종형 양식을 취하고 있는 청룡사지 부도의 경우도 주인공은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 청룡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승려로 추정된다.

 

 



 

 

 

석종형부도는 보각국사탑으로 진입하는 등산로 오른편에 육각형 부도편과 함께 세워져 있다.
석종형 부도는 크게 대석부와 석종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평면 사각형의 판석형 석재를 마련하였으며, 그 위에 높고 낮은 2단으로 형성된 대석을 놓아 석종을 받치도록 했다. 대석 상부는 1단의 받침대를 마련하였고, 상면에는 원형의 낮은 홈을 시공하여 석종이 견고하게 고정되도록 했다. 석종은 평면 원형으로 상하부의 지름이 거의 동일하다.

석종 상부에는 1단의 연주문대를 장식하고 그 위에 원형 보주받침대를 마련하였다. 보주받침대 위에는 낮은 원형 받침대를 마련하여 보주를 받치도록 했다.

 

석종의 표면에는 주인공의 명문이 음각된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설(雪)자와 당(堂)자는 울타리 밖에서도 판별이 되나 나머지 글자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전 조사 자료에 의하면 ‘적설당사리탑(寂雪堂舍利塔)’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석종은 상하부의 지름이 거의 동일하고 상부에 연주문대와 낮은 단으로 구성된 받침대를 마련하여, 석종형 양식의 부도 중에서는 우수한 치석 기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석종형 양식의 부도가 크게 성행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지역에 남아 있는 석종형 부도의 모범적인 작풍을 보이고 있다.
 석종형 부도 옆에 남아 있는 파손된 육각형 부도와 함께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 조선 후기 청룡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유물로서 청룡사가 적어도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청룡사위전비

 

 

 

보각국사탑에 오른는 산길의 초입에 청룡사위전비가 있다

청룡사위전비는 옛 청룡사 사찰유적의 하나로, 1692년(숙종 18년)에 청룡사 중창 및 경영 등에 관련한 경비를 충당하는 데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석이다.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및 수량을 적고 있어 당시 사찰의 경영 상태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며, 비문에는 2-3차례 추가로 기록한 부분도 있다. 위전비는 1978년 11월에 보수되었다

 

위전비는 귀부와 비신, 옥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귀부는 폭이 좁고 높이가 높아 안정된 느낌은 없다. 목은 짧고 두꺼운 편이어서 둔중한 느낌이 든다. 얼굴은 풍화가 심한 편이나 이목구비의 윤곽만 두루뭉술하게 조각하여 섬세한 맛이 떨어지는 조선 후기 조각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목이 짧고 귀갑을 두껍게 표현한 만큼 얼굴이 귀갑에 바짝 붙어 치켜든 모습을 하고 있다. 귀갑은 매우 두껍게 표현되어 있어 발과 꼬리 등은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귀갑 무늬를 반복해 귀갑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상부 중앙에 장방형의 홈을 파고 주변을 돋우어 비신을 꽂도록 하였다.

 

 

 

 


이수는 우진각 지붕 형식이다. 처마 끝은 약간 반곡시켰으며,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용을 새겼다.

용마루 양쪽 끝에 서로 마주 보도록 두 마리의 용을 새겼고, 각 추녀마루 끝에 각 1마리의 용을 새겼다.

지붕 면에는 아래쪽에 구름을 조각했고 위쪽에는 서로 꼬고 있는 용의 몸을 조각했다.

 

이처럼 옥개에 용을 새긴 것은 비석의 이수를 채용하는 고식(古式)의 기법과 지붕 형식을 채용하는 조선시대의 기법을 혼합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 비석이 지니는 독창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비신은 장방형의 판석으로 사면에 모두 글을 새겼다. 글은 모두 세로로 새겼으며, 맨 앞에 ‘청룡사위전비기(靑龍寺位田碑記)’라는 비명을 새겼다.
가첨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충주IC에서 승용차로 약 30분 거리이며 버스주차장이 완비되어 있고 충주시에서 파견된 문화재 해설사가 배치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보각국사탑까지는 완만한 경사길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국사탑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청룡사위전비와 석종형부조비, 그리고 건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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