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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마지막 재앙(1-3)
우리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공의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고, 반복적으로 경고하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할 때, 결국 하나님께서 판단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여러 차례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분의 뜻을 돕기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2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1-3)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것은 이제 남아 있는 ‘한 가지 재앙’입니다. 이 재앙을 겪은 후에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사의 강조 표현(가레쉬 예가레쉬, 반드시 내쫓다)과 포괄성을 가리키는 부사 ‘칼라’(모두)를 사용하심으로써 바로가 이번에는 ‘반드시’ 그리고 ‘전면적으로’ 굴복할 것임을 확증하십니다. ‘신부를 보내다’라는 해석은 이어지는 ‘반드시 쫓아내다’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부가 시집갈 때 집안에서 내쫓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모든’을 뜻하는 ‘콜’과 관련된 단어로서 부사 ‘모두’가 적절해 보입니다. 이 경우 이 부사는 앞의 ‘보내다’가 아닌 뒤의 ‘내다’와 연결되면서 ‘모두 내다’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떠날 준비를 갖출 때, 애굽인 이웃을 찾아가 은금 패물을 구하라고 명하십니다(2). 아마 이 패물(켈리)은 값비싼 은금 장신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3:19-22의 반복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애굽을 여러 가지 기적으로 여러 번 친 후에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3:20). 또한 그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 사람의 호의를 입게 하여 빈손으로 나가지 않게 할 것이며(21), 그들이 애굽 이웃들에게서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그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귀중품들과 물건들은 나중에 성막 건설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취하다’의 동사 ‘나짤’은 보통 강제력이 동원된 탈취에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무력적 행동으로도 읽힐 수 있는 이 표현에 대해 앞서 3:22에서 잠깐 설명했지만, 12:36의 주해에서 다시 살피기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열 번째 재앙에 앞서 이미 애굽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호의(헨 은혜)를 품게 하셨습니다. 또한 바로의 신하와 백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땅에 무서운 재앙을 연거푸 일으킨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추앙했습니다(3). 이것은 존경심보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존대로 이해됩니다. 그로 인해 애굽 백성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친절히 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대해 승전국의 지위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로의 고집 때문에 선량한 애굽 국민이 피해를 보아야 합니까? 결국 왜 그들의 장남들이 모조리 함께 심판 아래 놓여 죽어야 합니까? 이것은 지도자의 오판과 잘못된 행동이 구성원 전체에게 어떤 피해와 어려움을 가져다주는지 잘 알 수 있게 합니다.
바로에게 통보된 마지막 재앙(4-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는 당신의 은혜로 영생의 길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4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5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6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7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8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4-8)
이 장면은 앞선 10:29 무대의 연장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1-3절은 현재의 최종적 파국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달된 사전 준비 지시로 이해됩니다. 앞서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최후 통첩을 했던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마지막 재앙의 경고를 전달합니다(4). 이제 하나님께서 밤중에 직접 애굽 한복판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이 다 죽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가축의 첫 태생을 모두 포괄합니다. 사람의 경우 모든 장남이 다 죽을 것인데, 이것은 특징적인 총칭어법(merism)으로 “왕위에 앉아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은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당시의 맷돌은 회전식 연자 맷돌이 아닌 위아래 두 짝으로 구성된 손맷돌인데, 곡물을 아랫돌에 놓은 다음 윗돌로 아랫돌을 문지르는 방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성경의 증거는 전통적으로 맷돌질은 여성들이 하는 일임을 시사합니다(사 7:2; 욥 31:10; 마 24:41). 삼손은 거대한 연자 맷돌(회전맷돌)을 돌린 것이 아니라 이런 여성 전용의 손맷돌 작업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삼손을 모욕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최고 존엄인 바로의 장자로부터 가장 미천한 여종의 장자까지 모두 심판의 대상에 포괄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가축의 첫 태생이 포함됩니다(5). 아마 사람이 키운 가축 외에 야생 짐승은 해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재앙은 애굽에 심대한 타격과 슬픔을 안기고, 애굽 온 땅이 초상집이 되며, 그들의 통곡은 전무후무한 부르짖음이 될 것입니다(6). 무엇보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모의 총애를 받는 장자들이 모두 죽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문의 혈통과 전통을 잇는 첫아들이 지닌 중대한 의미와 위상을 고려할 때, 그들의 죽음은 애굽인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은 왕위 계승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바로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든 가축이든 어떤 첫 태생도 무사할 것입니다(7). 7절은 더 선명히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가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가축에게 ‘혀를 움직이지(놀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움직이다’라는 동사의 의미는 개가 으르렁거리거나 짖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협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한국 격언에 비교하자면,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립니다. 애굽의 비극과 이스라엘의 보존이 비교됩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둘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셨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7). 모세는 바로에게 바로의 자존심을 최대로 상하게 하는 최후의 예고를 전달한 뒤 그를 떠납니다(8). ‘당신의 모든 신하들이 나를 찾아와 내게 절을 하며 우리에게 떠나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나갈 것이다.’ 이곳에서 ‘절을 한다’는 뜻의 동사 ‘히쉬타하봐’는 언제나 권위자와 높은 연령의 어르신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납작 엎드리는 동작입니다. 따라서 바로의 신하들과 백성이 모세에게 엎드린다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바로의 권위의 자리를 실질적으로 모세가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모습은 마치 승전국 군주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모세는 나아가 대제국의 제왕인 바로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떠납니다. 여기서 모세의 분노는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열 가지 재앙이 임한 이유(9-10)
세상의 군왕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결국 하나님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이 뜻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완고함은 그와 그의 백성들에게 큰 의미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제외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의지하심에도 성도들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10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9-10)
두 민족의 운명을 가를 열 번째 재앙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현재까지의 상황을 총정리하여 모세에게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선 과정을 상기시키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9). 그 목적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들’(복수)을 계속 더하여 일으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로써 여호와의 능력과 그분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은 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인간의 사고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앞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것은 죄로 물든 인간의 고집스런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묵인이며, 그런 죄악마저 이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사역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아홉 번의 재앙을 내리시면서 바로와 애굽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이제 마지막 재앙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장자 심판의 이야기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그것과 관련된 법의 제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정립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기원과 신분에 대한 역사적 정립이며 신학적 정립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장엄한 계획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함께 구원의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기회를 주지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마지막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과 심판이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되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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