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부산의 역사
군사 요충지였던 부산 절영도 두고 일본·러시아 대립했죠
부산의 역사
김성진 서울 고척고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입력 2025.02.20. 00:50 조선일보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 ‘멸종 위기: 한국 제2의 도시, 인구 재앙을 우려하다’라는 제목으로 부산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해 화제가 됐어요. 한국전쟁 이후 산업 중심지로 부상하며 국가 경제를 지탱해 온 부산이 최근 출산율이 크게 떨어지며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게 기사를 쓴 계기였답니다.
우리나라 ‘제2 도시’ 부산은 과거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부산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지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대일 교역의 중심지가 되다
부산은 삼국 시대엔 ‘동래’라고 불렸어요. 15세기 초부터 부산포(富山浦)라는 명칭이 사용됐고, 15세기 말에 이르러 지금 같은 한자 ‘釜山(부산)’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조선 화가 변박이 1783년 초량 왜관을 그린 '왜관도'. 왜관은 일본인 마을로, 조선 시대에 일본과 교역하고 외교가 이뤄진 공간이에요.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시대 부산은 일본과 교역하며 차츰 성장합니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 특히 대마도와 아주 가까이 있어 일찍부터 왜관(倭館)이 설치됐습니다. 왜관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조선과 일본의 외교가 이뤄진 공간이기도 했지요.
왜관은 조선 태종(1400~1418) 때 부산포(현 부산 동구 좌천동 일대로 추정)에 설치됐다고 전해져요. 조선 전기엔 부산 외에도 내이포(진해), 염포(울산)에도 왜관이 설치되는데 이를 합쳐 ‘3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607년엔 왜관 위치를 두모포(현 부산 동구 구청로 일대)로 옮기고 일본인 마을을 본격적으로 조성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가 안정화되자 교역량이 늘며 왜관으로 오는 일본인 사절과 상인도 크게 증가했어요. 이에 조선은 왜관을 초량(현 부산 중구 광복동 일대)으로 옮겼는데, 초량 왜관은 두모포 왜관보다 10배 정도 컸다고 해요. 비슷한 시기 일본 나가사키에 마련된 네덜란드 상관인 데지마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초량 왜관에서는 조선과 중국, 일본 간 무역이 번성하며 활발한 교역이 이뤄졌습니다. 조선이 청에서 사들인 백사(흰 명주실)는 모두 왜관에서 거래될 정도였다고 해요. 조선은 부산 왜관을 통해 쌀이나 면포 등을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 은이나 공예품 등을 들여왔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일본과의 외교 마찰로 일본 사절의 상경이 금지돼 조선 국왕을 직접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외교 교섭은 왜관에서 진행됐다고 합니다. 초량 왜관은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이 개항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존속했는데, 따라서 부산은 대일 교역과 외교 창구로 기능하며 경제가 발전했죠.
열강의 각축전이 벌어지다
근대에 접어들며 부산은 열강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공간이 됐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늘리며 무역 주도권을 장악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대일 교역의 중심지였던 부산은 국내 최대 무역항으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1910년 준공된 부산 중구 중앙동의 옛 부산역. 부산역은 이후 1969년 동구 초량동에 새 역사가 완성돼 현재 위치로 옮겨 왔어요. /부산역사문화대전
일본에 이어 부산에 관심을 보인 것은 러시아였어요. 19세기 말 러시아는 한반도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가까운 부산을 군사 진출 발판으로 활용하려 합니다. 러시아는 1897년 조선 정부에 부산 절영도(오늘날 영도)를 빌려달라고 요구하는데요. 이곳에 자국 함대에 연료를 보급할 시설을 설치할 목적이었습니다. 조선 내에서 대대적인 반발과 저항이 일어나 이 계획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남진 정책으로 부산 일대엔 긴장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어요.
긴장 국면은 1904년 러일전쟁으로 폭발했지요.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대한제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본부인 ‘한국주차군사령부’를 부산에 설치하고 부산과 그 주변 지역에 포대를 비롯한 각종 군사 시설을 두었어요. 특히 러시아가 빌려달라고 했던 절영도에도 군대를 주둔시켜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대비했죠.
1950년 부산항으로 들어온 유엔군의 군수 물자가 부두에 쌓여있어요. 당시 부산은 여러 원조 물품이 들어오는 창구였죠. /부산역사문화대전
일본은 군수 물자 이송을 위한 보급로 건설도 서두릅니다. 이것이 바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도인 ‘경부선’입니다. 무역항으로 성장한 부산은 근대에 접어들며 강대국들의 전략 거점 도시로 다시 주목받은 것이지요.
광복 후 산업 도시로
일제강점기 부산엔 조선방직, 조선중공업(현 한진중공업) 등 다양한 기업이 들어섰어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시기 부산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생산 기지로서 기계, 금속, 조선(造船) 공장들이 세워지고 있었죠.
그런데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던 부산 경제는 혼란에 빠졌어요. 일본과의 왕래가 줄어들면서 공장 가동에 필요한 기계 장치나 생산에 필요한 원료·부품들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거든요.
1970년대 부산의 한 신발 공장 모습. 당시 부산의 신발 공장들은 유명 신발을 위탁 생산해 수출 증대에 기여했습니다. /부산역사문화대전
이러한 상황에서 발발한 6·25 전쟁은 부산을 다시 한번 바꿔놓습니다. 당시 전쟁 피해를 거의 보지 않은 부산으로 수많은 사람과 자본이 몰려들었거든요. 특히 부산항은 미국의 원조 물자가 유입되는 창구 역할을 했어요. 미국은 우리나라에 설탕과 밀가루, 면화를 원조 물자로 지급했는데요. 1950년대 부산은 이 물자를 기반으로 ‘삼백(三白) 산업’이 발전합니다. 이때 부산에 등장한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가 바로 제일제당공업(현 CJ제일제당)이지요.
1960~70년대 부산은 항구 도시라는 좋은 입지와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섬유∙의류∙가발 등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이 크게 발전합니다. 전쟁 이후 부산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물건들은 해외 각국으로 수출되며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죠. 특히 부산의 신발 산업은 세계적 명성을 얻었어요. 부산엔 세계 최대 규모의 신발 산업 단지가 조성되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나이키’ ‘아디다스’ 같은 유명 브랜드 신발을 위탁 생산했답니다. 부산을 중심으로 성장한 신발 산업은 1980년대까지 수십억 달러 수출액을 올리기도 했지요. 1970년대 중반까지 부산은 우리나라 수출의 20% 정도를 책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과 첨단산업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가 변화하며 부산의 기존 산업들이 침체를 겪고 있어요. 그 결과 젊은 인구 유출도 심화되고 있지요. 부산이 다시 돌파구를 마련해 이전의 활력을 되찾길 바랍니다.
윤상진 기자 사회정책부
사회정책부 근무. '신문은 선생님' 코너를 기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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