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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현목사/어떤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
(전 2:1-11)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행복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땀 흘리고 일을 하는 것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것은 전도서를 통해서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모든 것을 다 누리고 난 뒤에, 그 인생의 말년에 지었습니다. 모든 것을 누려 본 다음에 그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허무했다는 것입니다. 자칫 하면 전도서는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린 쾌락’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았을 때 누리는 쾌락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말씀하는 것은 낙을 찾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구하고 또 삶의 즐거움을 얻고자 합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쾌락을 허락하셨습니다. 건강한 욕망이 인류를 발전시킨 것처럼, 건강한 의미에서의 쾌락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식욕도 쾌락입니다. 안 먹고 살면 인생에서 재미가 없어집니다.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건강한 의미에서 누리는 것은 축복입니다.
삶에서 적절한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서 여가생활, 취미, 여행, 놀이문화를 누립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적절하고 건강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사람은 잘못된 중독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도박이나 술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건강한 쾌락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방식으로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빠진 것입니다. 적당한 놀이를 할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반복된 삶을 살다 보면 짜증이 나기도 하고 피로감이 몰려와 생산성과 창의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적절한 놀이문화, 여가활동, 취미는 아주 중요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고행주의, 금욕주의는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도 ‘거룩’이나 ‘경건’이라는 단어를 협소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룩과 경건’을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일상의 삶은 세속의 생활로 여깁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 드리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 생활의 전 영역이 거룩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일하는 것, 먹는 것, 모든 여가활동까지도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경건이라는 것을 딱딱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두꺼운 성경책을 끼고 다니는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릴 때에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문화가 많았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하는 무수한 규칙들을 지켜야 하는 엄격함’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앙을 왜곡한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여유와 해학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흥이 나고 신바람이 나고,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놀 줄 모른다고 말하는데, 논다는 개념도 잘못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삶이 어느 한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구의 영화를 보면 전쟁 속에서도 유머를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그것을 가볍게 넘기고자 하는 여유를 갖는 것입니다. 이번 아프리카 선교여행에서 만났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춤을 열심히 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 춤을 추다가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마나 열심히 춤을 추는지 모릅니다. 동양인들이나 유럽인들의 춤이 열심히 연습해서 추는 것이라면 그들은 본능적으로 추는 춤입니다. 맨발로 땅을 비비면서 춤을 출 때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얼굴에서 행복함을 보면서 인간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추구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서 여가를 가지는 것을 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멋지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시드니의 해변가에 사는 사람들도 휴가를 다른 곳으로 갑니다. 더 좋은 곳이 있을 수가 없는데도 다른 곳으로 갑니다. 또한 전국에서 알아주는 멋진 해변이 있는 해운대에 사는 분들도 다른 곳으로 휴가를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상에서 잠시 벗어남으로 삶의 활력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예수님의 일행이 아주 바빴던 것 같습니다. 굉장히 분주한 삶 속에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배려하시면서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쉼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서 잠시 쉼을 갖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쉼을 갖지 않으면 탈이 나게 됩니다. 현대인들에게 있는 만성피로증후군은 많은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피로는 삶의 활력을 잃어버리게 하고 어느 순간 삶을 멈춰버리게 합니다.
또한, 문화의 발전은 인간이 쾌락을 추구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과학과 예술은 인간이 즐거움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서구사회를 보면 놀이 문화가 많이 발전되어 있고, 놀 줄을 압니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잘 모릅니다. 스포츠도 결국 노는 것이지만, 머리를 많이 써야 하고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든 노동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힘든 스포츠를 하면서 쉼과 회복을 맛보게 됩니다. 때로는 시골길을 걷기도 하고, 별을 보기도 하고, 시를 읽기도 하고, 모닥불을 피우기도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특히 한국민족은 누구보다 쉼 없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어느 국민보다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암 발생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쉼과 여유를 가지는 노력을 해야 할 사회 속에 있습니다. 이런 쉼은 결코 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쉬는 것을 죄로 여기는 문화 속에 있습니다. 노는 것을 경건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러나 늘 쫓기며 자신의 일을 놓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의 요소일 수 있습니다. 여유는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며 맡길 때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한 템포 늦추고 쉼을 가져야 하고, 삶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갖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는 위험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쾌락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쾌락주의는 문제가 됩니다. 일상에서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한 번씩 얻는 쾌락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쾌락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은 쾌락주의입니다. 쾌락은 끄는 힘이 있어서 자칫 쾌락이 삶의 중심이 되면, 그것에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쾌락은 즐거움이 아주 짧고 순간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한순간과 같습니다. 마치 목이 말라서 콜라를 마시면 순간 시원하지만, 곧 다시 목이 말라 또 마시게 됩니다. 이것을 반복하면 중독이 됩니다. 세상의 즐거움도 이와 같습니다. 전도서의 솔로몬은 세상의 즐거움을 다 누려보았지만 결국은 허무했습니다. 10절에서와 같이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했지만, 결국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누려본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허무함이라는 것입니다. 쾌락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쾌락이 주는 매력 때문에 그것을 목적으로 착각할 때 찾아오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쾌락은 좀 더 강도가 높은 것을 찾게 합니다. 쾌락이 주는 만족은 아주 짧아서 즐거움이 사라질 즈음에는 빨리 반복해서 채워주어야 합니다. 마약도 한순간에는 아주 짜릿합니다. 쾌락은 잠깐이고 허무와 고통이 쏜살같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또다시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호주의 원주민이 사는 마을에는 주민들 거의가 마약을 합니다. 중독이 되어서 하루 세 번 주사를 맞아야 견딜 수가 있는데 돈이 없어서 주사를 맞지 못하면 정신이 나가서 행인의 가방을 강탈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주사를 맞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무상으로 매일 마약 주사를 주기도 했습니다.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갈수록 세상의 즐거움은 만족이 짧고, 그 갈증의 주기가 짧아집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잔으로 끝나지 않고, 처음에는 “더운 여름에 맥주 한잔 어때”로 시작하지만 조금씩 강도가 높아집니다. 도박도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시작하다가 어느새 도박이 됩니다. 스피드를 즐기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즐거움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속도에 대한 무감각이 오면서 “좀 더, 좀 더” 하게 됩니다. ‘조금 더!’ 하다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조절하지 못하면 중독이 되어 중단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전도서에서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고, 그것을 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만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쾌락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과 우리에게 있는 죄성이 만나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게 됩니다. 그래서 쾌락은 가볍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삶 전체를 요구합니다. 특히 오늘날의 문화는 우리를 빠져들게 합니다. 많은 영역에 중독성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분야에서든 이 중독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솔로몬도 그런 쾌락을 누리는 것에서 삶의 요소들이 흔들리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즐겨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즐거움을 누리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분명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 그 목적을 추구할 때 수단으로서 쾌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행위는 목적이 선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개인의 욕망을 채우게 하는 쾌락은 우리 삶을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휴가를 가는 목적이 단순히 놀고 쉬는 것이라면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즐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진정한 행복은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서구사회의 부유한 나라를 보면 휴가 가는 것에 목숨을 겁니다. 휴가가 거의 일 년의 목표입니다. 여름이 오면 두 달쯤 일이 안 될 정도입니다. 프랑스의 교회는 휴가철 두 달 동안에는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을 가능한 적게 하고, 가능한 많이 놀 수 있는 직장을 흔히 ‘신의 직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을 하다가 가끔 골프를 치고 여가를 즐겨야 그 안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당한 휴식은 간식과 같습니다. 간식을 밥보다 더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목적이 분명한 휴가와 놀이, 적당한 범주 안에서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수준 안에서 멈춤이 가능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허무에 빠질까요? 전도서는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청산하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언제 인간이 즐거움의 극치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할 때’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 때, 진정한 만족이 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즐거움과 목적을 따라가면 점점 더 갈증이 나는 것처럼 즐거움이 사라져가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살 때는 즐거움이 의미를 찾고 하나님 안에서 복된 누림이 될 것입니다.
관계 중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혼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하는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함께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성경은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을 해도 함께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혼자 먹으면 맛이 없습니다. 혼자서 하는데도 참 즐거운 분은 정신과에 가보셔야 합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함께 해야 즐겁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내 주변에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친구가 모여들고 있다면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주변 사람들이 떠난다면 잘 못살고 있는 것입니다. 쾌락주의자들의 특징이 지독한 개인주의입니다. 거기에서 허무가 오고, 그래서 더 쾌락을 추구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쁨은 혼자가 아니라, 관계에서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여름 휴가 기간에는 나와 우리 가족뿐 아니라 평소에 소홀했던 이웃과의 관계를 열어가는 일에 힘을 쓴다면 삶이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순간이 아니라 영원을 추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잠시 잠깐 주는 세상의 즐거움에 목을 매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즐거움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우리의 관심을 영원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전도서가 우리를 영원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허무주의로 끝나는 책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영원에 눈을 뜬 사람은 현실의 삶에서 모든 것을 누리려고 하기보다는 약간은 불편한 것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태도를 익혀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 덜 좋은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아프리카 선교여행에서도 보면, 어떤 분들은 휴가를 모두 선교에 쓰고 떠나왔습니다. 사실 선교지에 가면 불편한 점들이 많습니다. 씻지도 못하고, 나방도 엄청나게 많고, 먼지 나는 바닥에 앉아야 하고, 그런데도 아프리카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을 보면 꾀죄죄한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나 혼자 먹을 때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먹을 것을 포기하고 상대에게 먹였을 때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은 질이 다릅니다. 제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휴가를 반납하고 헌신하면서도 그렇게 기뻐하는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바로 그 맛 때문에 선교를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누릴 것처럼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 즐거움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장된 진정한 즐거움은 영원한 천국에 있습니다. 전도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 12:1)」 인생은 매우 짧습니다. 그래서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목을 매지 말고 영원한 즐거움을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유보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교훈입니다.
이 땅에 즐거운 것이 있다면, 너무 억제하거나 죄악시 하지 말고 누리십시오. 그러나 그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휴가를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어떤 것이 주어져도 그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와중에 나의 삶에 활력을 주는 일시적인 행복을 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좋은 것들을 누리되 목적을 잃지 말고, 그 좋은 것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가 경제적 성장과 부유함 속에 이 땅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휴가라는 두 달 동안 교회가 문을 닫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 속에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황폐한 것입니다.
과거의 한국은 일벌레처럼 일하다가 골병 들어 죽는 시절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시대는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여가 문화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쉼과 여가 문화로 가는 이 시대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에 탐닉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누리되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분명히 붙잡고,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 주어질 때 ‘이 세상도 이렇게 좋은데 천국은 얼마나 좋을까’라고 더욱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취해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