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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91:1-4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이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안전을 보살펴주시며 결코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빠뜨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으면서 모든 위험을 통과해 나아가도록 권면 받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되풀이해서 가르치는 것은 크게 유익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많은 말을 늘어놓는 자가 많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특별히 보호하고 계신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안전을 하나님께 기꺼이 내맡기는 신자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1. 본문 1절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입니다.
시인은 주의 보호 아래 있는 자는 안전하고, 난공불락의 위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어떤 대적의 무기로도 침범 못한다는 뚜렷한 두 개념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을 자신의 안전을 위한 보호자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안식을 누리리로다’ 로 번역돼야 합니다.
2절도 강조된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람의 힘으로 만든 연약한 피난처를 서로 대조시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풍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환난이 각기 다르기에 다양한 피난처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안전함과 우리가 속아 넘어가기 쉬운 다른 모든 것들을 신뢰하는 것의 허무함을 대조시킵니다.
시편 91 편
2. 본문 2절은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입니다.
2절에서 시인은 이미 자기가 가르친 교훈을 반복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한 신자로서 자신의 느낌과 경험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 방법은 가르치는 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단지 입술로만 진리를 가르치기를 그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해 주신 것으로 가르치지 않고서는 참된 지식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말은 자기가 앞 절에서 가르친 것이 자신의 내적 경험과 일치한 셈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자기 요새로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자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과 한 식구처럼 주의 말씀과 자신의 말을 주고 받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확신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안전하게 하나님의 그늘 밑에 거할 수 있는가 하는 증거를 추가로 제공해 줍니다.
이 거룩한 자부심은 우리가 최악의 시련 속에서도 두려워하는 일이 없이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충분하고 남는 도움을 얻는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을 때 신앙 승리의 극치를 이룹니다.
3. 본문 3절은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입니다.
3절에서 시인은 자기가 말한 그 의지함이 헛되거나 망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항상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증거 해 주신다는 자신의 확신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또 이 말씀을 통하여 자기 마음이 주 안에서 소망을 갖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극한 염병” 과 연결되어 언급된 “새 사냥군의 올무” 라는 말을 공공연한 공격과 구별되는 감추어진 악행으로 여기고 시편 기자가 사단이 드러나게 맹렬하게 자기를 공격해 오는 경우이든지, 은밀하고도 음흉한 방법으로 공격해 오는 경우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자기에게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해석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혹 어떤 자들은 이들이 단어의 단순한 뜻 만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시인은 이 말로 모든 종류의 죄악들을 가장 적절하게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 처해 있든지 우리를 기꺼이 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시편 91 편
4. 본문 4절은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입니다.
성경 말씀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는 이 비유는 우리들의 안전을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순수하시고 자비하신 보호를 아름답게 표현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생각할 때 여기 나타난 것처럼 자기 새끼들을 자기 날개로 품어 보호하는 암탉이나 다른 어떤 새와 같은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연약을 아시기에 주저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속한 하늘 영광으로부터 내려 오사 우리로 하여금 자기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겸손으로 자신에게 나아오도록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자비하신 방법으로 우리의 연약에 친절을 베푸시기에 분명히 우리가 가장 큰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진실함’이 자기의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실 것으로 말한 것은, 자기 백성들이 궁핍할 때 결코 모른 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그의 눈 속에 가지고 계신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내맡기는 모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약속들을 바라볼 때 뿐 입니다.
우리가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는 시인이 앞서 말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기에 시인은 이제 자기 자신을 이 일에 대한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앞서 “요새”의 비유로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쳤던 시인이 이제는 하나님을 “방패”에 비유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 사이에 임하셔서 우리가 그들의 공격에서 보호를 받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시편 91 편
시91:5-8 너는 밤에
하나님은 성도들을 그 성도들이 모르게 임하는 음해(陰害)와 그 성도들이 알게 임하는 위험들의 그 가장 악한 것 가운데서도 남달리 구원하십니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달리 위험에서 구출하시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특례의 구원 기사(奇事)는 고래(古來)로 교회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기사가 주의 뜻을 따라 이따금 있고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이 곤륜산에 붙으매 옥과 돌이 함께 탄다” 는 말씀과 같이 성도와 악인이 재앙에 동참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섭리에 속합니다. 이런 일까지도 모든 일이 합력하여 역시 성도의 유익을 위한 것이 사실입니다.
1. 본문 5-6절은 “(5)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6)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지하게 되면 모든 사단의 유혹과 공격에서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호 아래 두는 신자가 가장 완벽한 안전 상태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가장 뛰어난 체험을 가진 자도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특별히 이 세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과 죽음의 무수한 형태 가운데서 몇 가지를 만남으로 의심이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와 두려움과 불안감을 일으킬 때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시인이 여러 죄악들을 특별히 다루는 이유는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 이상의 구원의 양상을 바라보고 여러 가지 누적된 환난들을 견딜 수 있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밤에 놀램” 이라는 말씀은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기에 이렇게 불려졌거나, 밤은 우리들에게 여러 종류의 위험을 안겨다 주고 있어서 이 시간에는 우리의 두려움이 어떤 소리나 불안이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화살”은 다른 무기보다 낮에 날아가는 것으로 예시됩니다.
그 이유는 화살이 먼 거리까지 빠르게 날아감으로 우리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의 하반절은 비록 다른 말로 표현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전능자의 방패가 격퇴하거나 막아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시편 91 편
2. 본문 7절-8절은 “(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8)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입니다.
시인은 모든 사람들의 처지가 다 한결같은 모습이라 할지라도 신자들은 절박하고 긴박한 성격을 지닌 죄에서부터 제외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천태만상으로 죽어가는 사람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시인은 주저하지 않고 온 우주가 파멸을 당하게 될지라도 여호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각별하신 보살핌의 대상이 되어 전반적인 파멸 속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교훈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교훈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볼 때 비록 널리 퍼져 있는 보편적인 죄악에 매여 있기는 하지만 위험 가운데서 우리의 안전은 특별한 예외로 대우를 받습니다.
계속되는 구절들은 신자들이 시인이 말하는 단순한 개인 구원의 경험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이 자기 피난처가 되심을 친히 자기 눈으로 보고 느끼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새로운 논조(論調)는 세상의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자녀들에게는 피난처가 되어 주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 세상의 사물에는 많은 어두운 측면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 모든 환난들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봄으로서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백성들의 기대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기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 참된 신앙의 빛으로 특권을 부여받은 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완전히 깨우침을 받은 자, 적당한 때가 이를 때까지는 인내와 평안으로 기다릴 줄 아는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생각에 따라 주저하거나 망설이며 경솔한 결론을 내림으로서 감정에 따른 판단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단지 불완전한 정도만으로 만족을 누려야 하고 보다 온전한 파악은 완전한 계시의 날이 올 때까지 미루어 두어야 합니다
시편 91 편
시91:9-12 네가 말하기를
시인은 하나님이 지존자이시기에 그에게 피한 자가 안전할 것을 말씀합니다(1-13).
하나님께 피한 신자는 진실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자입니다.
그런 신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피난처” 이십니다(2).
“피난처”는 전쟁 때에 위험을 피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피난처”란 극한에도 그를 의뢰한 자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피난처” 이신 사실을 시인은 3절부터 자세히 설명합니다.
(1) “올무” 에서 건짐 받습니다(3절상).
“올무”는 속여 거꾸러뜨리는 것이기에 노골화(露骨化)한 위험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이 노골화한 위험 앞에서는 피할 길을 찾을 여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속여 넘어뜨리는 데는 피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로 그것에 걸리지 않게 걸음을 인도하십니다(고전10:13) (2) “극한 염병”과 기타 위험들에서 “건지심” 을 받습니다(3절 하반, 5, 6).
“염병” 은 특별히 옛날에 위험한 병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예방할 방법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를 거기서도 건져 주십니다(4).
그러므로 신실한 신자는 이런 것들을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6절하반).
(3) 사람들이 해(害)를 받는 장면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그 해를 면합니다(7). 유달리 보호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奇蹟的) 간섭으로야 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반면에 악인은 보복을 당하는 사실을 목도합니다(8-13).
이런 명백한 대조(對照)는 그 신자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합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입은 신자는 겸손해야 됩니다.
1. 본문 9-10절은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입니다.
시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찬송함에서 인간들이 본성에 따라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더딘가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에게는 이 마땅한 부분에 자극을 받아 자기들이 믿고 있는 거짓되고 세상적인 피난처에서 떠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보여줍니다.
시편 91 편
이 시는 전체에 걸쳐 인칭의 변화가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상반절에서는 하나님을 말하고 하반절에서는 자기 자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피난처”라 한 것은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자신의 예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곧 이어 자기 자신에 관해 자기는 내적인 환난에 대해 보다 나은 진지한 설득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이켜 아무도 우리를 보지 않을 때 자신의 심령을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더불어서만 행하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사람들에게로 우리의 눈을 돌이키게 된다면 이 믿음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거처” 또는 “피난처”(시90:1) 로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다음 절과 서로 연결되어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라는 말씀의 원인 또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해 의지할진대 어떻게 죄악이 침투해 들어올수 있겠는가? 사실상 다른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여러 근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인은 자신과 모든 격렬한 공격들과의 사이에다 하나님을 둠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의인들의 모든 ’장막‘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의인들의 자녀들도 그의 사랑으로 품으사 아버지의 사랑으로 보살펴 주심을 받도록 택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다 단순한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택한 자들보다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거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2. 본문 11절은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입니다.
1) 이 말씀은 우리의 죄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해 주기 위해 시인이 특별하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을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완전히 제거시켜 주시기 위해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긍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요새와 방패로 나타내시고 우리에게 피난처의 그늘을 드리우시며 우리가 사는 곳에 거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알려주심에도 우리가 이토록 풍성하고 만족스런 약속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는 진실로 가장 배은망덕함이 아니겠는가?
시편 91 편
우리가 혹 자신의 엄위하심에 대한 생각으로 두려움을 가질까 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암탉의 미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혹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의 세력과 우리가 직면한 많은 위험들로 인하여 공포에 질릴까 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모든 낮선 세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사실을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격려하는 모든 시도를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머뭇거리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거나 혹은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유일한 보호에 맡기기를 주저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음으로 천사들을 명하사 그들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긍휼과 우리 연약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덧붙여 설명하려고 시인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예비해 놓으신 천사들의 수효가 많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 천사만 정하여 매 성도들을 지키도록 하시지 않으시고 하늘의 모든 군대를 명하사 모든 개개의 신자들을 지키도록 하십니다.
시인의 말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로 시편 34편 7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성도들은 각자가 자기 자신을 지켜 주는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원수들이 많으니 우리를 보호해 주는 친구도 많다는 생각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 천사가 사명을 띠고 우리 위에 머무른다고 생각한 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자기를 대적하기 위해 정렬하는 원수들의 큰 군대를 멸시하면서 가졌던 생각과 같이(왕하6:16) 우리의 안전을 위해 수많은 무리가 사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 약속을 더욱 더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한 뛰어난 천사가 한 사람씩에게 배정된 것처럼 말했다고 성경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천사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여 몇몇 모든 민족들을 위해 한 천사를 배정하시고 또 한 사람을 위해서 여러 천사들을 보내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천사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해 함께 일하는 정확한 방법을 자세하고 뚜렷하게 알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한 사도(히브리서 기자로 보임 - 편집자 주)가 권위있는 말을 통해 천사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해 지정된 봉사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항상 자기들이 할 일을 한다는 생각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사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보다 강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2) 시인은 이제 이 구절에서 교회의 지체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시편 91 편
그러나 마귀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용했습니다.
마귀는 쉬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더럽히려 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반 원리와 관련되는 한 마귀는 어떤 것이건 허울 좋은 외관을 씌울 수 있기 에 충분히 날카로운 신학자가 됩니다.
우리 온 인류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쫓겨났을 때 우리는 천사들과 함께 어느 것이고 공통적으로 소유하지 못하게 되고 천사들도 우리와 교통을 나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천사들을 갈라놓을 모든 조건들을 다 제거하시고 우리와 천사들이 화목케 하신 이는 오직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엡1:10) 하늘과 땅에 서로 분리되어 있던 것들을 하나로 모이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고유한 직분입니다.
이 사실은 거룩한 족장 야곱에게 사다리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창28:12).
이것은 우리가 천사들과 한 몸으로 연합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1:51)고 말씀하셨습니다.
3) 시인이 “네 모든 길”을 복수로 덧붙임은 우리가 어느 곳을 가든지 천사들이 항상 우리를 지켜 주기 위해 다니는 것을 볼 것을 보다 분명히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나아갈 길은 많은 풍파와 변화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 우리가 시달리기 쉬운 모든 풍랑을 다 말하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사들이 우리의 모든 특별한 행위와 목적들을 주관하므로 우리가 요동한다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곳에서도 천사들의 보호를 받는다는 확신입니다.
“네 모든 길”이라는 말씀은 십중팔구 우리가 잘못된 걸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해, 또 우리가 우리의 부르심에 합당한 범위 내에 자신들을 제한하도록 권면하기 위해 우리에게 적절한 묵상과 절제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방자하게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보증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추구하여 가상적인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다면 우리는 천사들이 우리의 무모한 행위를 돕는 사역자가 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시험했을 때 교묘하게 이 구절을 빼놓음으로서 그리스도로 무모하게 성전 꼭대기에서부터 뛰어내리도록 유혹했을 것입니다.
3. 본문 12절은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입니다.
시편 91 편
시인은 계속 천사들의 보호에 대한 보다 고상한 개념들을 우리에게 말하면서 그들은 우리들이 죄악에 떨어지지 않게 정신을 차리고 주의하다가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의 손으로 우리 발걸음을 붙들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지 않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단순히 그 외모로만 판단한다면 그들은 진실로 그들의 지나온 걸음을 돌이켜 볼 때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없는 자요, 종종 애를 쓰기는 하나 힘들어 헐떡거리는 자이며 때로는 비틀거리고 넘어짐으로서 자기 길을 나아가는데 수고만 기울이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연약 가운데 있기에 오직 하나님의 유일하신 도우심으로 순간 순간 넘어지거나 멸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도움을 받는다고 시인이 그토록 찬송하는 것은 별로 신기한 일이 못됩니다.
한편 하나님이 여기 묘사된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한 사단이 우리의 기도를 대적하려는 모든 극심한 장애물에 우리가 넘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 언급된 두 가지 말씀 즉 우리 자신은 연약하다는 것과 우리의 길에 놓여 있는 거칠고 험악한 가시밭 길과 우리 마음의 특성을 없애 버리는 어리석음과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매복하고 있는 죄악의 교활함을 하나로 연결시켜 생각함으로서 천사들이 그들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비상한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시인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머리입니다.
또 우리가 인도자 되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술수에서 비롯됩니다.
또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심으로 우리들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도록 해주시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완전히 파멸되어 버리거나 진멸되도록 허락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우리를 받쳐 우리들을 붙들고 계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시편 91 편
시91:13-16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이 시편을 신약에 비춰보면 그 내용은 내세적(來世的) 구원까지 포함해 보여줍니다.
이 시는 교훈시 혹은 신앙시라기 보다 차라리 약속시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13-16).
(1)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14절 상반).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ק (카솩)인데 “딱 붙음”(cling)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든 다른 것들을 내버리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부착(附着) 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그를 믿음에 있어서도 가장 진실되이 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입니다(14절 하반).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인생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모르게 되었기로 하나님은 그것을 가장 슬프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모르는 자를 가리켜 “죽은 자” 라고 하셨습니다(엡2:1).
하나님은 지금도 그를 모르는 인생에 대하여 사랑이 얼마나 크시며 또 얼마나 슬프게 생각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때 아무리 붙들고 울어도 감각이 없는 그 시체를 보고 우리는 얼마나 안타까워 하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증표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를 귀히 여겨 높이십니다.
(3)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그에게 기도하는 자입니다(15).
믿음의 작용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구원해 주시며 영화롭게 하시며 장수케 해 주십니다(15절 하반, 16).
1. 본문 13절은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입니다.
동일한 진리가 여기에서는 다른 말로 표현됩니다.
시편 91 편
시인은 일찍이 사단이 우리의 길에 던져 놓은 장애물을 “돌”에다 비유했습니다.
시인은 이제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근심을 “사자, 독사, 젊은 사자, 뱀”에 비유합니다.
진실로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우리는 맹수들, 곧 우리를 파멸로 위협하는 맹수들 가운데로 걸어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하나님이 우리가 어느 곳에서든지 많은 죄악들을 이겨 승리할 수 있도록 약속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결과가 오겠는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시험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시인이 주님의 백성들의 마음에서 불안감을 제거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과장된 표현을 사용한다고 조금도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실제로 과장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처지를 참되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험스러운 광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자신의 용기를 크게 자랑하다가도 실제로 위험에 직면하게 되면 그 즉시 가장 사소한 것들도 사자나 뱀이나 무시무시한 위험의 무리로 생각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입을 통해 이런 우리 육체의 불안의 연약을 지적합니다.
히브리어 שחל(샤할)을 칠십인역은 “독사”라 했는데 본래는 “사자”란 의미입니다.
한 문장 안에서 같은 것을 반복할 때 두 번째에서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히브리어가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언급된 네 동물을 그 특수성대로 엄밀히 구분할 필요 없습니다.
다만 “사자”와 “젊은 사자”는 맹렬하고 막강하게 우리를 공격해 오는 공개적인 위험을 가리킵니다.
“독사” 나 “뱀”은 마치 독사가 그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오듯 가만히 또는 예기치 않게 원수들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은밀한 해독(害毒)을 가리킵니다.
2. 본문 14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입니다.
시인이 지금 말하는 주제를 또다시 반복하고 확대시키는 점에 대해 싫증이나 혐오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우리 연약을 진지하게 묵상해 위험이 닥쳐오는 불안한 시기에도 마땅히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게 해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인은 이제 자기가 말했던 바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그의 음성으로 확증하시는 것으로 소개합니다.
시편 91 편
또 이 구절에서 주의깊게 살펴야 할 점은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날개 아래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으로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망이나 믿음을 가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 חשק(하샤크)는 바람 또는 사랑이란 뜻을 가집니다.
우리도 어떤 대상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을 보통 이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여기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신뢰하여 안식을 누리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만일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지켜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뻗쳐 있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사망과 멸망에 둘러 싸일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불신자들에게도 도움을 주시기는 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신자들의 구주가 되어 주신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손은 오직 신자들에게만 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 는 것은 그들이 신뢰심과 기대에 연관해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무식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왜 사람들이 위급한 시기에 헛되이 다른 여러 곳으로 눈을 돌이키려 하겠는가?
이런 자들은 전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속이고 어렴풋한 어떤 생각으로 하나님 대신 자기들이 고안해 낸 단순히 죽은 우상으로 대치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신뢰함에 비롯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르도록 해주기에, 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이름에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자가 아니고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찾는 자가 있을 수 없기에 시인은 큰 예절과 신실함을 가지고 이 지식은 믿음에서부터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시인의 교훈은 우리가 교황주의자들이 믿음에 대해서 가르치는 내용이 무의미하며 잘못된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큰 유익을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암시적으로 가르치면서 사람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공개되어 있다는 말씀을 매장해 버립니다.
“높이리라” 또는 ‘높이 들리라’는 표현은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로 유지되다는 뜻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비유를 한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비상한 방법으로 보호하사 그들을 일으켜 마치 높이 솟아 침략할 수 없는 요새로 들어올리시는 것처럼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91 편
3. 본문 15-16절은 “(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대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입니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 안에 우리의 사랑과 기쁨을 두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과 소망은 우리들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하나님 말씀에서 적절한 근거를 가진다는 사실에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 우리들 자신의 마음이나 의지의 암시를 마음대로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로 하여금 자기에게로 나아오도록 우리를 불러 주셨으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구해야 합니다.
또 본문의 내용은 믿음이란 나태함이나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험으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이 올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또 우리는 신자들도 근심과 궁핍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교훈도 덧붙여 배웁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안이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약속해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환난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희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즉 이 시에서 언급되는 구원이 단지 일시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고 마침내 신자들을 완전한 복에 이르도록 해주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성도들에게 많은 영광을 돌리고 특별히 성도들 가운데 있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승리의 근거를 마련해 주시기 전에는 그들의 길이 완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많은 주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일찍 떠나가 버렸음에도 마지막 절에서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장수하는 것’ 이라고 말하는 점은 이상히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을 반복하거니와 현재의 썩어질 세상과 관련해서 약속된 하나님의 복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나의 고정되고 공평한 법칙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귀나 다른 세상적인 위로가 어느 정도 하나님의 은총이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결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강건함과 좋은 건강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시편 91 편
그러나 이런 생각 때문에 하나님은 연약함과 질병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계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장수(長壽)는 이런 종류에 속한 복으로 하나님이 모든 자기 자녀들에게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서 일찍 떠났다고 그들이 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짧은 기간 사는 동안에 수천년을 사는 악인들보다 더 많은 만족을 누립니다.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라는 말씀은 악인들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악인들은 오래 산다 해도 자기들의 욕망에 갈증을 느껴 계속 목말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명은 이러한 욕망으로 소란이 일어난 생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한순간이나마 유일하게 참된 만족을 누리게 해주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누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주의 백성들에게 속한 특권을 가리켜 적절한 말로 ‘장수함으로 만족을 누린다’ 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짤막한 말씀을 만족하고 매우 풍성한 의미로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장수가 영원과 비교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땅에 존재하는 좁은 경계선을 훨씬 초월해 있습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근본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시인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다른 모든 복들을 먼저 말한 후에 마지막 절에 이르러서 하나님은 성도들의 생활 전체를 아버지같이 보살펴 주시는 인자로 그들을 따라다니시다가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들에게 그의 구원을 보여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92:1-4 지존자여
이 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행적을 볼때 이 찬송을 할 만한 근거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줍니다 특별히 이 시는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악인들을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들어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에게 의를 행하도록 용기를 줍니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연약해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이 시에서 우리의 복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모든 환난을 사라지게 해줍니다.
한편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는데서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 죄인들은 번영을 누리는 시간에도 신속하게 멸망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의 찬송 시
1. 본문 1-3절은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입니다.
1) 비문들이 말해 주듯이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 시를 노래하는 관습을 가졌습니다.
여러 다른 시들도 이러한 용도를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성구들을 살펴볼 때 분명한 사실입니다.
(1) 본문 1-2절은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입니다.
3절로 이어지는 말씀을 히브리어의 문자 그대로 연결해서 읽는다면 ‘주께 감사하는 것이 좋으니’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동사의 단어 앞에 붙어 있는 ל(라멧) 에 근거하여 시인은 한 특별한 날을 정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부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특정한 날에 하나님의 사역을 찬송했다는 말은 일리 있습니다.
시인이 이 시를 안식일에 적합한 시라고 하는 데는 매우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것 저것을 다 받아 주실 것처럼 나태함으로 허비하는 날이 안식일이라면 이 날은 거룩한 날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일들을 전폐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사역을 묵상하는 날로 지낸다는 의미에서 거룩한 날입니다.
시편 92 편
우리의 마음은 한결같지 못하여 여러 가지에 주의를 빼앗기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자신을 하나님 찬송하려 한다면 다른 모든 관심들에서 떠나야 합니다 시인은 안식일을 올바르게 지키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빈둥거리며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하는 주장은 예배의 유익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반 명령에 따라 일하고 하나님께 향함으로 안식하려는 예배를 주장합니다.
우리 수고가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그 다음 구절들에서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근거를 밝힙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가 없이 우리들이 이 경배를 드리도록 불러 주셨다거나 또는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과 “성실하심”을 기억하여 우리들이 이것들에 올바른 의미와 경험을 가졌다고 할진대 이것을 우리의 마음속에 뜨겁게 느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시인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들 자신은 배은망덕과 완악함으로 그 찬송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의 고유한 대상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우리의 충실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이는 핑계할 수 없는 무관심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시인이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아침에” 주의 성실하심을 “밤마다” 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이상하게 여겨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한결 같아서 어느 특정한 기회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왜 한낱 적은 부분에만 그 인자하심을 찬송한단 말인가?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도 밤에만 나타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려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른 새벽부터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시작하여 가장 늦은 저녁 시간까지 계속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송하게 되면 다음엔 그의 성실하심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의 계속적인 찬송을 받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
시편 92 편
시인이 말하려는 것은 단지 태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계속되는 한 마땅히 감사해야 할 직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계속 찬송을 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시인은 더 적극적으로 노래하는 직분을 맡은 레위인들에게 악기를 연주하라 합니다
이것은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 아니라 다만 기본적인 도움을 주는 데만 유익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들 자신이 수금의 선율만으로 즐거운 느낌을 가지듯 하나님이 수금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젊은 유대인들은 이러한 유치한 요소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악기를 사용한 의도는 예배하는 자들을 자극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마음을 다 기울여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단지 백성들을 진전케 해주는데 도움이 될 뿐인 이러한 외적행사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만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림에 아직 연약하고 유치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뿐 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과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교회가 완성된 단계에 도달한 지금 분리된 시대의 그림자를 도입하는 것은 복음의 빛을 매장시키는 결과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볼 때 교황주의자들이 악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용하던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림자에 불과했고 복음과 더불어 종식을 고한 구약 시대의 예배에 나타난 하찮은 유희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애매모호한 방법으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칼빈은 공중 예배시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뜻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목소리로 곡을 붙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매우 존귀하고 유익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은 사도들이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과 음악이란 사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헌신의 열심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루터의 충고를 받아들여 개혁교회의 공중예배 순서 중 자국어로 된 가사에 평이하고 쉬운 멜로디를 붙여 모든 사람들이 배우기 쉽고 다 함께 부를 수 있는 시편을 노래할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Clement Marot 이 다윗의 시편을 파리에서 프랑스식 리듬을 붙여 번역 출판해 내자마자 칼빈은 제네바에서 그의 교인들에게 이것을 소개하고 신도 대중음악으로 사용했습니다.
시편 92 편
그러자 이것이 곧 수많은 프랑스의 개혁교회 교인들에게 보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Marot 의 시편은 제네바에서 요리문답 책의 부록에 삽입되어 칼빈주의적인 예배와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의 독특한 표징이 되었습니다.
Marot의 번역은 공중예배에 있어서의 어떤 변혁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인이었던 프란시스 1세와 프랑스 여인들에게 바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건전한 교리와 모순된 점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처음으로 소로본느의 재가를 받아 채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책을 소르본느의 박사들보다 더 높이 평가했으며 칼빈의 영향에 의해서 프랑스의 신교 예배에 채택되었습니다.
이 책은 비상한 대중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프랑스에서 개혁 교회가 우세하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남겼으며 가장 극심했던 형벌을 받을 때에도 이 시가 애송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에서는 시편을 노래하는 것과 이단이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2. 본문 4절은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입니다.
시인은 안식일이 노는 날이 아니라 우리의 전심전력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묵상하는 날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동시에 시인은 하나님의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시는 인자를 깨달아 느낄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 찬송을 돌릴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부여받은 자로 이 찬송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시인의 말 속에는 그가 이미 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자기들을 적절하게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행사에서 분명해진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기쁨이 생겨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실 때와 우리의 복을 위하고 계시는 분이 심오하고 깨어있는 관심을 나타내 주실 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짐승 같은 무관심이 우리를 주장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속에 들어있는 목적을 깨닫거나 음미할 수 없습니다.
우주 만물도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인자하시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표적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고 거룩한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시편 92 편
시92:5-8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1. 이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함이 좋다고 합니다(1-3).
시인이 좋다고 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 합당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분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이 시인이 하나님께 찬송한 이유도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놀라운 구원의 행사를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4-6).
이 행사에 대하여 이 시인 자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간섭인 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사람마다 다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영적으로 새로워진 자만이 그것을 깨닫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악인은 그 사고 방식이 일반 동물 수준에 속하여서 감각 세계 이상의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3. 이 시인은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흥왕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처지를 만족하게 생각합니다(7-15).
시인은 악인의 흥왕하는 것이 풀의 자람과 같이 빠르지만 그것이 이 세상 뿐이고, 또 장구하지 못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또 지극히 높으신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8).
1. 본문 5절은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입니다
시인은 일반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행사를 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다 특별하게 말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에 대한 형벌을 지연하시고 계시지만 적당한 때가 되면 그들의 죄를 간과하심으로 묵인해 주거나 그들을 잘못 보는 일이 없으실 것을 보여주십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시지만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복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이러한 특별한 문제를 취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 체계가 인간들의 행위의 고르지 못함과 무질서로 인해 많이 가려지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악인들이 승리하며 마치 자기들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는 것처럼 자신의 행운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근거로 과도하게 지나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92 편
우리 마음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은 우리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지 않고 하늘에서 빈둥빈둥 앉아 계시기만 하신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 유혹을 가중시킵니다.
또 우리들이 육체의 근심으로 얼마나 순식간에 주저앉아 버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내용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하나님은 늘 깨어 보살피심으로 모든 인류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인이 이 말씀을 할 때 선포하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우리의 이해력이 무서운 질병과 무질서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방식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영감을 받은 저자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나 일반적으로 세상을 섭리하시는 통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 가운데서 행하시는 심판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행사를 크시다 하고 하나님의 생각은 깊으시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만사가 우리의 생각대로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질서를 완전히 뒤엎어 버릴 것입니다.
혹 그렇게까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속히 의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지 않고 또 악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시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을 충고하려고 할 것입니다.
악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할 때, 그들이 감히 저지를 수 없는 죄악을 주저하지 않고 범할 때, 그들이 선한 자들과 무죄한 자들을 고의적으로 핍박할 때 하나님께서 참기만 하신다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완전성과 가장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악인의 불의와 강퍅함에 지배를 받도록 해놓고 허다한 거짓과 속임수와 약탈과 피흘림, 그리고 온갖 흉악한 행위들을 막으시지 않는 것이 우리의 눈에는 견디기 어렵게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가 흐려지며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짓밟힌 것을 보고만 계십니까?
이것이 바로 시인이 감탄하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위대함이요 생각의 깊음입니다.
우주 만물에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이해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특별히 말하려는 의도는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섭리적인 통치를 행하시지 않는 경우에 하나님을 비방하는 우리의 성품을 지적하여 훈계하려는데 있습니다.
이 문제에 인간의 일반 개념과 일치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순종을 시험해 보기 위해 우리의 생각을 훨씬 초월한 심오하고 신비로운 심판을 행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경외함으로 이에 대한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시편 92 편
2. 본문 6절은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 속에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을 찬송해야 하는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과오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적절하게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심판은 심오하고 신비롭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우매함과 무관심을 버리기만 한다면 별로 어려움 없이 이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들을 일깨워 줍니다.
시인은 “우준한 자” 라는 말로 불신자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면서 암암리에 이들을 말씀과 성령으로 신적 조명을 받은 신자들과 대조시킵니다.
시인이 말한 무지와 우준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조명을 받지 못한 사고력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 예외 없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판단을 정결케 하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시인은 교만한 자들이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종종 터뜨리는 멸시를 근거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입증하면서 그들의 어리석음과 우준함을 부분적으로 꾸짖음과 아울러 우리들이 무감각한 상태에 있다가 하나님의 신비하신 행사에 대해 적절하고 진지한 묵상을 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 줍니다.
3. 본문 7-8절은 “(7) 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8)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입니다.
시인은 뚜렷하고 적절한 비유로 악인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즉각 억제하시지 않으실 때에 하나님을 이겨 승리해 보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지적하여 밝혀냅니다.
시편기자는 가능한 정도까지를 허용합니다. 그들이 흥왕하고 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흥왕 하는 것은 마치 풀과 같아서 단지 잠깐 뿐이요 그들의 형통은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린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시인은 거의 모든 자들에게 보편 장애물과 공격의 근거를 제거합니다.
속히 망할 운명에 처해 있는 자들의 복을 부러워하는 것이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흥왕하다가도 내일은 잘려서 날아가 버리는 자들의 복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입니다(시129:6). 우리가 지금 인용한 시편을 생각해 보면 악인들에 비유된 풀은 지붕에서 자라는 덤불과 같은 것으로 깊은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자라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악인의 형통함이 마치 왕성하게 자라 곧 낫을 기다리고 있는 풀과 같이 신속하게 무너져 버릴 것을 비유로 말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시편 92 편
그들의 형통이 짧다는 사실과 그들을 기다리는 영원한 멸망이 서로 대조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가리켜 메마른 식물이 다시 소생하듯 또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자르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로 정죄하셨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은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는 권세와 직분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의 보좌의 안정성과 이 세상 유동성과 변화성을 비교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아무것도 고정되고 지속적인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보는 것으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서 자신에게 아무 영향을 미칠 수도 없고 연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는 이 땅에 속한 모든 변화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과 구별되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단순한 사실 이외에 또 한 가지, 즉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하시다는 사실에 마땅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편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이하고 신비로운 섭리를 묵상함으로 우리 자신이나 이 세상보다 위에 있는 것을 향하여 우리의 생각을 집중시킵니다.
우리의 세상에 속한 마음은 어둡고 혼잡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적절한 생각들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따라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영원한 존재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짧은 세월 동안만 살도록 지음을 받은 우리들은 종종 많은 어려움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를 방해받거나 곤란을 겪거나 중단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 기회가 주어지면 너무 기뻐하여 일을 경솔히 처리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앉아 계시고 지혜로 심판을 집행하고 계시는 영원하고 변치 않는 보좌를 향해 우리의 눈을 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배웁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된 존재를 단순히 찬송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음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많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며 영원하신 능력으로 그들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 해 줍니다. 그러기에 이 구절들에서 역으로 대조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부르신 자들에게는 고난의 세월이 긴 것 같으나 짧습니다.
또한 그 신자들의 생이 영원에 잇대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92 편
시92:9-11 여호와여 주의 원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만큼 주의 원수는 주의 심판에 의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본문 9-11절은 “(9)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흩어지리이다
(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 이다
(11)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에게 보응하심 을 내 귀로 들었도다” 입니다.
1) 시인은 앞 절에서 이미 말한 내용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을 넘어뜨리시지 않을 수 없다고 결론합니다.
시인이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강한 시험을 당할 때 믿음을 견고히 갖는 것이었습니다.
또 시인은 특별히 많은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켜 곁길로 나아가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악인들의 형통에 관해 말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갖게 될 당혹감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이 점에서 보다 더 예리하고 견디기 어려운 시험 당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감탄과 반복을 모두 사용해서 보다 강력하게 말씀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원수들의 멸망이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만큼이나 확실하며 자기 눈으로 목도한 만큼이나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다시 이 주장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것을 통해 이 시인이 이 세상을 초월하여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까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다보는 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악인의 형통으로 인해서 흔들리는 경우에는 시인을 본받아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원수들의 승리가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 지니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시편 92 편
하나님은 이유 없이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인 한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과 가장 상반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악인들과 도저히 화목할 수 없는 싸움을 선포하십니다.
악인이 왜 패망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주의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줍니다
악인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증오의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 못지않게 그들을 벌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이어서 시인은 자기가 이 구절에서 의도하는 것이 모든 근심과 수고와 고민과 번민에 눌려 있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근거를 제공해 주고자 함이었다고 합니다.
시인는 하나님의 복 누리는 것을 “기름” 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푸른’ 혹은 ‘신선한’ 기름이라는 말로 그 복이 오래되어 상하거나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못한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시인이 자신의 개인적인 위로를 위해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예외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졌다고 말하는 점은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일반 교훈은 냉담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 한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숫자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시인은 그의 원수들이 어떠한 핍박을 가해 오든지, 즉 은밀하게 핍박하든지 아니면 보다 드러나게 격렬한 핍박을 가해 오든지 간에 하나님의 보호해 주심에 대해 세상의 환란을 굴하지 않는 정신으로 견뎌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시편 92 편
시92:12-15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하나님께 속한 의인은 그의 높여 주심을 받습니다.
의인을 “종려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에 비유한 이유는 종려나무는 곧기 때문이며 레바논의 백향목은 눈 가운데서도 언제나 청청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풀과 같지 않아 견고히 서서 장구한 세월을 살기 때문입니다.
또 의인이 “여호와의 집에 심겼다”함은 그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양식으로 힘으로 얻어 영생하며 결실하기 때문입니다(13, 14).
1. 본문 12-14절은 “(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 하리로다
(13)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14)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입니다.
시인은 이제 또 다른 일반 진리,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비록 많은 시험과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환난으로 덮치게는 하시지만 마침내는 그 백성들을 결코 잊어버리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실 것이라는 진리에 눈길을 돌이킵니다.
우리는 시인이 이 점에 대해 이토록 명백하고도 주의 깊게 말하면서 하나님의 성도들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경우에도 장차 일으켜 주신다는 사실과 구원을 바라다보는 것이 조금도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대해 조금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의인은 잠깐 동안 말라 버린 것처럼 보이거나 잘리워 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다시 새로운 힘으로 소생하여 잘 장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교회의 행사는 레바논의 위엄 있는 나무들처럼 되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라는 표현은 의인들이 힘있게 성장한 이유를 보여줍니다.
또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단지 그곳에 있었을 따름이 아니라 확고하고 깊게 그곳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하나님과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궁정”이라 말 한 것은 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뜰에서 경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 ‘심기운 자’ 라는 말씀을 통해서 시인은 그 백성들이 참되고 신실하게 하나님과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이야말로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근거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흥왕이 변하거나 흔들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시편 92 편
진실로 우리는 성소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것은 무엇이 되어 있든지 계속 흥왕하여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자연적인 수분과 진액이 말라 버리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늙은 때에도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그들이 보통 사람들의 운명에서 제외 되어있다는 것이요, 자연의 일반 법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될 변혁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복된 시기에는 백세가 된 자가 어린 아이와 같으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자연적으로 볼 때는 죽을 나이에 다달았고, 백년을 산 사람은 매우 죽음에 임박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그 나이가 단지 어린 아이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경말씀에서 “수가 많고 기운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라고 할 때 하나님의 택하시고 부르신 신자들에게서 육신의 죽음이란 새 세계로 들어가는 생명의 출발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죽은 이후에 하늘에서 새로운 실체를 갖게 된다는 의미에서만 입증될 수 있습니다.
2. 본문 15절은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입니다.
이 구절을 볼 때 시인이 크게 다루는 주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일들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무질서로 마음의 혼란을 일으키기 쉬운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는 고통스럽고 수고스럽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악인들은 부귀와 권세에서 흥왕해집니다.
그렇게 악인들이 높고 가치 있는 지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 처해 있을 때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빛과 질서를 비추사 분명히 혼란을 몰아내신다는 소망을 갖도록 해주려는 것을 시인은 그의 주안점(主眼點)으로 가집니다.
특별히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라고 말씀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죄악으로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는 대로 만사가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게으르시고 불의로 그의 백성들을 버리사 죄를 범하게 버려 두신다고 결론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보응하시기 앞서 공의를 지연시키실 때 악인들이 누리는 번영은 단지 그들이 받아야 할 멸망 전 징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바위”로 불러 자기가 하나님이 공의를 베푸사 보호해 주시는 자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두 번째로 보여줍니다.
시인에게 허락된 이런 지식은 실존적, 혹은 실체적, 실천적인 지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