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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선의 시세계
타인의 고통에 대한 위로, 내시경으로 본 객체의 내부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는 되지 말자.
- 수전 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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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모든 사람은 시인이 되고 싶어한다. 그렇지 못할 때 철학자가 되고 과학자가 된다. 이것이 시인의 우수성을 증명한다. H. D. 소로의 말이다. 최재선은 한일장신대 교수로서 수필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수만 평 시의 밭을 경작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때, 가장 기본적인 척도로 삼는 것이 사실개념으로 볼 것인가, 가치개념으로 볼 것인가이다. 가치개념으로 보면 시인이라고 해서 다 시인일 수 없다. 시인다운 시인만 시인이다. 무엇이 시인다운 시인인가. 나는 시와 삶이 유리되지 않을 때,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최재선 교수는 삶 그 자체가 문학이다. 한마디로 문학적 생활 속에서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시가 되는, 그런 시적인 생활, 깨달음과 발견의 삶을 살고 있는 분이다. J. 아이핸도르프는 ‘시인은 세계의 눈’이라고 했다. P. B. 셀리는 ‘시인은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입법자’라고 했다. 최 시인은 시를 쓰고 시를 가르치고 무엇보다도 시를 사랑한다는 차원에서 세계의 입법자로서, 세계의 눈 역할을 다하고 있다. T. S. 엘리어트의 말처럼, 그는 새로운 소재를 찾고, 더 나은 시적 표현, 다른 해석으로 좋은 시가 되게 하며, ‘핍진성’과 ‘개연성’으로 실감을 주려고 노력한다.
시인에게 체험이 중요하지만 최 시인은 자신의 체험만 가지고 시를 쓰지 않는다. 이성과 가치관, 윤리 등이 시적 화자의 체험을 확장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 입장에서는 정황과 정서가 상상력으로 뻗어나가야 하는데, 시인이 그 시적 화자를 통제하는 그림자로 남는다면 시세계는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체험을 간절하게 활용하는 가운데 생각해야 할 것은 대상과 현상을 내밀하게 사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밀하게 사유한다는 말은 대상과 현상의 내적 요소를 내시경으로 살피듯 진지하게 섬세하게 직관한다는 뜻이다. 바로 ‘내시경 기법’이다. 이 기법으로 진지하게 대상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그것을 적합한 언어로 표현하면 진정성이 확보될 뿐더러 섬세한 표현이란 평가도 받게 될 것이다. ‘내시경 기법’을 동원하기 전에 최 교수는 시적 화자의 체험을 확장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상상력을 체험에 포개어 정서와 사상의 깊이와 진정성을 견인한다. 이 지점에서 시적 화자의 상상적인 힘과 경험적 맥락이 시에 투영된다. 슬픔이나 우울 같은 어두운 정서든, 따뜻함이나 황홀 같은 밝은 정서든 간에 그 정서에 간절하게 푹 젖어 있는 화자를 발견할 수가 있다. 이제 현미경을 들고 시집 속으로 들어가 보자.
Ⅱ.
정치가도 기업인도, 그리고 과학자라 할지라도 앞으로의 승부는 창조적인 상상력에 달려 있다. 상상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반대의 것을 통합하는 능력이다. 의견을 달리하는 견해란 상상력을 자극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어떠한 문제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상상력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수학문제에서나 그럴까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그것이 정치적이건 혹은 사회적이건 군사적이건 간에 경영자가 취급하는 것과 같은 불투명한 문제가 많은 영역에서는 새로운 상황을 낳게 하는 데 있어서 창조적인 해결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시인은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 현대는 상상력이 유일한 도덕이 되어야 한다. 정의가 아니라 합리가 아니라 상상력이라는 나침판을 가지고 항해하지 않으면 시인의 배는 좌초하고 만다. 상상이란 그 실현보다도 실현의 가능성에 그 가치가 있는 법이다. 오죽했으면 아인슈타인도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겠는가. 이 상상력에 비추어 볼 때 최재선의 삶터는 상상력의 언덕 위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일찍이 앙리 르페브르가 이야기한 것처럼 현대문명사회는 양식을 잃어버렸다. 양식이 사라진 곳에 오롯이 남게 된 것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쾌락의 감각뿐이다. 그리고 양식이 사라졌으므로 그러한 세계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현실처럼 되어버렸다. 사유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양식이 사라진 거리는 물화된 사물의 즉흥적인 이미지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이때 대중소비사회의 재화를 통해 가장 중요하게 제시되는 것은 소비와 감각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저 끊임없이 욕망하고 말초적인 자극을 감각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남겨진 과거의 양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비극적 이미지 속에서 최재선의 시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이미지가 이러한 비극을 표상할 때, 시인은 세계의 어떠한 지점을 바라보고 어떻게 그것을 재현하는가. 시에서 이미지는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렇다면 시인이 맞닥뜨린 이러한 세계 속에서 시는 어떠한 이미지를 응시하고 있는가. 욕망과 쾌락이 지배하게 된 세계 속에서 시인은 그와 같은 세계의 비극적 국면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최재선 시인의 세계에 대응하는 자세는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뱃길 없는 섬
이마 벗어진 무덤가 할미꽃
바닷바람에 허리 괜찮을까요?
신호등 없는 마을의 카페
문 여닫는 그림자 없어
오늘 불 꺼지지 않을까요?
어느 시인의 외딴 골방
쓰다 만 원고지 빈칸에
봄볕 발자국 남기고 갈까요?
먼 산 울음 삼키는 꾀꼬리
울림소리 예제에 흘려놓고
눈물 마르기 전 닦을까요?
마른 처마 적셨던 빗방울
탯줄 자르다 멈춘 꽃나무들
몸 다시 풀어 젖힐까요?
- <문안하다> 전문
‘문안’이라는 낱말은 최재선 시적 사유 안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문안하다’는 말은 일단 시적 화자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일차적으로 내포한다. 진선미에서 ‘미’는 사랑과 용서를 품고 있는 포용적 가치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시는 사랑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적 대상은 ‘뱃길 없는 섬’, ‘신호등 없는 마을의 카페’, ‘어느 시인의 외딴 골방’, ‘먼 산 울음 삼키는 꾀꼬리’, ‘마른 처마 적셨던 빗방울’ 등 다섯 개의 객체다. 이들 오브제는 ‘섬’ ‘카페’ ‘골방’ ‘꾀꼬리’ ‘빗방울’로 축소되면서 유정물 하나와 무정물 넷으로 구분된다. 시적 화자가 주목하는 대상들은 전부 온전하지 못한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비극적 이미지의 집합이다. ‘뱃길 없는’ 섬이 그렇고, ‘이마 벗겨진’ 무덤이 또 그렇다. 시적 화자의 걱정은 매우 디테일하다. 디테일은 대상에 대한 애정과 함께 감동을 창출하는 핵심 요소다. 시적 화자는 그냥 할미꽃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거센 해풍에 혹시나 할미꽃의 허리가 부러질까 하는 염려다. 어느 시인이 묵고 있는 외딴 골방에 햇빛 한 줄 비치기를 소원하는 마음에는 인류애적인 휴머니즘이 녹아 있다. 최재선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이름 없는 시인의 골방에 햇빛이 들기를 바라겠는가. 마지막 연은 압권이다. 탯줄 자라다가 멈춘 꽃나무들 ‘몸 다시 풀어 젖힐까요’하면서 이름 모를 꽃나무들의 탯줄 자르는 것까지 봐내는 것은 ‘내시경적 기법’으로 시를 써온 최 시인의 내공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노란 민들레와 흰 민들레
갈마들며 피는 상관 신리
고난주일 끼니 묵힌다
사적인 개화를 위해
놉 얻어 이어 굶지 말 것
날짜 셈하며 세월 내걸고
간헐의 찬양하지 말 것
빼빼 마른 뼈대 세우고
사소하게 뿌리내린 자리
개인적 개화 인용하지 않은
홀씨
의
비행
금식은 가벼워지고
자리까지 은밀하게 비우려는
애매한 신념에 관한 혈서
상관면 왜목로 민들레
한때나마 봄날의 문장에
마침표 다듬어 넣고
왜가리 몸짓으로 난다
- <민들레의 금식> 전문
시적인, 너무나 시적인 표현에 감동하게 되는 건 무슨 연유일까. 시적이라고 하는 것이 ‘파란’을 ‘파아란’이라 하고, ‘빨간’을 ‘빠알간’이라 한다고 시적 표현이 되는 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적 표현이란 상식적인 보편문법을 파괴할 때 나온다. 보편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데서 생기는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표현일 때, 우리는 시적이라 하는 것이다. ‘파란’에서 ‘파아란’으로의 변용은 시적 표현이 아니라 ‘시적 허용’에 해당한다. 1연에서 ‘노란 민들레와 흰 민들레’가 ‘고난주일 끼니 묵힌다’는 표현은 시적 표현이다. 서술어의 특징과 화자의 의식 지향에 의해서 주어인 생물은 인격화되어 화자의 가슴에 이미지로 존재하게 되고, 우리에게 단식으로 인한 고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시가 언제나 당대의 문제를 호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비극적이고 파편화된 양상을 드러내려는 시인의 형상화 노력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지가 곧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세계에서 이미지에 주목하여 세계를 파악하려는 시인의 모습은 최재선 시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화룡점정의 마무리, ‘민들레/ 한때나마 봄날의 문장에/ 마침표 다듬어 넣고/ 왜가리 몸짓으로 난다’는 의미화 문장은 이 시의 압권 중의 압권이라 하겠다.
붕어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붕어를 낚는 낚시꾼도 낚이는 붕어도
운암호에 떠 있는 붕어섬도 아니다
추위의 강에서 대물은 아니지만
그저 그런 크기의 붕어를 건져 올린
전주노동청 앞 붕어빵 장수이다
겨울 낚시는 이 또한 지나가는 세월
한 허리에서 어구를 접어야 할 일
섬진강변의 청매가 탯줄을 자르면
붕어빵 장수는 부레에 바람을 갈고
붕어의 몸짓으로 지느러미를 펼친다
붕어빵 한 마리 덤으로 주지 않는
레미콘 차 넘나드는 아파트 공사장으로
시간제로 식기 닦는 식당 주방으로
붕어는 숨쉬기 곤란한 세상에서도
숨구멍 자꾸 막는 허기를 뚫으며
어떻게든 풀풀 살아가는 풀잎이다
- <봄이 되면 붕어빵 장수는 무얼 할까> 전문
시인은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이 그 어떤 시적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기를 희망한다. 이미지를 통해 시인들의 경험과 상상력은 실재의 국면으로 재현되어 하나의 시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추운 날씨에 시인의 시선은 전주노동청 앞 붕어빵을 굽고 있는 붕어빵 장수에 멈춘다. ‘공감’, ‘공감 능력’이 화두로 떠오른 시대다. 4차 산업과 AI시대의 도래와 함께 공감 능력이야말로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중요한 영역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나를 이입하고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은 최재선 시인이 가진 최고의 능력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저서 <타인의 고통(2003)>에서 지구 반대편의 재앙을 작은 스크린으로 너무나 손쉽게 접하게 된 현대인들이 타인의 고통과 끔찍한 참사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수전 손택의 문제의식은 최재선 시인의 문제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시인은 ‘붕어’를 ‘숨쉬기 곤란한 세상에서도/ 숨구멍 자꾸 막는 허기를 뚫으며/ 어떻게든 풀풀 살아가는 풀잎’이라고 의미화해서 시적 긴장과 시적 성취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파도는 사전에서
명사의 신분으로 살다
여자도 앞바다에서
동사로 옷 갈아입는다
소리도 사전에서
명사로 붙박여있다
여자도 앞바다에서
파도와 인연 맺고
파도소리로 다시 산다
어떤 이름이든
여자도 앞바다에서
동사로 출렁거리고
형용사로 사늑이 젖어
부사를 끼고 산다
여자만,
여자도 앞바다에
혼자 누워있을 뿐
- <여자도 앞바다의 품사> 전문
시는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되며 다층적인 지점과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시적 이미지는 시의 감각을 형성하는 데 주요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시인은 이 시의 첫 연 ‘기’에서 ‘파도’는 사전에서 명사의 신분으로 사는데, 유독 ‘여자도 앞바다’에서는 ‘동사’로 옷을 갈아입는다고 표현했다. ‘여자도 앞바다’에서 동사로 변하는 연유를 상상함으로써 독자는 시적 화자의 언어유희에 미소를 흘릴 것이다. ‘승’에서 ‘소리’에 대한 시인의 해석이 상상력을 배가시킨다. ‘소리’도 사전적으로 명사인데, 여자도 앞바다에서 동사인‘파도’와 인연을 맺고, 파도소리로 다시 태어난다. 인연화합에 의한 새로운 생성이다. 원자에서 분자 결합을 통해 ‘파도’와 ‘소리’는 각자 명사에서 ‘동사’로 다시 살아난다. ‘전’에 가서 시적 화자는 어떤 이름이든 ‘여자도 앞바다’에서는 동사로 출렁거리고, 형용사로 사늑이 젖어, 부사를 끼고 산다고 했다.
사전적이고 문법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품사체계를 선보인 이번 시는 중요 품사인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를 다 출동시켜 ‘출렁거리다’ ‘사늑이 젖다’ ‘끼고 산다’등의 구체어와 이어주면서 작가는 상상력을 고조시킨다. 정태적인 차원에서 낱말 형태나 성질에 따른 품사의 구분이 시인의 상상력에 힘입어 갑자기 낱말의 내적 특성인 움직임으로 품사의 구분 기준이 바뀜으로써 긴장과 놀람은 다시 ‘여자도 앞바다에서’라는 장소 부사구에서 한 번 더 심화된 상상력과 연상력을 요구한다. 이때 이미지는 수단이나 목적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가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미지를 재현한다는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품사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파도소리’는 그것의 내적 특질만으로 하나의 동적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시에서 묘사가 곧바로 의미로 전이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어법이 돋보이는 최재선의 작품들은 다음 시에서도, 아니 시 전부가 다 그런 변용의 시학과 인연화합의 생성을 통해 새로움을 확보하고 있다.
곁 부사 잔 관형사 없앤 감정
몇 송이 함축과 명료한 어휘
주어 드러내지 않은 비문으로
꽃그늘 아래 핏물이 흥건하다
- <자목련이 쓴 문장> 전문
외부세계의 충격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이 인간의 존재양식이라 할 때, 그러나 시인의 경우, 이 반응은 단순히 수동적이 아니라 그 외부 세계를 자기가 갖고 싶어하는 세계로 변용시켜 자아와 세계가 동일성을 이루도록 하는 능동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이 시에서 시인의 마음은 수동적인 기록자인 동시에 능동적인 참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시의 세계는 환상의 세계요, 가정의 세계이며, 좀더 낯익은 말로 표현하면 가능의 세계다. 시는 보이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꽃그늘 아래’ 흥건한 ‘핏물’은 현실의 어두운 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꽃을 보고, 위만 쳐다본다. 그러나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늘도 가보고, 위보다 아래를 주시해야 한다. 시인은 목련꽃을 보면서 목련과 동화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시에서 자아와 세계의 만남이 동일성으로서의 만남이 되는데, 이것을 듀이는 미적 체험이라고 정의했다. 자아와 세계가 각기 특수한 성격을 상실하고 하나의 새로운 동일성의 차원에서 승화됨으로써 미적 체험을 경험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목련을 유정물화하고 인격화해서 감정을 불어넣고 꽃잎으로 하여금 문장을 쓰게 한다. ‘형부는 위험하다.’는 <문장가로 가는 길> 제1조 1항 지침에 따라, 곁 부사와 전 관형사 전부 없앤 밋밋하고 단아한 감정으로, 몇 송이 함축과 명료한 어휘로 문장을 쓰지만, 주어가 드러나지 않는 비문이다. 그 주어가 드러나지 않은 비문을 ‘핏물’로 의미화하는 시적 화자의 상상력이 놀랍다. 이 시 역시 비극적 이미지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더 우리는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이미지를 통해 형언하기 힘든 시인의 내면을 관통할 수 있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꽃잎을 핏빛으로 바라보는 시인이 주어를 없애버려서 왜 그것들이 몸을 던졌는지 알 수가 없도록 했다. 짐작은 가기에 더욱 슬프다. 다시 3S에 주목해 본다. 미적 대상인 자목련이 어찌하여 시적 화자에게 비극적인 대상으로 보였을까. ‘명료한 어휘’로 봐서 그 또는 그녀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한 것 같지만, 그 메시지의 주체, 비극의 대상, 고통스런 타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서운 세상이다. 시적 화자는 죽여놓고도 책임지지 않는 위정자들, 권력자들의 비겁함을 은근히 폭로하고자 한 건 아닐까.
맨발로 땅을 밟으면
가슴에 품고 있던 말을
비로소 풀기 시작한다
목덜미 어디쯤 저리니
손가락으로 눌러 달라고
팔 닿지 않는 어깻죽지 근린
가려우니 긁어 달라고
아래 종아리 뭉쳤으니
손바닥으로 풀어달라고
땅은 밟혀 굳은살 박이고
아픔에 관해 무지한 줄 알았다
마른 씨앗 뿌려놓으면
그저 싹 틔우는 줄 알았다
껍데기 몇 겹 벗고 다가가니
속엣말 이리 많은 것을
낯 한 점 붉히지 않고
하나하나 풀어놓는 것을
- <땅의 목소리> 전문
이 시는 인문학적 사유로 대상의 내면을 읽어낸 작품이다. 땅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적 자세로써 대단히 바람직한 것이 바로 타자-되기다. 땅의 목소리를 사물과 동화되어 해독해냄으로써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이 시에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뭐니뭐니해도 시적 화자가 땅과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 맨발로 다가가는 데 있다. ‘맨발’은 진실하게 소통하고자 하는 시인의 진정성이 담겨있는 어휘다. ‘맨발’에 땅이 ‘가슴에 품고 있던 말을 비로소 풀기 시작한다’는 시적 진술은 이 시의 쾌미를 보여준다. 땅에 생명을 부여했다는 식의 인격화는 땅이 자신의 목소리를 풀어내도록 하는 장치다. “땅은 밟혀 굳은살 박이고/ 아픔에 관해 무지한 줄 알았다/ 마른 씨앗 뿌려놓으면/ 그저 싹 틔우는 줄 알았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시적 화자가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움을 확인할 수 있다.
최재선 시의 결미는 언제나 화룡점정의 미학을 보여준다. 시에 있어서나 수필에 있어서나 결미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결말부는 담론층으로 주제의식이 의미화되는 부분이라서 시적 화자는 항상 긴장감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지배적 정황으로 가야 한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했을 때보다 더욱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도록 시의 언어가 기존의 언어질서를 무너뜨려야 한다. ‘껍데기 몇 겹 벗고 다가가니/ 속엣말 이리 많은 것을/ 낯 한 점 붉히지 않고/ 하나하나 풀어놓는 것을’에서 ‘껍데기 몇 겹 벗고’는 가식과 위선을 벗고 진정성으로란 뜻이고, ‘속엣말’은 땅이 자신의 속마음을 시적 화자에게 드러낸다는 의미다. ‘낯 한 점 붉히지 않고’는 땅이 어떠한 과장이나 불안감도 없이 상대를 믿고 자신의 속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런 해석은 화자의 주관적인 것이다. ‘맨발’과의 관계성을 정서적으로 풀어서 소통의 계기를 풀어내는 시인의 언어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면서 미적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메시지를 귀납적으로 풀어가는 시적 전개가 돋보인다. 땅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은 대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그런 시인의 시정신이 피워낸 결실이라 하겠다.
말이 자음과 모음으로
화목하게 융합하지 않고
우라늄과 플루토늄같이
핵으로 분열하고 싶은 날
나는 말 탄두를 날려 보냈고
허공엔 별꽃이 둘 피었다
성당 지붕에 있던 비둘기 떼
성호 그으며 십자가 주변
구구구구 맴돌고 있었을 뿐
신문기사 어느 곳에도
허공으로 말 폭탄 날렸던 말
한 줄 눈에 띄지 않았고
별꽃에 관한 소문 없었다
천변의 하얀 벚꽃 그늘만
어제보다 더 널찍해졌을 뿐
밤 서리 맞은 목련의 상처만
깊고 검게 멍들었을 뿐
- <말 폭탄> 전문
최재선의 <말 폭탄>은 ‘폭탄’이라는 강렬한 이미지에 말의 힘을 실어내었다. 만약에 ‘말 탄두’와 ‘별꽃’의 이미지가 없다면, 이 시는 직설적인 메시지가 되어 말의 강력한 힘을 갖지 못한다. 이 시의 핵심은 말 폭탄이 아니라 말 폭탄이 터져서 ‘별꽃’이 피어나도, ‘신문기사 어느 곳에도/ 허공으로 말 폭탄 날렸던 말/ 한 줄 눈에 띄지 않았’다는 언론의 무관심과 외면 그리고 회피에 있다. ‘별꽃에 관한 소문 없었다’에서, 이 ‘없었다’는 건 우리의 언론 매체가 매체로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정권에 빌붙어 정론직필의 가치를 망각하는 사이비언론과 언론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는 정부 기관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권력 지향의 언론 매체를 다시 제대로 보라는 메시지를 ‘한 줄 눈에 띄지 않았다’라고 함으로써 시적 화자는 견고하게 닫힌 우리 언론의 문제점을 겨냥하고 있다. ‘밤 서리 맞은 목련의 상처만/ 깊고 검게 멍들었을 뿐’이라는 마지막 지배적 정황은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심정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한 단면이 ‘목련의 상처’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진실에 대한 외면은 국민에 대한 배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말 폭탄은 입에 돋아난 무수한 칼날이다. 말 폭탄을 날리고도 당사자는 물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의 시대를 이 시가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주는 것 같다.
남녘 열차
여수 앞바다 종점인 새마을호
빈 들녘 같은 일반실 햇빛 동승한 창가에
젊은 여자 빈 브래지어의 젖가슴을 꺼낸다
아가의 유별스러운 잠덧 엄― 엄― 엄―
마를 끝내 붙이지 못한 부실의 울부짖음
엄마― 엄마―를 완성한 여자가 모성을 물린다
목련 꽃잎이 아가의 입으로 화사하게 흐르자
아가의 숨결이 쉿― 흐― 쉿― 흐― 살아난다
존재감 좀체 드러나지 않은 열차 천장의 줄
전구보다 여자의 허연 가슴이 만월같이 환하다
대낮 지상에도 달이 뜨는 구나
사내 몇의 눈빛이 달을 향해 은밀히 쓰러진다
쉿―엄 쉿―엄 크 쉿―엄 쉿―엄 크
이 반복어에 대해 빈도를 늘리고 소리 키
키운 아가는 사내이고 말리라
제 어미의 가슴을 아니 제 밥줄을 훔쳐보는
장성한 사내들을 향해 입바람으로나마
경고를 고의로 드러내고 있으리라
다음 정차 역은 오수 오수입니다
내리시는 곳은 오른쪽입니다
여자가 잠든 아이와 기저귀 가방 내색하지 않은
부끄러움을 빠뜨리지 않고 잘 챙긴다
몇몇 사내가 달을 훔쳐본 도둑눈을 감추듯
고단하게 눈을 감는다
예제서 코 고는 소리가 자국눈같이 내린다
한소끔 잠들기 좋은 낮이다
- <오수> 전문
이 시에서‘오수’는 ‘오수역’을 가리키면서도‘낮에 자는 잠’을 의미하는 이중적인 뜻을 지닌다. ‘다음 정차 역은 오수 오수입니다’에서 ‘오수’는 역명이고,‘한소끔 잠들기 좋은 낮이다’으로 볼 때 ‘오수’의 뜻은 ‘낮잠’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신의 젖을 꺼내 아이에게 물리는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장성한 사내들 몇몇을 가리키는 말로써 ‘더러워진 물’을 상징하기도 한다. 물론 시적 화자가 그런 의미를 가지도록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대시는 시인으로부터 시가 떨어져나오면 독자의 것이고, 시의 완성은 독자에 의해 완성되는 법이다. ‘모성을 물린다’ ‘대낮 지상에도 달이 뜨는 구나’ ‘사내 몇의 눈빛이 달을 향해 은밀히 쓰러진다’ ‘제 밥줄을 훔쳐보는’ ‘부끄러움을 빠뜨리지 않고 잘 챙긴다’ ‘달을 훔쳐본 도둑눈을 감추듯’ ‘코 고는 소리가 자국눈같이 내린다’ 등의 어구로 볼 때, 현대시의 기법 중 하나인 중층 묘사가 잘 구사되었다. 특히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 의미중심적인 시어를 통해 묘사 자체가 의미가 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높이 평가된다. 위에 열거된 어구에서 비유의 이중층위 구조는 시적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런 형상화 기법은 대상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시를 시답게 하는 전형적인 수법이기도 하다. 자아와 세계의 합일된 통일체를 추구하는 것이 시적 한 지향이라고 보면, 시인은 욕망에 갇혀 체면을 내팽개치고 살아가는 염치없는 사내들의 헛된 욕망을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몇 지인이 간밤 보내준 글을 가위질하거나 대패질하던 중
머릿속에 멸종된 기억의 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거미가
끈끈한 액으로 집 짓는 것 같은 우울한 가려움이 쏘아 다녔다
몽당연필 끝으로 가려움의 정곡을 찔러보고 며칠 전 깎은 날 서지
않은 손끝으로 오선지를 굵게 그려봤지만
가려움의 평수 콩 농사밖에 안 되는 자갈밭같이 늘었다
손길 닿는 데마다 때아닌 폭력을 당한 피부의 눈은 검은 눈동자
지워지고 흰자위만 풍선처럼 부풀리며 억울해했다
이런 통에도 손닿지 않은 폭력의 안전지대 아니 소양의 무풍지대가
몇 곳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내 몸의 통점이었다
그곳은 파스 한 장 내 손으로 어떻게든 붙일 수 없고 모기가 덤벼
들어도 내 힘닿지 않는 한참 절도였다
- <내 몸의 섬> 전문
시인은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내포적 자아를 갖는다. 이런 점은 최재선 시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내포적 자아는 역사적 자아보다 그 능력이 몇 배로 증폭되어 사물을 직관하고, 정서적 반응을 보이며, 사물의 속살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안을 가지기 때문에 그 자아가 창조해낸 시는 예사로울 수가 없다. ‘내 몸의 섬’은 제자의 글을 지도해야 하는 입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미적 사유를 통해 잘 풀어낸 시라 하겠다. 시인의 몸에 왜 섬이 생겼을까를 생각해 본다. 시인은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자기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 쓰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적 제재인 ‘섬’을 통해 말한다. 시인은 인연이나 운명에 의해 첨삭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운명적인 일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글에 가위질도 하고 때로 대패질도 해야 한다. 첨삭은 글쓰기 지도교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흰자위만 풍선처럼 부풀리며 억울해했다’라는 대목을 보면, 시를 봐주는 만큼, 시인은 이 부서진 세상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위질과 대패질이 잦을수록 억울해하는 글제자들의 눈을 보며 정작 자신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타자의식에 대한 치열성을 드러내고 있는 이 시에는 정작 자신은 돌볼 수 없는 현실을 몸에 나타난 섬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우리 오장육부 외에
바위라는 장기가 있다
아픔이 퇴화하지 않고
슬픈 무게대로 축적되어
사는 날이 묵직하다
다만 홀로* 강을 건넌다
수시로 수위 높여 범람하는 강
물 안개꽃은 허구한 날 피어
앞날 막막하게 막아선다
누가 삶의 강을 우회하랴
물속은 깊고 긴 허공이다
허공이 깨어지면 허방이다
허공의 유속은 가파르고
허방은 곳곳에 미지수로 있다
삶이 바위가 아니었다면
급류에 쏠려 고꾸라졌거나
어느 허방에 중심 풀리어
잔돌로 데구루루 굴렀을 거다
비탈진 강언덕에 서서
건너온 날의 강을 바라보며
물무늬 새긴 몽돌의 묵언을
동그랗게 듣는다
*이제 다만 홀로 남았는데 (열왕기상 19:14)
- <삶의 강> 전문
이 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삶이 바위가 아니었다면/ 급류에 쏠려 고꾸라졌거나/ 어느 허방에 중심 풀리어/ 잔돌로 데구루루 굴렀을 거다’라는 네 번째 연이다. ‘삶의 바위’는 ‘삶의 강’과 함깨 대립항을 이루면서 많은 함축을 나타낸다. 인생을 긴 강에 비유한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무엇보다도 오장육부 외 장기로 명명된 ‘바위’가 품어내는 연상에 주목해 보면, 바위의 든든함이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 이렇게 제시해 내놓고 보니 시인의 사물에 대한 인식과 묘사력이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물속은 깊고 긴 허공이다. 허공이 깨어지면 허방이다. 허공의 유속은 가파르고, 허방은 곳곳에 미지수로 있다.’라는 삶의 강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순전히 시인의 생산적 상상력을 통한 재구성의 결과이지만, 삶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기억의 잔상을 재생적 상상으로 살려내고 다시 그것을 생산적 상상으로 변용하여 바꾸는 과정, 즉 상상을 통해 언어의 집을 짓게 됨으로써 그는 삶의 형상화에 성공한 것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상징과 연결되어 공생하면서 사는 공동체적 존재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비탈진 강언덕에 서서/ 건너온 날의 강을 바라보며/ 물무늬 새긴 몽돌의 묵언을/ 동그랗게 듣는다’는 마지막 담론 부분은 회고적 화자로서의 성숙하고 성장한 시적 화자의 정신적 정서적 건강함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바위’가 ‘몽돌’로 전이되면서 이 시는 시인의 내적 성장 서사를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함축과 내포가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세계를 이루고 있어 감동을 준다. 최재선의 시에 ‘묵언’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석양 무렵
허공의 나뭇가지들
붉은 구름 한 접시씩 들고
마을회관으로 모여든다
어느 날 세상 밖으로
잎 내보낼 것이냐에 관해
날짜를 잡는 회의
이장과 노인회장이
알아서 하라는 주장과
지금이 어느 때인데
두 사람이 알아서 하느냐며
투표로 하자는 의견이
반 반으로 나왔다
투표 결과
힘깨나 쓰는 젊은 가지가
먼저 잎을 틔우고
노약한 가지는 뒤따르기로 했다
봄은 무심히 오는 것 같지만
이렇듯 화목하게 온다
잎은 아무 때나 나온 것 같지만
이렇듯 질서 있게 튼다
- <나무의 마을회의> 전문
어떠한 사물을 볼 때, 무엇을 보았느냐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느냐라 할 수 있다. 무엇을 보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은 소재에 그치는 얘기지만 어떻게 보느냐는 그 주제와 표현방법까지를 포함하는 범주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위해서는 형상화 능력도 중요하지만 우선 사물 인식의 눈이라고 하는 통찰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이 시는 나무로 동화된 시적 화자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나무의 관점으로 인간사의 문제를 견주고 있어 눈길을 잡아끈다. ‘이장과 노인회장이/ 알아서 하라는 주장과/ 지금이 어느 때인데/ 두 사람이 알아서 하느냐며/ 투표로 하자는 의견이/ 반반으로 나왔다’라는 대목에서 두 진영으로 갈라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연상케 한다. 물론 여기서 사용된 기법은 우화적이다.
선명하게 부각되는 주제의식은 작품 창작 의도에 통일적으로 기여한다. 민주적인 방식과 권위주의적인 방식이 반반으로 나온 투표에서 볼 수 있듯이 진영의 양극화는 첨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 결과에 의해, ‘힘깨나 쓰는 젊은 가지가/ 먼저 잎을 틔우고/ 노약한 가지는 뒤따르기로 했다’는 합리성은 ‘봄은 무심히 오는 것 같지만/ 이렇듯 화목하게 온다/ 잎은 아무 때나 나온 것 같지만/ 이렇듯 질서 있게 튼다’는 바람직한 결과 도출로 이어져 공감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최재선의 시는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합리적 판단으로 풀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잘 나타내고 있는가 하면 결국 거부할 수 없는,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심화하고, 그것이 메타포로 치환하여 순리를 받들게 한다는 데 매력이 있다. 대상과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묵직하고 나직한 화자의 목소리가 객관적 상관물에 의해 잘 육화되어 있어 감동을 준다.
서울 어느 동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방에
별똥별이 남긴 글
사는 기 힘드 다
삶이 허공이었으므로
각별하게 짤막하고
글씨 비뚤비뚤했을까
삶이 가난이었으므로
목메어 부를 사람 없고
마침표 찍지 못했을까
거듭거듭 잘못 읽히는
석 달 만에 볕 본 문장
죽는 것도 힘들다
*서울 모처, 반지하 방에서 고독사한 50대
모 씨를 석 달 만에 이웃의 신고로 발견하
였다.
- <고독사의 유언*> 전문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양상은 사회마다 다 다르다. 특히 소외와 단절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 이웃의 고통은 이제 ‘나’나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서울 모처, 반지하 방에서 고독사한 50대 모 씨를 석 달 만에 이웃의 신고로 발견하였다는 작가의 메모는 서글픔을 넘어 사회구조적으로 안전망이 붕괴되었다는 데서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작가의 시선이 '나'보다는 '우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독사의 유언>은 일단 작가의식의 측면에서 성공적이다. 문학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간과한 상태에서는 발아될 수 없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작가는 글 속에 시대의 울음을 담아야 한다. ‘우리’를 지향하는 시선은 응당 현실의 문제를 문학 속에 여과하게 된다. 최재선의 시적 오브제는 언제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약자다. 시는 시대적,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비평적 기능을 담당한다. 이런 숙명으로 볼 때 진실의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본질적 과제다. 따라서 최재선 시는 진정한 시민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묻는 질문지로써 사회 비평적 성격을 띤다.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정신은 아름답다. 작가의 용기가 이 시를 이끄는 힘이라면, 비판적 정신은 이 작품의 쾌미다.
작가는 자신의 소신과 신념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적어도 작가는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비롯된 판단으로 오만해지기도 하고, 겸허한 자세를 갖기도 한다. 이 시는 ‘문학은 주변부 타자의 담론’이라는 들뢰즈의 문학론에 비추어 볼 때, 의미있는 시사점을 건져준다고 하겠다. 타자의 고통을 껴안으려는 측면에서 작품적 가치가 있고, 글로써 세상을 바꾸려 하는 변혁의지가 있어 작가적 사명으로서 그 존재성을 잘 드러냈다고 하겠다. 꼭 ‘보아야 할 것’을 봐내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타자에 대한 연민을 시로 연결해서 문학성을 구축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이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내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관심으로 대처하고 있는 방관적인 자세를 진단해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작가의 인도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인식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사는 기 힘드 다’와 같은 비문법적인 문장의 의도적 배치와 ‘죽는 것도 힘들다’는 마지막 결말부 역설이 주는 효과가 비통한 마음에 강한 여운을 남긴다.
날카로운 마음이
한 통에 모여
있는 그대로를
서로 감싸는 온기
뾰쪽한 끝이야
타고난 운명
어쩌다 옆구리 찔려도
그럴 수 있으리라
운명으로 받드는 포용
송곳은 송곳대로
달무리는 달무리대로
사람 사는 마을에
저마다 쓸 데 있는 것
뾰쪽한 끝들이
쇳소리 한 점 없이
얽히고설켜
너붓해진 화목
- <못 그릇> 전문
‘날카로운 마음이/ 한 통에 모여/ 있는 그대로를/ 서로 감싸는 온기’로 시작되는 이 시는 시인의 비범한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날카로운 마음’이 한 통에 모여 ‘서로 감싸는 온기’를 창출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현실이다. 거기에는 필시 무슨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현실을 ‘운명으로 받드는 포용’이 빚어낸 결과다. 차이와 다름에 대해 이해는 성장을 의미하고, 세계시민의 자격을 부여하는 표기다. 그러나 시인은 각자의 ‘다름’을 ‘사람 사는 마을에 저마다 쓸 데 있는 것’으로 재해석하면서 ‘차이’를 가치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시는 우리 사회의 갈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면서 주변부 타자를 우리-되기를 통해 껴안으려는 데서 시인의 공동체의식이 빛난다고 하겠다. 우리-되기는 타자-되기에서 싹튼다. 이 시 역시 결구 의미화는 압권이다. 이 시를 비롯한 모든 시가 결말부 지배적 정황으로 제시되고 있어 이미지가 전달하는 미적 감각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한다. ‘뾰쪽한 끝들이 쇳소리 한 점 없이 얽히고설켜 너붓해진 화목’은 아무나 누구나 쉽게 해낼 수 없는 평화로운 장면이다. ‘뾰쪽한 끝’으로 인해 자신의 거처를 잃고 자신의 영토에서 추방당한 사람들도 도처에 있다.
그러나 시인은 ‘다름’이 완벽하게 융화되는 장면을 견인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가치는 물론 문학적 성취도 빛난다고 하겠다. 시인은 포용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화해의 미학을 통해 시와 교감한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언어를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언어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선택하는 제재는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과 가장 유사한 사물이나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온기’ ‘포용’ ‘화목’ 등의 관념은 그의 관용철학을 잘 보여주는 코드화된 어휘들이다. 특히 최재선의 이 시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삶의 진리를 담고 있어 감동을 준다. 시의 아름다움은 용서를 포함한다. 이 미적 요소에 필수적으로 인간적인 요소가 가미될 때 그 지점에서 비로소 시가 힘의 문학이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언제나 열린 마음의 눈으로 타자를 보는 존재다. 그러나 육안은 현상의 겉만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첫 장에서 다른 장으로 나아가면서도 한결같다. 무엇보다도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이런 타자의식은 시인의 약자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결과에서 나온다고 하겠다.
Ⅲ.
최재선 시의 스펙트럼은 위의 인용된 시에서 본 것처럼 시인의 순간적 깨달음을 통해 현실비판이라는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사물이 주는 내포가 사회의 아픔으로 전이되는 지점에 드리워진 반성적 성찰은 최재선 시적 지향성은 물론 시인이 가져야 하는 한정된 윤리가 아니라 문학을 ‘실천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새겨진 마음의 윤리를 나타낸다. 사물의 신성이라는 건 곧 이러한 마음의 윤리를 통해 시로 재현된다. 최재선이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하는 사회현상과 타자의 내면은 우리 독자에게 이웃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공생과 화합을 요구하는 시대적 정서와 맞물릴 뿐만 아니라 주체성에 익숙한 현대인의 요구와도 매치가 잘 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눈으로 명명되는 그의 시와 시학은 어떻게 보면 우리 시단의 미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실용적이면 모두 다 합리적이다’는 언명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이용가능성과 편리함에 길들여진 도구적 이성으로 물화되어 있다. 철저한 개인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미명 하에 더 이상 진지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최재선 교수는 이런 경도됨을 용납하지 않는다. 최재선 시는 늘 변화의 도정에 있고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타자의 환경에 맞추어 이동시키고 있다는 데서 그 시정신이 빛난다. 최재선은 시대가 바뀌어도 쉽게 진화되지 않고, 개선되지 않는 불편한 현실을 잘 조준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풀의 언어도 나무의 언어도, 땅의 언어도 척박한 삶을 견뎌내는 인간의 언어도 외면하지 않는다.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하찮은 것에서 고귀한 것에 이르기까지 시인 나름의 방식으로 각각이 지닌 아픔의 언어를 잘 듣고자 한다. 최재선은 타인의 고통에 위로를 보내면서, 인도주의를 그의 시에 구축하는 구원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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