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47년 12월 거제도 표류 대마도 사신선 4척의 조사보고 「장계(狀啓)」>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1847년 12월 거제도 앞바다에 표류해 온 대마도 사신선 4척을 조선 수군이 촘촘한 해안망으로 안전하게 나포·조사하여 정식 외교선임을 확인하고, 인도적 구호 및 부산 왜관 인도 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보고 소홀 관원들을 엄벌해 군기를 확립한 사건을 보고한 「장계(狀啓)」를 소개하겠다. 앞서 여러 편의 표류왜선(漂倭船)에 관한 문건들을 소개한 바가 있지만, 일본과 마주하던 최전방 거제도에는 워낙 표왜선(漂倭船)에 관한 문건이 많아 다시 한번 더 소개한다. 이 글은 1847년(헌종 13년) 12월, 거제도 일대 해상에 출현한 대마도 표류 왜선(일본 배) 4척의 탐지부터 최종 처리까지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
○ 사건의 발단은 ①1847년 12월 12일(음) 오후에 거제도 동남부 해상에서 정체불명의 선박을 포착한다. 12일 오후 3시~5시(申時)경, 거제도 먼바다에서 등불을 켠 채 접근하는 정체불명의 배 4척(朝倭未辨船)이 지세포·옥포·조라포·율포·가배량 등 수십 리 해안망의 망군(望軍)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포착되었다. 이에 조선 수군이 즉각 출동했다. 왜선일 가능성에 대비하여 거제도 각 진보의 만호(萬戶)와 권관(權管)들은 군선(영호선)을 몰고 즉각 해상으로 출동했고, 밤샘 추적 끝에 4척의 배를 각 포구(지세포에 큰 배 1척, 구조라에 작은 배 2척, 도장포에 큰 배 1척)로 안전하게 예인하여 감시(守護)를 시작했다. ② 철저한 현장 조사 및 민관 합동의 문정(14일 새벽)이 실시되었다. 14일 새벽, 옥포의 일본어 통역관(왜학) 한기순과 거제부사를 대리한 좌수 신재봉, 그리고 현지 만호들이 정박한 배들에 직접 승선하여 사정 조사(問情)를 벌였다. *조사 결과, 이 배들은 침략선이나 간첩선이 아니라 대마도에서 부산 왜관으로 향하던 정식 외교 사신단(송사왜)의 선박들과 보조선(비선·수목선)이었다. 대마도 항구를 출발했다가 거제도 해역에서 역풍을 만나 표류했다는 4척의 진술이 완벽히 일치했다. *여권(路引) 및 도장 검증을 했다. 조선 관원들은 그들이 지닌 통행증(路引)의 도장(도서) 모양이 바뀐 것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일본 측은 "올해 4월 대마도 외교 책임 승려(이정암 장로)가 교체되어 새 도장(남해도서)을 찍어온 것"이라 해명하여 위조나 밀항이 아님을 증명했다. ③ 사건의 결말 및 사후 인도주의적 조치(17일)를 했다. 표류 원인과 정체가 확실해지자, 조선 조정은 전례에 따라 왜인들이 먹을 땔나무, 물, 양식, 반찬(柴水糧饌)을 구해서 지급하도록 거제부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이후 이 배들은 부산의 관리 기지인 다대포(多大浦)로 안전하게 호송(越送)되어 왜관으로 인도될 예정임을 밝혔다. 이러한 과정 중에 규칙에 어긋난 행위에 대한 군기 확립과 관원 처벌이 이루어졌다. 군사 상황 보고의 엄격함을 강조하며, 이틀이나 늦게 현장에 도착해 조사를 지체한 통역관(왜학) 한기순과 왜인들의 정박 시간을 오인하여 착오 보고를 올린 지세포 수색 장수 김용이를 즉각 체포하여 곤장형(拿致棍懲)으로 엄벌할 것을 왕에게 보고하며 마무리되었다.
* 덧붙여 이번 「1847년 12월17일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통제사(統制使) 서상오(徐相五)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이다. [기사제목 道光二十七年十二月十七日]
○ [내용 해설 및 역사적 맥락] 이번 1847년 12월 표류왜선 「장계(狀啓)」는 왜선(일본 배) 4척이 거제도 동남부 일대 해상에 출현하자, 주변 진보(鎭堡)의 만호(萬戶)들이 신속하게 군관과 망군을 보내 탐색하고 예인 및 감시한 군사 상황 보고서다. 배경 지역은 거제도 동남부 일대다. 본문에 등장하는 지세포, 옥포, 조라포(구조라), 율포, 도장포, 지심도(지삼도), 가도(갈도)는 모두 현재 경상남도 거제시 일대의 수군 기지와 지명들이다. 이 지역은 남해안 방어의 최전선이자 일본과의 해로가 이어지는 요충지였다. 1847년 12월 12일 오후 3시~5시(申時) 즈음, 거제도 앞바다에 정체불명의 배 4척이 등불을 켠 채 나타났다. 거제도의 각 진보(지세포, 옥포, 조라포) 체계는 즉각 가동되었다.
[거제도 표류 대마도 사신선 총 4척] ①대형 왜선 1척은 지심도 방면으로 표류 → 지세포 만호가 직접 배를 타고 나가 예인하여 밤 7~9시(戌時)에 지세포 앞바다에 정박시키고 감시함. ②대형 왜선 1척은 가도 외양 방면으로 표류 → 밤 9~11시(亥時)에 도장포 강구에 정박함. ③소형 왜선 2척은 구조라 안섬(내도) 방면으로 표류 → 군관들이 추적하여 밤 9~11시(亥時)에 조라포 강구에 정박함.
본문을 보면 지세포 만호의 보고뿐만 아니라, 이웃한 옥포 만호와 조라포 만호의 보고서가 실시간으로 승정원에 도달하고 있다. 한곳에서 놓칠 수 있는 군사 정보를 인근 진보의 망군들이 동시에 포착하고, 이를 상부(조정)에 신속히 교차 보고하는 조선 수군의 정밀한 해안 감시망과 가동력을 잘 보여주는 사료다.
○ 앞선 글에서 "최초 발견 및 출동, 각 포구 정박"에 대한 교차 보고였다면, 이번 글은 "수색대의 복귀, 인근 진보(율포·가배량)의 추가 상황 보고, 그리고 마침내 왜학(통역관)과 관원이 직접 배에 올라타 정체와 목적을 조사한 결과(문정)"를 담고 있다.
군사 감시망의 퍼즐이 맞춰졌다. 앞선 글에서 율포·가배량 쪽 망군들은 "배 4척 중 3척은 밤이 되어 놓쳤고 1척만 추적 중"이라고 보고했었다. 하지만 좌측에 있던 지세포·옥포·조라포 망군들은 그 놓친 배들을 정확히 포착해 예인했다. 결국 거제도 남해안을 촘촘히 둘러싼 수군 기지들이 밤새 협력하여 4척을 모두 안전하게 포구로 인도하고 감시(守護)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밤새 긴박하게 돌아가던 군사 작전은 14일 새벽, 통역관(왜학 한기순)과 현지 대리관원(좌수 신재봉)이 지세포에 정박한 대형 왜선에 직접 승선해 '문정(問情)'을 하면서 반전을 맞이한다. 조사 결과, 이 배들은 조선을 침략하러 온 적선이 아니라, 대마도나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던 정식 사신단(송사왜)의 보조 선박(수목선)이었다. 정식 통행증인 '노인(路引)'을 확실히 소지하고 있었고, 격군(노잡이) 외에도 관원 교대 인력들과 공무용 쌀(공작미)이 실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영해 침범이나 해적 행위가 아닌 '해상 표류 사건'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이번 장계를 통해, 조선 말기 해안 방어 체계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그리고 일본과의 사신 왕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표류 사건을 지방관과 통역관이 얼마나 절차에 따라 엄격하게 처리했는지 보여주는 매우 가치 있는 사료다.
* 다음은 구조라(舊助羅浦)에 정박한 소형 왜선(비선) 2척을 추가로 조사(문정)한 결과다. 지세포에 잡힌 '큰 배'의 왜인들과, 구조라에 잡힌 '작은 배 2척'의 왜인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진술을 하고 있다. "12일 아침 대마도에서 배 4척(대선 2척, 비선 2척)이 함께 출발했는데, 수지(水旨) 해역에서 역풍을 만나 흩어졌고 우리만 거제도로 떠내려왔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조선 관원들은 이들의 표류 진술이 거짓이 아님을 확실히 검증하게 된다. 조선의 통역관(왜학)과 대리 관원들은 일본인들의 말만 믿지 않고, 그들이 가진 공식 통행증(노인)의 봉인과 도장(도서)까지 꼼꼼하게 대조했다. 마침 도장의 모양이 이전과 바뀐 것을 포착하여 날카롭게 추궁했고, 일본 측으로부터 "이정암 장로 승려가 최근 인사 이동되어 도장이 갱신되었다"는 외교적 사유까지 완벽하게 받아내어 기록에 남겼다.
*마지막 한 척도 조사했다. 지세포(대선 1척), 구조라(비선 2척)에 대한 조사를 마친 수색팀은 이제 마지막 4번째 배인 율포 도장포의 대형 왜선 1척을 조사하기 위해 급히 이동하며 글이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문서는 조선 후기 해안 감시망의 철저함뿐만 아니라, 대마도와의 실무 외교(이정암 장로 교체 시기, 도장 확인 등)가 지방 포구 수준에서 얼마나 정밀하고 엄격하게 통제되었는지 보여주는 대단히 흥미롭고 귀중한 고문서 자료다.
○ 이번 사건의 최종 결말(마무리)이 이어졌다. 마지막 4번째 왜선에 대한 조사 결과, 4척의 진술이 일치됨을 확인하였고, 표류 왜인들에 대한 인도적 조치(식량 지급), 그리고 보고 과정에서 시간 오차를 내거나 지체한 관원들에 대한 처벌(체포 및 곤장) 마감 내용까지 담겨 있다. 특히 맨 마지막에 '도광 27년(1847년)'이라는 정확한 연도가 등장하여 이 사건의 확실한 역사적 배경을 밝혔다. ①첫 번째 사건의 완벽한 삼자대면 및 검증을 완료했다. 거제도 동남쪽 해안 곳곳에 흩어져 정박했던 4척의 배(큰 배 2척, 작은 배 2척)는 조사 결과 대마도에서 함께 출발한 하나의 공식 외교 선단임이 최종 확정되었다. 진술이 완벽히 일치했고, 도장이 바뀐 이유(이정암 장로 승려 교체) 역시 똑같이 설명되어 간첩이나 해적이 아닌 순수한 '해상 표류'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②두 번째 조선 정부의 인도주의적 대응과 절차를 시행했다. 정식 외교선임이 확인되자 조선 조정은 즉각 지방관(거제부사)에게 명령하여 이들이 굶지 않도록 땔나무, 물, 양식, 반찬(柴水糧饌)을 전례에 따라 지급하게 했다. 또한 임의로 방면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을 전담 관리하던 부산의 다대포 기지로 안전하게 호송(越送)하여 절차대로 왜관에 인도하겠다는 향후 계획을 밝히고 있다. ③세 번째 군기 확립 차원에서 시각 오류와 늑장 대처에 대한 엄벌을 시행했다. 국가의 안위가 달린 변방의 긴급 상황(邊情)에서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으면 용납하지 않는 조선 군행정의 엄격함이 돋보인다. 먼저 왜학 한기순이 배가 들어온 지 이틀이나 지나서 문정을 시작한 죄(늑장 대처)와 그리고 수색 장수 김용이가 정박 시간이 '저녁 7~9시(술시)'인데 제대로 확인 안 하고 '밤 9~11시(해시)'로 허위, 착오 보고한 죄를 물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두 사람을 즉각 체포하여 곤장형(拿致棍懲)에 처하겠다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변방 해안 기지의 보고 시각 하나까지 얼마나 정밀하게 다루었는지 보여줬다.
이로써 이번 1847년 표류왜선 「장계(狀啓)」를 통해, 거제도 앞바다에 정체불명의 불빛(현등) 4척이 나타난 순간부터 망군들의 밤샘 추적, 각 포구 수군들의 긴급 출동 및 예인, 통역관의 날카로운 도장 위조 여부 심문, 그리고 마지막 군기 단속과 사후 복지 조치까지 거대한 조선시대 해안 경비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되었다.
<원문(原文), 1847년 12월 거제도 표류 대마도 사신선 4척 조사 보고 「장계(狀啓)」>
승정원(承政院)에서 열어 보았습니다. 이달(12월) 14일 인시(寅時, 새벽 3시~5시)에 도착한, 12일 유시(酉時, 저녁 5시~7시)에 작성된 지세포 만호(知世浦萬戶) 김득조(金得祖)의 급한 보고(馳報)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시 본 진(鎭)의 늘일곶(訥逸串, 와현) 군관 김윤손(金允孫)이 나아와 고하기를, '오늘(12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조선 배인지 왜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배 4척이 먼바다(洋中)로부터 등불을 매달고 나왔습니다. 그중 1척은 본 지세포진의 경계인 지심도(只森島, 현 지심도)로 떠내려오고, 2척은 구조라포(舊助羅浦)의 내도(內島, 안섬)로 떠내려오며, 1척은 율포(栗浦) 경계인 가도(柯島, 갈도) 외양(외해)으로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지심도로 떠내려오는 배 1척을 탐지하기 위해 만호(본인)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또한 구조라포 내도로 떠내려오는 배 2척을 수색하기 위해 군관 김용이(金龍伊)를 정하여 보냈고, 가도(갈도) 외양으로 떠내려가는 배 1척을 수색하기 위해 군관 김종업(金宗業)을 정하여 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동시에 도착한, 같은 날(12일) 같은 시간에 작성된 옥포 만호(玉浦萬戶) 전득관(全得寬)과 조라포 만호(助羅浦萬戶) 조원(趙洹)의 급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시 옥포의 옥산 망군(望軍, 망을 보는 군사) 이윤채(李允采)와 조라포 망군 김명운(金明云)이 동시에 나아와 고하기를, '오늘 신시(申時)에 조선 배인지 왜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배 4척이 먼바다로부터 등불을 매달고 나왔는데, 1척은 지세포 경계인 지심도로 떠내려가고, 2척은 지세포진 경계인 구조라포 내도로 떠내려가며, 1척은 율포 경계인 가도(갈도) 외양으로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지심도로 떠내려가는 배를 탐지하기 위해 만호 등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구조라포 내도로 떠내려가는 배를 수색하기 위해 옥포 군관 이원옥(李元玉)과 조라포 군관 강정협(姜政俠)을 정하여 보냈으며, 가도(갈도) 외양으로 떠내려가는 배는 멈추어 정박하는 곳을 상세히 살펴 다시 보고하라고 망군들에게 엄히 단속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추후에 도착한, 같은 날 술시(戌時, 저녁 7시~9시)에 작성된 지세포 만호 김득조의 급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를 재촉하여 지심도 앞바다로 전진하여 가니, 왜(倭)의 큰 배 1척이 과연 등불을 달고 표류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에 유시(酉時, 저녁 5시~7시) 즈음에 서로 만나 이끌고 예인하여, 술시(戌時)에 본 지세포진의 강구(江口, 포구 어귀) 앞바다에 멈추어 정박시키고 수호(守護, 감시 및 경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추후에 도착한, 12일 해시(亥時, 밤 9시~11시)에 작성된 옥포 만호 전득관과 조라포 만호 조원의 급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심도로 떠내려가는 배를 탐지하고자 바다로 전진하던 즈음에, 즉시 망군들이 다시 고하기를 '해당 배 1척은 과연 왜의 큰 배이며, 12일 술시(戌時)에 지세포 강구에 정박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추후에 도착한, 13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작성된 옥포 만호 전득관과 조라포 만호 조원의 급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시 망군들이 다시 고하기를, '어제 율포 경계인 가도 외양으로 떠내려가던 미분간(미확인) 배 1척은 과연 왜의 큰 배이며, 같은 날 해시(亥時)에 율포 경계인 도장포(陶藏浦) 강구에 정박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동시에 도착한 수색 장수(哨探將) 이원옥, 강정협 등의 급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시 망군들이 다시 고하기를, '어제 지세포 경계인 구조라포 내도로 떠내려가던 미확인 배 2척은 과연 왜의 작은 배이며, 같은 날 해시(亥時)에 구조라포 강구에 정박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관례에 따라 수색하고 탐지한 후 돌아왔다고 하였으므로, 그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추후에 도착한, 13일 축시(丑時, 새벽 1시~3시)에 작성된 지세포 만호 김득조의 급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도착한 수색 장수(哨探將) 김용이(金龍伊)의 보고에, '노를 재촉하여 구조라포 내도 앞바다로 전진하여 가니, 왜의 작은 배 2척이 과연 등불을 달고 표류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에 12일 술시(戌時, 저녁 7시~9시) 즈음에 서로 만나 이끌고 예인하여, 해시(亥時, 밤 9시~11시)에 동 구조라포 강구에 정박시키고 수호(감시)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또한 13일 축시(丑時)에 도착한 수색 장수 김종업(金宗業)의 보고에, '가도(柯島) 외양으로 표류해 가던 미확인 배를 탐지하고자 노를 재촉하여 전진하던 즈음에, 즉시 망군들이 다시 고하기를, 율포 경계인 가도(갈도) 외양으로 표류하던 미분간 배 1척은 과연 왜의 큰 배이며, 12일 해시(亥時)에 동 포구의 도장포 강구에 정박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관례에 따라 수색하고 탐지한 후 돌아왔으므로, 그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추후에 도착한, 12일 유시(酉時, 저녁 5시~7시)에 작성된 율포 권관(栗浦權管) 박종욱(朴宗郁)과 가배량 만호(加背梁萬戶) 김중근(金重根)의 급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시 율포의 가라산(加羅山) 망군 손영업(孫永業)과 가을곶(柯乙串) 망군 김철석(金喆石), 가배량의 등산(登山) 망군 배원이(裵元伊) 등이 동시에 와서 고하기를, '오늘(12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조선 배인지 왜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배 4척이 먼바다로부터 등불을 매달고 나왔는데, 그중 3척은 먼바다에서 뒤처졌고 마침 날이 저물어 그 향하는 곳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1척은 율포 경계인 가도(갈도) 외양으로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뒤처진 배 3척에 대해서는 그 가는 곳을 상세히 살펴 다시 보고하라고 망군들에게 엄히 단속하였고, 가도 외양으로 표류하는 배를 탐지하기 위해 만호와 권관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추후에 도착한, 12일 해시(亥時, 밤 9시~11시)에 작성된 동 만호와 권관의 급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를 재촉하여 율포 경계인 가도(갈도) 외양으로 전진하여 가니, 왜의 큰 배 1척이 과연 등불을 달고 표류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에 12일 술시(戌時, 저녁 7시~9시)에 서로 만나 함께 이끌고 예인하여, 해시(亥時)에 동 진(鎭)의 경계인 도장포 강구에 정박시키고 수호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추후에 도착한, 13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작성된 율포 권관 박종욱과 가배량 만호 김중근의 급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시 망군들이 다시 고하기를, '어제 뒤처졌던 배 3척이 간 곳을 밤을 새워가며 지켜보았으나, 그 배들이 (경상)좌도 방향인 지세포·옥포·조라포 쪽으로 표류해 갔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고, 정확히 어디로 향했는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였으므로, 그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추후에 도착한, 14일 인시(寅時, 새벽 3시~5시)에 작성된 옥포 왜학(倭學, 일본어 통역관) 한기순(韓琦淳)의 수본(手本,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세포 만호의 연락(傳通)을 받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급히 동 포구(지세포) 강구에 도착해 보니 왜의 큰 배 1척이 과연 정박해 있었습니다. 지방관인 거제부사(巨濟府使) 손량석(孫亮錫)은 고성군수(固城郡守)를 겸임하고 있어서 이미 그곳으로 급히 가고 없었기에, 해당 현의 좌수(座首, 향청의 우두머리) 신재봉(辛在鳳)이 대신 왔습니다. 이에 본 진의 장수인 지세포 만호 김득조와 함께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배로 가서 사정을 문문(問情,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이 배는 병신년(丙申條) 제1선으로 파견된 왜의 송사(送使, 사신)의 수목선(水木船, 나무나 물을 싣는 보조선)이 항해 중 바람을 만나 표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배 안에는 격왜(格倭, 일본인 사공, 노잡이) 15명과 임무 교대를 위해 가던 중금투왜(中禁徒倭, 중급 관리, 무사급) 5명, 소금투왜(小禁徒倭) 4명, 하대왜(下代倭, 하급 수행원) 2명 등이 타고 있었으며, 공작미(公作米, 공무 수행을 위한 쌀)를 싣고 가던 중에 노인(路引, 공식 통행증, 여권)을 소지하고 함께 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세포에 정박한 왜선에 승선하여) 그 섬(대마도) 안의 사정과 바람을 만나 표류하게 된 연유를 탐문하니, 해당 왜인 등이 말하기를, '섬 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습니다. 저희가 탄 큰 배 1척, 다른 큰 배 1척, 다른 비선(飛船, 빠르고 작은 보조선) 2척 등 도합 4척이 이번 달 12일 이른 아침에 대마도(馬島)의 대풍소(待風所, 바람을 기다리는 항구)에서 동시에 출항하여 곧장 왜관(館所)으로 향했습니다. 겨우 수지(水旨, 경상도 해역의 특정 길목 또는 거점)에 도착했을 때 바람의 형세가 불리해졌습니다. 다른 큰 배 1척과 다른 비선 2척은 먼바다에서 뒤처졌고 마침 날이 저물어 어디로 향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희가 탄 큰 배 1척은 바람을 따라 굴러 표류하다가 지세포 경계인 지심도(只森島) 앞바다까지 오게 되었는데, 같은 날 유시(酉時, 저녁 5~7시) 즈음에 서로 만나 영호선(迎護船, 맞이하고 보호하는 조선 군선)이 이끌고 예인하여 술시(戌時, 저녁 7~9시)에 이곳에 멈추어 정박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해당 왜선이 소지한 노인(路引, 통행증)의 피봉(겉봉투) 상단과 하단에 찍힌 도서(圖書, 도장)가 이전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에 그 자세한 사유(委折)를 물으니, 해당 왜인들이 말하기를, ”저희 섬의 이정암(以酊庵) 장로 승려가 올해 4월 20일에 교체(交遞)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새로 부임한 장로 승려의 이름이 새겨진 남해도서(南海圖書)를 찍어 온 것입니다“ 하였다. (지세포 선박에 대한) 문정을 마친 후, 구조라포에 정박해 있는 왜의 소형 배 2척을 문정하기 위해 급히 달려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추후에 도착한, 같은 날 문서가 붙은 해당 왜학(통역관 한기순)의 수본(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구조라포 강구 앞바다에 급히 도착해 보니 왜의 소형 배 2척이 과연 정박해 있었습니다. 이에 본 진의 장수인 지세포 만호 김득조 및 (거제부사를) 대리하는 좌수 신재봉과 함께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문정을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배는 비선(飛船)이 바람을 맞아 표류한 것인데, 우두머리 왜인(頭倭) 1명, 노잡이 왜인(格倭) 5명 및 임무 교대를 위해 가던 별금투왜(別禁徒倭) 1명, 중금투왜(中禁徒倭) 3명, 하대왜(下代倭) 1명 등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관수왜(館守倭, 왜관을 관리하는 일본 관원)에게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私書) 1장과 노인(통행증)을 지닌 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배 역시 비선이 바람을 맞아 표류한 것인데, 우두머리 왜인 1명, 노잡이 왜인 5명, 임무 교대를 위해 가던 별금투왜 2명, 중금투왜 1명 등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신왜(代信倭, 대마도주의 대리 사신)에게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 1장과 노인을 지닌 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이 두 배에 탄 왜인들이 말하기를, ”섬 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습니다. 저희가 탄 비선 2척과 다른 큰 배 2척 등 도합 4척이 이번 달 12일 이른 아침에 대마도의 대풍소에서 동시에 출항하여 곧장 왜관으로 향했습니다. 겨우 수지에 도착했을 때 바람의 형세가 불리해졌습니다. 다른 큰 배 2척은 먼바다에서 뒤처졌고 마침 날이 저물어 어디로 향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희가 탄 비선 2척은 바람을 따라 굴러 표류하다가 지세포 경계인 구조라포 내도 앞바다까지 오게 되었는데, 같은 날 유시(酉時) 즈음에 서로 만나 영호선이 이끌고 예인하여 술시(戌時)에 이곳에 멈추어 정박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 두 배가 소지한 노인의 겉봉투 상·하단에 찍힌 도서가 이전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에 그 자세한 사유를 물으니, 해당 왜인들이 말하기를, ”저희 섬의 이정암 장로 승려가 올해 4월 20일에 교체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새로 부임한 장로 승려의 이름이 새겨진 남해도서(南海圖書)를 찍어 온 것입니다“ 하였다.
문정을 마친 후, 율포 경계인 도장포(陶藏浦)에 정박해 있는 왜의 큰 배 1척을 문정하기 위해 급히 달려갔다는 내용이 수본에 적혀 있었다. ”지금 이 구조라포 강구에 정박해 있는 왜의 비선 2척은 12일 술시(戌時) 즈음에 만나 해시(亥時)에 정박한 상태입니다.“
"해당 진(鎭)의 수색 장수(哨探將)가 앞서 이미 보고하기를, 왜학(통역관)이 문정할 때 '12일 유시(酉時, 저녁 5~7시) 즈음에 만나 술시(戌時, 저녁 7~9시)에 정박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학이 올린) 수본(보고서)의 내용이 크게 서로 어긋나므로(相左), 해당 왜인들에게 다시금 상세히 물어 불꽃처럼 빠르게(星火, 매우 급하게) 수본을 작성하여 올리라고 왜학에게 엄히 단속하였습니다.
추후에 도착한, 같은 날 술시(戌時)에 작성된 해당 왜학(한기순)의 수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율포 경계인 도장포 강구에 급히 도착해 보니 왜의 큰 배 1척이 과연 정박해 있었습니다. 이에 본 진의 장수인 박종욱(朴宗郁) 및 (거제부사를) 대리하는 좌수 신재봉과 함께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문정을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이 배는 병신년(丙申條) 일특송사(一特送使, 첫 번째 특별 사신) 왜인의 수목선(보조선)이 바람을 맞아 표류한 것이었습니다. 배 안에는 임무 교대를 위해 가던 중금투왜 3명, 소금투왜 2명, 하대왜 1명과 노잡이 왜인(格倭) 20명 등이 노인(통행증)을 소지하고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해당 왜인 등이 말하기를, 『섬 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습니다. 저희가 탄 큰 배 1척, 다른 큰 배 1척, 다른 비선 2척 등 도합 4척이 이번 달 12일 이른 아침에 대마도의 대풍소에서 동시에 출항하여 곧장 왜관으로 향했습니다. 겨우 수지에 도착했을 때 바람의 형세가 불리해졌습니다. 다른 큰 배 1척과 다른 비선 2척은 먼바다에서 뒤처졌고 마침 날이 저물어 어디로 향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희가 탄 큰 배 1척은 바람을 따라 굴러 표류하다가 율포 경계인 가도(柯島, 갈도) 외양까지 오게 되었는데, 같은 날 술시(戌時)에 서로 만나 영호선이 이끌고 예인하여 해시(亥時, 밤 9~11시)에 이곳에 멈추어 정박하게 된 것입니다』“하였다.
이들이 소지한 노인의 겉봉투 상·하단에 찍힌 도서(도장)가 이전의 것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에 그 자세한 사유를 물으니, 해당 왜인들이 말하기를, 『저희 섬의 이정암 장로 승려가 올해 4월 20일에 교체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새로 부임한 장로 승려의 이름이 새겨진 남해도서를 찍어 온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문정을 마친 후 임소(근무지)로 돌아왔습니다' 라는 내용이 수본에 적혀 있었다.
추후에 도착한, 17일에 작성된 해당 왜학의 수본에 의하면, '즉시 도착한 통사(통역관)의 전령에 따라, 구조라포에 정박한 배 2척의 왜인들에게 당초 정박할 당시의 시간에 대해 다시금 상세히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고하기를, 『술시(戌時)에 정박한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그 연유를 수본으로 올립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각 진보의 보고 및 왜학의 수본들이 접수되었습니다.
위 항목의 지세포 강구에 정박한 왜의 큰 배 1척, 동 진 경계인 구조라포 강구에 정박한 왜의 비선(작은 배) 2척, 율포 경계인 도장포에 정박한 왜의 큰 배 1척 등 도합 4척에 대해 이미 차례대로 문정(조사)을 마쳤습니다.
이들이 먹을 땔나무와 물, 그리고 양식과 반찬(柴水糧饌)을 전례에 따라 구해서 지급하라는 뜻을 지방관인 거제부사 손량석에게 관문(공문)을 발송하여 분부하였습니다. 또한 이 세 곳에 정박한 배들을 (왜관이 있는 부산 쪽) 다대포(多大浦)로 넘겨보내는 상황(形止)에 대해서는 추후에 왕에게 보고(登聞)하여 헤아리도록 할 것입니다.
/ 변방의 군사 상황(邊情)이 이토록 엄중하고 급박한데, 왜학 한기순은 12일에 정박한 배를 14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도착해 문정했으니 매우 지체하고 느슨하게 행동(稽緩)한 죄가 있습니다. 또한 지세포 수색 장수 김용이는 왜인들이 고한 '술시 정박'이 이토록 분명함에도 처음부터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해시 정박'으로 잘못 보고해 왔습니다. 술시와 해시가 비록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고는 하나, 일 처리가 이토록 극히 소홀했습니다. 이에 왜학 한기순과 지세포 수색 장수 김용이를 모두 잡아들여 곤장을 쳐서 징계(拿致棍懲)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연유들을 아울러 먼저 급히 임금님께 계문(馳啓) 하오니, 차례를 갖추어 잘 상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도광(道光) 27년(1847년, 헌종 13년) 12월 17일"
[承政院開拆. 本月十四日寅時到付十二日酉時成貼知世浦萬戶金得祖馳報內, 卽刻本鎭訥逸串軍官金允孫進告內, 今月申時朝倭未辨船四隻, 自洋中懸燈出來。一隻段, 漂向于本鎭境只森島了是遣, 二隻段, 漂向于舊助羅浦內島了是遣, 一隻段, 漂向于栗浦境柯島外洋了是如爲乎等以, 只森島漂來船一隻探知次, 萬戶乘船下海爲乎旀。舊助羅浦內島漂來船二隻哨探次, 軍官金龍伊定送是遣, 柯島外洋漂向船一隻哨探次, 軍官金宗業定送是如爲白有旀。一時到付同日同時成貼玉浦萬戶全得寬, 助羅浦萬戶趙洹馳報內, 卽刻玉浦玉山望軍李允采, 助羅浦望軍金明云, 一時進告內, 今日申時, 朝倭未辨船四隻, 自洋中懸燈出來, 一隻段, 漂向于知世浦境只森島是遣, 二隻段, 漂向于同鎭境舊助羅浦內島是遣, 一隻段, 漂向于栗浦境柯島外洋是如內島漂向船段, 探知次萬戶, 等乘船下海爲乎旀。舊助羅浦內島漂向船段, 哨探次玉浦軍官李元玉, 助羅浦姜政俠定送是遣, 柯島外洋漂向船段, 止泊處詳看更告之意, 嚴飭望軍是如爲白有旀。追于到付同日戌時成貼知世浦萬戶金得祖馳報內, 促櫓前進于只森島前洋, 則倭大船一隻, 果爲懸燈漂來。故酉時量相逢領曳, 戌時本鎭江口前洋止泊守護是如爲白有旀。追于到付十二日亥時成貼玉浦萬戶全得寬, 助羅浦萬戶趙洹馳報內, 只森島漂向船探知次, 下海前進之際, 卽刻望軍等更告內, 同船一隻, 果以倭大船, 十二日戌時, 止泊知世浦江口是如爲乎等以。緣由馳報是如爲白有旀。追于到付十三日子時成貼玉浦萬戶全得寬, 助羅浦萬戶趙洹馳報內, 卽刻望軍更告內, 昨日栗浦境柯島外洋漂向未辨船一隻, 果以倭大船, 同日亥時同浦境陶藏浦江口止泊是如爲有旀。一時到付哨探將李元玉姜政俠等馳報內, 卽刻望軍等更告內, 昨日知世浦境舊助羅浦內島漂向未辨船二隻, 果以倭小船, 同日亥時同浦江口止泊是如爲乎等以。依例哨探後還歸是如爲白有等以, 緣由馳報是如爲白有旀。追于到付十三日丑時成貼知世浦萬戶金得祖馳報內, 十三日子時到付哨探將金龍伊馳報內, 促櫓前進于舊助羅浦內島前洋, 則倭小船二隻, 果爲懸燈漂來。故十二日戌時量相逢領曳, 亥時同浦江口止泊守護是如爲有旀。十三日丑時到付哨探將金宗業馳報內, 柯島外洋漂向未辨船探知次, 促櫓前進之際, 卽刻望軍更告內, 栗浦境柯島外洋漂向未辨船一隻, 果以倭大船, 十二日亥時, 同浦陶藏浦江口止泊是如爲乎等以。依例哨探後還歸是如爲乎等〈以〉。緣由馳報是如爲白有旀。追于到付十二日酉時成貼栗浦權管朴宗郁, 加背梁萬戶金重根馳報內, 卽刻栗浦加羅山望軍孫永業, 柯乙串望軍金喆石, 加背梁登山望軍裵元伊等一時進告內, 今日申時朝倭未辨船四隻, 自洋中懸燈出來, 三隻落後洋中, 仍値日暮, 莫辨其所向處是遣, 一隻漂向于栗浦境柯島外洋是如爲乎等以。落後船三隻段, 去向處詳看更告之意, 嚴飭望軍是遣, 柯島外洋漂向船段, 探知次萬戶權管乘船下海是如爲白有旀。追于到付十二日亥時成貼同萬戶權管馳報內, 促櫓前進于栗浦境柯島外洋, 則倭大船一隻, 果爲懸燈漂來。故十二日戌時相逢, 同爲領曳, 亥時同鎭境陶藏浦江口止泊守護是如爲白有旀。追于到付十三日辰時成貼栗浦權管朴宗郁, 加背梁萬戶金重根馳報內, 卽刻望軍等更告內, 昨日落後船三隻去向處, 達夜看望是乎則, 同船漂向左道與知玉助了是乎喩, 不知所向處是如爲乎等以。緣由馳報是如爲白有旀。追于到付十四日寅時成貼玉浦倭學韓琦淳手本內, 因知世浦萬戶傳通, 同日同時馳到同浦江口, 則倭大船一隻, 果爲止泊, 而地方官巨濟府使孫亮錫, 以固城兼任, 前已馳往, 該縣座首辛在鳳替來。故與主鎭將金得祖, 眼同就往問情, 則丙申條第一船送使倭水木船吹噓良中, 格倭十五名及交代次中禁徒倭五人, 小禁徒倭四名, 下代倭二名等, 公作米載次, 持路引同騎爲有等以。/探問其島中事情及漂風, 緣由則, 同倭等言內, 島中別無他事, 而俺等所乘大船一隻, 他大船一隻, 他飛船二隻, 合四隻, 今月十二日晨朝, 自馬島待風所, 同爲發船, 直向館所, 纔到水旨, 風勢不利。他大船一隻, 他飛船二隻, 落後洋中, 仍値日暮, 不知所向處是遣, 俺等所乘大船一隻, 從風轉漂于知世浦境只森島前洋, 同日酉時量相逢, 迎護船領曳, 戌時止泊此處是如爲乎旀。同倭船所持路引皮封上下端所着圖書, 比前有異, 故問其委折, 則同倭等言內, 弊島以酊庵長老僧, 今年四月二十日交遞, 故以新長老僧名字南海圖書着來是如爲乎等以。問情後, 舊助羅浦止泊倭小船二隻問情次, 馳往是爲白有旀。追于到付同日午時成貼同倭學手本內, 同日同時馳到舊助羅浦江口前洋, 則倭小船二隻, 果爲止泊, 故與主鎭將金得祖替代座首辛在鳳, 眼同問情, 則第一隻段, 飛船吹噓良中, 頭倭一人, 格倭五名及交代次別禁徒倭一人, 中禁徒倭三人, 下代倭一名等, 館守倭了私書一度及持路引同騎爲有旀。第二隻段, 飛船吹噓良中, 頭倭一人, 格倭五名, 交代次別禁徒倭二人, 中禁徒倭一人等, 代信倭了私書一度及持路引同騎爲有矣。同二隻船倭人等言內, 島中別無他事, 而俺等所乘飛船二隻, 他大船二隻, 合四隻, 今月十二日晨朝, 自馬島待風所, 同爲發船, 直向館所, 纔到水旨, 風勢不利。他大船二隻, 落後洋中, 仍値日暮, 不知所向處是遣, 俺等所乘飛船二隻, 從風轉漂于知世浦境舊助羅浦內島前洋, 同日酉時量相逢迎護船領曳, 戌時止泊此處是如爲乎旀。同二隻船所持路引皮封上下端所着圖書, 比前有異。故問其委折, 則同倭等言內, 弊島, 以酊庵長老僧, 今年四月二十日交遞。故以新長老僧名字南海圖書着來是如爲乎等以。問情後, 栗浦境陶藏浦止泊倭大船一隻問情次, 馳往是如手本爲白有臥乎所, 今此舊助羅浦江口止泊是白在倭飛船二隻, 以十二日戌時量相逢, 亥時止泊是如。該鎭哨探將前已馳報, 而倭學問情, 以十二日酉時量相逢, 戌時止泊是如。手本者, 大是相左, 同倭人處, 更爲詳問, 星火手本之意, 令飭倭學是白齊。追于到付同日戌時成貼同倭學手本內, 同日同時馳到栗浦境陶藏浦江口, 則倭大船一隻, 果爲止泊, 故與主鎭將朴宗郁替代座首辛在鳳, 眼同問情, 則丙申條一特送使倭水木船吹噓良中, 交代次中禁徒倭三人, 小禁徒倭二名, 下代倭一名, 格倭二十名等, 持路引同騎爲有矣。同倭等言內, 島中別無他事, 而俺等所乘大船一隻, 他大船一隻, 他飛船二隻, 合四隻, 今月十二日晨朝, 自馬島待風所, 同爲發船, 直向館所, 纔到水旨, 風勢不利。他大船一隻, 他飛船二隻, 落後洋中, 仍値日暮, 不知所向處, 俺等所乘大船一隻, 從風轉漂于栗浦境柯島外洋, 同日戌時相逢迎護船領曳, 亥時止泊此處是如爲乎旀。同倭等所持路引皮封上下端所着圖書, 比前有異, 故問其委折, 則同倭等言內, 弊島以酊庵長老僧, 今年四月二十日交遞。故以新長老僧名字南海圖書着來是如爲乎等以。問情後, 還歸任所是如手本爲白有旀。追于到付十七日成貼同倭學手本內, 卽到使傳令內乙用良, 舊助羅浦止泊船二隻倭人處, 當初止泊之時, 更爲詳問是乎則, 所告內, 戌時止泊丁寧是如爲乎等以, 緣由手本是如。爲等如馳報及手本是白置有亦。右項知世浦江口止泊倭大船一隻, 同鎭境舊助羅浦江口止泊倭飛船二隻, 栗浦境陶藏浦止泊倭大船一隻, 合四隻, 已爲次第問情爲白有等以。柴水糧饌, 依例覓給之意, 地方官巨濟府使孫亮錫處, 發關分付是白遣, 同三處止泊船, 越送多大浦形止段, 追于登聞計料是白在果。邊情何等嚴急, 而倭學韓琦淳段, 十二日止泊之船, 十四日始到問情者, 極爲稽緩是白遣, 知世浦哨探將金龍伊段, 戌時止泊倭人所告, 若是丁寧, 則初不詳審, 以亥時止泊報來者, 戌亥雖或難分, 擧行亦極疎忽是白乎等以。同倭學韓琦淳, 知世浦哨探將金龍伊, 竝只拿致棍懲爲白乎旀。緣由竝以爲先馳啓爲白臥乎事是白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道光二十七年十二月十七日]
[주1] 승정원개탁(承政院開拆) :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서 지방으로 올라온 밀봉된 장계를 열어보았다는 뜻이다.
[주2] 조왜미변선(朝倭未辨船) : 조선 배(朝船)인지 왜선(倭船)인지 아직 멀어서 명확히 분간하지 못한 배를 의미함.
[주3] 현등(懸燈) : 야간 항해나 신호를 위해 배에 등불을 매단 상태다.
[주4] 만호(萬戶) : 조선시대 정4품 무관직으로, 주로 바닷가의 주요 진보(鎭堡)를 방어하는 수군 지휘관이다.
[주5] 망군(望軍) : 높은 곳(망루)에서 바다를 주시하며 적선이나 이선(異船)의 출현을 감시하던 초소 군인이다.
[주6] 초탐(哨探) : 적의 동태나 상황을 몰래 수색하고 탐지하는 행위다.
[주7] 료시견(了是遣)과 시여위호등이(是如爲乎等以) : 조선시대 공문서(이두문)에서 문장을 연결하거나 원인을 나타낼 때 쓰는 고유한 어투입니다.(~하여서, ~하였으므로 등의 의미)
[주8] 권관(權管) : 조선시대 변방이나 해안의 작은 진(鎭)을 지키던 종9품 무관직. 만호(정4품)보다 아래 직급이다.
[주9] 왜학(倭學) : 조선시대 통역관(역과) 중 일본어를 전문으로 담당하던 관원이다. 왜선이 출몰하면 이들의 정체와 목적을 파악하기 위해 왜학의 동행이 필수적이었다.
[주10] 문정(問情) : 표류해 온 외국 배(표인)에 관원이 직접 찾아가 어디서 왔고 왜 왔는지 사정을 묻고 조사하는 공식 절차다.
[주11] 송사왜(送使倭) : 대마도주나 일본의 권력자가 조선 조정에 외교나 무역을 위해 정식으로 보낸 사신을 뜻한다.
[주12] 로인(路引) : 조선과 일본을 오갈 때 소지하던 공식 통행증(여권)이다. 정식 사신단임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문서다.
[주13] 금투(禁徒) : 대마도나 일본 사신단에서 치안, 경호, 행무 등을 담당하던 직책이나 무사 계급을 조선식으로 표기한 어휘다.(중금투, 소금투 등)
[주14] 거제부사 손량석(孫亮錫) : 거제부사를 1847년 헌종13년 8월1일~ 1849년 헌종15년 12월까지 역임함.
[주15] 이정암(以酊庵) : 일본 대마도(쓰시마섬)에 있던 사찰. 조선 외교에서 매우 중요한 기구인데, 대마도주가 조선과 외교 문서를 주고받을 때 문서의 작성, 검토, 위조 방지(도장 관리)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 승려(이정암 장로)가 상주하던 곳이다.
[주16] 남해도서(南海圖書) : 조선 조정이 대마도 측에 발급해 준 공식 외교 도장(인장). 위조 방지를 위해 이정암 장로가 바뀔 때마다 도장을 새로 새기거나 갱신했다. 본문에서 "도장이 이전과 다르다"라며 조선 관원들이 날카롭게 취조하자, 일본 측이 "올해 4월 20일에 이정암 장로가 새로 바뀌어서 새 도장을 찍어온 것"이라고 해명하는 정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주17] 비선(飛船) : 한자 뜻 그대로 날아갈 듯이 빠르고 가볍게 움직이는 소형 보조선이다. 대형 외교선(대선)을 호위하거나 긴급한 연락, 보조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
[주18] 관수왜(館守倭)와 대신왜(代信倭) : 부산 초량왜관에 상주하며 왜관의 행정을 총괄하던 일본 관원(관수)과 대마도주를 대신하여 외교 실무를 보던 대리인(대신)을 뜻한다. 본문의 표류민들은 이들에게 전달할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