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대구시 달성군 도동서원(道東書院)의 각종 시문(詩文)>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도동서원(道東書院)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서원이다. 이 서원은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2019년 7월 6일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도동서원은 조선전기의 성리학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68년(선조 1) 비슬산 기슭에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지금의 위치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재창건하고 '보로동 서원(甫老洞書院)'이라고 이름하고, 김굉필의 위패를 모셨다. 1607년 '도동'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78년(숙종 4)에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를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지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퇴계 이황은 도동서원(道東書院)의 김굉필을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 하여 조선유학의 정통을 계승하였음을 칭송하였다. ‘공자의 도학이 동방에 와서 결실을 맺었다’하여 편액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기록했다. 이때에 도동서원 건축 책임을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이 완수했고 사당의 삼문(三門) 앞에는 특별한 조형적 작품을 남겼다. 이를 이름 한다면 동방도학지도(東方道學之圖)라 할 것이다.
소학동자(小學童子) 한훤당 김광필(金宏弼)의 실천지성(實踐知性)과, 안민(安民)의 실용학을 추구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무실학풍(務實學風)이 유통하는 영남학의 산실이다. 치우침을 경계하며 성리학의 실천성을 강조했던 ‘중정(中正)’의 정신, 외양(外樣)의 꾸밈에 질색했던 구시(求是 옳음을 구함)는 도동학풍의 본령이자 현실 참여의 원동력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광필(金宏弼)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1) 길 가의 소나무[路傍松] / 김굉필(金宏弼 1454~1504) 一老蒼髥任路塵(일로창염임노진)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 가에 서 있어 勞勞迎送往來賓(노노영송왕래빈) 수고하며 오고가는 길손을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세한여여동심사)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경과인중견기인) 지나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을꼬.
2) 배를 타고[船上] / 김굉필(金宏弼 1454~1504) 人如天上坐 사람이 마치 하늘 위에서 앉아 있는 듯하고 魚似鏡中遊 물고기가 거울 속에서 노니는 듯하다 飮罷携琴去 술 마신 후에 거문고 끼고 돌아가는데 江心月一舟 강 가운데 달빛이 배에 가득 찼어라
●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는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이다.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고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대사헌직을 역임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이는 이황학파의 주자를 기반으로 한 학문적 전통과 서경덕·조식학파의 박학(博學 널리 배움)의 전통을 계승한 결과였다.
3) 자신을 반성하며[自省] / 정구(鄭逑 1543~1620) 大丈夫心事 대장부 그 마음과 하는 일이란 白日與靑天 밝은 해 푸른 하늘과 다름없어라 磊落人皆見 말끔하고 툭 트여 누구나 보는 光芒正凜然 번쩍이는 빛이여 위엄 넘치노라.
4) 도동서원을 배알하고[謁道東書院] / 곽종석(郭鍾錫 1846∼1919) 小學心經兩部書 『소학(小學)』과 『심경(心經)』 두 수양서의 글에서 昔賢當日敬尊如 옛 현인이 당년에 당연히 웃어른을 공경하라 했다. 崇祠合餟瞻巍座 사당의 높은 자리에 모셔놓고 함께 제사를 지내는데 一瓣今朝替束腒 오늘 아침 경건한 마음으로 삼가 어른을 흠앙하였다. [주1] 소학(小學) : 송나라의 유자징(劉子澄)이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1187년에 편찬한 수양서. [주2] 심경(心經) : 송나라 학자 진덕수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1234년에 편찬한 수양서. [주3] 일판향(一瓣香) : 일주향(一炷香)과 같은 말로서 스승의 연원을 계승하는 것. 존경하는 어른을 흠앙하는 것. 향을 피우는 마음, 경건한 마음.
5) 도동서원을 참배하고[拜道東書院] / 송병선(宋秉璿 1836∼1905) 戴尼山下道東祠 대니산 아래 도동(道東)의 사당이 있는데 杏樹陰濃春日遲 살구나무 짙은 그늘 속에 봄날 해는 더디가네 分明此地遺風在 분명 이 땅에 예부터 전하는 풍습이 있으니 小學書中早得師 소학(小學) 책을 일찍부터 스승으로 모셨다하네
6) 도동서원[道東書院] 한헌당 원우인데 현풍에 있다(寒暄堂院宇在玄風) / 오도일(吳道一 1645~1703). 1692년 여름 성주목사로 부임했다가 1694년 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壬申夏 出宰星州牧 甲戌春 還朝) 天佑吾邦大道東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큰 도(道)를 내렸는데 考亭遺派是眞宗 주자학(朱子學)의 유파(遺派)로 곧 진리의 근본(眞宗)이었다. 孤忠不救當時禍 고독한 충성심은 당시의 사화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至訓長開後學蒙 후학의 몽매함을 가르치고 깨우치기에 이르렀다. 依舊江山芳躅在 강산은 의구해도 옛날의 훌륭한 행적은 남아있으니 秪今俎豆閟宮崇 이제 다만 깊게 닫혀있던 사당을 열고 제사를 올린다. 門前淸洛流如馬 문 앞의 맑은 낙동강 물은 말이 달리듯 흘러가고 一脈惟應泗水通 오직 한 줄기 물은 응당 사수(泗水)와 통하여라. [주1] 고정(考亭) : 송(宋)의 주희(朱熹)를 말한다. 고정은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에 있는 지명인데, 주희가 만년에 거처했던 곳으로 고정서원이 사액을 받으면서 그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을 말하기도 한다. [주2] 사수통(泗水通) : 중국 산동성에 있는 강이 사수이다. 낙동강 물이 사수(泗水)와 통한다는 것은 영남의 학맥이 공자의 정통을 이었다고 강조 한 말이다. 사수는 공자가 노나라에서 강학하던 곳이다.
7) 도동서원에서 모재의 운에 차운하다[道東書院 次慕齋韻] / 조긍섭(曺兢燮 1873~1933) 聖代文治自世宗 성대의 문치는 세종조에서 비롯하니 先生儒學冠吾東 한훤당(寒暄堂)의 유학이 우리 동방에 으뜸일세 光風霽月依然在 광풍제월이 여전히 있건만 歎息如今大道窮 지금 대도가 궁함을 탄식하네
[주1] 모재(慕齋)의 운 : 모재는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호이다. 자는 국경(國卿),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1503년(연산군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후 박사ㆍ부수찬ㆍ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1517년(중종12)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장하였다. 원운은 저서 《모재집》 권1에 실려 있는 〈현풍의 학자들에게 보이다〔示玄風學者〕〉를 말한다. [주2] 한훤당(寒暄堂) : 김굉필(1454~1504)의 호이다. 자는 대유(大猷),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일컬었다. 1494년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이 되고 이어서 주부, 감찰을 거쳤으나, 1498년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희천(煕川)에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관련 자료로는 《경현록(景賢錄)》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주3] 광풍제월(光風霽月) : 청랑(淸朗)한 기상을 말한다. 송나라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높아서 흉중이 씻은 듯하기가 마치 광풍제월과 같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용릉(舂陵)은 중국의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 서북쪽에 있는 지명인데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살았던 곳이다. 주돈이의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이다.
8) 제문(祭文)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유생(儒生) 곽경흥(郭慶興)] / 곽경흥(郭慶興 1569~1621) 아아, 지난날에 한훤당(寒暄堂) 김선생(金先生)께서 우리 동방에서 도학(道學)을 주창하였는데, 오직 퇴도(退陶) 선생만이 그것을 듣고 알아 이 세상에 크게 천명하였습니다. 퇴도 선생께서 이미 돌아가신 뒤에 사도(斯道)를 전할 길이 없었는데, 우리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과 대암(大菴) 박선생(朴先生) 및 선생께서 서로 더불어 탄식하면서 함께 퇴도 선생의 서업(緖業)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대암께선 이미 돌아가셨고 선생께서 또 서거하셨으니, 한강께서 외롭게 되었으며, 한훤당의 도(道)는 더욱더 외롭게 되었습니다. 아, 본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께서 배향(配享)되어 있는 곳으로, 저희 소자(小子)들이 수호(守護)하면서 떠받들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돌아가신 데 대하여 어찌 큰소리로 울부짖으면서 목 놓아 울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못난 글솜씨로 제문을 지어 감히 저희들의 정성을 펴는 바입니다. [嗚呼 在昔寒暄金先生 倡道東方 惟退陶先生 聞而知之 大闡於世 退陶旣遠 斯道無傳 惟我寒岡鄭先生 大庵朴先生及先生 相與歎息 共理其緖 大庵纔歿 先生又逝 寒岡孤而寒暄之道益孤矣 噫 本院也寒暄之所享 而小子等之所奉守者 則安得不失聲長號於先生之歿也耶 玆將拙辭 敢伸微悃]
9) 도동서원(道東書院) 액판(額板) 밑에 쓰다[書道東書院額板下] / 정구(鄭逑 1543~1620) 이 선생(이황李滉)이 일찍이 김 선생(김굉필金宏弼)의 서원을 건립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가졌으나 안타깝게도 선생의 생존 시에 이 일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아 열 곳의 서원이 채워지지 못하였다. - 문집 속에 〈서원십영(書院十詠)〉이라는 시가 있으나 아홉 곳의 서원만 있고 열 개의 수효가 채워지지 못했다. - 만일 도동서원이 그 당시에 존재하였더라면 액호(額號)를 손수 쓰시는 일을 어찌 여느 서원보다 뒤에 하였겠는가. - 여러 서원의 액호는 대부분 선생이 손수 쓰신 것이다. - 지금 서원이 중건되어 이름을 도동(道東)으로 하라는 명이 대궐에서 내려오고 뒤이어 판액(板額)이 장차 내려올 예정인데, 마침 또 선생이 쓰신 편액의 글씨 중에서 네 자의 큰 글씨를 찾아서 본을 떠 각(刻)하여 서원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선사(先師)의 옛 필치와 성주(聖主)께서 하사한 판액이 장차 안팎에서 빛을 발하게 됨으로써 배우는 유자(儒者)로 하여금 무엇을 모범으로 삼을 것인지를 알게 하였으며, 따라서 또 이 선생의 유지(遺志)를 이루게 되었다. 이 어찌 다행스럽지 않은가. 이 서원에 들어오는 우리 선비들은 어찌 서로 이 편액을 우러러보고 김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며, 도동의 의미를 깊이 체득하여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오도(吾道)의 전통이 끊기지 않을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력 정미년(1607, 선조40) 가을 7월 일에 후학 서원(西原) 정구(鄭逑)는 삼가 쓰다. [李先生嘗拳拳致意於金先生書院之建 惜乎其不及於先生之時 以得備於十書院也 文集中 有書院十詠 而只有九書院 不備十數 若在其時 則親題額號 何後焉 諸書院額 多先生所自寫 今者書院重新 而道東嘉命 錫自九重 宣額將下 適又於先生書額之中 得四大字摹刻 送于書院 先師舊筆 聖主寵額 將交映內外 庶幾使學者知所宗範 亦所以成李先生之遺志也 寧不幸歟 凡我入院之士 盍相與觀瞻想慕 深體道東之意 勉勉不已 思所以不墜也哉 萬曆丁未秋七月日 後學西原鄭逑 謹書]
10) 도동서원(道東書院)에 한훤당 김 선생을 봉안하는 축문(祝文) / 정구(鄭逑 1543~1620) 거룩할사 우리 선생이 나라에 일어나니 자질 본디 단정하고 타고난 덕순후한데 천도를 일찍 깨닫고서 기반 세워 정한 뒤에 생각 깊고 힘써 실천 도(道) 지키어 간결하니 충과 신은 하늘이요, 경과 의는 땅이었네. 심성 공부 깊이 한 뒤 오랠수록 더욱 힘써 끊긴 도통 이으려고 복희(伏羲) 헌원(軒轅)으로부터 공자 맹자 가르침과 염계 이천 말씀까지 시대 멀고 땅 달라도 그 문하서 공부한 듯 의리 실제 성명 뿌리 흩어지면 다 다르나 도는 본디 하나인데 큰 근본을 알아내고 곁가지는 쳐 버리니 맥락 계통 분명하여 연원 곧장 거슬러가 끊긴 도학 길을 열고 염계 선생 계승했네. 이단 힘껏 배격하여 그들 단합 끊었으며 후학들을 계도하여 어리석음 깨우칠 제 즐겨 아니 게으르니 출중한 자 가득했네. 도 밝히고 부식하니 높은 공과 큰 은혜를 태산북두 우러르듯 영원토록 잊지 못해 상전벽해 그날까지 거룩한 이름 전하리. 대니산이 높디높고 낙동강은 넘실넘실 그 가운데 서원 있어 사당 모습 엄숙하네. 지난날의 쌍계 터는 시끄러운 저잣거리 여기 옮겨 터 잡은 곳 은거지와 가깝다네. 우러르며 공경하니 선생 넋이 강림한 듯 조정에서 유학 높여 베푼 은총 성대한데 임금 사액 거듭 내려 서원 편액 빛나누나. 길일 잡아 봉안할 제 사류들이 달려오니 이 행사의 거룩한 명 대궐에서 내렸다네. 도마 위엔 희생이요, 술병에는 정갈한 술 밝고 맑은 그 정성이 아침햇살 마찬가지 길이 편히 머무소서. 해마다 제향 올리리. [維我先生 奮起東藩 資本端方 德鍾粹溫 早悟天機 立定腳跟 精思力踐 守約不煩 忠信維乾 敬義維坤 眞誠旣積 愈久彌敦 發奮墜緖 遠自羲軒 魯鄒大訓 濂洛微言 世後地隔 如承面論 義理之實 性命之根 散爲萬殊 會于一原 收功大本 刊落枝繁 脉絡分明 直泝淵源 抽關絶學 嗣我周元 力排異說 絶彼板援 開迪後學 指迷燭昏 樂育不倦 茂材盈門 倡明扶植 崇功厚恩 仰若山斗 永世不諼 盛名之傳 山夷海翻 戴尼崇崇 淸洛沄沄 中有精廬 廟貌攸尊 昔日雙溪 城市湫喧 玆焉移卜 密邇丘園 瞻仰起敬 精爽如存 聖朝崇儒 寵渥便蕃 宣額荐降 輝映師垣 涓吉妥靈 衿佩駿奔 厥維休命 出自宸閽 潔牲在俎 淸酌在罇 一誠孔專 皦若朝暾 永寧無斁 歲歲蘋蘩]
위 축문(祝文)은 정구(鄭逑)가 65세 때인 1607년(선조40)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도동서원은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구지면(求智面) 도동리(道東里)에 있는 서원으로, 1605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는데, 이때 사액(賜額)을 받고 위판을 봉안하는 의식을 다시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11) 도동서원 유생에게 보내는 서신[與道東書院儒生書] / 오건(吳健 1521~1574) 늦가을 포산(苞山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서 강학하며 지내는 형편이 어떠하십니까. 지극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전현(前賢)은 이미 가시고 스승의 학문은 의탁할 곳이 없는데, 청렴한 풍속을 아직까지 계승하고 있으니 군자의 고을입니다. 제군이 서원을 창건하여 의지하고 사모하고자 한 것이 수십 년이 되어 오늘에 이룰 수 있었으니, 실로 사문의 매우 큰 행운입니다. 제가 성상의 명을 받고 남쪽으로 온 것은 돌아가신 정승 권모(權某)에게 충정(忠定)이란 시호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창녕 현감(昌寧縣監)이 곧 그 주인인데, 성상의 하사에 감격하고 부친의 은총을 영광스러워하면서 더없이 큰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심부름꾼인 나에게 정성을 미루었으니,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 마땅합니다. 능화판 무늬의 비단을 주어 그 정성을 드리기에 이르렀으니 또한 민간의 관례입니다. 사양하거나 받을 때는 물론 삼가지 않을 수 없지만, 도로써 교유하고 예로써 접대하면 또한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았으나 자기가 소유하는 것을 꺼려서 무익한 곳에 쓰면, 비록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고 해도 또한 어찌 재물을 쓰는 의리에 모두 합치되겠습니까. 하물며 예물을 아직 가져가기 전에 이미 존경하고 앙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이 세속을 따르는 의식을 만났으면 감히 무익한 것을 가지고 유용한 곳에 주고, 그 정성을 인정하여 그 물품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물이 이르는 것은 각기 그 정성이 있으니, 마음에 보존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이것으로 인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니 제가 이 폐백을 서원에 바치고자 하는 것이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제생이 만약 그 물품의 유래를 물으면, 시호로 충성을 표창하고, 폐백으로 은덕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지니고 있는 것을 살피면, 저의 동경하고 앙모(仰慕)하는 정성 또한 어찌 여러분이 허락한 것보다 작겠습니까. 그 정성을 허락할 수 있고 그 물품을 받을 수 있으면, 의리와 이익의 구분은 본래 제군이 일찍이 연구하여 밝히고 재단하여 취사를 정한 것이니, 어찌 저의 설명을 기다린 이후에 취하고 주는 것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자신을 굽혀 남의 뜻에 영합하는 사이에 혹 그 이치를 어기면 스스로를 잃는 후회가 있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저의 견해를 여러분에게 아뢰어 묻는 것은, 연구하여 밝힌 가운데 탁월한 견해가 있어서 책려하는 것을 듣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秋晩苞山 講候如何 不堪慕想之至 前賢旣往 師道無托 淸風尙襲 君子其鄕 諸君之所欲建院而依慕者 蓋將數十年 而得成於今日 實斯文之一大幸也 健之奉命南來 爲故相權某 而忠定其謚 昌寧守乃其主人 而感上之賜 榮父之寵 欲報莫大之恩 而推誠於使人 宜無所不用其極 至納其菱花紗段 以輸其忱 亦一俗例也 辭受之際 固不可不謹 而其交也以道 其接也以禮 亦不可不受 受之而嫌於己有 用之於無益之地 雖出於不獲已者 亦豈盡合於用財之義乎 況幣之未將之前 己有敬慕之心 而値此應俗之儀 則敢不將無益而供有用 許其誠而受其物乎 物之來也各有其誠 而心之所存者 必因此而著 則僕之將此幣而欲納於書院者 夫豈徒然哉 諸生若問其物之所自 則奬忠其謚 而感恩其幣也 察其心之所存 則鄙人向慕之誠 亦豈小君子之所許者乎 其誠可許 其物可受 則義利之分 固諸君所嘗講明而裁度者 何待鄙說而後能定其取與乎 然其遷就之間 或違其理 則未免有自失之悔 故敢以鄙見 稟質於左右者 庶聞講明之中 有所卓見而警拔焉] [주] 권모(權某) : 권벌(權橃, 1478~1548)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저술로 《충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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