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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발생의 현장] 요동고성.비사성.고평양성 등은 모두 지진으로 사라졌다. 안동 도호부는 당의 6도호부 중 하나이다. 당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평양에는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다.그러나, 신라가 이에 반발해 나당 전쟁이 터졌다. 이때부터 동족 의식이 형성되어 신라와 고구려 유민은 연합하여 당군을 패배시켰다. 안동 도호부는 이후 요동군 고성으로 치소를 옮겼다가 AD698년 신성으로 옮기고 다시 AD743년 평주로 옮겼다가 AD758년 요서 고군성에서 안록산의 난으로 폐지되었다. <서진군국도> 낙랑군.안동도호부.평주.요서위치 이지도에서 표시하는 각 지명들과의 거리는 《괄지지》에서 말하는 평양성의 위치를 중심으로 작성해본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물러간 이유중에는 군사적인 충돌 외에도 또다른 이유가 있었던것이다.설상가상이었을까.지진으로 인한 자연재난이었다. 여기에 고.수.당이 격렬하게 충돌했던 요동군 고성과.비사성.그리고 고 평양성의 모습을 오늘날은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전쟁 당시의 현장이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오늘날처럼 한사군의 위치를 두고 극심한 논쟁은 없었을것이다.사료상 기록에 요동군 고성(遼東郡故城),혹은 요서 고군성(遼西故郡城),고평양성(故平壤)등 지명앞에 '故'字가 붙으면 상대적으로 복수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세간에는 수천 년 동안 전해오는 전설이 있으니 그것은 당신도 나도 알고있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다. 갈홍의 《신선전》에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했다는 뜻인데, 이 말은 바로 발해(渤海)가 수몰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상(扶桑)이 있는 곳은, 발해(渤海)의 해중(海中)이고 그 해중(海中)에 삼신산(三神山)이 있으며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 영주(瀛州), 방장(方丈)을 일컫는다고《사기》<봉선서>는 기록 하고 있다. 이곳이 선인왕검(仙人王儉)의 주거지었다. ▼아래 지도는 《명사》<조선열전>이 주장하는 평양성과 고려의 서경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지도다. 요양을 평양성이라고 주장하는 요즘 사학자님들께 보여주고 싶은 지도다.이 지도에는 지금은 없어진 산해관 우측으로 흐르는 패수의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고구려 평양성.후에 서경.당나라 안동도호부.원나라의 동령로와 총관부 등이 바다에 그려진 이 지도를 연구하면 한국의 고대사는 자연히 복원될것이다.
▼ 고왈 고려 평양 후 개위 서경(古曰高麗平壤 後改爲西京) <대명구변인적노정전도(大明九邊人跡路程全圖)> 제작 왕군보(王群甫) 제공:향고도 편집:필자 청 강희2년(1663)청에서 제작돤것을 다시 일본에서 번각하여 쓰쿠바대와 고베 대학 도서관에 소장 ▼위의 명나라때 옛 평양성의 위치를 동북공정이 시작된 이후 담기양의 지도로 왜곡시킨 2005년판 <중국역사지도선집>2-2 唐1 담기양이 안동도호부를 신평양에 그린 지도 2005년대 발행된 <중국역사지도선집> 2-2 당-1 담기양이 그린 안동도호부 1차이동지 요동군고성 <2005판 중국역사지도선집> 2-2唐-2 ▲이 지도에는 영구(해성)지역에 있어야 할 비사성의 위치를 대련지역 으로 옮겨 그리고,안동도호부의 1차 이동지 요동군 고성(遼東郡故城) 의 위치를 산해관의 동쪽 요동만에 그리고 있다.이 요동군 고성은 어디로 갔는가.
담기양이 그린 안동도호부 2차 이동지 신성 <2005년판 중국역사지도선집>2-2 당-3 그 옛날 발해(渤海)는, 넓은 평원에 있었던 대동이(大東夷)의 거주지였다가 약 5천 년 전부터 서서히 뻘로 변해갔으며, 그래도 봉래(蓬萊), 영주(瀛州), 방장(方丈) 등은 높은 지대였으므로 육지(태백산)가 섬으로 변할 때까지 별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 후 지진으로 육지에서 16개의 섬으로 변했으며(《중국고금지명 대사전》1931년판 장려화…) 오랜 세월 동안 신비한 신선들의 세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발해는 원래 '뻘밭'을 뜻하는 싯담어(梵語)이다. 《동국정운》에 기록한 발(渤)자의 정확한 발음은 '뻘'이다. 즉, 갯뻘을 말한다. 또한 싯담어 사전에는 대평원의 뜻도 있다.《관자》 <규도편>에서는 이를 발조선(發朝鮮)이라 하고, 제나라에서 거리가 八千 리라 하여 혼란을 야기시켰으나 실재의 거리는 바다를 경계로 팔십 리다. '十'字를 '千'字로 왜곡한 징후가 짙다. 또한 평양(平壤)이란 지명중 '壤'字는 뻘을 뜻한 무괴유토(無塊柔土)라는 뜻이다. 평양은 뻘밭이 평원을 이루는 섬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곳이 결정적으로 물에 잠기게 된 첫 번째 기록은 《규원사화》<단군기>에 단군조선이 개국한지 3ㅇ년(甲辰 年)이 되던 해에 일어났던 대홍수였는데,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라고 하였다>.바다가 아니라면 불가한 표현이다. 두 번째 기록은 당나라가 평양성을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이후에 일어났다고 하는《대청일통지》의 기록이다. 이렇듯 고조선이 바다에 있었다는 중국 측의 기록은《산해경》과《고려도경》<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곳을 곽박은 주석에서 낙랑군이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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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재발했군.
구산, 너 시각에 문제있냐?
니 글을 너도 보겠지?
니 글 보는데 아무런 지장을 느끼지 못하냐?
짜증나지 않냐?
하긴 지 글인데 짜증이나 눈을 찌프린들 찌프린다고 하겠어?
얘, 어여 병원에 가 보거라.
까불지 말고 너 자신있거든 요동군 고성이나 비사성 좀 찾아보거라.눈밝을때 한번 찾아놓고 큰소리 치란 말이다.넌 죽으나 사나 자나깨나 일본놈들 지도조작설이나 붙들고 거품물지 말고. 알간? 이 못된놈아
@구산(九山)
못된 놈?
역사를 감정으로 하는 놈이구나.
어리석은 놈이로고.
@백랑 못된놈으로 부족하냐? 호로자슥,난하를 패수로 주장하려면 최소한 창려현 서남 바다에 있다는 갈석산 정도는 찾아서 밝혀야지.입만 벌리면 난하가 어떻고.요수가 어떻고 노래를 하면서도 그 실증이 되는 갈석산의 존재에 대해서는 꽁지를 내린다.이제 그만 그 가소로운 얼치기 공론은 집어치워라.임만 벌리면 1250리의 요수를 들먹이면서 진정으로 맞아떨어지는 그 경로를 밝혀본일은 있는가.
@구산(九山)
이거 돌대가리네.
야이 임마, 내 글을 똑바로 읽고서 비판을 하거라.
난하를 패수로 주장한다고?
또 갈석산에 대해서는 꽁지를 내린다고?
놀고 있구나.
너 안경맞춰야 되겠구나.
글 읽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는 놈이 뭔 개소리가 그리 심하냐?
에효, 3 류 공상 소설을 쓰는구나.
백랑아 제발 명심하거라 송나라의 소동파나 한국의 문정창같은 사학자들의 발해 윤몰논을 무시하고는 고조선의 역사를 밝히기는 어려우니라
@구산(九山)
문정창은 돌대가리고 소동파?
소동파가 뭔 역사를 알았다고 들먹이냐?
최소한도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安鼎福)이 중국 춘추시대 열국의 국계와 배치를 그림으로 표시하고, 나라의 흥망과 사건의 발생 등을 정리하여 알기 쉽게 해석한 책.《춘추열국도설》은 읽거라.
에고, 안정복이 뭔 대가라고!
안정복 들먹이지 말고 너나 제대로 된 고지도도 보며 사람답게 생각 좀 해가며 책 읽거라.
그리고 색칠 싹 빼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