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 12:1~8
제목: 가룟 유다의 배신이 주는 경고와 복음
● 기독교는 성경을 읽으며 가룟 유다의 위선과 배신 사건에서조차도 하나님의 경고와 복음의 메시지를 받고 자기 점검을 하며 회개하는 신앙입니다.
| 딤후3:15.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으나 끝내 배신자의 이름으로 남은 가룟 유다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고, 기적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배신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은 불신자나 이방인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여러 제자들 중에서 추려내어 선발된 영광스러운 사도였습니다. 제자들 중 사도가 나옵니다.
| 눅6:12.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14.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Judas Iscariot, who became a traitor) |
유다는 믿었지만 주님을 배신하고 배교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가장 뚜렷한 위선의 아이콘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신앙은 아래에 나옵니다.
| 요12: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he was a thief)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유다는 겉으로는 정의롭고 청빈(淸貧)을 강조하는 제자처럼 가장했습니다. 그는 “왜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했습니다만, 성경은 그의 속마음과 진짜 정체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도둑놈이었습니다. 비주류 군소교단이나 신비주의 목사들 중에 세속법의 범죄 전과자들이 꽤 있습니다. 이런 경우, 도둑놈이 사도 노릇을 한 가룟 유다의 경우에서 심각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유다 위선의 극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 마26:21.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betray me) 하시니 22.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Surely not I, Rabbi?”)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Yes, it is you.”) |
예수님과 가룟 유다 본인은 배신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그의 위선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선들의 왕 중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선은 겉으로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중심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고, 더 나아가서는 사탄에게 붙잡힌 상태입니다.
| 눅22:3.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Satan entered Judas, 공동: 유혹에 빠졌다) 4.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agreed to give him money) |
가룟 유다의 배신 사건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습니다: ‘신앙은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이다. 예배 자리에 있다고 모두가 참 제자는 아닙니다. 교회의 봉사를 한다고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뱉는 말은 경건할 수 있으나,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위선자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의 중심으로 회개한 지 여부를 통찰하십니다.
|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충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saves those who are crushed in spirit) |
● 유다의 배신을 기계적 예정이나 불신자의 운명론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그는 열두 제자들 중 유일한 도둑놈이고 배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고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가던 자였습니다(요12:5). 그런 오점과 악행이 누적되니 사탄의 포섭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 마26:14.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
눅22:3~5에서 보았듯이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고, 공동번역은 이를 ‘유혹에 빠졌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구체적 실행 방법은 유다가 짠 것입니다.
| 마26:48.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공동번역: 배반자는 그들과 미리 암호를 짜고)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구약에서 노예 한 명의 값이 은 삼십이었습니다(출 21:32).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노예 값으로 평가했습니다.
배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탐욕이 쌓이고, 마음이 굳어지고, 결국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작은 죄를 방치하면 큰 배신으로 자랍니다. 돈에 대한 욕심,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위선이나, 실망∙불만 등을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죄는 처음에는 마음에 들어오고, 다음에는 생각을 지배하고, 마지막에는 인생을 지배합니다. 어린 이는 큰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바늘 도둑질이 성장하면 파멸로 갑니다. 유다 배신의 비극 중 가장 큰 치명타는 후회는 했으나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이치는 신앙에도 적용됩니다.
| 마27: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공동: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
|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유다도 어설픈 양심은 있어서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돌아오는 참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은혜로 나아오지 못했습니다. 한편, 정열적인 사도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통곡하며 회개했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유다는 고의적 범죄 후 절망으로 갔고, 베드로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일시적 부인을 했지만 참 회개를 하고 주님께로 갔습니다. 범죄나 신앙의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넘어지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칭의된 성도일지라도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의 죄악만을 비난하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생활 중에 무의식중에 저지르는 작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데요. 혹시 실족하고 유혹에 넘어졌을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첫댓글 즐거운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이 포스팅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호크마 주석: 디모데후서>
=====3:15
네가 어려서부터 - '어려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푸스'(* )는 목회 서신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문자적으로는 '유아'를 의미하는 것으로(Sim-pson) '복중에 있는 아이'(눅 1:41,44)나 '젖먹이'(눅 2:12,16;18:15;행 7:19;벧전2:2)를 가리킨다. 한편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은 (1) 그 방법, 원리,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이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에 대해 가르쳤다(창 18:19; 출 12:26,27; 신 6:7,9;11:19;시 119:15,16,99;사 38:19;엡 6:4).(2) 그들의 교육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케 하는 것'이다(잠 1:7;9:10). (3) 부모의 훈계를 따르고 부모를 공경하도록 교훈했다(출 21:15-17;잠 1:8;6:20;엡 6:1-3). 부모들은 자녀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양육하였으며(시 103:13) 자녀 스스로 선택, 결정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수 24:15). 이렇게 어릴 때의 자녀 교육은 부모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성장하면서는 제사장, 레위인, 선지자, 특별 가정교사, 박사들 그리고
랍비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대상 27:32).
성경을 알았나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에라 그람마타'(* )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문서'(Sacred Writings)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킨다(Hendriksen, Lock).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일반적 표현 '그라페'(* )와는 다른 독특한 표현으로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Scott).(1) '히에라 그람마타'에서 '그람마'(* )는 원래 '문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디모데가 어릴 때 성경의 '문자'를 읽고 썼던 바로 그 기초적인 성경공부를 가리킨다(Lenski). (2) 당시 에베소의 거짓교사들은 '에페시아 그람마타'(* , '속된 문서')를 사용하였다(행 19:19). 바울은 이것과 대조를 나타내기 위해서 '히에라 그람마타'를 사용한다(Lock). (3) 디모데가 익숙했던 성경과 관련된 다른 기독교 문헌들을 가리킨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시 19:7;롬 11:11;빌 1:19). 성경에는유대인들이 구원의 방법으로 주장하는 율법 외에 다른 방법인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롬 3:21,22).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아'(* )는 '통하여'라는 의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성경'을 조명(照明)하며 생명력을 부여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Scott)
=====3:16
모든 성경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 )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Lenski).(2) '그라페' 앞에 관사 '헤'(* )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Lenski). (2) '그레페' 앞에 관사 '헤'(* )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every)을 의미한다(Bernard, Simpson, Guthrie). 두 가지 견해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Calvin).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 )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같이(창 2:7)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 영감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벧후1:21). 이에 대하여는 딤후 3:16,17 주제강해 '성경 영감론'을 참조하라.
교육하기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 )는 '모든 삶 가운데 어린아이를 올바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교훈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딤전 5:17).
책망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그몬'(* )은 '유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Lenski) 잘못된 교리나 행동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단자들의 거짓을 밝혀내는 것을 시사한다(엡 5:18;딛 2:15).
바르게 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노르도신'(* )은'추를 바로 세우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바로잡고 그들이 그 길로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시사한다(단 12:3;요 21:15-17). 의-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 는 법률적인 용어로 '엄격한 정의'(正義)를 뜻한다.
네,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6:12
이 때에 - 예수께서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는 동안, 특히 5장과 6장 11절까지의 사건들이 있은 후를 가리킨다. 11절과 관련하여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들의 음모를 깨달았을 때에 이 지방을 떠나셨다고 기록하는데(마12:15) '이 때'는 예수께서 그 지방을 떠나신 직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때가 정확히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 이 구절에서 산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나(Conzelmann) 학자들은 팔복을 말씀하신 산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Farrar). 아무튼 여기서 '산'(* , 토 오로스)에는 관사가 있어서 예수가 늘 오셨던 친숙한 산임을 암시하고 있다.
밤이 맞도록 - '디아뉘크테류오'(* )는 '밤을 새다'의 미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오랜 지속을 강조한다. 이 단어는 의학적 용어로(Vincent) 신약에서는 이 구절에만 나오지만 70인역 등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의학적 용어로 쓰는 경우에는 밤을 새워 병 간호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예수의 삶을 살펴볼 것 같으면 그의 생애에서 모든 중요한 사건 전에는
반드시 기도하시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끈임 없는 기도
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기도와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막 1:35).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의 능력의 공급선이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죄인을 구속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애절하고 절박한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다. 본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그가 선택하려고 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통해 미래에 성취할 모든 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셨다. 이러한 기도는 남에게 과시(誇示)하기 위해 요란스럽게 빌었던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는 현격히 대조된다(막 12:40).
=====6: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Thaddaeus)라고 부른다. RSV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Judas the son of James), KJV에는 야고보의 형제 유다(Judas thebrother of James)라고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는 그의 말이나 활동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석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예수께 질문한 적이
있는데(요 14:22) 이 제자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 곧 다대오일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 가룟은 그가 태어난 마을 그리욧의 헬라어 형태로서 '그리욧 사람'이란 뜻이다. 이 가룟이란 이름은 그의 아버지 시몬에게도 붙여졌다(요 6:71;13:2,26). 그리욧은 '기럇'과 똑같은 말로서 기럇 여아림에 있는 것임이 밝혀졌다. 그중 하나가 모압에 있고(암 2:2) 다른 하나는 에돔 가까이 남동쪽 해변에 위치한 유다에 있다(수 15:25). 그가 언제 어떻게 하여 제자가 되었는가는 성경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다. 그는 공관복음
의 열 두 사도의 명단에 맨 나중에 돈궤를 맡은 자로서(요 12:6) 신뢰와 신망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를 팔 생각을 갖도록 유혹했다(요 13:2). 결국 그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낭비한다고 항의(요 12:5)한 정의감을 내팽게 친 채 겨우 은 삼십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넘겼다. 당시에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이란 기껏해야 짐승에게 받혀 죽은 노예의 몸값에 불과한 것이었다(출 21:32).
유다라는 이름은 좋은데, 유다들 중 가룟 유다가 배신자인 것이지요.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나드(nard) 향유인데, 인도에서 나며 파사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특별히 술을 향기 있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혹설에 이 향유는, 나사로 죽었을 때에 그 시체에 바르고 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의 내용은 마리아의 특별한 사랑 표시를 말한다. 위의 학설은 이런 사랑 표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가 쓰다 남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면, 그것은 지극한 사랑 표시의 선이 될 수 없다. 막 14:8비교.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그의 발에 붓는 봉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와 존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보셨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하고 발에 부었다는 기사는 없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다. 라그랑지(Lagrange)는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곧,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만큼, 요한은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는 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뿐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마 26:8에 의하면, 마리아의 향유 부은 일에 비평한 이들이 "제자들"이라고 하였다(막 14:4에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음).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가룟 유다만 거론한다. 유다가 그 다른 제자들보다 지도적 처지에서 저런 비평을 하였기 때문에, 요한이 여기서 그의 이름만 말하고 그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300날 동안의 노동 품값이라고 한다. 유다는, 가난한 자를 예수님보다 귀히 여긴다고 여기 말한 셈이다(Grosheide).
이것은 세상 생각으로만 타산하는 그릇된 생각에서 일어난 불평이다. 이 불평은, 한 영혼이 예수님에게 사랑을 붓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어두움이다. 마리아와 유다 두 사람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는 희생자임. 그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아낄 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니, 주님의 말씀과 같이 행한 자이다. 곧, 마 22:37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악한 일에 최선을 다 할 줄은 알면서도 하나님께 그리할 줄은 모른다. 인도의 어떤 선교사가 한 번은 이상한 일을 보았다. 곧, 간지스강 가에 한 여자가 섰는데, 앓는 갓난아이는 팔에 안고 건강한 아들은 옆에 세워 놓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오랫동안 거기 서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 선교사가 다시 와서 보니 그 옆에 섰던 건강한 아이가 없어졌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그를 강에 넣어 악어들로 먹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 대답은, "나의 신(악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져서
이렇게 악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2) 유다는 옳은 것을 비평하였음. 유다는 마리아의 봉사를 비평하였으니, 그것은, 한 영혼이 그리스도와 뜨거운 관계를 맺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을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태도이다. 예수님은 천하의 몇 만 배보다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분이다. 이와 같이 귀한 예수님을 위하여 천하를 바친들 아까우랴? 그러나 유다는 물질만 귀한 줄 알았으며, 빈민 구제를 구실로 삼아 트집을 잡았다.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평한 것(마 26:8; 막 14:4)은, 부주의로, 혹은 피동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 귀절에 나타난 대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위선자(僞善者)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획적인 악행이었다. 유다는 저렇게 탐심이 강하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선생을 파는 무서운 죄악까지 범하였다(눅 22:3-6). 평소에 그의 마음 속에 자라나던 죄악(탐심)이 결국 그로 하여금 큰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예수님과 동행하였음에도 탐심을 버리지 못한 유다의 모습늘 보면, 예수님 말씀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던 사람 같습니다.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6:21
저희가 먹을 때 - 역사적인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었다(유월절 식사 절차는 17절과요 13장을 참조하라). 예수께서 제자들로 더불어 나누신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잔치였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이것은 최후의 유월절이었다. 즉 유대인의 유월절 잔치가 예표하는 바 '구속'은 그 다음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완성된 것이며, 여기서부터 유월절의 지위는 우리 주의 성만찬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인의 성례가 되었다(막 14:22-25, '유월절과 성만찬' 눅 22:19, '성만찬과 성찬식' 참조).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 당신이 친히 선택한 사랑하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이 선언은 마태, 마가, 요한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유다는 은밀한 중에 예수를 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미 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되어가는 일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만약 제자들이 그 계획을 알았다면 유다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실로 이 말씀은,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으며, 유다에게는 예수께서 자신의 배반적인 거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신 것은 물론 그 죽음에 이르는 절차(節次)까지도 은연중에 예견하신 바 있다(2절 ; 17:22 ; 20:18). 한편 예수께서는 유다의 악행을 아셨으나 그를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말로 마지막까지도 그의 마음을 돌이킬 것을 권고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완곡한 사랑의 호소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을 위압, 강요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회개를 호소하신다.
=====26:22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 요한은 이때 '서로 마주보며'라고 기록함 로써(13:22) 제자들의 의아한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공동 번역과 새번역은 '저마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본래의 뜻은 '각자가 한 사람씩'이라는 뜻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각자가 한 사람씩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주여 내니이까(* , 메티에고 에이미 퀴리에) - 여기서 의문사 '메티'는 질문자 쪽에서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즉 이를 달리 번역하면 "저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죠? " 정도의 질문이 될 것이다.
사실 11제자들은 이러한 본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질문을 통해 적어도 자신들의 연약함을 직시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 예수를 해칠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주여'라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즉 신앙의 주(主)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는 '랍비여'라는 말로 부름으로써(25절) 예수를 단지 '선생님'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26:23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 이 '그릇'은 과일이나 식초를 혼합하여 만든 소스를 담은 '대접'으로서 도구를 사용치 않고 주로 손으로 취식(取食)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쓴 채소와 함께 음식을 여기에 담갔다가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이때가 구운 양고기를 먹는 시간이었다면 '그릇'에는 나물과 과일 그리고 퓨레(puree)가 담겨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누룩없는 떡과 함께 그것을 먹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 있는 대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라는 말로만 가지고는 그 당사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유월절 식사 때에는 함께 자리한 사람들
각자가 그 그릇에 손을 넣어 찍어먹기 때문에 예수께서 손을 넣으실 때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사람이 함께 손을 넣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이에 대한설명도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이 말은 (1) 예수와 동시에 찍어 먹는 자(Bengel), (2) 예수가 말씀하실 그 순간에 그릇에 손을 넣은 자(Plummer)등의 견해가 있다. 이외에도 휀샴(Fensham)이라는 학자는 쿰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서 유다가 예수와 함께 손을 그릇에 넣은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쿰란 공동체에서는 그릇에 손을 넣는 순서가 있는데 그것은 계급에 따라서 차례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예수와 함깨 그릇에 손을 넣었다는 것은 유다가 예수의 지도자적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반역의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전체 분위기상 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단지 예수와 함께 같은 접시에서 먹는 한 사람이 그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할 뿐인데(막 14:18), 마태복음에서는 방금 그의 손을 예수와 함께 접시에 넣은 자가 배반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당사자에 대한보다 구체적인 암시이다.
더욱이 예수 자신이 떡 조각을 찍어다가 유다에게 주는 것을 기록한 요 13:26, 27에서는 배반자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하튼 가장 친근한 사람끼리 마음을 터놓고 식사하는 유대인의 풍습에 비춰볼 때 식사 중에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를 한 것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시 41:9). 그것은 곧 예수께서 다함없는 사랑을 베푼 바로 그가 예수에게 가장 해로운 배신(背信)을 한 것이었다.
=====26:24
인자는...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는 구약 예언에 대한 일반적 언급이다('인자'에 대해서는 눅 5:24 강해를 참조하라). 그러나 본문에 있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해 줄 수있는 구약 성경 인용구는 찾을 수 없다. 혹 고난 받는 종을 노래한 이사야 53:7-9이나 다니엘 9:26과 같은 구절을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유월절 어린양과 같은 예언적 유형론(2:15 ; 5:17-20)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두 가지가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말을 하나님이 작정하신대로,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대로 되어진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간다'는 말은 죽음을 향하여 갈 길을 간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요 7:33 ; 8:21, 22) 이 단어의 직접적 의미는 죽는다는 뜻이기 보다 차라리 '떠나간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대하여 예언한대로 고난의 길을 '갈'뿐 아니라 그 길을 통과한 후 영광을 받아 아버지께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예정된 대로 죽음을 겪게 되지만 그를 파는 자의 죄는 결코 가벼워질 수 없다. 따라서 유다는 결국 자기가 한 일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의 형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 한 그런 종류의 형벌인 것이다. 아뭏든 이는 유다의 배신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모두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키고 구속사가 성취되도록 한다. 그러나 인간의 책임은 악한 마음의 유혹에 넘어간 잘못에 대한 것이다. 그 결과로 해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하여 메시야의 백성이 죄에서 구원받게 되고(1:21), 인간이 유혹에 빠짐으로 인해서 영원한 심판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 가룟 유다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비참하게 될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는 당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는 속담적 표현으로 욥기(욥 3:2, 10, 11)와 외경(에녹 38:2)에서도 발견된다. 한편 배신하여 절망적 운명에 처하는 것보다 차라리 세상 햇빛을 보지 않은 자가 훨씬 좋았겠다는 이 비극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계속 자신의 반역 의지를 실천해 갔다. 그리고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바로 이때 유다가 밖으로 뛰쳐나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요 13:30).
=====26:25
랍비여 내니이까 - 이 문장 앞에 나오는 '예수를 파는 유다'라는 문구는 마태가 열두 제자의 명단(10:4)을 제시할 때마다 덧붙였던 형용구였다. 여하튼 이미 예수를 팔기로 공회원들과 내통하고 있었으며(14-16절), 더욱이 예수의 회개에의 권고성 발언에도(21절) 불구하고 그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양심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지독한 위선(僞善)이다. 더구나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랍비'라는 호칭으로 예수를 부른다(22절). 이것은 유다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의 메시야성을 철저히 무시한 언사이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그런데 유다 역시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적대자들의 반열에 서고 있는 것이다. 유다는 이 칭호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배반하는 순간에 또 한 번 사용할 것이다.(49절).
랍비라고 부른 의도도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22:3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에 대한 묘사는 공관 복음서가 공통되게 다루고 있지만 배반하는 주체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는 누가가 독특하다. 즉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스스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아 넘긴 것으로 묘사하지만 누가는 12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감으로써 유다의 배반이 시작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에 의하면 사단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 요 13:2에서는 '마귀가 벌써...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아마도 누가와 요한은 유다의 배반이 유다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사단의 짓임을 말함으로써 예수의 대적은 궁극적으로 사단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 사단은 첫 사람 아담 부처를 유혹하고 죄악에 빠뜨린 것을 비롯하여(창 3:1-13) 인류 역사를 통털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離間)시켜 왔으며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사람들마저 멸망에 빠지게 하려고 안감힘을 다 쓰고 있다(벧전 5:8). 따라서 인류 구속의 대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야말로 사단의 눈에는
가장 무서운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시종일관 예수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에로 몰고 갔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승리였을 뿐 예수는 부활을 통해 피와 죽음과 세상을 정복하시고 사단의 머리를 깨뜨렸을 것이다(창 3:15).
=====22:4
군관들 - '군관들'(* , 스트라테고이스)이란 성전 수위대장을 지칭하는 말인데 단수로 사용되었을 때는 제사장 다음가는 직책인 성전 지배인을 가리킨다(행 4:1 ; 5:24, 26). 여기서는 복수로서 수위 대장을 가리키며 무력적 힘을 집행할 수 있는 권력자를 지칭한다. 마태와 마가는 대제사장만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를 체포한다는 생각에서 볼 때 누가의 진술이 훨씬 자연스럽게 보인다.
방책(方策)을 의논하매 - 마태의 경우를 보면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테니 얼마의 돈을 주겠느냐고 흥정했다(마 26:15). 방책이란 돈에 대한 흥정, 6절의 표현처럼 민중들이 없을 때 체포할 것 혹은 48절의 언급처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할 것 등에 대한 의논을 포함할 것이다. 어쨌든 가롯 유다의 확연한 배신으로 인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호기를 만났고
예수의 공생애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게 된다.
=====22:5
저의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 지라 - 의논 대상자들의 기뻐하는 모습이나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표현은 마가와 동일하다(막 14:11). 그러나 마태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은 30을 달아서 유다에게 직접 주었다고 언급한다(마 26:15). 여기서 은 삼십은 구약의 예언(슥 11:12)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비천한 자들의 죄과를 담당하셨다는 메시야적 사역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은 삼십, 즉 은화 30세겔(shekel)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제사장과 성전 수비대장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 대한 그들의 사악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마태의 표현을 보면 유다가 먼저 돈을 요구하며 예수를 넘겨 주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나타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급박(急迫)하게 진행시켰던 상황과 유다의 배신이 시기적으로 정확히 맞아 떨어져 이 가운데 사단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좋은 설명입니다. 잘 참고하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죄질이 안 좋은 게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 계획적, 적극적이었고, 제사장들에게 가서 돈 거래를 했을 만큼 악질적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를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느냐고 먼저 제안을 했을 정도로 돈 거래에 밝은 면모를 보여 줍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사람 됨됨이가 돈에 취약했던 것을 보여 줍니다. 헌금궤에서 돈을 훔쳐가더니 예수님의 장사를 예고하는 것으로서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는 것을 향해서는 가난한 자들 타령을 하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습니다. 제자들도 가룟 유다가 헌금을 유용하는 도적이란 것을 당시에 알고 있었겠지만 그 일들이 커져서 자신의 스승을 팔아 넘기는 죄에 이르기까지 커져버릴 줄은 몰랐다가 나중에서야 전모를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살까지 간 것은 사탄이 그 영혼을 잠식한 것이 가장 컸다고 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자를 정도로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지만 비겁함으로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을 예수께서도 예고하셨죠. 베드로의 경우는 이 일을 두고 예수께서 계속 기도해 주셨던 것이 유다의 경우와 근본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유다의 도둑질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노베 공감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간파하시는 주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주님께 대한 충성심, 깨끗한 마음,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모르실리 없었겠죠. 그래서 처음부터 베드로는 교회를 이끌어 갈 수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떡잎부터 알아 본다는 말이 이런 경우일 것 같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결코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오늘 묵상을 통해 더 강하게 듭니다. 목회자, 교회의 타락이 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숱한 역사 속에서도 발견하는데요. 한국 교회의 타락과 무너짐이 목회자들이 돈을 너무 사랑한 결과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목회자들이 돈에 대해서, 헌금에 대해서 일체 깨끗한 마음으로 욕심 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 또한 성령께 붙들려서 항상 회개하고 돌이킬 양심의 자유가 있는 성도가 되기를 더욱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이것을 일깨워 주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내용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하나님께서 참혹한 변절자 가룟 유다의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신 것은 후대의 성도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성도의 견인을 하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좋은 묵상입니다. 내용도 아주 어렵지는 않고요. 우리에게 경종과 분발을 동시에 유발하는 복음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