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피었다. 아찔하도록 고운 색색의 요정들이 계절을 밝히고 있다. 봄이 꽃을 피운 게 아니라 하사한 꽃들이 엉거주춤하던 봄을 화들짝 피웠다. 꽃 등불이 켜진 세상은 찬란하고 향기롭다. 눈웃음을 날리며 하늘거리는 봄꽃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오페라 무대에 등장한 프리마돈나처럼, 매혹적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꽃향기가 깃들 것 같은 날, 수필가들의 봄 행사가 열렸다. 흙냄새 나는 넓은 마당이 시원하고 집 뒤 미나리 밭의 초록이 살팍한 곳, 도시를 벗어난 한적한 음식점에서다. 마당 앞 따사로운 풀숲엔 갓 피어난 쑥과 풀이 어울려 시골 냄새가 고물거린다. 사방이 봄빛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느긋하게 점심을 먹으며 자리마다 한 바퀴 술잔이 돌자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정담을 담아 건네는 술잔에 마음속이 향긋해지고 봄맛에 취한 선후배 문인들의 얼굴엔 꽃잎 홍조가 번진다. 봄엔 사람의 가슴도 회춘을, 하는가 싶다.
잔치에는 놀이가 빠질 수 없는 일, 흥이 오르자 모두 들 넓은 마당으로 내려왔다. 줄다리기와 피구, 족구 경기를, 하느라 갑자기 왁자해졌다. 불혹(不惑)의 나이를 지나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을 넘긴 분들이 수년 세월의, 두께를 뚫고 어우러진 한마당이 그냥 즐겁다. 은빛 머릿결을 날리면서도 옹골진 공격과 방어, 멋진 패스로 봄 햇살을 감아올리고, 달아난 젊음을 당겨 보듯 줄다리기에 온 힘을 모은다. 한때의 빛나던 청춘은 성급히 사라지고 제 영역을 넓히려고 가지를 버둥대던 세상도 잠시 젖혀 둔 채 제자리로 돌아온 사람들, 어쩌면 다시 순수로 돌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햇살마저 낙낙하여 흥취를 돋운다. 도시의 기계음과 빠른 비트의 현란한 리듬과 테크니컬한 음악도 벗어난 작은 들녘에서 아이 같은 어른들의 웃음꽃이 애잔하도록 소박하다. 마음을 밝히는 글과 자연을 벗하려는 사람들이잖은가. 물기 어린 그 감성이라면 구멍 숭숭한 가슴속에라도 봄을 일으킬 환한 꽃잎 하나쯤 틔울 것 같다.
봄은 피는 계절이다. 봄을 지피는 숨소리가 곳곳에서 가쁘다. 광양의 매화 축제, 지리산 산수유, 하동과 진해의 벚꽃축제가 이어지고, 여수 영취산 진달래꽃 축제, 오동도 동백꽃 축제가 뒤따른다. 백목련, 자목련의 향기가 피고 지고, 개나리도 샛노란 눈을 떴다. 호젓한 들녘, 아무도 몰래 톡톡 꽃망울을 터뜨린 앙증맞은 노루귀, 얼레지, 꽃다지, 팽이 풀도 지극한 삶의 빛을 피워 올린다. 피워낸다는 것은 간절함이며, 집중의 힘이다. 간절함이 꽃으로 피는 계절, 나부끼는 꽃잎에 마음을 실어 보는 계절, 봄은 꽃으로 하여 정녕 봄다운 게다. 찬란하게 피었다 한순간에 진다 해도 생의 찬미 같은 꽃은 봄의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빛이 난다. 세상의 무대에서도 사회를 움직이는 ‘슈퍼클레스’를 보라. 그들은 정치 경제 문화를 리드하고 패션의 흐름과 소비 패턴을 주도한다. 어디에서건 패기와 자신감으로 활기차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의 중앙에 서 있다. 부르지 않아도 주변에 사람이 모여든다. 그래서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영화나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도 주인공은 돋보인다. 아름다운 조연의 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주연을 든든히 받쳐 주는 역할에 그치기 쉽다. 주인공은 언제나 극의 중심에 있으며 찬연한 젊음을 가졌고 꽃처럼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봄과 꽃, 향기롭고 눈부시고 희망적이지만 영원하지 않기에 더 애절하게 고운 것일까. 연속극의 대사 한마디가 생각난다. 극중 톱 탤런트 역을 맡은 주인공이 후배 탤런트와의 공동 주연을 거부하자 매니저가 쏘아 대던 말이다.
“너 언제까지 젊을 줄 아냐? 곧 아이 엄마 되고 이혼녀 되고 그럴거 아니냐고!”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고도 한다. 내가 떠나오지 않아도 가는 시간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려나. 봄 길을 걸으면 옛날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 젊은 아버지와 고운 엄마와 어린 동생들이 있는 집, 작은 꽃밭이 있는 마당과, 도랑 건너 너른 들판을 지나면 진달래 꽃물 든 동산, 소꿉친구와 진달래 꺾어 들고 팔랑팔랑 뛰어다니던 그 시절 그 길로.
꽃 빛으로 깨어난 봄날에 지난봄에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인다면, 거름으로 묻힌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긋방긋 향기를 터뜨리고 있는 꽃의 속내를 읽는다. 송이송이 쓰고 있는 봄꽃들의 언어가 새롭게 읽힌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하여도, 지는 순간까지 가꾸어야 할 생(生)의 무대에선 자신이 늘 주인공이지.’ 봄을 짧게 요약한 꽃의 말을 새긴다.
그렇더라도 현기증처럼 아득해지다가 기어이 목이 메는 이 한 잔의 설움 같은 봄빛, 난분분 지는 꽃비는 알고 있겠다.
첫댓글 단어 하나 하나가 가슴에 꼭꼭 스며듭니다.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환절기 건강 조심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