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년(중종 32)~1582년(선조 15))
백광훈은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리며 당풍唐諷('그려지는 시’) 시들을 남겼다.
28세인 156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 정치에 참여할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와 서도를 즐겼다.
'단풍잎 흩날리고 푸른 골짜기 어둑한데
닫지 않은 사립문에 석양빛이 깊이 드리웠네
어디서 별천지 찾느라 이리 늦으시는지
벽 가득 써붙인 청아한 시들을
길손 혼자 읊어보네'
백광훈이 천방 유호인을 만나러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자 써 놓고 떠나온 시다.
장흥에 발령되어 오는 감사나 목사들은 의전행렬을 멀리 남겨 놓고 걸어와 천방 선생을 방문했으며
이율곡이 유학의 대가가 되자
책을 짊어 지고 천방 선생에게 와서 더불어 지내며 가르침을 받곤했는데, 부모님 봉양으로 인해 자주 못옴을 무척 아쉬워했다.
삼당시인의 문학사적 의의는 당시의 시들이 표절과 논리에 치우치고 난삽했던 경향에서 벗어나, 당시풍의 창작활동을 통해 인간적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했다는 데 있다.
그 당시 송시(宋詩)냐 당시(唐詩)냐 하는 시비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삼당시인들은 송나라시(서술하는 시)가 자연스런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지적하고, 방향전환을 위해서 당시(그려지는 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시를 기교와 현학의 과시나 심성 수양의 한 방편으로 여기던 풍조에 맞서고, 삶의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정감을 충실하게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