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1864-1930)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오산중·고등 학교는 원래 1907년 남강 이승훈에 의해 평북 정주에서 시작된 학교이 다. 이 학교를 거쳐 간 교사와 학생 들을 보면, 한 사람이 심은 씨앗이 얼마나 창대한 결과를 낳았는지 알 수 있다. 고당 조만식,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다석 유영모, 함석헌,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소설가 염상섭, 벽초 홍명희, 시인 김소월, 화가 이중섭 등등. 이들이 모두 오산학교 출신이며, 독립지사와 애국지사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10살에 고아가 된 이승훈은 상점의 사환으로 시작하여 성실과 정직으로 기반을 닦아, 30대에 유망 기업가로 성장한다. 그리고 마침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던 때에,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된다. “우리나라를 바로 잡으려면 먼저 우리가 깨어야 하고, 동포를 깨울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구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젊은 도산의 연설에 충격을 받은 이승훈은 그날로 단발을 하고 금주와 금연을 단행한다. 그리고 4개월 후 전 재산을 투자하여 오산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그는 첫 입학생 7명을 앞에 두고, 혼자 입신출세할 인재가 아니라 국민을 깨우고 민족운동을 일깨울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1909년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고, 오산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변모시켰다.
그는 105인 사건으로 3년 7개월 감옥에서 똥통 청소를 하며 신약성경을 백독하였고, 3·1운동을 주도하여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한경직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누군가 “참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했더니, “왜 어려운가? 일본 놈들 하자는 대로 하면 쉽지. 옳게 살려니까 어려운 게야.” 라고 일갈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