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난제는 중국말로 법희(法喜)라 하며 도거륵(兜佉勒) 사람이다. 7ㆍ8 세 무렵에 속세를 떠났으며, 총명과 지혜를 일찍 이루었다.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외우며, 전심전력으로 업을 닦았다. 두루 삼장(三藏)을 보고,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암송하였다.
널리 알고 두루 들어 종합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여 감복하였다.
어려서부터 곳곳을 보고, 두루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항상 말하였다.
“불법을 크게 펴려면 아직 듣지 못한 곳에 베풀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멀리 고비 사막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의 보배를 품고 동쪽으로 들어왔다. 부씨(符氏)49)의 건원(建元, 365~384) 중에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담마난제는 배움이 이미 넉넉하여 명성이 크게 났다. 그러므로 부견(符堅)이 깊이 예를 갖춰 대접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의 여러 불경에는 아직 사함(四含:四阿含經)이 없었다. 부견의 신하로 무위태수(武威太守)인 조정(趙正)이 경을 번역할 것을 청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모용충(慕容冲)이 이미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켜 부견을 공격하니 관중(關中)이 어지러웠다.
조정은 법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불도를 위하여 도안(道安) 등에게 청하여 장안성(長安城) 안에 교리를 공부하는[義學]50) 승려들을 모았다. 그리고 담마난제에게 『중아함경(中阿含經)』과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의 두 아함(阿含)을 번역해 낼 것을 청하였다.
아울러 이보다 앞서 『비담심론(毘曇心論)』ㆍ『삼법도론(三法度論)』 등 모두 106권을 먼저 번역했다. 불념(佛念)이 번역하고, 혜숭(慧嵩)이 붓으로 받아썼다. 여름에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까지 연속적으로 2년이 걸려 문자가 바야흐로 갖추어졌다.
그러나 요장(姚萇)이 관내(關內)를 침범하여 쳐들어오니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담마난제는 이에 그곳에서 작별을 하고 서역(西域)으로 돌아갔다. 그가 삶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조정(趙正)
그때에 부견(符堅)이 처음으로 패하자 여러 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요사한 오랑캐들이 멋대로 사납게 굴어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나갔다. 그런데도 오히려 『대부(大部)』를 번역할 수 있었으니, 이는 대개 조정(趙正)의 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조정의 자는 문업(文業)이다. 낙양(洛陽) 청수(淸水) 사람이라고도 하고 제음(濟陰) 사람이라고도 한다. 나이 18세에 위진(僞秦)의 저작랑(著作郞)이 되었다. 후에 황문시랑(黃門侍郞), 무위태수(武威太守)에 올랐다.
그 사람의 모습이 수염이 없고 삐쩍 마르며, 처첩은 있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고자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그 뜻과 국량이 민첩하고 통달하여, 배움이 불전과 외전(外典)을 겸비하였다. 성품이 나무라고 간하기를 좋아하여 말을 돌리거나 피하는 바가 없었다.
부견(符堅)이 말년에 선비족(鮮卑族)을 사랑하는 데에 빠져서 정사를 등한시하였다. 조정은 노래를 불러 간하였다.
예전에 들었어라. 맹진(孟津)51)의 강물은
한 굽이가 천 리에 이른다고[千里一曲].52)
이 물은 본래 맑았거늘
누가 어지럽혀 탁하게 했나.
부견이 낯빛이 변하여 말하였다.
“바로 짐이다.”
그러자 조정은 또 노래하였다.
북쪽 동산에 한 그루 대추나무가 있네.
잎이 우거져 그늘을 드리웠구나.
대추 겉이 살쪘어도 갈라보면
안에는 붉은 씨앗[赤心]53) 들어 있네.
부견이 웃으며 말하였다.
“조문업, 자네가 아닌가?”
그가 놀리는 말을 하면서도 기지(機智)가 민첩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뒤에 관중(關中) 지방에 불법(佛法)이 성하자 조정은 이에 출가를 하고자 원하였다. 부견은 그를 아껴서 허락하지 않았다. 부견이 죽은 뒤에 이르러 바야흐로 그 뜻을 이루었다. 이름을 고쳐 도정(道整)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송(頌)을 지었다.
부처를 따르는 생이 이리도 늦었건만
죽음은 한결같이 이리도 빠를까.
석가모니께 귀명(歸命)54)하여
오늘에야 불도에 몸담았네.
후에 상락산(商洛山)에 은둔하여 오로지 불경과 계율을 연구하였다. 진(晋)의 옹주자사(雍州刺史) 극회(郄恢)가 그의 높은 절개를 흠모하여 가까이에서 함께 노닐었다.
양양(襄陽)에서 삶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0여 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