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명산 천관산 월출산은 종종 비교되는데, 미수 허목(1595~1682) 詩에 나온 구정봉(九井峰)에 관한 오해가 크다. 56세에 참봉
출사를 시작한 ‘미수 허목’은 ‘영의정 이원익’의 손녀사위, ‘백호 임제’의 외손자로, 소과 대과 급제 없이 三公정승에 올랐다. 젊은 날부터
산행을 즐겼는데, ‘남해금산(1638), 천관산(1640,46세),월출산(1672)’의 산행기로 <범해록, 천관산기, 월악기> 등이
있다.
■“登 九井峰..” 詩에 대한 오해 마침 詩 첫머리를 지제(支題)로 시작한데서 ‘천관산 九井峰’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아니다. 시문에 등장한 ‘구룡井, 요석, 청대, 석록거, 장생석표’ 등은 월출산에 해당할 뿐이고, <월악기>에서
확인된다. ‘월출산 九井峰’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아마 오해는 支題에서 시작되었을 것. 支題는 ‘탑파’를
가리키는 불교용어로, 우리들이야 ‘천관산 支題山’으로 불렀지만, 월출산 나름 支題山으로 불려졌다. 천관산에는 ‘九龍峰,九精峰,九精庵’이 있었다.
요즘 명칭 ‘구정봉(九頂峰)’은 9개 암봉군을 가리키는데, <지제지>에도 ‘九頂峰’은 없었다. 김창협(1651~1708)은
<登월출산 九井峰기>를 남겼다.
■“從 九井峰下..희극 납자” 詩에 대한 오해 여기 九井峰을 두고도 천관산으로 오해하는데,
남해금산(錦山) 九井峰이다. 九井峰은 금강산에도 있는데, 완벽수 9를 상징할 수 있겠다. ‘허목’이 금산 九井峰 하산길에 ‘희극’ 노스님을 만나
철쭉 지팡이를 받은 사실은 <범해록>에서 확인된다. 반면 천관산 ‘九井峰’은 없다. 천관산 바위에 절구(확)처럼 패인 구멍(가마)
숫자는 9보다 훨씬 많다. ‘九龍峰,九精峰’이 있고, ‘九精庵’이 유명했다. 한편 “마주 보이는 천관산 九鼎峰 火氣 때문에 존재 선생의 고택
앞에 연못을 팠다”는 전래담은 “서울 관악산 火氣 때문에 남대문 앞에 南池를 만들었다”는 비보(裨補) 설화와 닮았다.
■천관산, 월출산 비교론 ‘담헌 이하곤(1677~1724)’은 1722년경 동지달에 올랐던 천관산과
월출산 산행기를 <남행집, 남유록>에 남겼다. 천관산에 대해 “속에 금오자(錦?子,비단 두루마기)를 두고 감싼 삼베 같다.”고 했다.
월출산에 대해 “속에 폐온포(弊縕布,헤진 솜옷도포)를 두고 감싼 비단 같다.”라고 했다. 속보다 겉이라면 월출산이요, 겉보다 속이라면 천관산이란
뜻인가? 그는 ‘금강산, 속리산, 천관산’으로 그 순서를 매겼다. 천관산 ‘九精庵’과 월출산 ‘上見性庵’에 감명을 받았다는데, ‘천관산
九井峰’은 일절 거론한 바 없었다.
■아, 천관산과 그 소나무 “아, 이렇게 많은 松林을 여태 보지 못했다”고 1722년경 여행객
‘이하곤’은 천관산 앞에서 감탄했다. 그러나 1794년경 남도 일대를 둘러본 호남위유사 ‘서영보’는 “이제 소나무가 없다”라고 잘라 보고하였다.
불과 70년 세월에 대관절 무슨 곡절로 민둥산이 되고 말았던 것일까? 1801년경 강진 유배객 ‘정약용’도 송충이에 먹힌 천관산으로 빗대어
탄식했다. 덧붙인다. 장흥 천관산의 여러 면모에 관련하여 ‘천관산詩, 천관산記’ 등을 모은 <天冠山 詩文集> 발간과 지원을 제안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