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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진리파수
주기철(1897~1944)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오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15년에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김익두 목사의 마산 집회에서 소명을 받은 주기철은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5년부터 목회를 시작, 1936년 산정현교회로 부임하였다. 1938년 대부분의 교단이 신사참배를 허용했으나 이를 반대했던 주기철 목사는 일제로부터 갖은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했다.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를 중도 포기할 만큼 안질환이 심했던 주기철은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석한다. 3.1 운동 때 옥살이를 하고 두 달 만에 풀려난 주기철은 이 집회에서 눈의 질환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고 목회자가 되겠다는 소명을 받게 되었다.
산정현교회 담임이었던 주기철 목사는 "왜 목사들은 이 사악한 시대에 맞서 싸우지 않는가"라고 절규하다 경찰에 강제로 끌려 내려지기도 했다. 1938년 장로교와 감리교 등 거의 모든 교단이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며 찬성 결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기까지 일제의 회유와 협박은 모질었다. 못이 촘촘하게 박힌 못판 위를 걷게 하고, 전기 고문을 했으며,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 푼 물을 코에 부어 배가 잔뜩 부풀어 오르면 의자로 짓눌렀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끝까지 우상인 일본의 천황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어떤 변명으로도 우상을 섬기는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우상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지만 일본의 천황은 그들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로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인정하거나 섬기거나 그 앞에 머리를 숙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와 똑같은 하나의 사람일 뿐이며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천황을 섬기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등 갖가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친일파들은 이들에게 굴복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와 같은 이들은 나라를 위해, 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결단코 굽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민족 대표 33인 중 가장 영향력 있던 남강 이승훈 장로가 세운 오산학교에서 교육받은 주기철 목사는 교장이었던 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목사가 된 후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평양의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허용하려는 당시 교계의 움직임에 강력히 반대하며, 예레미야와 같이 악한 시대를 향해 외치지 않는 목사들을 질타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1938년 9월에 있을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성 결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강력한 반대자인 주기철 목사를 예비 구속했다가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석방시킵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형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고 마음껏 편하게 신앙생활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신사참배를 허용했지만 이는 치욕스러운 일이며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일입니다.
1939년 7월에 의성 농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3차로 7개월간 구금되었던 주기철 목사는 다시 산정현교회로 돌아와 '5가지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 달라,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해 달라"며 유언적인 결사각오의 설교로 마지막 항거를 준비했습니다. 일제의 파면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강단을 지키던 주 목사는 그해 9월 4차로 구속되었고, 12월 19일 평양 임시노회는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하기로 결의합니다. 이듬해 3월에는 평양 산정현교회당이 폐쇄당하고 가족들은 목사관 사택에서 추방되기에 이릅니다.
주기철 목사의 죄목은 황실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이었습니다. 영혼을 파는 용기없는 지도자들의 외면 속에 외롭게 투쟁하던 주기철 목사는 일제의 잔인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못판 위를 맨발로 걷게 했지만 굽히지 않았습니다. 여러 날 굶긴 후에 천황의 사진 앞에 밥상을 차려놓고 결박한 채로 두어 머리를 숙여 밥을 먹게 했지만 주 목사는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그대로 굶었습니다. 손 발톱이 다 빠지고 하루에도 여러 번 혼절하여도 꿋꿋이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는 사이 주기철 목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그가 이처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함께 그를 돌본 아내 오정모 사모의 기도와 굳은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정모 사모는 주 목사의 순교 직전 평양형무소에서 잠시 남편을 면회했습니다. 간수의 등에 겨우 업혀 나온 주 목사에게 오 사모는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살아서는 이곳을 못 나오십니다." 하며 남편의 의지가 약해지지 않도록 격려하였고, 주 목사가 옥고를 치르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기철 목사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내 살아서는 이 붉은 벽돌문 밖을 나가리라 기대하지 않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나는 오래지 않아 주님께로 갑니다.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을 잘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의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나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하오."
오정모 사모가 "마지막으로 더 부탁할 일이 없으세요?" 하고 묻자 주 목사는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이 먹고 싶은데..."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인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주기철 목사는 47세로 그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조국의 해방을 불과 1년여 남기고 순교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감동적인 삶은 짧은 것이었지만 그 열매는 한국 교회의 부흥으로 나타났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의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고, 주기철 목사의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이 되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간 그리스도인들은 영화와 연극을 통해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본받고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신앙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일제에 굴복했던 교회의 역사를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우상을 멀리 하며 우리의 신앙이 순수할 수 있도록 늘 주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뿌린 피로 이 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고 기독교의 원형을 회복하여 순수하고 아름다운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손양원(1902~1950)
1902년 독실한 기독교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23세에 결혼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고학으로 마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본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에 졸업했다. 여수 반란사건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두 아들이 총살되었는데, 손 목사는 아들 둘을 죽인 자를 오히려 구원하고 자기 아들로 삼아 놀라운 사랑을 실천했다. 손 목사는 자신을 끌고 가는 공산군에게도 전도했지만 손 목사는 그들의 손에 죽어갔다.
1946년에 목사가 된 손양원은 어려운 살림에도 나환자 수용소인 애양원을 섬겼다. 그도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로부터 6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갖은 고통과 병을 겪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은 여수 반란사건을 일으켰는데,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을 무참히 총살시켰다. 그러나 손 목사는 사형을 받게 된 주모자인 좌익계 학생을 조건없이 용서한 것은 물론 자기 아들로 삼아 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온갖 고난과 믿을 수 없는 현실에도 손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가문에 순교자를 둘이나 주신 것,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 새로운 아들을 얻어 구원시킨 것 등 모든 일에 감사한 참된 목자였다.
사랑... 말로 하기는 쉽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거나 영화를 볼 때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내 이야기가 된다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작은 피해만 입어도 불평이 나오고,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가 일쑤입니다.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숭고한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칫 위선의 모습이 아닐까 의아할 정도입니다.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모자라 양아들로 삼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한 것입니다. 온전히 내가 아닌 성령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또한 큰 믿음으로 천국의 존재를 믿고 그 소망을 간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람들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지 않았다면 살 길이 없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놀라운 사랑은 이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기에 베풀 수 있는 실천이었습니다.
또한 손양원 목사의 인품은 청렴과 결백, 그리고 올곧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가 일본 경찰에 의해 옥살이를 하던 때에 쓴 편지들을 보면 그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법이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이니 광명한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어두운 밤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양춘가절을 맞기 위하여 엄동설한의 고생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겠지요... 고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범사에 기뻐하며 항상 즐거워 합시다. -1943년 2월 16일, 신도들에게
불초 양원은 어떻게 위로를 드리리까? 다만 믿기는 아브라함과 욥의 반석같은 그 신앙으로 위안과 복을 받으소서. 5월 21일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성경 진리 그대로 절대 복종한다고 한 까닭입니다. -1943년 6월 8일, 아버님께
병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도 욥의 고난이 더욱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도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1943년 8월 18일, 부인에게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는 두 오빠를 죽인 좌익 학생 강철민을 생각하면 분노로 온 몸이 떨리는 듯했다고 손양원 목사 일대기에 적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 그를 용서하고 싶다는 손양원 목사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그 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감정을 삭이며 강철민이 갇혀 있는 곳에 용기를 내서 찾아가게 됩니다.
강철민을 취조하던 군인 대령은 동희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손동희입니다."
"죽은 손동인과 손동신이 네 오빠들이냐?"
"네, 그렇습니다."
지금 몇 학년이냐?"
"순천 매산여중 1학년입니다."
"그래,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서 여기까지 왔니?"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고 하셨어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이 순간의 인간적 고뇌와 솔직한 감정을 손동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내었다. 그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내가 왜 이런 데까지 불려 다녀야 하나, 나의 마음은 설명할 수 없는 갈등에 휩싸였다. 아버지와 딸자식 사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신앙을 고스란히 받아 소유할 수는 없었고, 또 그처럼 성숙한 아이도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의 신앙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였다. 나는 쓰러지듯 책상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었다.
손동희가 울음을 터뜨리자 강철민을 죽이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대령은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것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감탄의 말을 했습니다.
"위대하시다....."
강철민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모든 범인들과 군인들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울게 되었습니다. 원수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령은 결국 그를 처형하지 않고 손양원 목사의 뜻에 일임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후 손양원 목사는 강철민을 회개시키고 구원받게 한 것은 물론 늘 그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우리 철민이, 우리 철민이' 하며 신앙을 길러주기 위해 함께 집회를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애양원에 또 다시 공산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사람들의 권고로 여수항에서 피난 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애양원 교우들을 버려두고 나 혼자 피난 갈 수는 없다"면서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가 함께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 공산당에게 잡혀 옥에 갇히고 말았고, 일제의 감옥보다 더욱 처참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손 목사의 최후는 그해 9월 18일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끌려나와 맨발로 40리 길을 포로로 걸어가게 된 날이었습니다. 그 길에서도 손양원 목사는 인솔하는 공산군에게까지 계속 전도를 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 믿으시오."
"뭐? 나한테도 전도질이냐?!"
그때 또 다른 공산군이 그 말을 듣고 세 발의 총을 손 목사를 향해 쏘았습니다. 총알은 손 목사의 입과 어깨와 손가락을 관통했습니다. 어깨가 부서지고 손가락이 떨어져나갔으며 입은 피투성이가 되어 손양원 목사는 이 땅에서의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복음을 실천한 손양원 목사의 감사 기도제목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손동희는 당시를 회상하며, 두 아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는 혼절을 할 정도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도 많은 눈물을 흘리셨지만 깨끗하게 순교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영결식 때는 아홉, 열 가지의 감사 조건을 들어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조건들은, 우리 가문에도 그렇게 훌륭한 순교자가 둘이나 나온 것, 또 아들들이 살려 달라고 빌다가 죽지 않고 전도하다가 쓰러진 것, 그리고 미국 가려던 것 대신 천국에 갔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 게다가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회개시켜 아들 삼고 싶은 마음을 주신 것 등등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는 마치 해방 때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세차게 두드렸고, 그래서 손양원 목사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서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그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본 위대한 하나님의 종 손양원 목사의 참사랑은 천국에서도 해같이 빛날 귀하고 값진 사랑이었습니다.
첫댓글 제가 저상황이라면 저 두분처럼 했을지 깊이 생각해봅니다..저상황을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제마음은 그러고싶지 않습니다. 어떠한상황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고싶지 않습니다.
아멘...ㅠㅠ
아멘... 주님......
두 분 목사님의 삶이 우리나라를 있게 만드셨어요...
주기철 목사님... 정말 주님의 사람이네요...
주님 저도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