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운드레이싱
나는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하얀 천장이 보였다. 흐릿하던 감각이 점차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삐-삐- 병실을 보여주는 드라마에서 자주 듣던 소리였다. 허리와 엉덩이, 하체, 팔 끝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팔에는 수액이 꽂혀있고 알 수없는 푸른 액체가 내 팔을 통해 내 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오늘은 수요일이었고 주변인을 탐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래, 아주 중요한 단서를 얻어냈었다. 그것은 범인을 잡을 수 있는 핵심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확인해보면 범인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흥분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았고 김형사에게 전화를 해서 소식을 알렸고... 거기서 기억은 멈췄다. 아마도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겠지.
무려 3년을 이 사건에만 매달려 있었다. 형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인생에 한 번은 생긴다고 한다. 이 사건이 내게는 그런 사건이었다. 극악무도한 자가 사건을 일으켰다. 처음엔 쉽게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도처에 증거로 보이는 많은 단서들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구분이 가능한 하이힐 자국, 피가 묻은 흉기, 그리고 지문. CCTV는 범행 추측 시간인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그곳을 지나간 13명을 정확히 찍었다. 후드를 입은 남자, 키가 작은 여고생, 정장을 입은 50대 남성, 하이힐을 신고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의 아름다운 여성. 이 여성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사건현장에 하이힐 자국이 있었으니. 나를 흥분시키는 사건이었다. 잔혹한 그 수법이 나를 정의감에 휩싸이게 했고 그 범인이 여성일 수 있다는 점이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용의자로 지목할 13명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지역을 지나간 그 누구도 될 수 있었다.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그 여자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다른 CCTV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옷이나 가방 등의 차림새도 너무 흔한 차림이었다. 머리길이도 걸음걸이도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었다. 그 일대의 모든 사무실, 학교, 학원, 심지어 윤락업소까지 모두 뒤졌다.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그 날, 드디어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도시 외곽의 개경주장(하운드레이싱)의 흑인 청소관리인이었다. 여섯 마리의 그레이하운드들이 시작을 알리는 탄약 소리와 함께 토끼 인형을 향해 질주했다. 그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고, 토끼 인형은 그것보다 더 빨리 멀어지는 것 같았다. 개들은 침을 흘리며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다.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개들의 눈은 토끼 인형만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맹목적이었다. 또 반대로 그 무엇도 바라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구역질을 했다.
1등 그레이하운드가 결승선을 넘었고 나머지 순위가 가려졌다. 1등 그레이하운드도 토끼 인형을 얻을 순 없었다. 토끼 인형을 잡은 들, 뜯을 수 있는 고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똑똑히 기억해요. 매주 금요일이면 이곳에 나타났죠. 둘러보세요. 이곳에 젊은 여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젊은 여자라고는 그 사람뿐이었어요. 그녀는 개에게 돈을 걸지 않았어요. 개를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오로지 질주하는 토끼만 보고 있었어요.」
그는 cctv 영상을 보며 한 쪽 귀에 두 개 씩 걸린 반짝이며 흔들리는 저 귀걸이를 기억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귀걸이는 그의 흑인 친구가 운영하는 아프리카 상점에서 팔았던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런 곳들은 공산품을 파는 곳이 아닐 경우가 많다. 보통 수제품을 소량 들여와서 팔기 때문에 누가 사갔는지 특정할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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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기억이 났다. 서둘러야 한다. 그녀를 찾아야 한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은 무거웠지만 나의 집념은 이내 가벼움을 되찾아왔다. 퇴원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겠지. 우선은 그녀의 신상을 확보하고 나머지는 그때 정리하면 될 것이다.
아프리카 상점은 병원과 멀지 않은 오래된 시장 속에 있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골목들 사이로 성인오락실, 러브샵, 낡은 금은방, 문을 닫는 가게들이 보였다. 골목에는 야바위하는 사람들, 노숙자, 창녀. 누군가를 패고 있는 남자, 그리고 어딘지 경계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도 마약상일테다.
나는 정신없이 뛰었다. 드디어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드디어 사건을 종결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 상점이 있어야 할 곳에 상점이 없었다. 이미 폐허가 된 지 수 년은 흐른 것 같았다. 옆에 몸을 숙이고 있던 노숙자에게 물었다. 여기 아프리카 상점이 있지 않았소? 그는 대답했다. 내가 여기에 자리 잡은지 2 년인데 그런 것은 없었다고.
이상하다. 분명 아프리카 상점의 사장과 통화를 했었다. 주소도 직접 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바로 옆 공중전화로 김형사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범인은 이미 밝혀졌어요. 2년 전 형사님의 전화 덕분이었죠. 형사님이 사고를 당하시고 깨어나지 못하는걸 보고 저 혼자라도 움직여서 무조건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프리카 상점 사장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근처 사무실을 다니는 여자라고 했어요. 3년 전 쯤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했구요. 저는 수사를 한 결과...... 그녀는 이미 죽었었어요. 이미 3년 전에요. 유서는 없었어요. 그녀의 집에서 찾아낸 지문과 dna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어요. 그녀는 그 범죄현장에 있었고 그 칼을 그 손으로 들었고 찔렀던 거에요. 그리고, 그 충격에 그날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구요.」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쫓았던 것은 무엇인가. 나는 유령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나의 정신에 똑똑히 박힌 집념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온 힘을 다해 찾아내고 밝혀내려고 했다. 솟아오르던 정의감의 대상은 물리적인 실체가 사라지고 정신만 남은 것이었을까. 나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나의 직감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것은 분명히 느껴졌다. 확신할 수 없다. 범행 시각과 용의자의 자살 시각이 겹친다. 과연 범인은 그녀가 맞을까? 누군가 뒤집어 씌운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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