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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수도이자 앙카라 주의 주도로 인구는 510만 명이다. 튀르키예에서 이스탄불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도시가 건설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적어도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BC 1000년 이전부터 이 지역에 프리지아 왕국의 도시가 세워져 번영했음이 밝혀졌다. BC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으며, BC 3세기에는 갈라티아(앙카라 주변지방의 고대 지명)의 한 부족인 텍토사게족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BC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로마 제국으로 넘어갔다. 비잔틴 제국에 속해 있을 때 페르시아인과 아랍인들에게 공격을 받았으며, 1073년경에는 셀주크 튀르크에게 함락되었다.
1101년 십자군 전사인 툴루즈의 레몽 4세가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냈으나 비잔틴 제국의 통치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곳은 튀르크 변경의 경쟁적인 영주들과 셀주크 왕조 간의 분쟁의 초점이 되었다. 1143년 이후 셀주크 군주들간에 앙카라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 셀주크 제국의 수립과 더불어 앙카라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356년 오스만 왕조의 제2대 술탄인 오르한에게 점령된 이곳은 1360년 오스만 영토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티무르의 아나톨리아 전투중에 포위공격을 받았으며, 1403년 다시 오스만 제국 치하로 들어갔다.
뒤이어 수세기 동안 동방으로 가는 대상로변에 위치했다는 입지조건으로 인해 상업도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튀르키예의 민족주의 지도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 튀르크가 이곳을 오스만 술탄 정부와 그리스 침략군에 저항하는 저항운동의 중심지로 삼고, 1919년에 본부를 설치했다. 1923년 앙카라는 튀르키예의 수도로 공표되었다.
건축물을 보면 많은 변화를 겪었던 이 도시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으로 목욕탕, 율리아누스 원주, 로마-아우구스투스 사원( 등이 있으며, 비잔틴 제국의 유적으로는 성채와 공동묘지가 있다. 1개의 미나레트가 있는 정4각형의 알래딘 사원은 셀주크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가까이에 있다.
1946년에 설립된 앙카라대학교를 비롯하여 하제테페대학교(1206)·중동공과대학교(1956)·주립극장·국립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으며, 대통령 교향악단이 활동중이다. 오스만 제국시대의 건물들은 무수히 많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하지바이람카미(1429), 마무드파사 시장(1464), 오늘날 아나톨리아 문화박물관으로 사용되는 15세기의 바자르(시장) 겸 대상숙소가 손꼽힌다.
오스만 제국 시대의 건물들에 수용되어 있는 앙카라 시의 여러 박물관들은 아나톨리아의 전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박물관으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히타이트 소장품이 있는 아나톨리아 문화박물관과 튀르키예의 역사·민속·예술 등에 관한 소장품이 있는 민속박물관을 들 수 있다. 아타튀르크 영묘 안에는 아타튀르크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아타튀르크의 개인소지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아타튀르크’는 투르크인의 아버지란 뜻이다. 터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 3국 동맹에 대항해 터키의 해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영국이 오스만 정부로 하여금 세브르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하자 민족정부가 조약을 합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그리스군이 앙카라 근처까지 육박해왔는데, 의회로부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케말은 그리스군을 격퇴했다. 이 승리로 모든 터키 영토로부터 그리스군의 철수를 규정한 휴전협정이 그리스와 체결되었고, 영국은 차나칼레와 이스탄불을 국민정부에 양도했다. 오스만의 마지막 술탄 바히데딘은 해외로 도주했으며, 케말의 제안에 의해 터키에서의 오스만 600년 통치는 종결되었다. 1923년 케말은 공화국을 선포,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무스타파는 1881년 오스만 제국하에 있던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터키 가계는 미미했다. 초등학교 재학중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그녀의 형제와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 후에 살로니카로 돌아온 무스타파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오스만 군대의 장교가 되기 위해 군사중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그와 똑같은 이름(무스타파)을 지니고 그의 수학적 재능을 칭찬해주던 한 교사가 그에게 무스타파 케말(성숙과 완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중등학교를 마치고 그는 모나스티르(지금의 마케도니아 비톨라)에 있는 군사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터키인들에 대한 마케도니아 그리스도교 무정부주의자들의 계속적인 공격을 적의를 품고 지켜보았으며 그의 동료 생도들처럼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1899년 그는 이스탄불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으며 거기에서 정치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였다. 1902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참모대학으로 진학했는데 이곳에서도 정치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계속되었다. 육군대위로 대학을 마친 그는 다마스쿠스의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몇몇 동료와 함께 '조국과 자유'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나 별다른 진전은 보지 못했다. 살로니카로 돌아온 그는 대다수의 동료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비밀조직인 '통일진보위원회'에 가입했는데 이 조직은 전군(全軍)에 혁명활동을 퍼뜨렸으며, 1908년의 헌법선포를 유발했다.
그후의 몇 년 간 그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바쳐 직무에 충실했다. 1911년 이탈리아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트리폴리를 공격하자 그는 동료장교들과 서둘러 현지에 도착했으며 토착민들로 부대를 구성해 적에 대한 성공적인 게릴라 습격을 감행했다. 같은 해에 그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2년의 발칸 전쟁 때에 그는 갈리폴리 반도의 방어 책임을 맡았는데 그 임무는 이 중요한 지역의 전략적 형세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1913년 대사관 무관으로 소피아에 부임한 그는 그곳에 체재하는 동안 서구인들의 취향과 예술에 관한 규범과 상류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는 뒷날 터키의 사회생활을 개혁할 때 이때의 지식을 잘 활용했다. 소피아 주재시에 그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차나칼레의 19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갈리폴리에서 영국군을 2번이나 격퇴했으며 터키 언론으로부터 '이스탄불의 구세주'라는 칭호를 얻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다르다넬스 작전). 1916년 동부전선에 근무하면서 그는 남하하던 러시아군의 전진을 막아냈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1918년 팔레스타인에 있던 제7육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가 임무를 맡았을 때는 영국과의 전쟁은 이미 거의 끝나 있었고 적군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북진하고 있었으며 또 아랍 게릴라들은 터키군에게 공격을 전개하고 있었다. 제7육군 전군이 포로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알레포 북쪽으로 병력을 후퇴했다. 무드로스의 휴전 이후에 터키에 주둔하던 독일군 장교와 사령관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그는 동남전선에 있던 모든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휴전조항의 실시에서 영국과 의견 대립을 보이자 그는 육군부(部)로 전보되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그는 3국동맹의 함대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다. 휴전조항은 강경했으나 3국동맹 국가들의 비밀합의에 의해 오스만 제국 영토가 분할되었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더구나 이스탄불과 기타 지역에 있던 소수민족들이 이 기회를 이용해 투르크족에 대항하는 조직을 구성하려 했다. 터키의 국민들은 평정(平定)의 수단을 강구했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권리방어를 위한 연합'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일찍이 1917년에 그는 자신에게 능력과 권한이 있다면 터키의 사회생활을 단번에 바꾸어 놓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기회가 찾아왔음을 간파하고 개혁 일정에 착수했다. '아나톨리아와 루벨리아의 권리 방어를 위한 연합'을 대체해서 국민당(나중에 공화국민당으로 개칭됨)을 창당했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 로잔 조약의 체결 후 곧이어 실시된 총선에서 이 당은 터키의 유일한 정당으로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1923년 10월 29일 그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24년 그는 칼리프 제도를 폐지했다. 한편 그의 급격한 개혁방법에 반대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진보에 신념을 두었던 일단의 그의 동료들은 '진보공화당'(Progressive Republican Party)을 발족시켰다. 케말은 그의 개혁 일정을 계속 진행시켜 회교경전의 율법에 기초한 모든 기관들과 수도원, 교단을 폐쇄했다. 그는 "과학은 삶의 가장 믿음직한 안내자다"라고 말했으며 대부분 종교적이었던 전통교육 체제를 폐지하고 현대식의 탈(脫)종교적인 학교들을 설립했다. 오스만의 모든 법 체계가 현대화되었으며 새로운 민법전과 형법전이 채용되었다.
그의 개혁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했다. 종교적 의미를 함축했던 동양식의 의복은 유럽식 의상으로 대체되었으며 댄스, 무도회 및 그밖에 남녀가 함께 즐기는 오락들이 권장되었고 계몽된 계층에서는 유럽식 생활방식을 받아들였다.
케말의 개혁이 도전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세이 사이드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이슬람 경전의 율법을 회복하려 했다. 이즈미르에서는 케말을 암살하려던 예비음모가 발각되었다고 전한다. 또 모자 사용에 반대하여 몇몇 지방에서 반란 기도가 있었다고도 한다.
케말은 이런 운동들의 모든 주도자들을 강력히 처벌하고 진보공화당을 해산시켰으며 이전의 권위주위적 체제로 복귀해 그의 개혁 일정을 밀고 나갔다. 남존여비를 주장했던 구시대의 모든 법률과 전통을 폐기하고 그는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포함한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수립했다. 1928년 그는 터키에서 수세기 동안 사용되어왔던 아랍 문자를 대신해 로마자를 도입했으며 터키에 서구의 고전음악과 극장을 대중화하려고 노력했다.
1930년 그는 자유공화당의 창설을 허용함으로써 다당제를 도입하려는 2번째 시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당은 곧 반개혁적인 안(案)과 행위들의 중심이 되었고 진보공화당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그는 또 터키의 언어와 역사 분야에서 대규모 연구일정에 착수했는데 이로써 그는 고래의 종교적 유대를 대신해 사회에 민족적 정서의 유대를 강화하려 했다. 1933년 성(姓)의 사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국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수여했는데 이 이름은 곧 널리 보편화되어 그의 이전의 이름과 칭호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의 외교 정책은 '국내에서의 평화, 세계에서의 평화'라는 그의 표어로 요약된다. 경제에서 민족경제정책을 추구한 그는 외국인의 모든 상회와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터키의 산업화 문제에 있어서 그는 한동안 사적인 국내 자본에 희망을 걸었으나 그것이 불충분함을 깨닫고 국가사회주의를 권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도 중요한 성공을 성취하지 못했으며 한두 가지 외교정책을 제외하면 그의 마지막 5년간은 점진적인 침체에 들어갔다.
그는 마지막 해를 중병으로 보냈으며, 1938년 11월 10일 이스탄불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여행지도 ▼
심 산
앙카라 전경 ▼▲
앙카라성 ▼
앙카라 중심가,발가트 지구 ▼
아느트카비르 (기념 묘);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이자 튀르키에 독립전쟁의 영웅 그리고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영묘가 있는 세레모니플라자.신시가 서쪽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터키 공화국이 건국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의 장사를 지내기 위해 1944년부터 10년에 걸쳐 세운 것이다. 아타튀르크는 터키 공화국의 독립과 술탄제를 폐지하여 터키 근대화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대리석을 깔아서 만든 가운데 길을 지나면 우측에는 위패를 모셔놓은 넓은 곳이 있고, 좌측에는 큰 기둥으로 세워진 아타튀르크의 묘가 나타난다. 천정은 모자이크로 깨끗하게 장식되어 있고 건물의 외벽에는 그가 한 연설의 일부가 새겨져 있으며, 위를 둘러싼 앞 공간에는 그가 아끼고 사랑하던 차와 같은 소장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앙카라 시가 한눈에 보이며 묘소에는 육군·해군·공군의 위병이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날인 11월 10일이 되면 터키인들은 조문을 위해 이 곳으로 찾아온다.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모든 시계는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시간인 9시 5분에 멈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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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어디를 가나 국기가 걸려 있는데 국위를 선양하는 좋은 문화로 느껴진다. ▼
앙카라 성채 ▼
라미콕 박물관 ▼
앙카라성 ▼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1997년 스위스에서 올해의 박물관으로 선정된 아나톨리아 박물괸은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까지 많은 코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
아타쿨레; 1989년에 개장한 통신및 관특 타워 (중앙) . 아타는 조상을 뜻하고 쿨레는 타워를 의미한다. 전망을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
겐츨릭 공원은 대규모 녹지와 연못을 갖춘 공원으로 수영장, 놀이공원, 야외극장 및 2개의 소형 기차가 있다. ▼
한국공원▼
튀르키예는 6.25 전쟁에서 UN군 파병규모 4위로 참전하기도 했다. 1990년대까진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과 튀르키에가 3.4위전에서 만나면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튀르키예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한국측 응원단의 대형 튀르키예 국기 퍼포먼스 이후로 튀르키예가 형제의 나라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생기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하고,1949년 합법 정부 승인, 1957년 1957년 수교하였다.
사실 한국과 튀르키예는 근대 이전에도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은 관계다. 튀르키예인은 스스로를 '튀르크'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한자로 쓰면 돌궐이다. 과거 돌궐은 북주 북제 중국을 속국으로 삼고 오래 군림했으며 통일 중국이 들어서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역사가 있다. 약 1400년 이후 , 한국과 튀르키예는 중국과 소련을 양 끝에서 포위한 제1세계의 군사적 요충지로, 제2차 냉전에 이르러선 다시 러시아와 중국에 맞서는 잠재적인 동맹국 같은 관계로 다시 만났기에 참 기묘하면서도 특별한 인연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서방에서는 돌궐을 튀르크, 고구려는 코리아라고 불렀는데 현재 두 나라의 정식 대외 국명으로 쓰인다는 점도 재밌는 부분이다.
한국공원 ; 앙카라 기차역 근처에 있는 한국 공원은 서울과 앙카라의 자매 결연을 계기로 1973년 11월에 조성되었다. 아담한 공원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으로는 한국식 6각 정자가 있는데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공원 중앙에는 ‘한국 전쟁 참전 터키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높이 9m, 4층의 탑은 석가탑 모양과 많이 닮아 있다. 탑 아래에는 한국 전쟁 당시 전사자들의 이름과 출생년도, 사망 일자가 기록되어 있다. ▼
한국 참전 기념탑 ; 1950년 한국의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희생당한 터키의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하였다. 1971년 서울-앙카라 간 자매결연을 계기로 설치된 공원으로 1973년에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을 본떠 9m의 4층탑으로 만든 참전기념탑이 공원의 중심을 이룬다. 기념탑에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765명의 터키 무명용사의 명단이 적혀 있고 한글로 된 추도글도 있다. 1977년 건립한 한국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6각 정자가 있다. 한국에도 여의도 인도네시아 대사관 옆에 앙카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 방문 후 정비하여 담도 쌓고 깨끗해졌다.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
우리에게 '케말 파샤'로 알려져 있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의 어렸을 적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로 불렸다. 10대 때 군사예비학교를 다녔던 무스타파는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런데 수학 교사의 이름도 무스타파였다.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성이 '케말'이다. 터키어로 케말이라는 단어는 완벽함을 뜻한다. 그야말로 앞날을 내다보는 호칭이었던 것. 이후 군 지휘관이 된 무스타파 케말은 1차 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웅적인 활약으로 승리를 이끌어 냄으로써 지도자를 의미하는 '파샤' 칭호를 얻게 된다. 이후 터키 공화국 건국을 이끈 그에게 아타튀르크, 즉 '투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최상의 경칭이 붙게 된다.
무스타파 케말이 살았던 시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격변기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하급 관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터키 공화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이자 나라의 기반을 닦은 정치인으로 지금도 여전히 터키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웬만한 터키 도시에서는 그의 이름이 붙은 도로나 공원, 동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지금은 그리스 영토인 살로니카에서 태어난 무스타파 케말이 전성기 활약을 펼친 곳은 소아시아의 앙카라였으며 숨진 곳은 이스탄불이었다. 생애 자체가 터키의 국가 운명과 함께했던 것이다. 군인에서 혁명가로, 정치인으로 탈바꿈하면서 그가 쌓은 공적은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철원 6사단에서 34개월 근무 ▼
한국전쟁 참전 당시 모습 ▼
여의도 앙카라 자매 공원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