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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춘계공세(4월 공세)
1. 개 요(쌍방이 전략)
가 . 아군의 상황
유엔군은 3월 중순 1.4후퇴로 상실한 서을 재수복하고 4월 초에 주력부대들이 38도선 북쪽의 임진강-전곡-호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이른비 캔사스선에 진출하였다. 이로써 전쟁전의 영토를 회복하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게된 유엔군은 휴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에 따라 이 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로써 미 제1군단(국군 제1사, 미 제3, 제24, 제25, 영 제29여, 터키 여단)은 임진강-한탄강 선에,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국군제6사, 미 제1해병사, 영 제27여)은 석룡산-유촌리 선에,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국군 제5사, 미 제2사, 미 제7사)은 소양강 북쪽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국군이 담당한 동부전선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제3군단(제3, 제7사)이 내륙 산악지역에, 제1군단(수도사단, 제9사)은 동해안 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당시에 미 제8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은 수도권 지역으로 진입이 용이토록 금곡 부근에 제187공수연대는 대구에 집결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육본 직할인 제8사단은 대전, 광주, 진주 부근에서, 제2사단은 춘양, 제천, 안동 부근에서 연대별로 후방지역 공비 토벌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유엔군이 방어선 보강에 주력하는 동안 공산군도 38도선 북쪽에 방어진지를 편성하는 한편 중부전선의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라 명명된 평강, 철원, 김화 일대에 병력과 보급품이 집중되고 있고 후방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지 않는 점등을 고려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자은 중부전선의 방어 종심을 깊게 하고 적의 공세준비를 차단할 목적으로 철원-김화를 통제할 수 있는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새로운 통제선인"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이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에 배치된 적을 고착 견제하여 중부전선으로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제1군단도 4월 24일부터 양구-가전리-송도진리를 연하는 "알라바마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1단계 작전으로 미 제1군단 예하 3개 사단(미 제3, 24, 25사단)과 제9군단의 영 27여단이 4월 11일 캔사스선 북쪽 약 20km에 위치한 금학산-광덕산-백운산을 연하는 우타선을 목표로 공격하여 적의 포격과 강우로 다소 고전하였으나 20일 우타선을 점령하였다.
이에 미 제1군단(미 제25, 제24사)과 제9군단(국군 제6, 미 제1해병사단)은 21일 항공 및 포병화력의 엄호하에 최종 목표선인 와이오밍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이때 적의 저항이 강화되고 체포된 포로들의 진술이 22일 야간에 중공군의 대공세가 개시될 것이라 진술하였다. 또한 도처에서 진출이 돈좌되자 제8군 사령관은 공격을 중지하고 신속히 방어태세로 전환토록 명령한다.
나. 적군 상황
유엔군이 38도선 북쪽으로 반격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공군은 2월 공세의 실패로 실추된 위신을 만회하고 다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대규모 공격작전을 준비하였다.
중공군 사령부는 '51년 초에 증원부대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들어온 제19병단(제63, 제64, 제65군)을 임진강 북쪽의 구하리-덕사리 선에, 제3병단(제12, 제15, 제60군)을삭령-신탄리 선에, 지난번 장진호 전투에서 피해를 입고 함흥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제9병단(제20, 제26, 제27군)을 중부전선의 철원-김화선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북한군 제3, 5군단을 양구-원통 선에 배치하여 조공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을 공격토록 하였다.
적은 이 기간중에 하력과 기동력을 보강하기 위해 야포, 장갑차, 차량 등을 대폭 보강하고 산악지대에서의 기동력을 살리기 위해 말을 수송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중공군은 공군을 투입하기 위하여 신의주, 의주, 신안주, 평양, 원산, 연포 등에 비행장을 건설했으나 유엔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항공기를 춘계공세에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
2. 전투 편성 및 작전 계획
가, 공산군
북한군 제1군단(제8, 19, 47사단)은 개성과 장단의 국군과 유엔군을 섬멸한 후 주력은 민진강으 ㄹ도하, 문산-고양-서울을 점령한 다음 방어임무로 전환하며 중공군 제19병단에 작전지휘를 받도록 했다.
중공군 제19병단(제63, 64, 65군)은 신속히 임진강 서안의 국군 제1사단 방어선을 돌파하여 1개 군이 고랑포리 부근에서 임진강을 도하한 후 의정부를 우회하여 국군 과 유엔군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하고 , 주력은 감악산 일대의 영 제29여단을 섬멸한 후 동두천-왕방산- 포천방향으로 진격한다.
중공군 제9병단(제20, 26, 27, 39, 40군)은 신속히 영국군 제27여단을 섬멸하고 일부는 미 제24사단을 견제해 영 제27여단과의 연결을 차단한 후 기산리-만세교리-포천으로 진격하여 제19병단 및 제3병단과 협동으로 미 제24사와 미 제25사단을 섬멸한다
중공군 제40군은 가평방향으로 전진하여 국군 제6사단을 섬멸한 후 춘천-가평간 도로를 차단하여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연결을 차단한다.
중공군 제39군은 일부 병력이 화천 이북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견제하는 한편 주력은 논미리-원천리 방향으로 돌격하여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의 서쪽 증원을 차단하여 병단의 좌측익을ㄷ 보장한다.
중공군 제3병단(제12, 제15, 60군)은 연천의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섬멸한 후 초성리-종현산으로 진격하여 제19병단 및 제9병단과 협동으로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을 섬멸한다
조공으로 동부전선을 담당한 북한군 제3군단과 제5군단은 일부 병ㄹ력이 양구 이북에서 중공군 제39군과 연합해 미 제2사단과 국군 제7사단을 적극 견제하고, 주력은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의 전투지경선인 서호리와 인제를 공격하여 국군 1~2개 연대를 섬멸한 후 평창-강릉 방면으로 진격한다. 아울러 북한군 제2군단은 회양일대에서 머물며 일부가 해안경계를 담당하여 통천-양양 일대의 국군과 유엔군의 상륙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나. 국군과 유엔군
중공군의 3차 공세로 1.4후퇴로 서울을 상실한 유엔군은 '51. 3월 중순 서울을 재수복하고 4월 초에는주력부대들이 38도선 북쪽의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캔사스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미 제3사(영 제29여단, 필리핀 제10대대 배속), 미 제24, 미 제25사(터키여단 배속), 국군 제1사, 벨지움대대(영 제29여단 배속)은 임진강-한탄강 선에 배치하였다.
중부전선의 미제9군단(미 제1해병사(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 국군6사, 영 제27여단('51. 4. 26일부 제28여단으로 개칭))은 석룡산-유촌리 선에 편성하였다.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미 제2사(네덜란드 대대, 프랑스 대대 배속), 미 제7사, 국군 제5사)은 소양강 북쪽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 국3사, 국7사)이 태백산맥을 경계로 내륙 산악지역에, 제1군단(수도사, 국9사, 국11사)이 동해안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당시 미 제8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은 수도권지역으로 투입이 용이 하도록 금곡 부근에,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은 대구에 집결 대기하였고, 국군은 국군 제2사, 국군 제8사였다.
3. 전투 경과
가. 서울 북방의 전투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1군단은 좌전방 김포반도에 해병 제5독립대대(국군 제1사단에 배속), 임진강 남쪽의 오금리-마지리에 국군 제1사단, 마지리-도감포에 영 제29여단( 미 제3사단 배속), 도감포-군자산에 미 제3사를 배치하였다.
이때 군단 중앙과 우전방에 터키여단(미 제25사 배속), 미 제25사, 미 제24사단이 와이오밍선으로 공격 주에 돈좌되어 급편방아로 전환하였다. 터키여단은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미 제25사단은 금학산-0장흥리 일대에, 미 제24사다능ㄴ 신술리-문혜리에 각각 방어진지를편성하고 군단의 우인접으로 방화동-백적산에 진출한 미 제9군단의 좌전방 국군 제6사단과 연결하였다.
'51. 4. 22일 어둠이 깔리자 중공군 주력인 제19병단의 공격이 개시되어 군단은 축차적으로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면서 캔사스선, 델타선, 골든선으로 철수작전을 펼치게 된다.
(1) 금굴산(194) 전투('51.4.22~4.23)
영 제29여단은 1개 대대를 감악산 좌전방 적성 부근에, 1개 대대를 감악산 북쪽에, 그리고 배속받은 벨기에 대대를 금굴산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봉암리에 예비로 확보하여 임진강을 방어하고 있었다.
임진강 연천
백학
무등리 진상리
금굴산 전곡
마전리 남계리
한탄강
임진강 158고지
마포리 임진교 도감포
한탄교
257고지 화봉촌
구암리 동두천
이곳 전투는 22일 자정 무렵부터 시작되어 교량을 점령한 후에 마포리 동남쪽이 257고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철수로가 차단되어 우전방의 미 제3사단이 우타선에서 전곡으로 철수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금굴산에 고립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제3사단의 예비인 제7연대에서 1개 보병중대와 전차 2개 소대를 지원하여 전차 1개 소대가 진지에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미 제3사단의 헬기로 부상병을 후송하는 등의 유기적인 방어작전으로 진지를 고수하며 동쪽의 임진강변의 15m 천연장벽을 넘고 차량화 부대는 공중에서 근접 항공지원으로 탈출하여 전곡에 집결 후에 다시 차량으로 동두천을 경유하여 봉암리 일대로 재배치 된다.
(2) 파평산 전투
백학
백학
대덕산
고랑포 가여울
개성
판문점 장좌리 중성산 적성
백학산
덕현리 마지리
장파리
청운동
일월봉 파평산496
마산리 금곡리
문산 법원리 덕정
강정리
임진강
오금리 봉서산
월롱산
금촌
국군 제1사단은 좌전방 문산 복쪽의 고지군에 제11연대, 우전방 파평산 일대에 제12연대, 그리고 제15연대를 사단 예비로 대고령일대에 각각 배치하였다.
4월 22일 20:00시를 전후하여 중공군 제64군이 일부 병력으로 임진강 북족으로 진출한 다음 사단 수색대의 퇴로를 차단한 후 포위공격을 기도하였다. 좌전방 제11연대 지역은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도하공격에 불리하므로 우전방 제12연대의 석포, 자지포, 석교 일대에서 도하지점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
23일 02:30를 전후하여 조수의 영향으로 강물의 수위가 낮아진 점을 이용하여 2개 중대로 도하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무렵 우인접 중성산의 영 제29여단을 공격한 중공군이 제12연대의 우측방 돌파를 시도했으나 연대는 이들을 마지리 벌판으로 유인하여 살상지대 화력을 집중하여 3,000여 명의 중공군으 사살하며 적의 예봉을 꺽었다.
이에 중공군도 임진강변에서 한판 승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임진강 도하와 정면에서 파평산을 공격하여 국군 제1사단을 분리 격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날이 새면서 아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의 집중 사격에 좌측으로 침투한 부대는 영평산과 주변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결국 제11연대와 제15연대의 보전협동 공격으로 돌파구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우전방 제12연대는 파평산과 그 동쪽의 주저항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사단의 주저항선에 적의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반면 중공군은 제ㅔ63, 64군의 임진강 돌파가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의 분전으로 지욘되자 예성강변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북한군 제1군단을 임진강으로 진출시켰다.
부간군 제1군단(제8, 19, 47사)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선두인 제8사단이 임진강을 철교로 도하하여 제11연대 좌전방을 제47사단의 1개 연대는 청운동에서 도하하여 우전방을 공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우전방 제12연대 우측에서 방어중인 영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중성산이 돌파되면서 D중대가 철수를 하게 되고 그 인원의 상당수가 제12연대쪽으로 유입되면서 중공군이 이 틈을 이용하여 연대를 포위섬멸 하려 하자 금곡리로 철수하게 된다.
사단은 25일 돌파구를 회복하기 위해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금촌과 문산사이의 월롱산-부곡리-삼방리를 연하는 델타선으로 철수하였다.
(3) 설마리 전투
백학 마전리 금굴산 전곡
도감포
257
적암리
중성산
적성 탄광촌
마지리 송산리
236 314
367 감악산 마차산
황방리 안흥리 동두천
북암리 구암리
신신리
덕정
국군 제1사단의 우인접 영 제29여단은 마지리-도감포 간 11KM의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4월 22일 아침부터 임진강 주변에서 정찰대와 중공군의 접촉이 빈번하였다.
이 날은 영국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성 조지의 날" 전야로서 행사준비에 바빴다. 바로 이런 취약점을 이용하여 22:00시에 적은 1개 연대 규모로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도하지점인 가여울의 통제가 가능한 중산산의 A중대는 중대장이 전사하는 ㄷ우 최악의 상황에서 23일 임진강 남쪽에 교두보를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글로스터 대대가 포위되고 이를 구출하기 위해 필리핀 제10대대와 영 제8전차대대 C중대의 보전협동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도로 노폭이 협소하여 전차의 기동이 제한 되는 등의 악순환 속에서 대대는 각자 흩어져 탈출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런 와중에 남쪽으로 철수하는 부대원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으나 북으로 철수한 D중대는 아군의 국군 제1사단과 합류하여 복귀하게 된다.
한편 여단 주력도 철수과정에 전차에 200여 명의 부상자를 분슨한 채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봉암리로 철수하게 되는데 포탑을 회전시킬 수 없을 정도로 부상자들이 탑승하여 화력이나 기동성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중공군을 3일간이나 고착 견제하여 군단 주력부대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고 서울 방어의 준비 시간을 획득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결국 영 제29여단의 글로스터 대대는 D중대를 제외하고 대대가 포로가 되고 전체 병력의 1/3이 손실을 입게 된다
(4) 철원. 연천-동두천. 포천 지연전('51. 4.22~4.25)
철원
신탄리 와이오밍선
대광리 금학산
장흥 신술리
지장봉 문혜리
장승천
율동 나미현 광덕산
군자산
연천 운천
전곡 금곡 구정동
캔사스선
장암
영평 *국망봉
* 1010
초성리 만세교 일동
마차산
동두천 왕방산 포천 운악산
칠봉산
델타산
가납리 덕정 수원산 신팔리
연천 동쪽에서 철원-김화를 목표로 공격하던 미 제1군단의 미 제25사(터키여단 배속)과 미 제24사단이 4월 22일 중공군이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돈좌되자 좌전방 터키여단을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중앙의 미 제25사는 철원 남쪼긔 금학산 일대에, 우전방 미 제24사는 문혜리-신술리에 급편방어 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터키여단의 좌인접에는 미 제 3사단에 배속된 필리핀 제10대대가 우타선을 점령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4월 22일 19:00시에 터키여단이 점령하고 있는 대광리 남쪽의 장승천 일대에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하여 주요 철수로상의 나미현을 차단함으로써 큰 피해를 입었고 율동 부근에 배치된 필리핀 제10대대 지역에서 공방전이 계속되는 과정에 미 제9군단의 사창리지역에 이어 제1군단의 감악산 지역도 부분 돌파되어 미 제8군사령관은 이들 부대를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로 연결되는 캔사스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중공군의 전사에 의하면 제9병단이 유엔군을 추격하여 영평, 금ㅂ곡, 구정동 일대에서 5개 중대를 포위 했으나 유엔군의 항공기 출현에 위협을 당하여 실패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미 제56곻ㅇ군은 신정공세시 주력부대가 일본으로 이동하여 한국엔 3개 비행단과 미 제1해병비행단, 그리고 다수의 함재기들이 있었으나 소요에는 절대작으로 부족하였다. 하지만 '51. 4. 23일 전례없이 340회의 출격을 하여 미 제1군단의 철수를 지원하였다.
중공군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은 성동리-노고산-덕정-포천을 잇는 델타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때 우전방 미 제24사단을 엄호하기 위해 투입된 제8유격중대가 국망봉 아래 1010고지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 되었으나 미 제24사단은 전차 5대를 투입하려 부상자 65명을 구출하여 마지막으로 철수 하였다.
(5)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금굴산 남겨진 영국군의 야외 화장터와 전투흔적(수많은 전투화)
(나) 임진강 단애(수직절벽)를 넘어 죽기살기로 철수하는 군인(지역주민 제보)
(다) 마지리 벌판에 흩어진 중공군 시신들
(라) 파평산의 사라진 유해(공군 레이다 기지건설 등)
(마) 두포리 임진강변에 남겨진 반공애국자의 유해(발굴하여 재 가매장)
(바) 중성산의 전투 흔적(산성을 이용하여 축성, 중요 문화재 지역)
(사) 장승천과 까치봉의 터키군
(아) 율동의 필리핀 대대 전투와 계곡에 쌓여있는 유해(참전용 증언)
나. 사창리-가평 축선의 위기
중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9군단도 4월 21일 쫘인접 미 제1군단과 병진하여 좌전방 국군 제6사단이 김화로,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단(배속:국군 제1해병연대)은 화천저수지 북쪽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반면에 중공군 조공인 제9병단은 화천-가평 축선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유엔군의 동서간 증원을 차단할 목적으로 주공부대에 앞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미 해병 제1사단지역은 화력의 열세와 북한강을 도하하는 불리점 때문에 산악기동의 장점을 살려 좌전방 국군 제6사단 지역을 집중 공격하였다.
(1) 사창리 전투
국군 제6사단은 4월 21일 석룡산-화악산에서 와이오밍선의 육단리와 복주산(`1057)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좌전방 제19연대가 상해봉(1019), 우전방 제2연대가 백적산(883)을 점령, 중간 목표를 확보하였다.
사단이 정비중 항공관측으로 중공군이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발견하여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좌전방에 제19연대는 방화돟일대에, 우전방 제2연대는 백적산 일대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예비인 제7연대를 두류산(993)부근으로 전진 배치하고 제27포병대대, 뉴질랜드 포병대대, 미 제2박격포 대대 C중대가 배속되어 사창리 부근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51.4.21 17:00에 방화동, 실내리 일대에 포격을 시작으로 제20군 제60사단과 제40군 제120사단의 일부로 정면공격과 부대 간격을 이용하여 사단 후방지역으로 침투하여 북진 작전시 운산지역에서 당한, "포위되면 끝장이다"는 강박관념이 되살아나 무질서하게 후방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좌전방 제19연대가 포위되고 우전방의 제2연대와 예비인 제7연대, 화력지원 부대들이 무기를 버리고 사창리-신포리간 도로를 따라 탈출을 시도하여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한편 제6사단의 우측방 미 해병 제1사단도 4월 21일 제5, 7연대와 국군 제1해병연대로 화천저수지 북쪽의 와이오밍선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곳 역시 중공군 제40군 주력의 공격과 좌측의 국군 제6사단의 철수로 포위 위기에 들기도 했으나 우세한 화력으로 극복하며 북한강 동쪽으로 철수하여 춘천을 중심으로한 캔사스선을 점령하였다.
김화
와수리 육단리 대성산 사방거리
복주산 재안산
*1190
신술리 방화동 실내리 *486 *509
국 제19 미 제5해병 국 제1해병
*상해봉 미 제7해병
*광덕산
명월리 *백적산 국 제2 화천 화천 저수지
*두류산 구만리
국 제7
사창리 원천리 용화산
신포리
캔사스선
*국망봉 *석룡산 *화악산 *매봉
*677 죽둔리 *504 춘천
캐나다 내촌 호주군
미들섹스
가평
국군 제6사단은 미 제9군단으로부터 캔사스선 점령을 하도록 통제되었으나 이미 지휘체계가 무너져 국망봉-매봉선에서 견디지 못하고 중공군의 계속되는 압력에 영국군 제27여단의 엄호하에 가평 계곡을 통하여 철수하여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 불기산(601)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때 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2.36"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미군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하여 4.2"박격포 13문과 242대의 무전기,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었다. 이후 낙오병들이 재합류하여 25일에 병력은 6,313명이 된다.
(2) 가평 전투
가평에서는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영 제27여단과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한 중공 제118사단 간에 결전이 전개 되었다. 영 제27여단은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에 4월 19일 사창리 서쪽에서 방어지역을 국군 제6사-19연대에 인계하고 가평에 집결하였다. 이때 한국 근무가 만료된 아질 대대의 홍콩 원대복귀 문제로 여단의 분위가 어수선 하였다.
23일 미 제9군단장은 국군 제6사단의 캔사스선(석룡산-화악산) 점ㄹ령이 불투명하자 뉴질랜드 제16포병대대와 군단의 213포병대대는 계속 국군 제6사단을 지원하고 여단 주력은 후방의 가평 계곡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춘천-가평 도로를 목표로 진출 중인 중공군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영 27여단은 내촌을 중심으로 677고지에 캐나다 대대, 가평 계곡을 통제하도록 504고지에 호주 대대, 아질 대대를 예비로 가평에 집결 보유하였다.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한 중공군 제118사단은 영국군의 배치현황을 모르고 종대 대형으로 도로와 계곡을 다라 내려오다 우전방 호주 대대의 집중 포화로 격퇴되었다. 적은 계속하여 돌파를 시도했으나 강력한 항공 및 포병화력에 다수의 시체를 유기한 채 철수하였고 수색대는 40명을 생포하였다.
중공군 제354연대는 24일 야간 22:00에 다시 공격을 좌전방 캐나다 대대 방향을 중점으로 시작하여 , 25일 야간 02:00에도 재차 공격을 하였으나 포병화력의 집중과 강력한 저항으로 결국 3일간의 공격을 실패로 철수하였다.
여단은 25일 밤에 군단에 배속된 미 제1기병사단의 제5기병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양평으로 이동하여 군단 예비가 되었다. 이후에 부임한 여단장 테일러 준장이 부대명칭을 제28여단으로 개칭하였다.
(3)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국6-19연대는 상해봉, 광덕산에서 전투하지 않았다.
국군 제2사단이 '51. 6월에 재진격간 전투(참전용사 증언)
(나) 백적산의 유해는 국군인지 중공군이지?
지역주민은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중공군이 죽어 나중에 모아서 묻었다.
(나) 도마치 계곡에 숨져간 군인은 누구인가?
(다)춘천 사북면 오탄리에 있었던 비극(지역 주민 목격담)
노획한 전차로 살아있는 국군을 길에서 깔아 죽이는 운전 연습
죽은 용사님이 야전 화장하는데 벌떡 있어섰다.
화천 원천리 건넌들에 남겨진 유해와 산 나, 그리고 소유주와의 인연
다.소양강 부근 전투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 3군단은 3월 초순부터 반격작전으로 중서부전선의 부대들이 캔사스선에서 철의 삼각지대를 공격할 무렵 공격축선에 지형이 험준하고 적의 저항이 완강하여 화천저수지-남전리-한계령을 연하는 캔사스선에 도착하여 전선을 정비하였다.
제8군 사령관은 4월 20일 중부전선에서 미 제1, 9군단이 와이오밍선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태백산맥을 중심응로 동서로 배치된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에 주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 도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 도로의 북쪽 10~22km에 위치한 양구-대암산-가전리-사천리-고성 남쪽을 연하는 "알라바마선"을 목표로 24일부터 공격하도록 명령항렸다.
그런데 북한군 제5군단이 양구-원통선에서 먼저 22일 선제공격을 함으로써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이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된다.
(1) 인제 쟁탈전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은 4월 19일 소양강을 도하, 좌전방 제35연대가 가아리로, 우전방 제36연대가 원통북쪽의 봉화산(579)으로 진출하여 인제를 확보하고 있었다.
알라바마선을 공격하기 위해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전투지경선을 일부 조정하여 제5사단은 인제 북쪽의 제36연대 지역을 제3군단의 좌전방으로 투입된 국 제7사단 제5연대에 인계하고, 양구 동쪽의 좌인접 미 제7사단 제32연대 지역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 계획에 의거 제36연대는 22일 18:00에 제5연대에 지역을 인계하고 사단 예비로 인제로 철수하고, 작전지역의 변동없이 사단의 우전방이 된 제35연대는 대암산(1316) 공격준비에 들어가고 에비인 제27연대는 미 제32연대의 양구 동쪽 야촌리 지역을 인수히기 위하여 남전리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아군의 진지교대를 하는 취약시간을 이용하여 22일, 제45사단이 양구, 제12사단이 인제, 제6사단이 한석산(1119)을 목표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국5-35연대의 전초진지 873고지를 점령하고 주저항선으로 접근하였다.
펀치볼 서화리 간성
대암산 매봉산
*873 소양강
35연대
가아리 명당산
36연대, 국7-5연대
양구 야촌리 봉화산 한계리 *안산
제5해병 제36연대 원통 제22연대 장수대
송정리 제36연대 양양
*915 *940 23연대
제27연대
*539 한양동 *1228 제18연대 가리봉
인제 덕산리
개운리 남북리 *한석산
제27연대 제36연대 제22연대
관대리 검발리 *매봉
제3연대
남전리 *733 검우석
신남리 제8연대
내린천
홍천
현리
제35연대는 자정부터 백병전과 화력전으로 적의 돌파를 저지하였으나 우인접 제5연대와 전투지경선의 배치 공간으로 침투한 적의 포위공격에 읹네로 물러나고 있었다. 23일 미 제8군사령관의 알라바마선 공격을 취소하고 군단간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적의 공세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으로 국 제7사단 제3연대와 제5연대가 제5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지역이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제5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제27연대를 인제 북서쪽 고지군에, 중앙 제36연대를 인제 북쪽 고지군에, 제5연대를 원통리에 배치하였고 제3연대는 예비로 소양강 남쪽 한양동에 배치하고 인제 남쪽으로 철수한 제35연대는 재편성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이 계속 제5연대의 좌우측으로 돌파하여 포위를 시도함으로써 사단은 인제로 철수를 하여 제27연대는 개운리 북쪽에, 중앙 제36연대를 남북리에, 예비인 제3연대를 소양강 동쪽 검발리를 점령토록 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인제탈취 명령으로 25일 06:00시에 제36-2대대와 미 제7사단에서 배속된 전차 5대러 인제를 공격하여 정오경 탈환했으나 20:00시경 다시 적에게 넘겨주고 인제를 포기하고 소양강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2) 한석산 쟁탈전
제3군단의 국 제3사단은 인제-간성 도로와, 원통-양양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한석산-가리봉으로 진출하여 좌전방 한계리에 제22연대, 우전방 가리봉에 제23연대를 , 그리고 제18연대를 예비로 덕산리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제7사단이 군단 예비로 후방지역에서 공비소탕 작전 중에 알라바마선 공격으로 4월 22일 오후에 제5사단의 원통지역을 인수하고 제3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투입되었다.
이날 저녁 좌인접의 미 제10군단 우익인 국5-35연대가 격전을 펼치고 있을 때에 국 제3군단 정면에서도 제22연대 전초부대가 한계리 북쪽에서 적 대규모 부대의 공격을 받고 주저항선으로 철수하였다.
23일 전선 조정에 따라 제7사단의 제3, 5연대가 국 제5사단에 배속되었고, 8연대가 제3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지경선이 조정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이날 오전 정오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제5연대와 제22연대 전투지경선의 간격을 집중공략하여 제5연대 지역이 돌파되면서 급격히 약화되어 한석산을 피탈당하고 매봉일대로 후퇴하였다.
이에 사단장 김종오준장은 24일 제22-2대대와, 제18-2대대로 고지쟁탈전을 벌려 한석산을 탈환하였다. 고지를 물러난 적은 25일 다시 1개 연대 규모로 공격을 하여 다시 피탈당하고 매봉으로 물러났다. 26일 새벽에 적이 다시 매봉으로 진출을 기도했으나 2차례에 걸친 백병전에서 적을 격퇴하였다.
사기가 오른 제22연대는 다시 한석산을 재공격하여 탈환하게 된다.
(3)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한석산-매봉 쟁탈전의 진정한 전투부대는 누구인지, 제3사단(4월전투)냐 아니면 제9사단이냐?
(나) 원통-가아리-광치령 서쪽 계곡 고지군의 전투흔적
(다) 과연 제5사단은 적의 보급창고였을까?.
라. 서울 고수 방어 작전
중공군은 승리를 확신하고 4월 22일 공세를 개시하였다. 공격개시 5일 만에 26일 조공부대는 중부전선의 가평-춘천과 종동부 전선의 소양강에서 저지되어 이 전선에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주공으로 서부전선에 투입된 제19병단과 인민군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맏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음에도 초격의 고삐를 늦추지않고 서울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주간 공격으로 전환하여 서울 외곾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된다.
(1) 미 제8군사령관의 작전 방침
적의 4월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는 미 제8군의 작전개념이 와이오밍선 공격간 적의 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면 3개의 축차적인 통제선을 따라, 먼저 성동리-노고산-덕정-포천-가평을 연하는 델타선과, 서울 외곾의 수색-북한산-덕소를 연하는 골든선, 그리고 한강-양평-횡성-양양을 연하는 "네바다선"으로 철수하면서 공산군에게 최대의 출혈을 강요한 후 반격작전으로 다시 캔사스선을 회복하는 것이였다.
제8군은 미 제1군단이 골든선을 점령하면 다른 군단들도 기 계획에 의거 네바다선으로 철수하여 상황에 따라서는 다시 한강이북의 서울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제8군사령관은 26일 새로운 "노네임선"을 설정하고 제1군단이 골든선으로 철수상황에 네바다선보다 30~40KM 북방의 용문산-홍천-한계령-속초를 연하는 "노네임선"을 방어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와간은 명령은 미 제1군단의 서울 외곾 골든선 확보를 우측에서 지원하고 부득이 철수하더라도 동측방에서 서울을 재탈환하는 발판을 확보하겠다는 의도였다.
이 방침에 다라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1군단이 서울 방어에 주력할 수 있도록 그동안 우측방을 엄호하던 미 제24사단을 미 제9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여 방어정면을 축ㄹ소하고 군 에비인 미 제1기병사단을 미 제1군단에 배속하여 강력한 예비대를 보유할 수 있게 했다.
(2) 미 제1군단의 골든선 점령
미 제1군단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4월 25일 성동리-덕정-포천을 연하는 델타선을 점령했으나 방어선이 준비된 것이 아니고 일시적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선정된 선이다.
반면 중공군은 주저항선과 캔사스선에서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델타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또한 일부 부대를 경춘국도로 진출시켜 서울 방면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여 미 제1군단은 델타 방어에 실패하고 서울 방어의 마지막 보루인 골든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좌전방 국군 제1사단이 한강하구-구파발에,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이 구파발-쌍문동에, 우전방 미 제25사단이 쌍문동-덕소간의 골든선을 점령하였다. 이때 연천-전곡-동두천-의정부축선에서 중공군 제19병단과 전투를 한 미 제3사단은 예비로 전환하여 각 1개 연대씩 전방사단의 후방지역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하여 미 제1군단은 어떤 때보다 더 강력한 전투력과 포병을 보유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게 되었고 반면 중공군은 28일까지 계속된 공격으로 전투력이 소멸되고 적시적 보충이 지연되어 계속하여 공격을 하지 못하고 일시적 방어로 전환하게 되었다.
(3) 화전리 전투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8사단과 금촌, 동거리일대에서 치열한 지연작전을 전개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서울 외곾으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는 화전리 일대에, 제15연대는 불광동 일대의 골든선을 점령하였다. 골든선은 4월 초순부터 지역주민을 동원하여 유개호 진지와 교통호를 구축해 놓았다.
문산-서울 축선으로 진출한 북ㅎ란군 제8사단은 28일 새벽 1개 연대규모로 행주나루터로 은밀히 침투시켜 김포공항방면으로 도하를 기도했으나 사단수색대에 발각되어 2시간 동안 인천 외항에 대기중인 순양함 톨레도호의 8인치 함포사격을 받고 다수의 시체를 유기한 채 북으로 철수하였다.
북한군 제8사단은 서울 탈취의 야욕을 멈추지않고 소규모 부대로 전초대대를 고격하였다. 이에 사단은 적을 유인하기 위해 전초대대를 철수시키자, 적은 다시 연대규모로 경의선 철도와 국도를 따라 종대대형으로 좌전방 제11연대 지역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사전 준비된 화력으로 강타하자 순식간에 흩어져 피신하려 했으나 모든 지역에 이미 공병이 지뢰를 매설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결국 북한군은 그후에도 10여차례에 걸쳐 무모한 공격을 하였으나 백병전 속에 900여 명의 시신을 유기한 채 물러났다.
한편 중공군 제64군의 일부가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우전방 제15연대 지역으로 양공작전을 실시하여 한때는 앵봉이 피탈당하였다. 사단은 예비대와 미 전차 중대를 투입하여 협동으로 중공군을 격퇴하였고 이로써 적 주력은 금촌-앵무봉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였다.
이 무렵 중앙의 미제1기병사단은 도로망의 결핍으로 북한산, 도봉산, 일대로 중대규모로 소부대로써 무려 39회에 걸쳐 침투공격을 감행한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우전방 미 제25사단도 퇴계원 부근에서 중공군 제65군을 포병사격으로 1,000여 명을 살상하고 방어진지를 고수하였다.
서울을 목표로 개성-서울 축선과 연천-서울, 포천-서울 축선으로 양익포위를 기도한 중공군의 4월 공세는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의 임진간선 방어로 유엔군의 주력부대 포위에 실패하였고 항공 및 포병화력의 위력앞에 서울 북방에서 무려 7만 5에서 8만여 명이 사살되면서 실패하고 그들의 공격작전 지속능력이 일주일 이상 게속될 수 없음을 다시한번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은 중서부지역은 60km, 중동부지역은 35km를 상실하였으나 서울 북방 골든선-마석우리-대포리를 있는 노네임선에서 서울을 방어하였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활동 결과
(가) 인천 앞바다에서 때리는 미 해군의 함포가 정말로 삼각산 뒷면에 떨어졌다(그곳에 숨어서 지낸 지역주민 제보)
(나) 화전리에 900여 명, 퇴계원 부근의 1,000여 명의 공산군 시신은 어디로 갔는가?
(다) 북한산 북쪽에 남아있는 6.25전투 흔적, 그리고 오봉산 유격장안이 일제시대부터 화류계의 별장이 있었다.
마. 정찰기지 확보 작전
중공군의 4월 공세를 격퇴한 국군 과 유엔군이 골든선=노네임선에서 부대 재배치와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있을 때에 포로들의 진술과 정보판단에 의하면, 적은 4월 공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병력을 즈원받아 재편성을 완료한 후 공격을재개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함은 물론 적의 기도를 탐지하기 위한 정찰활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강 하구-횡계에 이르는 주저항선 북쪽 10km 지점에 사단별로 연대 규모의 정찰기지를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전방사단들이 정찰기지 확보작전을 수행하게 되는데 유일하게 국군 제1사단 전방의 북한군 제8사단이 정찰기지 확보작전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미 제1군단장은 제1사단의 정찰기지 확보는 물론 북한군 제8사단을 격멸할 목적으로 5월 6일 군단 예비인 미 제3사단으로 서울 북서쪽의 덕은리-용두리-불광동간 제1사단 지역을 인수토록 하고 국군 제1사단은 사단 공격을 하도록 하였다.
문산 법원리
내화산
동거리
봉일천 *277
금촌 동원리 박달산
*163 *앵무봉
봉일천 *명봉산
죽원리 곡릉천 * 비호봉 일영
벽제
* 고봉산 *138 관산리 대자동 *188 고양
일산 원당리
신원리
국사봉 삼송리
구파발
능곡
불광동
덕은리
한강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를 능곡 일대로, 제15연대를 국사봉 일대로 진출시켜 5월 7일 06:00시에 미 제3사단의 엄호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좌전방의 제11연대가 고봉산 일대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항공 폭격과 보전포 협동 공격으로 무려 5시간의 혈전을 펼쳐 탈환하였다.
사단은 8일에 명봉산과 대자동의 188고지선으로 진출하여 정찰기지 확보작전을 완료할 무렵 미 제1군단장은 게속 공격을 명령하여 좌익의 제11연댄즌 내화산-동거리를 확보하였으나 우익의 제15연대가 163-박달산 진출작전이 중공군의 증원으로 돈좌되었다. 따라서 미 제1군단장은 1개 연대로 정찰기지 확보를 하고 주력은 주저항선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하였다.
마-1 :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 명봉산, 박달산의 발굴 되는 유해는 어느 나라인가?
(2) 봉일천 동원리에 남겨진 수많은 묘지들의 얽힌 사연?
바. 주보급로 확보 작전
미 제8군사령관은 중서부 전선의 골든-노네임선 방어진지가 강화되고 정찰기지 설치가 완료되자, 전선 조정에 따라 노네임선으로 철수하여 적에게 넘겨준 중동부 전선의 주요 전술도로인 홍천-인제-간성 도로를 탈환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동부 산악지대에 배치된 국군 제1, 제3군단은 부대기동과 군수지워능 험준한 계곡 통로인 속사리-현리-인제 도로에 의존하고 있었다.
제8군사령관은 특히 제3군단의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또 아군이 차후 화천저수지 동쪽에서 공세작전으로 전환시 유리한 기동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 제7사, 국군 제3군단에 배속된 제3사, 제9사,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된 수도, 제11사단을 투입하여 홍천-인데-간성도로의 10~25km 북쪽 가리산-신월리-915고지-1037고지-대진리를 연하는 "미조리선"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에 다라 국군 6개 사단이 5월 7일 이 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소양강 남쪽의 부평리-청구리 일대를 공격한 제5, 7사단은 큰 저항없이 이 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한석산을 공격한 제9사단과 설악산을 공격한 수도사단은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1) 매봉- 한석산 전투
중공군 4월 공세시 제9사단은 제1군단의 예비로 강릉에서 부대 정비를 한 후에 4월 25일 제3군단에 배속되었다. 27일에는 이성가 준장의 후임으로 최석 준장이 사단장으로 취임하여 5월 2일 제7사단 제8연대 지역을 인수하여 제3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현리 북쪽 7km의 산악지대를 방어하던 중에 7일 미조리선을 공격하게 되었다.
사단의 공격목표인 한석산(1119)과 그 남쪽 매봉(1066)은 지난 4월 25일 제3사단 제22연대가 피탈당한 고지로 북한군 제6사단이 2개 연대규모로 거점 방어를 하고 있었다.
5월 7일, 제9-30연대는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매봉은 9일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점령하였고 이어서 10일 저녁에 한석산 마저 점령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제30-3대대는 390여 명의 전사장자를 낸 반면 895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탄약과 장비를 노획하여 대대 전사병이 일계급 특진하였다.
[4월 공세시 한석산-매봉의 제3사단 방어 전도]
35연대
가아리 명당산
36연대, 국7-5연대
양구 야촌리 봉화산 한계리 *안산
제5해병 제36연대 원통 제22연대 장수대
송정리 제36연대 양양
*915 *940 23연대
제27연대
*539 한양동 *1228 제18연대 가리봉
인제 덕산리
개운리 남북리 *한석산
제27연대 제36연대 제22연대
관대리 검발리 *매봉
제3연대
남전리 *733 검우석
신남리 제8연대
내린천
홍천
현리
(2) 설악산 전투
동해안으로 재반격작전을 개시한 제1군단은 4월 15일 한계령-오색리=관모봉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하여 좌전방에 수도사단, 우전방에 제11사단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했다.
군단도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맞았으나 다른 군단과는 달리 적의 공격이 경미하여 공세작전으로 전환이 용이하였다. 사단은 설악산을 점령하고 가리봉-용대리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약수리 부근으로 이동했다.
간성
용대리 미시령
*827 속초
노동 저항령
원통 백담사 *882 마등령 설악동
제11-20연
*안산 *대승령 *972
원통 우화리 *1456
수도-기갑연 설악산
한계령 약수리
수도-1연
가리봉
이때 인민군 제6사단은 가리봉-대승령-노동을 연하는 선에 강력한 거점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단의 공격은 8일 제1연대가 가리봉을, 제기갑연대가 백담사 부근의 노동을 공격하게 되었다. 가리봉과 972고지를 점령한 사단은 전과확대를 목적으로 적을 추격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이 돈좌되곤 했다.
당시 북한군 제6사단은 용대리-간성간의 주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하여 패잔병과 증원 병력으로 대성폭포-백담사-노동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5월 10일에는 적 2개 중대규모가 가리봉을 기습하여 한때 피탈되어 3차에 걸친 역습으로 11일 새벽에 재탈환하였다. 이어서 사단은 적을 계속추격하여 좌전방 제1연대가 안산(1430)을, 우전방 제1기갑연대가 노동을 점령하였다.
한편 수도사단의 우인접으로 진출한 제11사단은 제20연대가 1,000m 이상의 험준한 설악산 준령을 따라 백설의 잔해를 밟으며 기동을 하여 11일 저항령 부근에서 31시간동안 격전을 펼쳤다.
이렇게 동부전선의 국군이 미조리선 공격작전이 순조롭게 38도선을 연하는 캔사스선 점령을 목전에 두데 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서부 및 중서부 전선 부대도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여 문산-춘천 간과 인제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5월 11일 적군이 수일내 대규모 공격을 재개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모든 공격계획을 중지시켰다. 미조리선을 공격한 제3군단과 제1군단은 13일 인제-가리봉-설악산-대포리를 연하는 노네임선 전방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전방 지역에 대한 정찰활동을 실시하게 된다. 결국 유엔군은 서부와 중서부, 그리고 대포리를 잇는 골든선-노네임선에서 중공군 5월 공세를 맞이하게 된다.
(3)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한명의 영웅(당시 제9-30연대장 손희선 대령)을 위해 간과된 한석산-매봉전투
*중공군 4월 공세시 제3사단 제22연대, 18연대의 전투가 더 치열했다?
(나) 80의 제20연대 참전용사님이 설악산을 올랐다
(다) 마등령, 저항령에 남겨진 영혼들
(라) 가리봉 계곡의 기관촣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