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lafHbXKLDQE
약 1:21, 더럽혀진 옷을 벗어 버립니다(Get rid of all moral filth and the evil)
교회 ➊사택 외부단열공사를 하면서 저녁이 되면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피곤한 몸으로 그냥 털퍼덕 들어 눕습니다. 그러면 접은 바지 가랑이에서 흙 먼지가 떨어집니다. 아내가 야단을 칩니다. “옷을 벗고 들어오세요”. 이 말은 “씻고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씻으려면, 옷을 벗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온 몸이 깨끗해집니다. 벗지 않고는 씻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➋자대에 배치를 받았을 때에,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데, 선입병들이 먼저 군에 왔다고 후임병들의 군기를 잡는다고 연병장(운동장)에 모이게 했습니다. 동료 병사들은 그들에게 이끌리어 부대 뒷산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산꼭대기에서 70도 이상 경사가 진 산비탈 아래로 앞으로 포복을 시켰습니다. 육중한 몸무게가 비탈길을 손살 같이 내려갑니다. 그것을 막아 보려고 풀이며 나무며 잡아 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마치 토끼몰이를 당한 그런 기분입니다.
다시 연병장에 모인 우리는 시궁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시궁창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다시 포복을 했습니다. 구역질이 나고 견딜 수 없는 모멸감에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반나절을 고통을 당한 후에, 여기 저기 상처투성이 속에서 더럽혀진 오물 투성이가 된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장에 가서 온 몸을 씻어냈습니다. 그래도 그 구역질나는 냄새가 얼마나 오랫동안 몸에 베어 있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 때에 샤워를 하지 않고 오물 투성이 옷을 계속해서 입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➌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더럽혀진 오물 투성이의 부도덕한 행위들을 벗어 내 던져 버려야만 합니다.
첫째, 믿음은 더러운 악을 벗어 던지는 것입니다.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 버리고
본문은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➊세례를 받을 때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포기하기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내 버리고’의 문자적 의미는 ‘외투를 벗는다’는 뜻입니다.
세례를 받는 신자는 그들의 더러운 옷을 먼저 벗어 던져 버려야 합니다. 세례가 베풀어 진 후에 새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샤워를 하고 나서는 다시 먼지와 오물 투성이 옷을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적 전승>이란 책에서 피포리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옷을 벗습니다. 물속에 잠기는데, 이때는 어떤 물건도 장식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반지나 장식품들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는 벗어버림이 요구됩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세례를 베풀 때에 상징적인 의미로 약간의 물을 머리에 부어 줍니다. 침례교와 같은 교단에는 세례를 베풀 때에 완전히 물속에 잠기게 합니다. 이때에는 모든 장식구들을 벗어던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지금 이 때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물속에 들어가 잠기는 세례를 받을 때에는 부자의 금가락지와 아름다운 외투든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가난한 자의 남루한 옷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서 ➋벗어 버려야 할 것은 단지 외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모든 부도덕한 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높은 도덕적 혁신을 요구받습니다. 부도덕한 행실은 마치 더럽혀진 오물투성이 외투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아티메도러스는 이것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하여 귀의 귀지라고 했습니다. 귀지가 가득 찬 사람은 잘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귀지를 깨끗이 청소해 내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벗어 버려야 할 외투?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라고 하지요!
➌과도한 열망, 곧 ‘자기 욕심’은 넘치는 악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거대한 악의 덩어리입니다. ‘자기 욕심’은 시험에 들게 하고, 죄를 잉태시킵니다(14~15).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욕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낳습니다(5).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 냅니다(20).
둘째, 옷을 버리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러분, 오물 투성이 옷을 벗어 버리고 난 후에는, 그리고 몸을 깨끗이 씻은 후에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➊그 새 옷이 무엇입니까?
바로 “마음에 심어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온유함으로, 겸손함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는데,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다시 오물 투성이 옷을 주워 입는 것과 같습니다. 그 옷은 이미 벗어 버려야 할 오물 투성이입니다. 그것은 신자에게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➋말씀으로 새 사람의 옷을 입었습니다.
골 3:8~10,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이제 여러분은 ➌하나님을 따라 새 사람의 외투를 입어야 합니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로 이 새 사람의 옷이 “마음에 심어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18절,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러니 ➍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의 옷을 주섬주섬 집어 입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말씀이 없이는, 특히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겸손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새 옷/새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으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 이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입니다.
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렇게 말씀은 ➊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이 말씀이 ➋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마음 밭에 심겨지고, 싹이 나서, 결실하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말씀을 날마다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욕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욕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➌이 말씀을 ‘사모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씀을 사모할 때에, ‘구원에 이르도록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그리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말씀을 사모해야만 합니다.
벧전 2:1~3,,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그러므로 ➍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은 새 사람의 옷을 입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 구원, 뜻과 욕심을 이룸으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받게 됩니다”(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