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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장
1. 호세아의 결혼(1-9)
사람은 예수님을 잊고 살면서도, 자신이 예수를 잊고 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히려 나만큼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로 살아간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십상입니다.
이러한 착각과 오해에 빠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는 잊고 있으되,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자신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음을 판단할 때도, 교회 일에 대한 부지런함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곧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16장에서도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믿음은 교회 일에 부지런한 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나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느냐를 보는 것이 옳은 것이지,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가를 보면 안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 일에 열심인 자신을 바라보며,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종교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실상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았음을, 호세아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 형식, 의식 등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신앙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가 종교적 형식을 잘 갖추고, 의식에도 소홀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형식 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신앙인가를 바르게 분별해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으면서도, 그 실상을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절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말씀을 하는데, 그 내용은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러한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은,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인 시각으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입장이나, 그가 겪을 마음고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의 입장이나, 여러분이 당할 마음고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 자체가 우리의 입장을 배려하신다거나,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감히 평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2절의 마지막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음란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음란한 것은,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참된 하나님으로부터는 마음이 떠나고, 대신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세상의 행복을 약속해주는 바알 신을, 하나님과 함께 섬긴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형편을 드러내기 위해, 호세아를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는 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이 누구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3-4절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은 북쪽에 있는 지명입니다. 이곳 이스르엘은 여로보암의 조상인 예후가, 아합의 가족들을 몰살시킨 곳입니다. 이세벨도 이곳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인데, 그는 예후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신 것은, 예후의 집안이 아합의 집안을 이스라엘에서 몰살시킨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될 것임을 예고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는다’는 말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딸로서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로암미이며,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게 하시고, 그가 낳은 자식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긍휼히 여김 받지 못할 족속들이고,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이스라엘은 자기 형편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자기 실체를 바라보면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한 심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아래 있을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상한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세 자녀를 통해 선포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은 긍휼의 대상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7절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북쪽 이스라엘은 심판이 선포되고, 남쪽 이스라엘인 유다에게는 긍휼이 선포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신앙이 이스라엘보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구별하시는 것입니까?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족속입니다. 곧 유다에게 주어진 긍휼은, 약속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여호와의 구원은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활이나 칼, 전쟁, 마병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기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뿐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약속 안에 거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 안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살아갑니까? 사실 우리의 속마음에는 하나님 말고, 의지의 대상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지없이 음란한 여인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여호와의 긍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긍휼을 긍휼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음란한 여인이면서도, 스스로는 요조숙녀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러한 착각이 깨어질 때, 긍휼에 눈이 띄어질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긍휼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어진 긍휼을 바라보며,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2.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1:10-2:1)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하신 말씀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음란한 여인처럼 행했던,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자녀의 이름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긍휼을 입을 자가 아니며, 오직 멸망의 대상이 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음란함이란,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음란은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사귀는 것을 뜻합니다.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되, 그들 마음에는 또 다른 신, 곧 자신들을 이롭게 해줄 이방신을 마음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이러한 음란함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솔직히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한분만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역시 수많은 나를 위한 의지의 대상을 내 속에 두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의 음란함이, 오늘 우리의 음란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점을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호세아서가 이스라엘의 심판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멸망을 받아야 할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었는가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알 수 있으며, 결국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병에 좋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병이 생명을 위협하는 중한 병이라고 한다면,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에 기울여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곧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은 의원이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몰두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병든 자라면, 모든 관심을 자신의 병에 집중하면서, 의원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병든 자면서도,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병들었음을 모르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기에, 의원의 필요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앙 상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제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실체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를 잘 다니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 보일 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음란한 존재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에서 건지는 분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들으면서도, 예수님이 나의 전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를 회복하여 자녀로 삼으신 자비와 긍휼에 대해서도, 감사함이 없게 됩니다. 단지 나를 용서하셨다는 이론을 기억함으로써, ‘감사’라는 단어를 머리에 두고, 가끔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입술로 ‘감사’를 내뱉으면서,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실상에서 우리의 실상이 어떠함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긍휼과 자비를 보면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어지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놀라운 위로와 힘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10절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또한 2:1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뜻이고, 루하마는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6절에서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시고, 9절에서는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는 선언을 하셨는데, 바로 이어서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마치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씀이야 말로 이스라엘이 존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 받은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불의함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까?
10절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입니다.
심판이 선고된 그들이, 다시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된다는 회복의 선언이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약속으로 인해 심판에서 자녀라는 놀라운 반전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지느냐 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의 실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헤어날 수 없는, 음란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약속 때문에 무작정 자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우습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원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죄의 무리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기 위해서는, 필히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풀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심으로서, 죄의 사람인 우리에게는 죄를 묻지 않으시고, 의인으로 일컬으심으로 말미암아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시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려짐으로써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아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많다는 의미로 이해가 될 수도 있지만, 사실 이스라엘의 수가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과장법을 써서 말씀하셨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인간이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은, 인간의 실력이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는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인간이 힘쓴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교회를 나오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심으로 성취되어진 놀라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실상을 알게 된 성도라면, 자연히 그리스도 한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 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은, 서로 분열된 상태에서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온다는 것은, 한 우두머리, 곧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살 수 있음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서로 적대 관계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이며 교회인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격, 서로 다른 생각으로 부딪힐 수도 있고, 다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알았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일치 될 것이고, 결국 한분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의 공로만 앞세우고 나아가고자 하는 것에서는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우두머리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우두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심판에 처한 우리를 붙들어 구출하시는 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죄인인 우리가 의지해야 할 유일하신 분이고, 오직 그분으로 말미암아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국 얻을 것은 실패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두머리로, 두목으로 섬길 것이고,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한 백성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우두머리를 세운다는 것이,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다툼은,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기에, 결국 자신을 주장하게 되는 결과로서 다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됨을 본다면, 도무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교회를 다니고,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에 바친 것을 내세우면서,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일방적으로 내밀면서 받아달라고 하고, 내 정성을 봐서 나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은 철저히 도외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심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결국 죄 없는 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의 오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아니면 백성의 자리에 머물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서로가 예수님을 한 우두머리로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 우두머리로 세웠다면, 한 우두머리 아래서 성도는 서로 한 지체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우두머리만을 바라보기에, 한 우두머리, 곧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자랑하는 자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과 사랑의 맛을 알기에, 긍휼과 사랑을 얘기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이것이, 한 우두머리 아래 모여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