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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9)】 "민중끼린 사이좋게 살아간다"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2
동·서양의 차이
그러니깐 성경을 읽더라도 우리가 그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는데, 여기 지금 우리도 그렇다 그 말입니다. 그래 ‘우리’라는 건 뭐요? 성경은 우리 교회거든, 지금 교회인데 믿음으로 인해 공동체 되는 게 이게 교회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죠. 우리 있어야지. 하지만 또 다른 말로, 말이 너무 순서가 뒤바뀌어 먼저 나와 안됐습니다만, 생각나는 김에 합시다. 교회가 있어야 하지만 그건 지금 필요 없으면 안 돼요. 이 공동체에서 평화주의를 가지고 이렇게 본래 생각이 착하긴 하지만 단순해. 이런 걸 가지고 저기 저 목적을 향해 갈려면, 어느 이렇게 울타리가 있어. 그래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그 살림을 해갈 수가 없어. 그렇지만 그 울타리는 마지막까지 있는 울타리냐? 그건 뭐 내가 말할 거 없이 묵시록을 읽어봐. 마지막에 가면 교회 없어졌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이 이래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필요한 건데, 거기만 말라붙어있으면 안 돼. 어느 때 가다간 이때까지 없어선 안됐던 걸 슬쩍 놓을 수 있게끔 돼야 그게 정말 바로 아는 사람인데, 그럭하기가 참 어렵다 그 말이야. 그럭하길 어려운 것이 뭐 때문이냐? 그러면 이 우리의 소위 깨지 못하는, 밝아지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그래.
불교나 노ㆍ장식 사상의 말로 하면 득어망전(得魚忘筌)이란 말이 있어. 고기 잡은 다음엔 통발을 잊어버린다 그말이야, 고기 잡을 때까지 통발이 필요해서 구했지만, 고기 잡은 다음엔 통발 잊어버려. 그러면 이다음에 뒀다 또 잡아먹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말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고, 그야 물론 이 다음에 잡으려면 뒀다 그러지만, 지금 내가 통발에 대한 생각을 말할 때 고기는 잡았는데도 상을 잡았으면 중요한 고기, 이걸 가질 생각은 안하고, 통발에만 생각이 있으면 어떡하느냐? 그러니까 고기 잡은 다음에는 통발을 잊어버리는 거, 그럼 그것과 꼭 같이 뭘 하자고 그러지? 뜻을 깨달은 다음엔 말은 잊어버려. 이제 말이 말대로 있는 사람은 아직도 뜻 모르는 사람이라. 뜻을 안다는 거, 이제 나 직접 해보지도 않고 이런 말은 안됐습니다만, 불교의 선이라 하는 건 대개 그런 겁니다. 어떡하면 사람이 그 뜻을 붙잡고 말에 붙잡히지 않을 수 있겠나? 이 서양식 사람이란 건 뭐냐? 논리에 열린 사람들이예요. 저번에도 한 얘기입니다만 이 사람들은 주관 객관 문제에 제일 고민해오는, 동양에서는 주관 객관 그렇게 문제 안 돼. 도대체 주관 객관이란 말로써, 여기 안병무 박사님 말대로 하면 적어도 어느 그 사람이 철학자가 와서 묻고 하니깐 그렇게 대답했다고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말을 할 때도 “I see you” 내가 너를 본다 그러지만, 우리 동양말로 “본다” 그러면 그만이지. I는 무슨 I이고, You는 무슨 You냐? 주관객관 없거든. 보면 보는 거지. 무슨 내가 너를 본다? 우리 동양말로하면 “얘, 이제 가라” 그럼 그만이지. “나 있어요. 내 자식아” 뭘 그래. 그게 동양과 서양이 다른 것인데, 이 사람들은 주관, 객관이 분명해. 성에도 “He”냐, “She”냐, “It”이냐 셋씩으로 구별을 해가지고. 그게 똑똑이라면 똑똑한 겁니다만, 그건 그 면만이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말에 걸려 있어요. 그런데 선이라는 건 말하자면 그런데 걸리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문답하는 건 말만 그러고 있다간 그건 안 돼. 선생님이 쓱 들어가 뭐라 하니 “밥 먹고 왔나?” “밥 먹고 왔냐?” 정말 이게 문제가 돼 묻는 거 아니거든. 정말 그런 때 대답을 “먹고 왔습니다. 냉면 먹고 왔습니다.” “비빔밥 먹고 왔지.” 그 소리하면 틀려먹었다, 생각이 아직도 너 정도가 멀었다, 그럼 벌써 선생님은 뭘 가지고 대답하는걸 보면, 그렇다고 미리 그럴 땐 어떻게 준비를, 준비할 재주 없어. 제 마음이 당초에 밥 정도에만 있지 않고, 마음의 높은 정도에 있으면, 턱 문제가 나올 때 다르게 대답이, 그건 뭐라고 지을 수 없어요.
민중끼린 사이좋게 살아간다
우리 얘기도 교회 얘기하게 될 거니까. 자연히 그럽니다만, 교회 없을 수 없지. 없을 수 없지만, 거기 말라붙으면 안 돼. 마지막엔 가다가는 놓는다고 하는, 그러니까 나는 이런 점이 너무 지나쳐 제가 쓸 데 없는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 요한복음 10장 읽고는 그러기 때문에 절대 우리 교회 들어오지 않고는 구원 못 얻는다, 예수님 아니곤 안 된다, 물론 그렇지. 교회 있어야 하고 예수님 있어야 되지만, 그게 문제의 초점을 놓쳐 버렸어. 그런데 있는 건 아닌데, 내가, 네가 뭘 어떻게 할거냐? 그러는데 네가 뭐냐? 그러면 목자가 어느 게 목잔줄 알아볼 줄 알아야 돼. 그 점을 가르치자는 거지, 나는 그렇게 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게 그 전체 생활을 하게 버릇이 생긴 거고, 또 평화적으로 생긴 건데, 단순해. 그래 잘 속아. 그게 뭐요? 이 민중이 그렇지 않습니까? 민중이란 이 세상 민중끼리 모여 살게 됐지.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돈 이라도 못 구하면 저기 높은데 올라가서 구석에 가서 돈 특별히 내고, 전기 끌어오고, 수도 끌어다가 조용하게 살라 그럴 건지 모르지만, 일반 민중이라는 건 아랫 거리에 여기 와서, 한데 여기서 울고불고 뭐 어쩌고 어쩌고, 여기서 살게 마련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렇게 해야 살림이 여기서 하나로 되는 거. 저 사람은 인간으로 되는 거 아니라 돈으로 사는 사람이니까? 저기 딴 데 가서 말이야. 자기 자동차를 가지고 말이야. 전화로 뭘 가져오라면 그건 인간 사회 살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기계 상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민중은 뭔고 하니 싸우기도 하고 시비도 하고 별별 거 있지만, 역시 그 인간적, 그러니까 기차를 타보면 2등 타는 손님 다르고, 3등 타는 손님이 달라, 3등 칸에야말로 정말 우리나라가 있지. 2등 칸만 해도 벌써 우리나라는 거기에, 1등 돼서 어떤 사람들이 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우리나라 국민이 처음부터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탈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전체 살림은 그런 건데, 그러나 그렇다고 그럼 그 사람들이 다 착한 사람이냐? 그렇진 않아. 그러니까 이게 어렵다 그 말입니다. 이 전체를 내놓고는 못 살겠고, 또 민중이라는 건 평화적이야. 갖다 놓으면 민중은 싸움하지 않습니다. 일본사람하고 섞였거나 한국사람하고 섞였거나, 민중은 민중끼린 사이좋게 서로 살아가는 거지. 거기 괜히 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저 사람이 일본사람인데, 저 사람이 무엇인데, 선전하는 사람이 들어가니까 거기 무슨 민족주의요 뭐요. 이래가지고 반감이 생기지. 사람 됨됨이 된 사람인 담엔 다른 사람 보면 색다른 감, 더 재미있어서 어디서 왔나? 그러고 더 친근하게 살려고 그러지. 배추꽁지 하나라도 더 갖다 주려고 그러지 안 줄려고 그러겠어요? 그런 걸 꼭 이 정치적인 다른 생명 때문에 그건 인간생활이 아닙니다.
이제 얘기대로 기계를 목적으로 그것 때문에 선전에 넘어가 그래. 그런데 그 약점 있는 이 민중이란 전체를 떠나선 못 사는 것, 평화적이건만 단순해서 속기를 잘해. 양 같은 것, 양 같이 순한 것, 양 같이 착한 것, 양같이 아름다운 거지만, 단순해서 남이 이끌면 잘 속아 넘어가. 그래서 요점이 울타리 없이도 못살고, 목자 없이도 못 살 거지만, 울타리가 어떤 거고, 어떤 게 정말 목자인지 알아야 된다, 그 점을 가르쳐 주자. 왜 어찌해 그러셨겠나? 자기가 그 동안 전도 나서서 몇 번 지나보니 잔뜩 악의를 가지고 대하는데 말이야. 자 이건 사람 눈 고쳐 주었건만, 눈 고쳐 주었다고 해서 죽이려고 그러지. 주일날 손 마른 거 고쳐주었더니, 그랬다고 해서 죽이려고 그러지. 38년 된 병 불쌍해서 그거 가서 고쳤는데, 그랬다고 해서 또 죽인다고 그러지. 그러니 이 민중은 어떡하나? 같이 싸우려는 건 아니지만, 늘 살아갈려거든 똑똑해서 누가 네 지도자며 누가 가짜 지도자인지. 그 점 참 알아야 한다 하는 걸 우리들에게 알려줘. 내가 그러니까 날 더러 그런 게 아니야. 절대 초점을 바꿔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니깐 누구든지 나한테 예수님, 예수님 그러기는 대단히 쉬워요. 우리 교회 오시오, 그 말하긴 쉽지만 그럭하는 동안에 실속은 빠지고 우리 할 건 모르고, 그러니까 그런 큰 소리를 치는 자꾸자꾸 그래서 감정적으로 차분히 생각하는 거 보단, 감정적으로 떠드는 교회일수록 속 내용은 어떡할지를 몰라요. 자기 실제 살림은 어떡할지 모르고 속아 넘어갈 땐, 아주 맥없이 속아가고 그러니까, 매양 이 세상의, 성경에 있는 말이지만, 이 세상의 아들들이 너희보단 더 영리하다, 그러니까 콘스탄틴 대제가 보고 아, 종교 허락한다하고 이용해 먹어도 된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죽이던 걸, 하룻밤 사이에 고쳐서 자, 신교의 자유를 허락한다, 그 대신에 너희들 다 군대 나와야 된다, 그렇게 옭아매서 로마 시대에 다 군대에 넣지 않았어요.
우리를 전적으로 믿는 게 우리나라
아무 때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신자라는 사람들이 어리숙해. 그러기 때문에 전도를 내 보내면서 선하기는 비둘기 같이 하지만, 또 참 지혜롭게 하는 것은 뱀의, 악독한 걸 배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뱀으로 표시하는, 뱀같이 그렇게 아주 판단을 요렇게 해서 속아 넘어가서는 못쓴다하는, 착한 것은 착한 거고 어리석은 것은 어리석은 것, 다릇습니다. 아무리 평화요, 착하다 그러더라도 미처 생각을 못해서 속아 넘어가서는 못 쓰는, 그러지 말라고 해서 말씀하는 게 이게 아닌가?
그런데 문을 맨 처음엔 이제 문이 나오지 않아요? 두 가지로 자기를 비유하셨거든. 하나는 “나는 문이다” 그랬다, 그 다음에 “내가 선한 목자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 말이 한 말입니다. 한 말인데 처음에도 말할 때도 그 뜻이고, 후에 말할 때도 그 뜻인데, 잘 모르니까 그걸 풀어 말씀을 하다 이제 그렇게 됐습니다만, 그 문이라고 그랬어요.
문이란 뭔가? 전체 울타리가 있으면 그 울타리에 드나드는 데가 문입니다. 그 문은 들어갈 수 있고, 나올 수 있고, 그러니까 울타리라는 게 문 없으면 울타리 의미가 없어요. 문 없는 울타리가 소용 있어요? 그러니까 양의 울타리는 웬고하니 평화적이요. 공동살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안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거기 문이 있어서 출입이, 들어가고 나가고가 있어야지. 딱 요렇게 막아놓으면 울타리가 울타리가 못되고, 그 다음엔 감옥이 돼버려요.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나올 때는 나왔다 들어왔다 하면서 이제 여러 가지 어려움을 피하고 그렇게 돼야 하지. 덮어놓고 가둬만 놓으면 안 돼. 지금도 이 정치사상가들 아주 이렇게 폐쇄주의가 있지 않아요? 지금은 똑같습니다. 공산주의서도 폐쇄주의, 자유진영이라고 하는 데도 폐쇄주의, 이제까지 저기서 얘기하다가 왔습니다만 저번에 나는 지금 주민등록증을 안 한다고 아주 선언해서 안하겠다고 그랬어요. 이제 외국갈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데 이제 좀 어떡하나 문제는 났습니다만, 주겠는지 안주겠는지 해봐야 알 일이지만, 왜 그럼 그걸 반대했냐 그러면, 그건 쓸데없는 짓이에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건 국민을 못살게, 그 사람이라는 거 권력을 쥐면 남을 못살게 하는데 그 일종 취미를 느껴요. 그런데 그래야만 되는 것 같아 그랬지. 그건 겉보다도 다른 데 목적이 있어서 어떻게 한데 묶어 세워가지고 일치행동을 시키려고, 투표할 때라도 다른 생각을 못하고 하라는 대로 위에서 위층이 지도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그런 것 때문에 이걸 만든 겁니다. 그런 줄을 내가 아니까 난 그거 안한다, 내게 무슨 손해가 나더라도 난 안한다, 이제 그러고 합니다. 더구나 지장을 찍으라고 하는 건 그건 참 나쁜 짓입니다. 그럴 때에 그건 뭐냐 그러면 우리를 덮어놓고 의심하는 겁니다. 사람이 가다가 무슨 잘못이 생기면 그 사람을 의심하고 하는 건 부득이 할 일이지만, 처음부터 의심한다는 건, 그건 이 국가를 우리나라라면, 우리나라라는 건 뭐냐? 우리를 전적으로 믿고 들어가 주는 게, 우리 국민을 믿는 게 우리나라지, 처음부터 의심을 하고 저놈이 또 어드렇지 않겠나? 그러면 그건 정부가 아니에요. 부모라는 것, 아버지라는 것 뭔지 아십니까? 아버지는 속는 게 아버지에요. 속지 않는 건 아버지 아닙니다. 저 자식이 또 요러지 않나? 그러곤 형사의 태도를 하지 않으면 안 속는다, 벌써 그러면 아버지 자격이 떨어진지 오래야. 거짓말을 10번해도, 그래서 또 줘야지 어떡하겠나? 돈을 또 주고 또 주고 하는 것이 아버지지. 요걸 안 속겠다고 아들 뒤에 몰래 나간 다음에 일기를 들쳐보고, 그건 벌써 아버지 자격을 스스로 자기가 없애는 거. 그러니 한 나라에 국가라는 게 일도 생기기 전에 국민을 전적으로 신임하는, 너 이거 죽어줘야겠다. 말은 간첩 때문에 그런다고 하지만 간첩하나 때문에 전 국민, 그래 이건 아주 그런데 우리 영원히 신문도 잡지도 이런 걸 국민한테 안 가르쳐 주는데, 답답합니다.
국민한테 그런 걸 가르쳐 주면 나처럼 안 하겠다 할 사람이 상당이 있을 겁니다. 이 사람들은 뭔지 몰라 양 같은 백성이 되어서 날 죽을 데로 끄는지, 살 데로 끄는지, 그저 가자하면 가기만. 그러니깐 그건 숙명이 아니야, 그건 어리석은 거지. 예수님이 그러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걸 구별을 잘 하라고 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런 점 지금은 너무나 이렇게 아주 계획적으로 하기 때문에, 참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니깐 문의 요점이 뭐요? 문이 뭔고 하니 울타리를 대표하는 거예요. 문이 없으면 울타리가 울타리의 의미가 없어요. 아까 말 다시 합니다마는 넓으나 넓은 하나님의 계신 천지에 무슨 또 울타리를 만들겠소. 이제 우리가 부정해서 할 수 없어 하는 거거든. 사람이 바로 된 사람은 울타리를, 문 잘 아는 사람은 울타리가 무슨 필요 있어요? 다른 말로 또 하면 이 타고나는 근기가 같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높이 타고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낮이 타고나는 사람 있습니다.
천당, 지옥 없어도 상관없다
나는 박태선이라든지, 문선명이를 아주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넓게 생각하면 그런 데라도 안 가 보면 못 견디게 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사람은 구조가 그렇게 됐어. 그런데 문제는 느린 놈 아니라 거기 있다 조금 잘하면 이제 또 그 위에 올라갈 생각해야지. 그래야겠는데 그 높은 이치를 아는 사람은 염불이고 뭐고 안하고도 되지만, 이치를 잘 모르는 사람은 염불이라도 해라, 그렇게 해야 알지. 그렇지 않고는 몰라요. 그러니깐 지금 지식이 있는 사람의 생각으론 천당은 무슨 천당이고, 지옥은 무슨 지옥이냐? 그건 정신적인 의미로 천당지옥이 있지 없을 리가 있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제는 우리가 생각이 현실적으로 저기 올라가면 천당이 있고, 여기 땅 속에 들어가면 지옥이 있는, 그런 따위는 없어질 것만 분명해. 이 종교 얘기하는 사람들이 비겁해서 말이야. 저도 그런 줄 알면서도 이런 얘기하면 날더러 또 성경에 반대한다 그러지. 그런 생각나서 말이야 또 그럼 잘못 생각을 해 가지고 오해를 하면 안 되지. 남의 걱정을 너무 지나치게 해서 그러지만 이런 거 할 필요 없습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진실대로 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바르게 말하면 알아듣는 능력이 있지. 다 그렇게 어리석다고 그랬지만 어리석지만은 않은 건데, 여기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너무 지나친 걱정을 해서 그러질 말고 솔직히 말한다면 옛날에 믿던 그런 의미의 천당 지옥이야 없다 해도 괜찮아요. 참 깊은 의미로 들어가서 생각할 때에 그러니까 같은 이름에 천당 지옥이란 말을 놓고도 이 사람 생각하는 것과 저 사람 생각이 다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깐 어떤 사람에게 아주 까내놓고 쉽게 말을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당지옥이 있어야만 믿지만, 어떤 사람에겐 없어도 상관없어요. 상관없어, 천당 지옥 없어진다고 하나님 못 믿는 거 아니에요. 난 나대로 말을 하라면 그까짓 것은 집어치우는 편이 훨씬 하나님한테 더 가까이 가고 더 좋습니다.
그러니까 그럼 그렇다고 저기 저 사람들에게 거기까지 가서 그러진 않아. 어린애들한테는 어린애들답게 공부 잘하면, 이다음에 장가 잘 가고, 시집도 잘 간다, 그래야 공부를 하지. 왜 어린애 놓고 뭐 공부를 하는데 무엇이 깊은 이치를 말하면, 그 애가 몰라. 그러니까 어릴 땐 어릴 때에 알아들으리만큼 구체적으로 다 비유입니다. 그러니깐 비유로 말해도 좋아요. 그런데 나이 자라거든 그 다음엔 그걸 깨쳐줄 생각을 해야지. 그때까지도 안하니까 그게 나쁘단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라는 것도 말이야. 우리가 있긴 뭐 있겠어요. 극단엔 구경의 말씀으로 하면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이 계신 이 안이 당초 이게 전체의 하나인데, 거기다 무슨 또 딴 집을 짓고, 뭐 교회라 그러고, 나라라 그러고,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있는 나라들은 다 가짜나라예요. 나라가 본래 있는 나란데 하느님 모시고 다 천지만물 들어서 한나라인데, 또 무슨 나라라고.
놀래지 마시오. 이다음에 언제 기회 있으면 얘기합시다만, 벌써 그러니까 송나라 때 장횡거가 서명(西銘)이라는 거 있는데, 서명이라는 사상이 놀랍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이고, 저 나라 소위 무슨 임금이라 하는 건. 대군자는 오부모종자(大君者 吾父母宗子)라, 우리 맏아들이지. 또 기대신은 종자지가상야(其大臣 宗子之家相也)라. 이 대신된다는 건 종가집에 심부름꾼들 그런 거고, 천지지색이 오기체(天地之塞 吾其體)요 이젠 천지가 내 하늘, 땅이 내 몸이고 천지지수가 오기성(天地之帥 吾其性)이라. 그 안에 있는 정신은 내 마음이고. 민오동포요, 물오여야(民吾同胞 物吾與也)라, 백성이라는 건 뭔고 하니 다 우리 동포예요. 천하의 있는 사람이 뭐 다 오랑캐 불러서 다 동포고, 물오여야(物吾與也)라, 이 세상의 물이라는 건 나와 더불어 짝 하는 거야. 사상이 굉장히 높은 거야. 그러니 유교 사상에서도 깊이 생각하면 그렇게 쪼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 생각하면 다 그런 자리에 갈 수 있어요. 새삼스럽게 뭘 여기다가 요것만이 신실한, 여기 오면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이 무슨 거기만 오면 있겠어요?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다 저녁엔 천지간에 어디 가는 게 있다, 그렇게 해가지곤 도리어 몰라, 모르니깐 그런 설명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얘기 할 때에는 자기가 이쪽도 저쪽도 이해 할 수 있는 자리에 서 가지고야만, 그래야 자유자재하는 자리에 서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그런 생각쯤 할 필요 있게 됐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깐 구경자리 말하면 교회는 따로 있겠어? 그러기 때문에 묵시록 쓰는 사람이 마지막에 가면 제단이 없더라. 그건 그렇게 거기 가서 무슨 제단이 또 있겠소? 누가 누굴 보고 하나님을 새삼스럽게 믿어라, 공경해라, 하지 않아도 내가 영혼을 예언자의 영을 마지막에는 너, 젊은이, 늙은이, 애, 종, 남종, 여종에게도, 그건 무슨 소린고하니 사람에게 다 일체의 모든 사람에게 다 넣어준다, 그러니까 누가 누굴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데가 이제 그 지경 아니에요? 그런 것이 이 현실적인 역사에서 어느 때 온단 말 아닙니다. 그건 몰라요. 2000년, 3000년 후에 오겠는지? 몇 만 년 후에 오겠는지? 그건 내가 알바 아니지만 구경자리를 생각할 때에는 이제 그 점을 생각해야 돼. 그것이 소위 종말관(eschatologically)이라고. 그러니까 이 세상의 말하는 그 논리에 만족을 시켜서 논리로만 따져가지곤 설명이 안 돼. 사람은 구경자리를 찾아 구경자리를 얘기를 하면 그건 종말관적으로 말 안할 수가 없어.
마지막 자리가 첫자리
그러니깐 마지막엔 하느님이 대 심판하신다, 해서 모든 걸 다 없애게 된다, 그 자리, 그게 그 자리가 뭔고 하니 마지막 자리가 첫 자리야. 처음부터 있던 자리가 마지막에 또 나온다. 똑같은 게 나오는 게 아니라, 이런 말이 오늘 너무 이런 데로 기울어져 안됐지만. 내가 처음부터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이요. 또 나중이라는 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천지창조 전 상태를 안다면, 이다음 마지막 상태를 알 수가 있어. 마지막 상태를 안다면 천지 전 상태를 알 수가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창세기를 쓸 수가 있는 겁니다. 하느님 창조도 누가 옆에 가보고야 썼다, 그건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허나 여기 중 가운데 있어도 벌써 끝을 알 수가 있고, 시작을 알 수 있어요. 그건 시간적으로 현실적으로 하느님이 아무나 일기를 해줘서 아는 거 아니라, 그 근본, 이걸 볼 때 이랬겠지, 이랬겠지.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를 쓸 수 있다고 그러는 거야. 진리얘길 그래 할 수가 있는 건데, 그런 걸로 하면 어드런고 하니 새삼스럽게 울타리란 거 없다, 큰 울타리가 하나 있는, 그런데 큰 울타리 하나 너무 크기 때문에 몰라요. 이것만은 조물로써 어쩔 수 없는 운명이야. 너무 크면 몰라요. 그러게 우리가 아는 건 이 중간 것, 너무 큰 것도 아니고, 너무 작은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요. 그게 우리 눈이라는 거야. 귀라는 거야. 그래 과연 귀로 듣는 거야. 1초 동안에도 진동수가 10이하 되는 건 못 듣잖아요? 또 높은 것도 굉장히 많이 진동수가 높으면, 음이 있지. 있긴 있는데 못 듣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듣고 싶을 때에는 기계를 이용을 해서 가령 눈으로 한다면 작은 것은 현미경을 이용하고, 또 큰 것은 망원경을 이용하고, 이렇게 해서 이 중간적인 이 눈을 보태가지고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하물며 거기 X광선을 이용한다든지, 요새 전자 뭣을 이용한다든지 해서 본다면 놀라운 걸 보지 않아요. 그런 모양으로 지금 이것이라는 건, 중간적인 것 밖에 못돼. 중간적인 것 밖에 못 되는데, 그걸 잘만 보면 그걸로 헤아려서 미루어서 그걸 먼저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게 이것 때문에 극소도 못보고, 극대도 못보고, 이러기 때문에 임시로 불교식 말로하면 방편으로 이걸 만든 거야.
이제 우리 애들이 소꿉놀지 않아요? 집이면 집이지. 집안에다가 또 한편 구석에 집을 지으면 뭘 해. 부엌에 솥이 있는데, 또 솥이라 그러고. 어린애 마음에 그래야 돼요. 애는 소꿉질을 하지 않으면 애가 못돼 어른이 보면 우습지. 야, 이 자식아, 그건 무엇이라고 그러냐? 부엌에 솥이 있는데, 뭐 그렇지만 그건 모르는 말. 어린애의 심리에는 부엌에 솥이 있기 때문에 제가 요렇게 걸어놓고 요래야 요것이 내 살림같이, 집은 이건 내 살림이 아니에요. 적어도 내 살림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거든. 그런데 나이 차차 크게 되면, 싫증내고 이건 내 살림이다, 그것과 꼭 마찬가지에요. 지금 우주가 너무 허전해서 큰데, 이걸 모르니깐 우리나라다, 그래가지고 얘기하지만, 조금 더 가면 그거 싫어져서 그다음에 아이구 이게 무슨 일이냐?, 인제는 인류가 그것 벗어버리게끔, 이 국가주의 벗어버리게, 민족은 무슨 민족, 나라는 무슨 나라, 이렇단다고 제 나라 사랑하지 말라는 말 아니고, 제 민족 사랑하지 말라는 말 아니라, 그것이 다인 것처럼 말라붙으면 그것도 못살게끔 되었어. 이제는 큰 거 자체가 나타나는, 그런 때가 오게 되니까, 그래서 교회 생각을 할 때도 우리가 그 점,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임시적인 거야. 임시는 허망한 건가? 그런 거 아니야.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야, 이게 없어서는 우리가 자랄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해서 나왔어.
속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야
그럼 저건 벗어버려야 되나? 벗어버리라 할 필요 없어. 내가 잘 자라면 저절로 슬쩍 떨어져. 옷 벗을라 하지 말고, 애기를 키우라고. 애기를 키우면 옷 저절로 벗겨지게만 마련이야. 그러니까 나무가 자라면 겉껍데기가 슬슬 저절로 벗겨지지 않습디까? 그런 모양으로 그 자체와 싸울라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속을 키우는 게 목적이야. 이것도 여기 말씀도 속을 키워주느라고 해서 지금 이 말씀, 내가 문이다, 내가 문이라니까 보시오. 우리 예수님이 문이다, 예수님 통과 안하고는 하늘나라 못갑니다. 그것만을 강조하는 건 제법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몰라요. 그 말을 하자는 거 아니라, 그것쯤이야 누가 모르겠어요? 문이 뭐냐? 문이 울타리 전체 대표하는 거다, 울타리가 뭐냐? 큰 원체 울타리 있는 것 속에 그것은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교재로 쓴 거다, 그렇게끔 알아야 교회의 의미도 뭔지? 거기 내가 문이다, 한 뜻도 뭔지 아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여간 이제 울타리라는 그런 것, 그러니까 이게 이웃이라는 것. 그래서 그 문이 대단히 지금 있는 데는, 이제 보시면 뭔고 하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못 들어간다, 더구나 저도 잘 못한 일이 있어 몰라서 한동안 그런 일이 있습니다만, 여기도 그런지 몰라요. 거기 제일 잘 못하기 쉬운 게 뭔고 하니, “나보다 전에 온 사람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하는, 이거 잘못 알면 큰일 나는, 그러니깐 뭔고 하니 그럼 모세도 절도 입니까? 공자님도 강도입니까? 그럼 그전에 예수님 전에 왔던 것들 모두 다 절도 강도 입니까? 이렇게 묻는데, 예수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요점이 어디있는고하니 “내말 안 들었느니라.” 거기 있어요. 그 전에 사람은 목자가 아니고, “이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 양들이 안 들었다, 그 ‘안 들었다’ 하던 그것들 두고 하는 것이지. 뭐 모세를 두고 말하고, 왜 공자와 석가를 두고 말했겠어요? 그런 점에 성경 잘못 봐가지고 세상에 이런 것 때문에 싸움을 자꾸 하니까 그러는 거야. 그러면 열심이 굉장히 나거든, 우리 예수님만을 딱 통과를 해가지고야 들어가지 않으면 저러냐? 그러면 옳은 말이라고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수가 뭐냐? 예수를 그럼 뭘로 푸느냐가 문제야. 예수라는 몸뚱이가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예수님 살아 있어야지 왜 세상을 떠나가지고 왜 지금 여기 안 있겠어요. 그러니깐 몸에 있지 않는 거니까 말씀하시는, 그러게 예수님 자신더러 말씀하시라면, 자기를 인자라 그러지 않았어요. 자기를 부를 때, 예수라, 아무개라 그러지 않고, 인자(人子)라 그래. 인자라 그러는 건 뭔고 하니 사사 이름은 이제 그만 둬. 세상 사람들이 다 사사 이름, 여기도 아래로 나가다 나옵니다만, 이름이야말로 중요해요. 이름이야말로, 왜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에요. 진짜 이름은 안 불러요, 왜 그런고 하니 옛날 생각에 그 사람의 이름을 알면 내가 그 사람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고, 그러기 때문에 이름은 왜 잘난 사람일수록 이름을 안 써요. 그리고 통성명을 하지. 아무개라, 그렇지 않으면 자, 호를 불러. 그런데 우리는 지금 안 그럽니다만 예전엔 이름이라는 건 그렇게 신성한 걸로, 내 영혼하고 둘 사이에 무슨 밀접한 이게 있어서, 그걸 알려줬다간 내가 다른 사람하고 꼼짝 못하고 붙잡힌단 생각에 이름을 그러리만큼 그랬는데, 예수님이 그 이름 안 쓴 것은, 자기 이름 숨기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이 아무개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있기는 한 개인이지만 자기를 공적인 사람, 나 인자란 말에 유래가 어디 있는지 그건 신학자들이 아마 많이 알겁니다. 난 전문연구를 안 해 모릅니다. 구약 때 어느 만큼 썼고, 예수 당시에 어느 만큼 쓰는 걸 예수께서 인용했는지? 또 자기만이 썼었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그중 한 가지만은 그것이 사사 성격을 떠나서 공적인 걸로 말한 거라 하는 것만은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요. 인자라고 말 할 때에 그렇게 자기를 결코 나로써 나를 내세우자고 그러는 게, 내가 양의 우리의 문이다, 내가 아니곤 안 된다, 할 때에도 그런 점 생각하고 우리가 이걸 읽을 필요가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보다 전에 온 사람은 절도요, 강도라” 하는 것도 말 잘못 들어서 교파적인 그런 분쟁을 일으키는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 문으로, 처음엔 그래서 비유를 했어. 문이라는 게 조건이 있어요. 들일 사람은 들이고, 아니 들일 사람은 아니 들이는 게 문의 역할입니다. 또 시간을 두고 나갈 때는 나가게 하고 들어올 때는 들어오게 하는, 그 어느 조건이 있어요. 그렇하는 것. 그러니깐 울타리의 의미는 어디 있냐 그러면 덮어놓고 다 들이는 것도 아니고, 덮어놓고 다 안 들이는 것도 아니고, 들일 것은 들이고, 낼 것은 내고, 또 언제든지 개방을 해서 들어와도 좋고, 나가도 좋고, 그런 게 아니라 들어올 때 있고 나갈 때 있고, 그것은 아까 얘기대로 우리가 중간적인 살림이기 때문에, 맨 처음에 근본도 아니고 다 완성이 된 이다음도 아니고, 이 두 중간에 있는 이거기 때문에 그 동안에 필요한 것은 우리의 훈련이야. 이게 일종의 한 훈련양성으로 우리도 지금 이 살림을 하고 있는 거라. 교회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시기에 적당한 영역을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렇게 울타리로, 문으로 말씀을 했는데, 그런 다음에 그때도 잘 몰라. 그러니 그 아래 켠에 그걸 더 풀어 말하면서 문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내가 선한 목자다”, 그래 선한 목자 거기 이야기 하는데, 그게 두 가지로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목자하고 도둑하고 대조 시켰고, 또 목자하고 삯군하고 대조시켰고, 그러니까 목자 아니면서 목자 비슷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너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울타리로 말하면 문은 누구든지 알거야. 그러니까 문이 대단히 중요해. 그래 나갈 때 문으로 나가야지, 들어올 때도 문으로 들어와야지, 그 문으로 들어오나 안 들어오나 그걸 봐서 그게 옳은 목자인지 아닌지를 안다, 그런 모양으로 살림살이가 그 어느 결정 된 조건이 있어서 이 전체를 위한 이 울타리 안에 살림에 맞도록 한 무슨 그 조건이 있어. 그대로 하냐? 안하냐? 따라서야만 그걸 이제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럼 그 다음엔 거기서 내려가서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그랬는데, 목자와 도둑과의 다른 게 뭐냐? 그거예요. 문으로 들어오면 목자지만,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건 그건 절도요 강도다. (녹음2, 3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