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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08. [역경의 열매] 홍성훈 (1-16) 파이프오르간은 하나님과 인간 연결해주는 통로
제작 장인으로 24년간 20개 오르간 만들어
산수화오르겔 만들며 주님 뜻 제대로 느껴
한국형 오르간 통해 주님 은혜 전하고 싶어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지난해 6월 경기도 양평 국수교회에 설치된 열세 번째 파이프오르간 ‘산수화오르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민일보DB
지금까지 20개의 파이프오르간을 지었다. 독일에서 국가시험을 통과해 ‘오르겔바우 마이스터’(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가 된 지 24년 만이다. 하나하나의 파이프오르간에 곡진한 사연이 담겨 있지만, 인생의 전환점이 된 파이프오르간 하나를 꼽자면 2014년 경기도 양평 국수교회(김일현 목사)에 지은 ‘산수화오르겔’이다.
열세 번째 파이프오르간인 산수화오르겔은 내가 54세가 되던 해에 만들었다. 나는 산수화오르겔에 세 개의 산과 능선, 남한강, 곳곳에 앉은 뻐꾸기, 그리고 산 위로 반짝이는 은하수까지 양평의 자연을 그대로 담았다. 시골 교회에 어울리는, 가장 한국적인 소리와 미를 담은 파이프오르간을 짓고자 했다.
완성된 산수화오르겔을 보며 앞선 12개의 악기를 만들었을 때 보다 하나님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 더 많이 살아났다. 파이프오르간이란 낯선 악기를 나에게 알려주시고 한국에서 만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그제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파이프오르간의 한국화’라는 꿈이 구체화하는 순간이었다. 김일현 목사는 그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산수화오르겔은 열세 번째가 아닌 첫 번째 파이프오르간입니다. 홍성훈씨가 생각해왔던 파이프오르간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이 세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86년 독일로 유학 가기 전까지의 27년, 산수화 오르겔을 만들기까지의 27년,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이다.
독일에 가기 전까지 나는 교회는 다녔으나 하나님을 잘 몰랐다. 음악과 사람들 즐겁게하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흥사단에서 우리 문화를 배우고,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삶을 살았다. 어느 하나에 깊게 마음 붙이지 않고, 내가 주목받고 인기를 얻는 게 자랑이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간 후엔 거꾸로 좌절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들이 계속됐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IMF를 겪었지만, 다시 파이프오르간을 만들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성취에 취했을 뿐, 은혜를 쉽게 잊었다. 여전히 내 의만 드러내기 바빴다.
돌이켜보면 앞선 두 부분의 인생은 남은 인생을 사명에 헌신할 수 있도록 훈련받아온 과정이었다. 파이프오르간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악기,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통로와 같은 존재다. 그런 파이프오르간을 한국에 맞게 만들어 더 많은 사람에게 미처 알지 못했던 감동을 전하는 일이 내게 주신 사명이자 선교 그 자체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성공한 사람도, 화려한 삶을 산 사람도 아니다. 나를 빛내기 위해 꾸몄던 화려한 수식어를 내려놓고 내 삶을 통해 끊임없이 역사하신 하나님을 말하고자 한다. 나에게 왜 젊은 날 많은 경험을 하게 하셨고, 부족한 나를 사용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 말이다.
약력=1959년 서울 출생, 흥사단 단우, 서울시립가무단 단원, 클라이스 오르겔바우사 도제, 독일 파이프오르간 제작자(오르겔바우 마이스터) 국가시험 합격, 홍성훈오르겔바우 대표.
* [역경의 열매] 홍성훈 (1) 파이프오르간은 하나님과 인간 연결해주는 통로
* [역경의 열매] 홍성훈 (2) 스포트라이트 체질… 노래와 춤에 빠진 '날라리 삶'
* [역경의 열매] 홍성훈 (3) '독일에서 기타 배우면…' 막연한 로망 안고 유학길
* [역경의 열매] 홍성훈 (4) 어학 시험 불합격… 아내와 함께할 유학계획에 차질
* [역경의 열매] 홍성훈 (5) 어렵게 목공소 찾고 나니 노동비자 없어 발만 동동
* [역경의 열매] 홍성훈 (6) 뮌스터 시청과 약속한 비자 만료 시한은 다가오는데…
* [역경의 열매] 홍성훈 (7) 한국의 문화 담은 '홍오르겔' 제작할 소명 안고 귀국
* [역경의 열매] 홍성훈 (8) 한국서 첫 작품 완성 후 IMF 터져 몇 년간 주문 없어
* [역경의 열매] 홍성훈 (9)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우리를 주께 올려주지 않을까요"
* [역경의 열매] 홍성훈 (10) 열세 번째 작품 '산수화오르겔'로 한국적 모습 완성
* [역경의 열매] 홍성훈 (11) 첫 유럽 수출… 아픔 딛고 일어선 우크라이나 교회에
* [역경의 열매] 홍성훈 (12) 마치 빨간 파이프오르간에 그려진 나비가 살아난 듯
* [역경의 열매] 홍성훈 (13) 오르간이 내는 성령의 바람 소리, 또 하나의 전도
* [역경의 열매] 홍성훈 (14) 비무장지대에 평화의 상징 '무기오르겔' 만들고 싶어
* [역경의 열매] 홍성훈 (15) 오르간이란 프리즘 통해 하늘의 소리·색 전하고 싶어…
* [역경의 열매] 홍성훈 (16·끝) 남은 인생, 하나님 찬양하는 악기 만드는 일에 헌신
정리=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
***[역경의 열매] 홍성훈 (2) 스포트라이트 체질… 노래와 춤에 빠진 ‘날라리 삶’
학창시절 꿈 코미디언, 공부와는 담 쌓아
졸업 후 흥사단 입단 봉산탈춤 전수자 돼
이때 배운 대금, 오르간 한국화에 큰 역할
서울시립가무단 단원이던 홍성훈(오른쪽)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85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오페라 ‘안드레아 세니에’ 공연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86년 독일에 가기 전까지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날라리’가 아닐까 싶다. 무엇 하나에 깊게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배웠다. 어릴때부터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당시의 신앙은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얕았다. 그 27년엔 하나님 얘기가 없지만, 돌이켜보면 그때도 하나님은 늘 나를 통해 일하고 계셨다.
학창시절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팝송을 부르고 기타를 치며 다니는 날들이 많았다. 당시 꿈이 코미디언이었을 만큼 사람들을 웃기는 게 좋아서 찰리 채플린처럼 지팡이 짚고 따라 하기도 했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다. 우연히 슈베르트의 ‘밤과 꿈’이라는 곡의 기타 연주를 듣고 매료됐다. 기타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좋아서 계속 배우다 보니 남보다 좀 빨리 습득해 연주할 수준까지 됐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 생활을 시작하고도 공부보단 당시 살던 동네이자 ‘문화 1번지’라고도 불린 서울 종로구 혜화동을 돌아다니기 바빴다. 그리고 혜화동에 흥사단이 있었다. 당시 흥사단에선 일주일에 한 번씩 도산 안창호 선생의 철학을 배우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삶의 자세를 본받자는 내용의 시국 강연을 했다. 그 강연을 매주 찾았다. 집과 흥사단, 당시 다니던 연동교회를 오가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자연스럽게 흥사단에 입단하게 됐다.
나는 흥사단에서 봉산탈춤과 장구 등 우리 문화를 배웠다. 노래와 춤을 좋아했던 나는 물 만난 듯 신나게 탈춤을 췄다. 당시 흥사단에 있던 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전수교육조교 최창주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나를 눈여겨보면서 봉산탈춤 일반전수자가 됐다. 춤을 더 잘 추고 싶단 마음에 대금을 배운 것도 이때다. 이 시기에 접한 대금의 소리는 훗날 파이프오르간에 한국적 소리를 입히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80년대 초 당시는 정치·사회적으로 어수선하고도 혼란스러웠던 격동기였다. 그 당시 흥사단에서 저항정신이 담긴 탈춤을 추다 보니 여러 곳에서 나를 찾았다. 사람들이 춤을 보고 위로와 동기부여를 받는 모습을 보며 나도 괜스레 신이 났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곤 했다. 사람들이 나의 무대에 웃고, 그에 따라오는 인기도 나쁘지 않았다. 대학 축제에 사회자나 레크레이션 강사로 초청되는 일도 잦았다. 그 틈새에 요트도 알게 돼서 주말엔 요트 조종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훈아 서울시립가무단에 들어와라.” 그러던 중 84년 당시 서울시립가무단에서 배우 활동을 하던 최 교수가 가무단 입단을 권유했다. 지금이야 뮤지컬단의 경쟁률이 매우 높지만, 당시만 해도 뮤지컬에 관한 관심이 높지 않던 때였다. 미래에 대한 큰 계획 없이 그저 재정이 궁핍하지 않게 노래하고 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만 기뻤다. 그렇게 세종문화회관으로 출근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3) ‘독일에서 기타 배우면…’ 막연한 로망 안고 유학길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가무단 생활 회의 ‘지붕위의 바이올린’ 작품을 끝으로 중단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85년 11월 서울 종로구 당시 한국일보 대강당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 있다.
1년여의 서울시립가무단 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내가 느끼기엔 거의 놀이처럼 노래하고 연기하는 일이 직업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땐 파이프오르간이 뭔지도 잘 몰랐다. 동양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있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무대에서 그저 노래와 춤, 연기 연습만 했다. 황홀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마음 한편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연이 될 가능성은 작아 보였고, 40세가 돼서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확신도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85년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란 작품을 위해 9개월간 긴 연습을 하게 됐다. 이 작품이 가무단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자,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는 동기가 된다.
당시 나는 엑스트라였지만 수개월 함께 연습하는 시간 동안 많은 걸 깨달았다. 작품 속 주인공인 유대인 테비예가 하나님께 마치 대화하듯 말을 건네고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웠다. 나도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이에서 대화하고 싶단 마음에 연습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아마도 하나님께선 그 작품을 통해 이제 떠날 때가 됐다는 신호를 주신 게 아닐까 싶다. 봉산탈춤, 장구, 대금 등 국악부터 기타, 뮤지컬 등 서양음악까지 예술적 기반을 쌓았고 충분히 놀았으니 이제 진짜 소명을 찾아 떠나라고.
이 작품을 끝으로 가무단을 그만두고 유학 준비에 나섰다. 당시 해외여행이 막 풀리면서 유럽을 다룬 책들이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나 역시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1985년 11월에 서울 종로구에 있던 한국일보 대강당에서 기타 연주회를 열만큼 관심이 컸던 나는 ‘독일에서 기타를 배우면 어떨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타로 대학 원서를 넣기엔 실력이 좀 부족했다. 고민하다가 우회로 원서를 넣은 곳은 독일 뮌스터대학 지질학과였다. 그때 독일 대학엔 외국인에게 필수로 배정해야 하는 인원수가 있었다. 1년간 어학을 배운 후 일정 조건을 통과하면 입학을 허가해주는 식이었다. 독일어는 한 글자도 몰랐고 지질학과는 생소했지만, 무작정 원서를 넣고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그리고 공연 때마다 입었었던 탈춤 의상과 기타를 양손에 든 채 1986년 1월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독일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에서 13시간이 넘는 동안 나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이런 결정을 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독일에 가겠다고 했을까, 말 한마디 못하는데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그 결정이 내 결정이 아니고, 더는 놀기만 좋아하는 나를 가만둘 수 없으셨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걸 깨닫게 된 건 오래 뒤의 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4) 어학 시험 불합격… 아내와 함께할 유학계획에 차질
정식 입학과정인 어학 공부 뒤로한 채
유학생과 1.5세들에게 한국문화 가르쳐
학생비자 끝나가는데 대학 입학 길 막혀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89년 8월 독일 하민켈른 딩덴에서 열린 클라우젠호프 한독가정세미나에서 전통 의상을 입고 봉산탈춤을 추고 있다.
독일에 간 후 처음 1년간 생활은 한국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년 후 어학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선 공부에 집중해야 했지만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1.5세들에게 탈춤과 사물놀이 등 한국문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소문이 나면서 재독 교포들이 자녀들을 가르쳐 달라며 연락을 해왔다. 1987년 여름부터는 방학마다 ‘클라우젠호프’라는 현지 교회 단체가 주최하는 ‘한독가정세미나’에 매년 강사로 초청됐다.
당시는 60년대 독일에 일하러 가서 정착한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의 자녀들이 성장해 10·20대가 됐던 때였다. 아이들은 독일인처럼 독일어를 유창하게 했지만 정작 부모님과는 문화가 다르고 대화가 잘 안 돼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나는 장구채를 쥐여줬다. 탈춤과 노래를 들려주며 함께 춤을 췄다. 한국의 문화를 구구절절 설명해 주기보다는 그저 한국의 춤과 소리를 직접 알려줬을 뿐이었다.
한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국악을 처음 접하는 아이들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우리의 소리를 좋아했다. 한 아이는 서툰 한국어로 “장구소리만 들으면 피가 끓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음식도 함께 해 먹었다. 나는 이 아이들이 독일에 계속 살더라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고 스스로 자존감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독일인들도 아이들을 더 존중할 거라고 여겼다.
실제로 우리 문화를 알아갈수록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당당해졌고 방황하던 아이들도 올바른 길로 돌아왔다. 300여명의 아이들에게 크고 작게 영향을 미쳤다.
86년 12월엔 아내와 결혼을 했다. 아내는 국내 유수의 음대를 졸업한 플루티스트였다. 독일에 오기 전에 반년 정도 한국에서 만나다가 독일에 와선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를 이어갔다. 결국 아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3월 아내도 독일에 와서 함께 유학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하려면 치러야 하는 어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기타 레슨도 꾸준히 받고 있었지만, 시험에 떨어지면서 하려던 기타 공부도 접어야만 했다.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면 학생비자도 끝나 한국에 돌아가야만 했다. 아내가 유학 준비를 마치고 독일에 오기까지 1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엔 유학 가면 적어도 박사학위를 받아와야 금의환향이라는 강박감이 있었다. 어떻게든 독일에 남아야 했다.
그때 우연히 독일에서 알게 된 장우형 박사가 나에게 한국교회를 위해 파이프오르간 제작을 공부해보라고 제안했던 것이 떠올랐다. 선명회어린이합창단(현 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을 설립한 장수철 박사의 아들인 장 박사는 당시 독일에서 음악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1년간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렸던 내가 다시 장 박사를 찾아갔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5) 어렵게 목공소 찾고 나니 노동비자 없어 발만 동동
오르간 제작 위해 목공 배우는 곳 수소문
헤매다 찾은 곳 이름이 ‘예수는 목수였다’
공무원 도움으로 도제 과정까지 시간 벌어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90년 독일 뮌스터 플라이터사에서 견습생으로 파이프오르간 제작을 배우고 있다.
장우형 박사의 도움으로 파이프오르간 제작을 배우기 위해 ‘플라이터’라는 회사를 처음 찾아갔다. 플라이터에선 목공을 1년간 배우고 오면 도제 과정에 받아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목공이라곤 해본 적도 없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1개월 안에 목공소를 찾아야 했다.
인터넷도 없고 독일어도 잘하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도 끝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에 버스를 타고 아무 곳에나 내려 목공소를 찾아다녔다. 너무 절박하고 비참한 마음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를 헤매던 때였다. 어디에 내렸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앞을 봤는데 들판에 집이 한 채 있었다. 무작정 들어가 목공소를 찾고 있다고 하니 그 주인이 “여기가 목공소”라고 했다. 그 목공소의 이름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예수는 목수였다’였다. 그 당시엔 아무 생각도 안 났지만, 나중에야 하나님께서 이끄셨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다. 당시 비자를 담당했던 뮌스터시청에선 학생비자로 왔기 때문에 노동비자를 다시 받아와야 한다고 했다. 노동비자를 받기 위해선 한국에 가야 했고, 가더라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당시에 파이프오르간 제작은 독일 사람이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시청에서 조건을 제시했다. 도제까지만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내 비자를 담당했던 공무원이,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인 나를 많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하는 나에겐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목공 1년, 도제 3년 반까지 4년 반의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1주일 후인 1987년 3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아내를 맞이했다.
당시엔 어쩔 수 없이 파이프오르간을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선 내게 지속적으로 파이프오르간을 만날 기회를 주셨다. 중학교 2학년 땐 내가 다니던 연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이 지어졌다. 2명의 미국인 제작자를 보며 나는 그들이 ‘천사같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이 악기를 짓는 일은 천사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울시립가무단 단원으로 연습하고 공연했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는 동양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이 있었다.
목공을 배우던 중 견습생으로 파이프오르간 제작 현장에 견학하러 갔을 때다. 파이프오르간의 작동 장치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우주선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옛날부터 어떤 한 가지만 하는 게 싫었다. 그런데 파이프오르간은 촘촘한 공학기술이 더해진 음악이었다. 모든 요소의 총체적인 결합체인 파이프오르간이 나와 잘 맞는다고 느꼈다.
또 한번은 뮌스터에 있는 한 대성당에서 수사들이 파이프오르간 선율에 맞춰 노래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타지의 독일인들 속에서 멜빵바지 작업복을 입은 내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독일 최고의 파이프오르간 제작사인 ‘클라이스’에 들어가기를 꿈꾸게 됐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6) 뮌스터 시청과 약속한 비자 만료 시한은 다가오는데…
불안한 마음에 날마다 울면서 기도하던 중
서울의 한 교회서 파이프오르간 제작 의뢰
제작사 클라이스에 들어가 새 비자 받게 돼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92년 독일 클라이스사 실습 기간 중 제작한 나무 파이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년간 목공을 배운 후 1988년부터 플라이터사에서 3년 반의 도제과정을 시작했다. 파이프오르간을 알아가는 과정은 힘들지만 즐거웠다. 그러나 끝날 날이 다가올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뮌스터 시청에서 약속한 기한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 약속기한 반년 전쯤부턴 울며 기도하는 날이 많았다. 내가 왜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되물었다. 한 번은 교회 수련회에서 기도하는데 평생 그렇게 운 적이 없을 정도로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됐다.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그때 서울의 한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교회를 새로 건축하면서 파이프오르간을 지으려고 하는데, 당시 시무하던 목사님께서 내가 제작 관련 일들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교회를 다닌 적도 없고 어떤 인연도 없었다. 지금도 어떤 연유로 연락이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그 교회가 클라이스 파이프오르간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터라 나는 가장 가고 싶은 곳이기도 했던 세계 최고의 파이프오르간 제작사인 ‘클라이스’를 찾아가게 되었다. 때마침 클라이스사도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눈을 돌릴 때였다. 한국에 파이프오르간을 지으면 이를 수리하고 조율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때 도제 과정을 밟던 내가 찾아온 것이다. 클라이스사는 나를 받아줬고 곧바로 독일 본에서 새로운 비자를 받아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뮌스턴 시청과 약속했던 기한인 1991년 9월의 일이었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전 세계 파이프오르간 도제생의 꿈이자 외국인 도제생을 받아본 적이 없는 클라이스사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제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장 먼저 축하해주셨던 문성모 목사님(현 강남제일교회)께서 독일에서 늘 함께 기도해주셨다. 위기 때마다 절실하게 기도하고 인도받았음을 느꼈다.
91년 10월부터 클라이스사에서 정식 도제로서 삶과 5년간의 마이스터 과정을 시작했다. 매일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예술을 향한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클라이스사 사장인 한스 게어트 클라이스씨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파이프오르간을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클라이스 사장은 그 후로 나를 곳곳의 제작 현장으로 보냈다. 한 번 갈 때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반년을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큰딸은 쑥쑥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5년이란 실습 기간은 좀 더 빨리 마이스터가 되고 싶은 나에게는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마이스터 과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클라이스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차피 파이프오르간 제작을 평생 해야 하는데, 학위를 좀 더 일찍 받을 수 있도록 마이스터슐레(학교)에 빨리 입학하면 안 될까요.” 그가 1주일 후 건넨 답변은 “여기서 정도를 밟고 계속 일하든지 아니면 당신의 생각을 받아줄 다른 곳을 찾아가라”였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7) 한국의 문화 담은 ‘홍오르겔’ 제작할 소명 안고 귀국
실습기간 당기려다 사장의 깨우침으로
초심으로 돌아가 견습생 일부터 시작
우여곡절 끝에 오르겔바우 마이스터 돼
홍성훈(왼쪽)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94년 독일 본 클라이스사 집무실에서 스승이자 클라이스사 사장인 한스 게어트 클라이스씨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클라이스씨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클라이스씨는 “우리는 빨리 마이스터로 만들어줄 능력이 되지 않으니 다른 회사를 찾든지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계속 일하라”고 말했다. 나는 남아서 계속하겠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클라이스씨는 나무를 나르는 일 등 견습생들이 하는 일들을 시켰다. 초심으로 돌아가란 의미였다.
‘직업’을 뜻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는 ‘소명’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이 세상에서 소명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직업을 대하는 방식도 특별하다. 빵 하나를 만들더라도 최고로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다. 유럽에 역사가 100년이 넘는 빵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번은 어느 교회의 철문을 만드는 사람에게 완성하는 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더니 7년이 걸린다고 했다. 유럽의 교회들을 다닐 때도 똑같은 모양의 십자가와 예수상을 본 적이 없다. 교회마다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예술작품, 감동이 있었다. 그들은 특정 시간 안에 많은 성과를 내고자 하기보단 한 가지를 만들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성심껏 투자했다. 그 결과물이 예술로 승화돼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마이스터가 되기 전 5년이란 긴 시간을 준비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물며 빵도 그렇게 만드는데 하늘의 소리를 만드는 사람이 일을 허투루 해선 안 됐다. 클라이스씨 덕분에 나는 기술과 예술을 겸비한 오르겔바우로서 기본과 자질을 배울 수 있었다. 교회를 아름다운 소리로 채워 교우들의 마음을 신앙과 감동으로 가득차게 하기 위한 일이 ‘파이프오르간 제작’이란 사실을 되새겼다.
우여곡절 끝에 5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마이스터슐레(학교)에 입학한 뒤 역사 회계 수학 등 여러 과목의 필기시험과 100시간에 걸친 실기시험을 두 번의 시도 끝에 통과해 1997년 오르겔바우 마이스터가 됐다. 시험에 합격한 나에게 클라이스씨는 축하와 함께 이런 말을 건넸다.
“한국에 가서 당신의 문화가 담긴 ‘홍오르겔’을 만드십시오.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가장 싫어하는 건 사탄입니다. 파이프오르간은 분명 교회를 위한 하늘의 소리지만 이를 짓는 과정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겁니다.”
그땐 잘 몰랐으나 한국에서 파이프오르간을 만들며 그의 당부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클라이스씨는 파이프오르간이 단순히 악기가 아니라 영적 싸움에 무기로 쓰인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내가 받은 소명도 분명했다. 한국에서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마지막 통로이자 영적 전쟁의 병기로서 파이프오르간을 짓고 더 많은 사람에게 들리게 하는 일이다.
1997년 12월, 나는 독일에서의 12년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독일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텐데 왜 한국으로 왔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엔 나도 그 이유를 잘 몰랐다. 한국에서 파이프오르간은 지금보다 훨씬 더 생소한 문화였기에 막막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한국으로 이끄셨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8) 한국서 첫 작품 완성 후 IMF 터져 몇 년간 주문 없어
수입 없이 지내다 한 교회서 제작 요청
큰 규모라 독일서 1년 걸쳐 완성한 후
한국 가져와 설치… 현재까지 20대 지어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98년 5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소성당에 지은 첫 번째 파이프오르간 봉헌식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98년 1월 1일에 가족들과 함께 창경궁을 찾았다. 고궁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는데 문득 ‘40세가 되면 뭘 하고 있을까’ 고민했던 27세의 내가 떠올랐다. 그날이 바로 내가 40세가 되던 해였다. 나도 모르게 “40세에 내가 마이스터가 됐네”라고 했더니 가만히 듣던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그러네요”라며 호응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파이프오르간 제작자 1세대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번째 파이프오르간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소성당에 지었다. 이 파이프오르간은 마이스터 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실기시험 때 만들었던 작품이다. 94년 독일 유학 중 한국에 왔을 때 서울주교좌성당 수석오르가니스트인 조인형 성공회대 교수와 소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중세교회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작은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조 교수와 서울주교좌성당 음악감독인 이건용 한예종 교수도 이곳에 나의 첫 번째 작품을 짓길 원했다.
98년 5월 소성당에 파이프오르간을 완성하고 봉헌예배와 봉헌 기념 연주회를 열었다. IMF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독일에 있을 때 이미 수주를 받았기 때문에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 공명이 잘 되는 공간에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감동이 밀려왔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인 파이프오르간을 만드는 것이 소명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IMF의 여파를 피해가진 못했다. 경제가 초토화되고 문을 닫는 회사가 속출하는데 값비싼 파이프오르간을 짓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다시 독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후로 몇 년간 단 10원도 벌지 못했다. 그저 둘째 딸을 데리고 오전에 놀이터에 가서 오후 서너 시까지 그네를 밀어주는 일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게 아내는 “그럴 시간에 기도를 더 하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에 보내신 것 같았다. 아내와도 사소한 일로 많이 싸웠다. 돌이켜 보면 나의 자격지심이었던 것 같다. 아내에게 참 미안하다.
그러던 중 2000년 봉천제일교회(현 큰은혜교회)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나로서는 큰 규모의 파이프오르간이었다. 나는 한국에 제작소는커녕 도울 수 있는 직원이나 공구도 없었음에도 덜컥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독일에서 임시로 작업실을 빌리고 현지 제작자를 고용해서 원정 제작을 시작했다. 1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을 다시 해체해 2001년 한국으로 가져와서 교회에 설치했다. 기적 같은 결과였다.
그 뒤로 하나둘씩 주문이 들어와 현재까지 20대의 파이프오르간을 지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고 매번 절실하게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하시는 과정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동안 제작한 파이프오르간이 모두 소중하고 기억에 남지만 그중에서도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몇 대가 있다. 그중 하나는 경기도 용인 아름다운동산교회에 지은 세 번째 파이프오르간이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9)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우리를 주께 올려주지 않을까요”
작은 개척교회 목사님 찾아와 오르간 주문
우리 재료들로 한국적 소리 담으려 애써
세 번째 작품 통해 미래의 제작 방향 잡아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2004년 12월 경기도 용인 아름다운동산교회에 지은 세 번째 파이프오르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2001년 두 번째 악기를 지은 후 나는 파이프오르간에 담고자 하는 한국적 소리의 방향을 더 구체화하게 됐다. 프랑스 로맨틱풍 소리를 바탕으로 하되, 우리 정서에 다가가기 위해 좀 더 허스키하고 중저음이 강조되는 음색을 생각했다.
하지만 순탄하게 풀리지 않았다. 한동안 또다시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처럼 주문 없이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2003년, 경기도 용인 아름다운동산교회의 김재남 목사님이 교회를 새로 건축하는데 파이프오르간을 짓고 싶다며 나를 찾아오셨다.
아름다운동산교회는 당시 막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한 작은 개척교회였다. 시인이기도 한 김 목사님은 대학에서 국문과 교수를 하시다가 목회를 시작하셨다. 개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짓는 비용은 아무래도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처음엔 반대하는 교인도 있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의 뜻은 확고했다.
“우리 교회의 예배당을 가장 기도하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기도 소리가 울려서 나에게 들릴 정도로 공명이 있는 공간에 파이프오르간 음악이 들린다면 그 소리가 우리를 하나님께 올려주지 않을까요.”
아름다운동산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짓기 전 세 가지 다짐을 했다. 한국에서 순수히 우리의 힘으로 만드는 것, 한국의 재료로 만드는 것, 그리고 우리의 소리를 접목해 만드는 것. 실제로 인천 검단의 한 목공소를 빌려서 작업자들과 함께 가능한 우리의 재료들로 직접 제작을 했다. 이는 자신과의 약속이자 앞으로 제작할 파이프오르간의 방향이 됐다.
세 번째 작품을 제작하면서 나는 파이프오르간이 단순히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품이 아니라 그 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작은 교회에 지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단 한 사람이라도 건지고 그에게 하늘의 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면 이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안에서 나의 사명도 되새겨 봤다. 새로운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잡초를 치우고 길을 닦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누군가는 분명 가야 할 길이다. 하나님께선 파이프오르간을 한국에 정착시키는 일을 나에게 주셨다는 확신이 점점 들었다. 불모지를 개척하는 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이 비켜 가지 않았지만, 단순하고 긍정적인 성향의 나는 그런 고통을 비교적 잘 견뎌내고 또 쉽게 잊어버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버티고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가면서 아름다운동산교회 교인들도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줬다. 김 목사님과 교인들의 지지 아래 2004년 파이프오르간이 완성됐다. 140석 규모의 작은 예배당이지만 불필요한 장식을 최소화하고 공명에 집중해 만들어진 공간에 울려 퍼지는 파이프오르간 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10) 열세 번째 작품 ‘산수화오르겔’로 한국적 모습 완성
파이프오르간 비전 꿈꾸던 목사님과
꾸준히 대화 나누며 구체적 형상 그려
소리와 모습, 양평의 자연 그대로 담아
김일현 국수교회 목사가 2014년 9월 경기도 양평 국수교회에서 파이프오르간 ‘산수화오르겔’의 봉헌식을 진행하고 있다.
파이프오르간을 한 대씩 만들면서 한국적 파이프오르간의 방향을 조금씩 잡아갔다. 열세 번째 작품인 양평 국수교회의 파이프오르간은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완성된 대표적인 예이다.
김일현 국수교회 목사님은 파이프오르간을 짓기 전에도 음악에 대한 비전을 품고 연간 20~30회씩 지역 주민을 위한 음악회를 열어왔다. 김 목사님은 교회를 새로 세우기 전인 2001년부터 나에게 파이프오르간을 짓겠다는 뜻을 밝혔다. 양평에 가로등이 제대로 갖춰진 곳도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는 “우리 시골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김 목사님은 꾸준히 파이프오르간에 대한 비전을 꿈꿨다. 2005년 12월엔 국수교회의 한 장로님이, 소유하고 있는 경기도 양평 땅의 일부를 제작실로 쓸 수 있도록 흔쾌히 내주셨다. 물론 제작비 일부를 드리긴 했으나 선교의 일환이자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하신 일이었다. 김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만들고 싶은 파이프오르간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됐다. 본격적으로 제작을 시작한 건 10여년이 지난 2012년이었다.
목사님은 나에게 파이프오르간 제작에 대한 전권을 줬다. 어떤 파이프오르간이 적합할지 고민하는 데에만 수년에 걸친 시간이 들었다. 어느 날 문득 퇴근길 어둑할 때 눈에 들어온 양평의 자연이 뇌리에 꽂혔다. 하늘엔 촘촘하게 별이 박혀있었고 어두운 하늘에 산의 실루엣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그중에서도 한국의 자연 그대로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관뿐만 아니라 소리도 우리의 소리에 가깝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물이 국수교회의 ‘산수화오르겔’이다.
산수화오르겔은 파이프오르간을 왜 한국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준 작품이다. 파이프오르간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만들어지고 연주돼왔다. 소리도 당연히 유럽 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발전해 온 것이다. 유럽의 영적 부흥을 이끈 바흐와 같은 음악가들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었던 하늘의 세계를 파이프오르간으로 연주했다. ‘음악 설교’라는 말처럼 그런 음악은 그 자체로 말씀이고, 거기서 받는 감동은 ‘영성’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런 파이프오르간을 우리의 정서에 맞게 발전시킨다면 어떨까. 우리가 민요나 타령을 듣고 왜 좋은지는 모르지만 ‘얼쑤’하는 추임새가 절로 나오는 것처럼 하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악기가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면 영성도 커지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한국엔 파이프오르간이 많지 않고 그 소리가 생소한 사람들도 많다. 내가 꿈꾸는 것처럼 이 소리가 우리에게 익숙한 소리가 되기까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작은 시골마을에서 울려 퍼지는 파이프오르간 소리와 거기서 감동을 받는 순박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미래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게 됐다. 영적인 소리야말로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가장 큰 무기다. 천상의 소리로 우리를 무장시키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임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11) 첫 유럽 수출… 아픔 딛고 일어선 우크라이나 교회에
소련과 강제 합병 후 무너지고 방치된 터에
교회 세우고 입당 때 오르간 소리 듣길 원해
마침 보관 중이던 오르간 뼈대로 제작 시작
홍성훈(왼쪽)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2017년 9월 우크라이나 키예프 타라스세브첸코대학에서 기념 연주회를 하기 전 파이프오르간을 살펴보고 있다.
2017년 9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슬로브쥐차(생명의빛)교회에 설치된 열여덟 번째 파이프오르간은 한국에서 유럽으로 수출한 첫 사례다. 모든 파이프오르간을 짓는 데 우여곡절이 있지만, 내가 이 파이프오르간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소련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농업을 발전시켜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부흥했던 나라였다. 현지 목사와 선교사들에 따르면 당시 키예프에는 금빛 지붕의 교회들이 많아 언덕에서 보면 눈이 부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922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에 강제 합병되면서 많은 교회가 차례로 문을 닫고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20여년 전, 우크라이나의 쿠네츠 현지 목사와 임현영 선교사 그리고 요한선교단의 김동진 목사는 무너진 채 방치돼 있던 그 교회의 터에서 벽돌 세 장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반드시 교회를 다시 세우겠노라고. 그리고 15년이란 긴 시간에 걸쳐 그곳에 조금씩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름이 40m인 둥근 모양의 교회는 높이가 50m에 달하지만 한 층밖에 없는, 천정이 높은 아름다운 교회였다. 완성돼 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며 세 사람의 마음엔 ‘입당예배를 할 때 이곳에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고 한다.
그분들과 우연히 만나게 된 나는 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놓자고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나와 가난한 목회자인 그들이 파이프오르간을 세우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1년 가까이 고민을 하던 어느 날 작업실 한편에 언젠가 기회가 있을 거란 생각으로 만들어 뒀던 작은 규모의 파이프오르간 뼈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곧장 김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 우리 합시다.”
대책 없이 시작은 했으나 문제는 돈이었다. 우리는 모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진 일곱 명이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팸플릿을 제작해 이곳저곳에 발품을 팔며 홍보했다.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후원금을 보내왔다. 그중엔 암 환자도 있었다. 어떤 분은 100만원이란 돈을 덜컥 내놨다.
그렇게 십시일반 후원금을 보내준 덕분에 재료비의 3분의 1 정도가 모였다. 나머지 비용 중 일부 재료비와 인건비는 내가 감당했고 나머지는 세 목회자가 힘겹게 마련했다. 이탈리아의 거래처 마이스터는 이 소식을 듣고 파이프를 무료로 보내주기도 했다. 이 일의 여파로 한참을 재정적으로 힘들게 보냈다. 아내와 상의도 없이 내려버린 결정에 원망의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나에게 강권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이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었지만,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심을 느꼈다. 기적은 파이프오르간을 완성한 후에도 이어졌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12) 마치 빨간 파이프오르간에 그려진 나비가 살아난 듯
완성기념 예배 중 주변 날아다니는 나비
오르간에 가득 그려 넣은 나비와 똑같아
성령께서 함께하심 체험하고 모두 감동
김동진(요한선교단) 쿠네츠(슬로브쥐차교회) 목사,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 임현영(왼쪽부터) 선교사가 우크라이나 키예프 슬로브쥐차교회에 설치된 나비오르겔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슬라브쥐차(생명의빛)교회로 보낼 파이프오르간을 완성한 2017년 8월, 제작소에서 기념 예배를 드리던 날이었다. 장마철이긴 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새벽부터 저녁까지 한시도 그치지 않고 세찬 비가 쏟아졌다. 이런 날씨에 이 외진 제작소까지 과연 몇 명이나 오려나 싶었다.
그런데 장대비를 뚫고 40여명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제작소를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그간 제작의 어려움과 소회를 나눈 후 제막식 순서가 됐다. 천을 걷으려는 순간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그 주변을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순간 ‘저 나비를 어디서 봤지’란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사회자로서 진행해야 하는 나는 이내 천을 걷었다.
제작소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제야 내가 그 하얀 나비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났다. 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빨간색 파이프오르간 정면에 제작소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똑같이 생긴 하얀 나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열여덟 번째 작품의 제목은 ‘나비오르겔’이었다. 한국화 화가 안명희 작가와 함께 작업한 이 작품은 뒤주를 본뜬 육면체를 빨간색으로 칠한 후 그 위에 나비를 가득 그려 넣은 모습이었다. 그날 참석자 중 절반 정도는 비기독교인이었는데 모두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성령께서 그 예배 가운데 함께하심을 체험했다.
나비오르겔 정면 모습.
마침 그 해는 우크라이나의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이자 한국과 우크라이나가 수교한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여러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지만, 크림반도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인지라 한국 정부에서는 별도의 사절단을 보내지 않았다. 기념 예배를 마친 오르간을 정성껏 포장해서 현지로 보낸 후, 모금하는 일에 앞장섰던 추진위원회 일곱 명과 나는 각자가 가진 달란트를 활용해 문화 행사를 준비해 9월 키예프를 찾았다. 졸지에 한국의 문화사절단이 된 것이다.
그곳으로 운송된 파이프오르간을 교회에 다시 설치하는 열흘 동안 우리는 사진전과 회화전, 파이프오르간 연주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열었다. 나비오르겔 봉헌식을 하던 날, 우크라이나 문화부 장관이 교회를 찾았다. 당시 이양구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도 한국의 위상을 높여줬다며 고맙다는 뜻을 밝혔다. 현지인들도 한국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선물 받은 것에 기뻐하며 우리를 환대해줬다.
그렇게 우크라이나의 무너진 교회 터 위에 새롭게 교회가 세워졌고, 우리는 그곳에 파이프오르간을 선물했다. 그 소리를 통해 우크라이나인들은 위안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이는 분명 또 다른 형태의 선교였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우리 모두 각자의 소명을 갖고 전도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13) 오르간이 내는 성령의 바람 소리, 또 하나의 전도
전주기전대에 세운 스무 번째 오르간
주민·학생들에 오르간 소리 들려주고 싶은
조희천 총장의 40년 염원… 꿈이 현실로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지난 1월 전주기전대에서 자신의 스무 번째 파이프오르간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 최근에 지은 파이프오르간은 지난해 12월 전주기전대에 세워졌다. 내가 한국에 온 지 20년째 되던 해인 2018년부터 시작된 스무 번째 오르간이다.
파이프오르간은 조희천 전주기전대 총장의 40년 넘는 꿈이었다. 그는 늘 가슴 한편에 파이프오르간을 짓겠단 염원을 품고 살아왔다. 어느 날 조 총장은 100여년 전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학교건축물 중 한 창고를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다가 그 천장 위에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서까래를 발견한다. 그는 100년이 넘게 숨겨져 있던 이 공간을 보자마자 이곳에 파이프오르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고 한다.
조 총장은 전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 학교에 파이프오르간을 지어서 학생과 주민들에게 그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꿈을 내비쳤다. 파이프오르간을 짓고 그 소리를 들려주는 일이 또 하나의 전도라고 생각한 것 같다. 얼마 되지 않아 나에게 연락을 해 왔고 곧바로 파이프오르간 제작이 시작됐다. 늘 갈망하던 조 총장의 꿈이 현실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서까래 천장 아래에 300석 규모의 채플을 만들고 그 이름을 ‘오르겔홀’이라 붙였다.
전주기전대는 미션스쿨이긴 하지만 비기독교인 학생 수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전까지 전북 지역엔 아직 파이프오르간이 없었다. 과거에 많은 선교사가 학교와 교회를 세웠던 전주의 미션스쿨에 전북의 첫 번째 파이프오르간이 세워졌다.
전주기전대는 지난해 파이프오르간을 완성한 후 올해부터 음악과에 오르겔 전공을 만들고 교수를 임용했다. 그리고 3월부터 영상으로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올리기 시작했다. 조 총장은 이 소리가 개강 예배를 비롯한 매 예배 때, 그리고 이곳에서 결혼식이 올려질 때 등 많은 사람에게 수시로 들려지길 바랐다. 파이프오르간이 내는 성령의 바람 소리를 듣고 그 속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오랫동안 비전을 꿈꾸며 철저하게 준비해 온 그의 모습이 놀라웠다.
한국에서 20여년간 20대의 파이프오르간을 지으면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파이프오르간이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이 소리를 오래전부터 품고 꿈꿔온 사람들을 만날 때면 신기하기도 했다. 하나씩 만들어질 때마다 반드시 함께하는 고통과 더불어 따라오는 은혜는 마치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나를 빚으시고 훈련하는 과정임을 안다. 특히 열세 번째 오르간 이후 인생의 세 번째 부분을 살아가면서는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금씩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앞으로 내가 해 나갈 것들에 관한 것이다. 30여년간 파이프오르간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헤쳐가야 할 또 다른 고난이 가득하다. 그러나 내 남은 생을 투자해 기꺼이 이루고 싶은 꿈이 몇 가지 생겼다. 그중 하나는 전쟁 무기를 재료로 평화를 연주하는 파이프오르간인 ‘무기오르겔’을 만드는 일이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14) 비무장지대에 평화의 상징 ‘무기오르겔’ 만들고 싶어
‘풍관’이란 디지털 접목 오르간 제작 후
파이프오르간에 대한 관념 자유로워져
전쟁 무기를 재료로 오르겔 제작 계획
서울 구로아트밸리에 설치된 풍관 모습. 파이프오르간의 형태 중 파이프만 남긴 후 디지털 방식을 결합해 공연 전 자동으로 음악을 연주하도록 했다.
2009년 이돈응 서울대 교수의 제안으로 서울 구로아트밸리에 기존의 오르간과는 전혀 다른,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풍관’이란 이름의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했다. 풍관은 이 교수와 9개월간의 토론과 연구 끝에 완성했다. 파이프오르간에서 케이스, 연주대 등의 형태를 해체하고 파이프만 남겼다. 그리고 공연 15분 전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자동으로 모터가 작동해 바람을 만들고 그 바람이 각 파이프로 전달돼 음악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파이프오르간에 대한 관념이 좀 더 자유로워졌다. 그러던 중 비무장지대(DMZ)에 평화의 오르겔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분단국가인 한국에 살생을 위해 사용하는 전쟁 무기를 재료로 파이프오르간을 만든다면 평화를 상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 같았다.
계속 무기오르겔에 대한 마음이 지워지질 않던 중 2019년 내 마음을 알고 계시던 송길원 양평 청란교회 목사님이 계속 묵혀둘 순 없다며 말을 건네셨다. 때마침 다가오는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인 2023년에 무기오르겔을 만들어보자는 논의를 시작하게 됐다. 잔혹한 전쟁이 게임이나 영화 등에서 흥미 위주로 소비되는 이 시대에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난해 7월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 게시물을 올렸다. 2023년에 DMZ에서 연주할 ‘무기오르겔’을 만들 수 있도록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답변을 들을 수 있는 청원 숫자인 20만명을 채우진 못했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많아졌다.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 것만 해도 절반은 성공이었다. 그 후 이 구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지난 4월 ‘무기오르겔’ 프로젝트를 위한 시민단체 ‘건반 위의 평화’를 설립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와 안위를 허락하셨고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길 원하셨다. 평화와 자유를 갈망했던 독립운동에 기독교인이 주축이 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잔혹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엔 결코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전쟁에 사용됐던 무기들을 해체해서 평화의 소리를 내는 악기로 다시 만든다면 어떨까.
DMZ가 아니더라도 무기오르겔이 있는 곳이 랜드마크가 되고 전 세계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찾아와 뜻을 같이하고 협연한다면, 그래서 대한민국이 평화의 주축이 될 수 있다면 종국엔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무기를 재료로 재탄생된 파이프오르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이 있을 것이다. ‘건반 위의 평화’는 그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15) 오르간이란 프리즘 통해 하늘의 소리·색 전하고 싶어…
군 선교에 큰 뜻 품은 세 사람과 만나
연무대군인교회에 오르간 짓는 일 논의
세례받는 훈련병들 은혜와 감동 받기를
논산 육군훈련소 연무대군인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짓기로 한 관계자들이 지난 3월 27일 연무대군인교회에서 시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홍상표 목사, 구재서 장로, 김용호 김준성 목사,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
또 하나의 꿈은 논산 육군훈련소 안에 있는 연무대군인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짓는 일이다. 나는 이전까지 군선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우연히 군선교에 뜻을 품고 기도하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됐다. 김준성 과학원(KAIST)교회 목사님과 홍상표 겨자씨교회 목사님, 그리고 전 육군훈련소장인 구재서 장로님이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계기로 연무대군인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짓는 일을 꿈꾸다 만났다. 김 목사님은 28년 전 강원도 철원에서 군목으로 근무하셨다. 그는 파이프오르간과 어떤 인연도 없었지만, 군대를 떠나면서 뜬금없이 “하나님, 제가 언젠가는 군인 청년들을 위해 파이프오르간을 헌신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후로 늘 그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홍 목사님은 부대로 둘러싸인 동네에서 자란 환경 탓에 어린 시절 군대 안의 교회를 다니며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그 영향인지 군선교에 비전을 품은 목사님은 매주 2000여명분의 와플을 만들어 육군훈련소를 찾는다. 덕분에 ‘와플 목사’란 별명도 생겼다. 군선교를 하면서 홍 목사님은 군인들에게 영성 가득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됐다.
구 장로님은 2018년 연무대군인교회가 새 예배당을 봉헌할 때 육군훈련소장이었다. 원래는 그 전해에 임기가 끝나 훈련소를 나와야 했지만, 교회를 짓는 일을 마무리하라는 뜻에서 국방부가 1년 연임을 결정했다. 군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이 서로 연결돼 지난해 처음 만나 각자 막연하게 꿈꿔 왔던 연무대군인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짓는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만남과 기도를 이어 오다가 지난 3월 처음으로 함께 연무대군인교회를 찾았다. 군 교회 담임인 군목 김영호 목사님은 처음엔 “우리 연무대교회에서 이뤄지는 예배형식에 오르간이 어떻게 쓰이면 좋을지 모르겠다”며 잠시 침묵하셨다. 그러다 다음과 같은 얘기를 조심스레 건넸다.
“이곳에서 세례를 받는 훈련병들이 1년에 6만명 정도입니다. 세례는 우리 연무대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룩한 예식에 파이프오르간의 웅장한 소리가 예배당 가득히 울려 퍼진다면 그 은혜와 감격이 한층 더할 것 같네요.”
그 순간 교회를 찾아간 네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곳에 파이프오르간을 지어야 하는 이유의 답을 찾은 것이다. 프리즘을 통해 빛의 색깔을 알 수 있듯이 청년들이 세례를 받을 때 오르간이란 프리즘을 통해 하늘의 소리 색깔을 맛볼 수 있다면 그 은혜와 감동은 더해질 것이다. 우리는 더 확고한 사명감을 안고 돌아왔다.
연무대군인교회는 60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교회다. 비용 홍보 등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말씀하셨다. 이전에 세워진 파이프오르간도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씩 완성해왔다. 각자 주어진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저 지켜볼 뿐이다.
***[역경의 열매] 홍성훈 (16·끝) 남은 인생, 하나님 찬양하는 악기 만드는 일에 헌신
여러 분야 예술가들의 도움과 기도로
‘파이프오르간의 한국화’ 장족의 발전
제작소 문제 등 가시밭길… 주께 의지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2015년 3월 문화서울역사284(옛 서울역사) 중앙홀에서 열린 홍매화오르겔 제작 기념 콘서트에서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홍매화오르겔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홍매화오르겔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만들어진 그의 14번째 작품이다.
최근 처음 뵌 한 목사님이 내게 뜬금없이 “홍 선생님이 선교사라는 걸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저는 선교사는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의 일 자체가 선교가 되도록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 내게 말씀하셨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국내에서 유일한 파이프오르간 제작가란 이유로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성과도 없진 않았다. 잘한 부분이 드러나서 세상에 드러나는 게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역경의 열매’를 통해 그동안 이뤄낸 것보다는 그 과정에서 겪은 굴곡진 삶, 그리고 이를 해결하고 그 길을 인도해 가신 하나님을 말하고 싶었다.
지난 20년 동안 파이프오르간의 한국화는 현재 30~40%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유럽의 파이프오르간 역사에 비춰볼 때 엄청난 속도다.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었을 여정이었다. ‘홍매화오르겔’과 ‘나비오르겔’에 매화와 나비를 그려 넣은 한국채화 작가 안명희 선생, 경첩을 제작한 장석 기능전수자 양현승 선생, ‘블루오르겔’의 칠보 작업을 맡았던 ‘금하칠보’의 박수경 작가 등 한국적인 파이프오르간을 만드는 일에 예술가들이 자기 일처럼 온 힘을 보탰다. 또 부족한 남편의 가장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 준 아내, 그리고 중보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신 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길은 여전히 험난하기만 하다. 당장 제작소부터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양평의 제작소를 빌려주고 계신 장로님께서 선교의 뜻을 품고 큰 결단을 해주셨기에 그동안 우여곡절 가운데 감사히 사용할 수 있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제작소 용지를 팔아야 하게 된 것이다.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오롯이 제작이란 본연의 목적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제작소 문제란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파이프오르간이 한국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문화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기에 더욱 갈급한 심정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강권적으로 시키셔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제작소 부지 문제로 여기서 멈추게 되는 것일까.
새벽마다 다시 엎드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구한다. 이제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분명히 이 일 또한 인도해 주시리라 믿는다. 지금은 세상의 온갖 타락의 소리로 무너지는 한국교회를 되살리고, 주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늘의 소리인 파이프오르간이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나의 남은 인생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를 만드는 일에 계속해서 헌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낙망치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분의 능하신 오른팔에 의지해 선하신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