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약점 / 박선애
소리 재를 넘으면 아름다운 우리 동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른 살쯤에 만난, 진도로 살러 온 지 얼마 안 된 어떤 분은 내가 향동에서 산다고 했더니, “어머, 그 예쁜 마을, 나는 그곳을 보자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어요.”라고 했다. 그저 내 고향이니 좋았는데, 이 말을 듣고서는 훨씬 멋져 보였다. 계절의 변화를 잘 알려 주는 뒷산은 지금 온통 초록이다. 크고 높은 산 아래 빨강, 파랑 산뜻한 지붕과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있는 나무가 어우러진 마을은 아직까지 제법 규모도 크고 아늑하다. 모내기가 시작된 마을 앞 논은 대부분 물을 채워 모심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모르는 사람들이 길갓집 시멘트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가늘고 드문 빗방울이 떨어진다. 맑은 날에 할 것이지, 더 큰비가 내려 씻길까 걱정된다. 하늘색을 칠한 벽이 왠지 주변과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해서 왜 저런 걸 하는지 못마땅하다.
오늘은 아버지 기일이라 가족들이 모였다. 4년이라는 시간의 힘 덕분에 슬픔은 희미해지고 가족과 함께하는 기쁨이 크다. 사촌 언니는 쑥이 가장 연하고 맛있을 때 캐서 준비해 두었다가 찹쌀과 함께 내 제자가 하는 방앗간에 맡겨 놓았다고 했다. 오후에, 이제는 40대 중반이 된 그 아이도 볼 겸 떡을 찾으러 갔다. 나가면서 보니 아까 칠한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학교 갔다 오는 아이, 친구들과 모여서 노는 아이, 그 옆에서 동생을 업고 구경하는 아이 등 이제는 동네에서 만날 수 없는 아이들이 거기에 있다. 비어 있는 용석이네 집 벽에는 외양간의 어미 소와 송아지를 살려 놓았다. 미애네 문간 옆으로는 정성 들여 닦아 놓은 반짝이는 항아리가 늘어선 장독대가 생겼다. 나야네 벽은 수국꽃밭으로 변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추억을 살려 주는 그림을 보자 마음이 따뜻해져서 차를 세우고 잘 그린다고 인사를 했다.
제자는 다니던 건설 회사를 그만두고 기술을 익혀서 떡집을 한다. 제대로 배운 데다 신식 기계를 들여놓아 값은 비싸도 맛있게 한다고 소문났다. 짙은 초록색에 노르스름한 콩고물을 묻힌 쑥인절미는 향긋하고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 한입에 쏙 들어가게 자른 떡은 자꾸 손이 간다. 동생이 벽화 그리는 사람들 좀 갖다 줘야겠다고 떡과 과일을 챙긴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동생과 함께 음식을 싸면서 아버지라면 이 사람들을 이미 집에 데려와서 먹였을 거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아버지가 우리 마을에 낯선 이가 와서 일하는 것을 봤으면 궁금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초면이지만 어디서 왔는지, 성은 무엇인지, 어떻게 배워서 이렇게 잘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그러면 애들은 몇인지, 부모님은 살아 계신지 등 자꾸 물었을 것이다. 그러다 공통점이라도 찾으면 예를 들어 박 씨라고 하면 족보 따져 일가를 찾고, 고향을 말하면 그곳의 인맥을 동원해 한 다리 걸쳐 아는 사이로 만들 것이다. 특히 오늘처럼 집에 먹을거리가 있으면 아무 관계를 찾지 못해도 억지로 끌고라도 왔을 것이다. 우리는 혹시 차가운 사람 만나 모욕이라도 당할까 봐 요즘 젊은이들은 낯선 사람이 말 붙이는 것도 싫어한다고, 거기에 어머니는 내놓을 것도 없는데 갑자기 손님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냐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심지어는 신비의 바닷길을 보러 온 일본인을 데려와 재워 준 적도 있었다. 그는 돌아가서 가족사진과 함께 감사 편지를 보냈다.
우리 마을에는 군청에서 지정한 귀농인의 집이 있었다. 6개월 동안 연습 삼아 살아 보도록 거처를 마련해 주는 제도인 것 같았다. 몇 사람이 거쳐 갔는데 이들에게도 자청해서 안내자 역할을 했다. 노년에 심심했던 아버지에게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강 집사님은 교회 옆에 밭을 사서 집을 짓고 우리 동네 사람이 되었다. 말만 듣던 그를 아버지 병원에 계실 때 처음 봤다. 광주까지 병문안 와서 아버지를 따뜻이 위로하는 것이 고마웠다. 장례 때도 여러 차례 예배에 참석하고 끝까지 같이했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시골 어른답지 않게 말이 통하던 자신에게 좋은 친구였다고 했다. 6개월 동안 날마다 만나다시피 하며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니,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는 당신 나름대로 세상일에 밝고, 적극적이라 앞장서서 이끄는 걸 좋아하셨다. 꼼꼼하게 계획하고 계산해서 정확하게 하기보다는 시작하면 다 해결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거침없이 도전하는 성격이었는데 이것만은 도저히 안 된다고 미리 손을 든 것이 있다. 바로 노래다. 모임에서 여행을 갔다 오면 노래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것을 탓했다. 넘어서지 못한 아버지의 약점이었다.
인정이 많아 돌보고 나눠 주는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동생은 노래 못 부르는 것도 물려받았나 보다. 동생이 고등학생이던 어느 명절이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 마을은 같은 학년만 30~40명쯤 되어 애들이 골목골목마다 넘쳐나던 때였다. 어머니가 밤에 골목길을 가고 있는데, 저만치서 몇 명이 떼 지어 노래를 부르며 오더란다. 가까이 보니 당신 아들과 친구들인데, 아들 목소리만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어찌나 도드라지게 꽥꽥거리던지 혹시 어머니를 보고 민망할까 봐 숨었다고 했다. 살짝 내게만 해 주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비웃은 나는 잘하느냐면 그건 아니다. 그나마 학교 다닐 때는 배운 대로 착실히 불러 실기 시험에서 중상쯤의 점수를 받는 수준으로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직장에 들어가니 회식을 하면 식당에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방이 생기면서는 회식 후 2차 노래방까지 의무적으로 가야 할 때가 있었다. 여기서는 노래 잘하는 사람이 제일 돋보인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부르려고 하면 떨리고 소리도 제대로 안 나온다. 내 친구는 노래를 못하니 춤추겠다고 해서 흥을 살리기도 하는데 나는 춤은 더 못 춰 분위기 깨기 딱 좋다. 못 본 척하고 놓아두면 좋겠는데 억지로 끌어들여 노래를 시키면 당혹스러웠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음주가무를 나는 무서워한다. 아버지를 닮아 나도 노래 잘하는 사람이 부럽다.
첫댓글 하하. 그래도 저는 음주가무 중 한 가지는 되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세 시간쯤은 부를 수 있는 방대한 양의 노래 보유자랍니다. 부럽죠?
멋진 아버지를 두신 선생님이 부럽습니다.
두고두고 그리운 이름이 되셨으니까요.
다행 정도가 아니라 큰 재산을 가진 거지요.
저는 세 시간쯤은 거뜬히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들려 주시죠.
선생님 글 좋아합니다. 아빠가 보고싶은 아침이예요.
제 글을 좋아한다니 속 없이 기쁘네요. 고맙습니다.
글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우리 아부지와 같으시네요. 족보! 사돈네 팔촌, 그 위까지 훌투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의 아버지들은 다 비슷할까요?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향동'이라는 마을 저도 아는 곳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저에게도 이야기가 많은 곳입니다, 그 곳이 진도라면. 마을처럼 정겹고 따뜻한 아버지의 딸이시군요. 잘 읽었습니다.
네, 선생님께서 아시는 그곳입니다. 큰 은행나무, 운동장 가에는 고목이 된 벚나무가 있었지요.
우리 친정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다장 전화 해야겠어요. 어쩜 똑 같으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노래 잘 하십니다.하하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마을이 상상됩니다. 아름다운 곳이네요.
네, 전화 받으실 때 하세요. 노래도 들어 드리고요. 고맙습니다.
향동댁, 박선애 선생님 고향이 진도였군요?
영락없이 우리 아버지네 생각하며 글 읽었어요..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예체능은 더욱더 타고나는 분야인 것 같습니다.
네, 제 고향은 진도랍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저도 고향을 진짜 좋아합니다.
언제나 정성스럽게 답글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전여전, 예쁜 고향만큼 멋진 사람.
전 음주가무 중에서 무가 가능합니다.하하!
오우, 우린 환상의 동갑내기 짝꿍!
하하하하하하하.
@이팝나무 뭉쳐야죠. 하하하!
@조미숙 그럽시다. 음주가무 다 안 되는 제가 돈 낼게요.
@박선애 그래도 술값이 안 드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날 잡읍시다.
동갑내기 3총사가요.
아버지가 그려지게 잘 쓰셨네요. 아침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