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이름들, 그러나 홀리클럽은
梁萬命 隨筆
이름(名稱)은 처음부터 約束이었다.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그 存在를 認定하겠다는 뜻이고,
그 이름을 使用하겠다는 것은
그 이름에 담긴 責任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告白이다.
그래서 이름은 輕하지 않다.
부르는 쪽도, 불리는 쪽도
서로에게 負債를 지는 行爲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름을 빚이 아니라 道具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켜야 할 約束이 아니라
必要할 때 꺼내 쓰는 包裝紙가 되었다.
民主黨에는 民主가 없고
正義黨에는 正義가 없고
國民의힘에는 國民의 힘이 없다는 말이
諷刺처럼, 때로는 笑話처럼
消費되는 社會가 되었다.
웃고 넘기지만
그 웃음의 底邊에는
期待하지 않게 된 마음,
속지 않기 위해
아예 믿지 않기로 한 體念이 깔려 있다.
이름이 信賴를 잃으면
사람들은 冷笑를 배운다.
冷笑는 批判처럼 보이지만
實은 放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이
反復될수록
世上은 조금씩
責任지지 않아도 되는 곳이 된다.
政治는 늘 國民을 말한다.
그러나 國民은
選擧철에만 登場하는 單語가 아니다.
病院 待機室에서,
廢業 整理 看板 앞에서,
月末 通帳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는 얼굴들,
그들이 바로 國民이다.
그 얼굴을 외면한 채
國民을 말하는 순간,
그 이름은 스스로를 否定한다.
正義도 마찬가지다.
正義는 口號가 아니라
不便을 甘受하는 選擇이다.
自己 편을 向해서도
같은 尺度를 들이대는 勇氣,
損害를 보더라도
선을 넘지 않겠다는 決斷,
그것이 빠진 正義는
이름만 남은 裝飾品에 不過하다.
民主는 더 어렵다.
民主는 多數의 힘이 아니라
少數의 聲音을 끝까지 듣는 忍耐다.
節次를 지켰다는 말로
사람의 마음을 짓밟아도 되는 權利는
어디에도 없다.
民主가 暴力이 되는 순간,
그 이름은 自己背反에 이른다.
이름과 實體가 어긋나는 現象은
政治만의 問題가 아니다.
家庭에서도, 敎會에서도,
우리 個人의 삶에서도
같은 일이 繰返된다.
父母라는 이름 아래
아이의 마음을 듣지 않고,
指導者라는 이름 아래
責任을 미루며,
信仰人이라는 이름 아래
愛 대신 判斷을 選擇한다.
우리는 이름을 가졌다는 理由로
이미 役割을 다 했다고 錯覺한다.
聖經은 이 錯覺을
가장 正直하게 깨뜨린다.
“너희가 나를 主여 主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은
行하지 아니하느냐.”
이 말씀은
이름과 삶의 間隙을
正面으로 겨눈 問答다.
하나님은 이름을 바꾸실 때
먼저 삶을 흔드셨다.
아브라함은 떠났고,
모세는 돌아섰으며,
베드로는 울었다.
破碎 없는 새 이름은 없었고,
淚目 없는 名稱의 變更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부서지지 않고도
좋은 이름을 원한다.
變化 없이도
尊重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름은 점점 增加하고
삶은 점점 輕薄해진다.
이상한 이름들이 氾濫하는 이 時代에
나는 하나의 작은 夢을 품어 본다.
예성 홀리클럽 送年會가
이름만 거룩한 자리가 아니라,
말로만 聖潔을 말하는 모임이 아니라,
實際로 聖潔을 살아내려 애쓰는
聖潔之士들의 모임이 되기를 말이다.
겉으로는 笑顔로 挨拶하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牽制하는 자리가 아니라,
職分과 年輪을 앞세우는 자리가 아니라,
自己 成就를 證明하는 시간이 아니라,
각자의 지난 一年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나는 아직 不足합니다”라고
告白할 수 있는 자리이기를 바란다.
聖潔은 口號가 아니다.
每日의 鬪爭이고,
一番의 決心이 아니라
平生의 方向이다.
그래서 聖潔한 사람들은
서로를 判斷하기보다
서로를 붙들어 준다.
定罪보다 悔改가 많고,
誇示보다 淚가 먼저 흐른다.
예성 홀리클럽이
이름처럼 거룩해지기를,
聖潔이라는 單語가
徽章이나 名牌가 아니라
삶의 痕跡으로 남기를,
送年會를 마치고 돌아간 자리에서도
조금 더 愼重하고,
조금 더 愛하고,
조금 더 하나님 앞에
正直해지는 사람들이 되기를 꿈꾼다.
이상한 이름들이 넘쳐나는 時代 속에서
이 모임만큼은
이름과 삶이 어긋나지 않는
稀有한 證據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職銜도, 看板도 아니다.
사람들의 記憶 속에
그 이름이
어떤 삶으로 남았는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 問題 앞에 선다.
나는 지금
내 이름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