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와집(凝窩集) 이원조(李源祚)생년1792년(정조 16)몰년1871년(고종 8)자주현(周賢)호응와(凝窩), 취송(鷲松), 나고(懶高), 호우(毫宇), 만귀산인(晩歸山人)본관성산(星山)초명영조(永祚)시호정헌(定憲)특기사항조승수(趙承洙), 정종로(鄭宗魯)의 문인. 유정문(柳鼎文), 유치명(柳致明) 등과 교유
凝窩先生文集卷之三 / 詩 / 發三院 玄風尼陽,靈山道山,宜寧嵋淵。 行。
三院燒香計日程。出門天氣喜新晴。道東樓下秋江碧。率禮祠前夕照明。鷲城曾有故人約。鹿塾多慚洞主名。最是嵋淵遺像在。白雲長係後人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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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響山集) 이만도(李晩燾)생년1842년(헌종 8)몰년1910년(순종 4)자관필(觀必)호향산(響山), 직재(直齋), 모암(某巖)본관진성(眞城)특기사항권승하(權承夏), 권연하(權璉夏)의 문인. 김흥락(金興洛), 유필영(柳必永), 유기호(柳基鎬), 곽종석(郭鍾錫) 등과 교유
響山文集別集卷之二 / 書 / 答李子剛 泰植○乙巳
고종 | 42 | 1905 | 을사 | 光武 | 9 | 64 | 1월, 「朱書節要」 중간본을 교정하다. ○ 4월, 平海 온천에 가다. 白巖山의 騎牛子 李行의 옛터를 방문하고, 龜尾津의 白巖 金濟의 祭壇에 참배하다. ○ 11월, 〈請斬五賊疏〉를 올리다. |
前者屢致書問。一未修復。今又因許戚來。疊承委惠。感悚可言。仍審霜令。侍履冲裕。觀翫之工。似不被妨奪而益有慥慥之意。仰慰區區。燾年來遭値。非衰下所堪。五官失守。百骸不束。些少繙閱。猶無以接續。他何足更云耶。
德谷,嵋淵皆已落成。
斯文之幸。而顧此跧蟄。雖欲往從之遊。勢不得也。所問諸條。非愚陋所能明言。若又如前闕沒。非托契交修之道。別幅仰控。初無實得者。必不中理矣。
향산집 별집 제2권 / 서(書) / 이자강 태식 에게 답하다 을사년(1905, 광무9)〔答李子剛 泰植 乙巳〕
앞서 누차 보내온 편지에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못하였는데, 지금 또 허척(許戚)이 찾아온 편에 거듭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았으니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말로 할 수 있겠는가. 편지를 받고 만추에 부모님을 모시는 체후가 넉넉하고, 학문에 침잠하는 공부가 방해를 받지 않아 더더욱 독실하게 매진하고 있다는 뜻을 알았으니 못난 이 몸이 몹시 위안이 되네.
만도는 근년에 만난 일은 노쇠한 몸으로 감당키 어려운 것이라 오관(五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잃고 온몸의 뼈마디가 풀어져 잠깐 책을 보는 것마저도 계속할 수가 없으니, 다른 것이야 더 이상 말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덕곡서원(德谷書院)과 미연서원(嵋淵書院)은 모두 이미 낙성하였다니, 사문(斯文)의 다행일세. 그러나 숨어 사는 이 몸은 한번 가고 싶지만 형편상 그럴 수가 없네. 물어 오신 여러 조목은 어리석은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다만 또 이전처럼 마냥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함께 사귀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도리가 아니기에 별폭에다 내 견해를 적어 놓았네. 하지만 애초에 실제로 체득한 것이 없기에 꼭 이치에 맞지는 않을 걸세.
[주-D001] 이자강(李子剛) : 이태식(李泰植, 1875~1951)으로, 자강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수산(壽山)이다. 의령군 오방(五方)에 살았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이용(李容)의 후손으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1919년 파리 장서에 서명하여 옥고를 겪었고,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주도한 독립운동에 군자금을 후원하였다.[주-D002]
덕곡서원(德谷書院) : 1656년(효종7)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있던 윤순거(尹舜擧)가 퇴계의 처가가 의령이고 또 이곳에 퇴계가 머물렀던 까닭에 서원을 세워 추모하였다. 1660년(현종1)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69년(고종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그러다가 이 편지를 쓴 1902년(광무6)에 지역 유림들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다. 경남 의령군 의령읍 하리에 있으며, 경남문화재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주-D003]
미연서원(嵋淵書院) :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중촌리에 있다. 중촌리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병자호란에 피난을 온 지역이고, 미연서원은 허목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825년(순조25)에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 1901년(광무5)에 이의정(二宜亭)과 영당(影堂)을 지었다. 1905년에 《기언(記言)》이 간행되었고, 그 책판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규필 (역)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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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의령 덕곡서원 (宜寧 德谷書院)
지정(등록)일 1985.11.07
소 재 지 경남 의령군 의령읍 벽화로 629-12 (하리)
문화재 설명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이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백운동서원을 ‘소수’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퇴계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여 퇴계 학파를 형성해왔고, 일본 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덕곡서원은 효종 5년(1654)에 세웠고, 현종 원년(1660) 나라에서 ‘덕곡’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하지만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목조건물 전부가 철거되었다. 그 후 고종 39년(1902) 유림들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고, 다시 1992년 사우각을 다시 지었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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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의령 미연서원 (宜寧 嵋淵書院)
지정(등록)일 2014.09.25
소 재 지 경상남도 의령군 모의로 323 (대의면)
문화재 설명
미연서원은 미수 허목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1825년 창건, 1901년 재건되었으며 정면5칸, 측면 전후퇴가 있는 1칸, 5량가 팔작지붕으로 연대가 비교적 오래되어 지정문화재로서 고찰 의미가 있고, 전통법식을 충실히 따른 건물로서 재목 및 치목 등이 우수하며 창호 등이 건립 당시 모습으로 잘 보존되어 서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