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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昌寧)
관산서원(冠山書院) 갑오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연암향현사(燕巖鄕賢祠) 갑오년에 세웠다. : 이장곤(李長坤) 기묘(己卯)의 명현(名賢) ㆍ성안의(成安義) 호는 부용당(芙蓉堂), 승지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ㆍ이승언(李承彦) 벼슬은 참군(參軍),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물계(勿溪) 세덕사(世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성송국(成松國) 고려 시중(侍中)이다. ㆍ성삼문(成三問)ㆍ성제원(成悌元)ㆍ성담수(成聃壽) 호는 문두(文斗)이다. ㆍ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성운(成運)ㆍ성혼(成渾)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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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21년 정사(1797)11월 20일(을유)
21-11-20[13] 서울과 지방의 유생 유익주(兪益柱) 등 1029인이 상소하여 고려(高麗) 시중(侍中) 성송국(成松國)을 모신 서원을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삼가 보건대, 우리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설립한 것이 거의 군읍(郡邑)에 부단히 이어졌으니 열성조(列聖朝)에서 권장하고 배양하는 은전(恩典)과 존숭하고 보답하는 거행이 참으로 지극합니다. 성상께서 즉위함에 이르러서는 현인을 높이고 절사(節士)를 드러내는 성대한 덕과 지극한 뜻이 뭇 임금보다 뛰어나시어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은전이 미쳤고, 비록 은미하더라도 반드시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한 가문에 훌륭한 이들이 계속 나와서 여덟 유현(儒賢)이 함께 배향된, 고려 시중 성송국의 신주(神主)를 모신 서원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조정에서 표창(表彰)하는 은전을 미루시니 사림(士林)들이 흠결로 여기는 마음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성송국의 효행록(孝行錄)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성송국은 창녕인(昌寧人)입니다. 아비가 중윤(中尹)으로 개성(開城)에 정조하(正朝賀)를 드리러 갔다가 경저(京邸)에서 죽자 성송국이 달려갔습니다. 영구(靈柩)를 싣고 돌아올 때 곡(哭)을 하며 통탄하면서 ‘자식이 되어 아버지가 병들었는데 알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죽을 때 보지도 못하였으니 내가 차라리 몸소 시신을 져서 지극한 한을 조금이라도 풀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들것〔轝〕을 물리치고 직접 졌습니다. 길을 떠난 지 십수 일 만에 창녕 경계에 다다랐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청산원(靑山院)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눈이 그쳐 다시 길에 오르려 할 때 호랑이 발자국이 영구 옆에 빙 둘러 나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는 없고 간 곳은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그 발자국을 따라 올라갔더니 서쪽으로 맥산(麥山)에 이르러 끊어졌습니다. 발자국이 끊어진 곳에 눈이 한 자리만 녹아 있는 것이 구덩이를 파 놓은 듯해서 여기에 장사 지냈는데 마침내 길조(吉兆)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늘이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전해지니, 얼마 안 되어 사적(仕籍)에 올라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 뒤 수백 년간 효자와 충신, 보필하는 신하와 순정(純正)한 선비가 끊임없이 배출되어 천년토록 윤리를 세우고 한 시대에 문치(文治)를 빛내서 성대히 성조(聖朝)의 명문가가 되었습니다. 숙묘(肅廟) 임진년(1712, 숙종38)에 많은 선비들이 발기하여 맥산(麥山)의 북쪽 물계(勿溪) 가에 속히 나아가 사당을 세우고 성송국을 제향하였습니다. 영묘(英廟) 기유년(1729, 영조5)에 사당을 서원으로 하고, 이어 7세손인 승지(承旨) 충문(忠文) 성삼문(成三問)과 참봉 성담수(成耼壽), 9세손인 문정(文貞) 성수침(成守琛)과 사섬시 정(司贍寺正) 성운(成運)과 현감 성제원(成悌元), 10세손인 현감 성윤해(成允諧)와 문간(文簡) 성혼(成渾)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당저(當宁) 정미년(1787, 정조11)에 또 성수침의 아우 증(贈) 직제학 성수종(成守琮)을 추가 배향하였고, 또 성송국의 현손(玄孫)인 고려의 직제학 성사제(成思齊)와 6세손인 도총관 성승(成勝)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이는 성삼문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만나 섬기는 분께 충성을 바친 것이 절개는 백이(伯夷)ㆍ숙제(叔齊)에 비견되고, 의로움은 방효유(方孝孺)와 경청(景淸)에 견줄 만하여 숙묘조와 영묘조에서 관작을 회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사당을 세워서 민절(愍節)이라는 편액(扁額)과 충문(忠文)이라는 시호(諡號)를 차례로 선사(宣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전하께서 연로(輦路)에서 감흥하여 제문(祭文)을 환하게 지어서 치제(致祭)하시고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어 충성스런 혼령을 배향하도록 하셨는데, 세상에 보기 드문 성대한 전례(典禮)를 다 거행하여 여한이 없습니다.
성담수는 성삼문의 재종제(再從弟)입니다. 그의 아비 교리 성희(成熺)가 계유정난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결국 형배(刑配)되고 난 뒤 죽을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아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등의 제현(諸賢)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숙묘조에 함안(咸安)에 서원을 세우고 서산(西山)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셨으며, 당저 임인년(1782)에 관질(官秩)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시어 은혜와 영광이 성삼문과 대략 같았습니다.
성수침은 일찍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 유학하여 그 정통(正統)을 얻었으며, 지극히 효성스러운 행실과 고고하게 은둔한 지조가 선정신 이황(李滉)이 지은 묘문(墓文)에서 칭송받았습니다. 열성조에서 여러 차례 증직하여 우의정에 이르렀고 후학들이 상서로운 별과 구름처럼 우러러보았으니, 이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수종은 지향이 바르고 식견이 고명하여 아비의 상에 시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 제사 지내는 일을 직접 맡아 하였습니다. 선정신 조광조가 당대의 선비들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성수종을 으뜸으로 삼았고, 좌찬성 김안국(金安國)이 그의 묘에 쓰기를 ‘절효(節孝)’라고 하였으니, 형 성수침과 함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아울러 제향되었습니다.
성운은 성수침의 종제(從弟)로 작록(爵祿)에 마음을 두지 않고 뜻을 고상하게 하여 고결한 풍모와 아름다운 지조가 완악한 자를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를 곧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선묘(宣廟)의 사제문(賜祭文)에 ‘겸손하여 스스로 은둔하였으니 뭇 선(善)이 모인 것이네.’라고 하고, 또 ‘백대 후에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볼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왕의 말씀이 참으로 위대합니다. 극진하게 찬미하고 은총을 베푸시어 또한 보은서원(報恩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성제원은 성담수의 종손(從孫)입니다. 막 15세가 되었을 때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외물에 유혹되는 뜻이 전혀 없었으며 정밀히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니, 주사(州司)가 그 효행을 아뢰고 조정에서 그 어짊을 천거하였습니다. 보은 현감(報恩縣監)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고 나서는 고을 사람들이 선정(善政)을 기술하여 책으로 만들어서 세상에 전하였으니, 또한 공주(公州)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성윤해는 성운의 조카로, 은거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기를 구하였고 그의 학문은 한결같이 힘써 행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선정신 이이(李珥)가 조정에 천거할 때의 말에 ‘일민(逸民)으로 재덕(才德)이 있는 자’라고 하여 매일 초치하는 명(命)이 이르렀으나 번번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니, 상주서원(尙州書院)에 배식(配食)되었습니다.
성혼은 성수침의 아들로, 그의 학문은 한결같이 고정(考亭 주희(朱熹))을 법으로 삼았습니다. 공부가 엄격하고 치밀하며 도덕이 순수하고 완비되어 전대의 성인을 잇고 후대의 학자를 깨우쳐 세상 선비들의 종주(宗主)가 되었습니다. 인조조(仁祖朝) 때 파산서원에 배식되었고 숙묘조 때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습니다.
성사제는 우리 조정이 명을 받아 개국하는 때를 만나 만수산(萬壽山)에 들어가 두(杜)로 이름을 짓고서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되 죽어도 고치지 않겠다고 맹세하니, 감화되어 따른 이들이 72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거처를 ‘두문동(杜門洞)’이라 불렀습니다. 영묘(英廟)께서 개성에 행행하셨을 때 제단을 만들어 치제(致祭)하시고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셨습니다. 당저(當宁) 계묘년(1783, 정조7)에 조(曺)ㆍ임(林)ㆍ맹(孟), 세 현인의 성명(姓名)이 드러남을 따라서 우선 특별히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제향을 올리게 하셨습니다. 근자에 수신(守臣)이 성사제를 표절사에 함께 올리기를 청하였는데 대신(大臣)이 헌의(獻議)하였을 때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성승은 아들 성삼문과 같은 날 순절(殉節)하여 부자의 이름이 해처럼 빛났습니다. 숙묘조에 그 관작을 회복해 주셨고 당저 신해년(1791)에 찬성으로 증직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셨으며, 이미 노은서원(魯恩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우리 성조(聖朝)에서 세교(世敎)를 북돋아 주고 도의(道義)를 장려하는 은전이 더없이 극진합니다.
지금 성송국이 살던 시대와의 거리가 500년 가까이 됩니다. 증명할 만한 문헌이 충분하지 않은 이상 그의 학문이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지와 도덕이 얼마나 완성되었는지는 참으로 억측하기 어렵습니다만, 믿을 수 있는 사적에 실린 내용을 근거로 효성에 감동한 바를 논하면 위에서 아뢴 것처럼 신천(神天)이 묵묵히 감응하여 증험이 밝게 드러났습니다. 다행히 우리 전하께서 효도로 다스리는 정치를 행하시는 때를 만나 팔도의 백성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마다 선하게 되고 있으니,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을 성송국의 이 효도야말로 추숭하는 은전으로 기려야 마땅하며, 더구나 한 가문에 훌륭한 이들이 모였고 아름다운 후손들이 배출된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 절의로 말한다면 저처럼 우뚝하게 성명(聖明)한 세상에서 빛나며, 그 도덕으로 말한다면 이처럼 찬란하게 사문(斯文)에 본보기가 되고 있는데, 이는 모두 효(孝)를 쌓고 인(仁)을 이룬 것으로 인하여 후대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당시의 인사(人士)들이 누구나 지닌 본성에 따라 전대의 현인을 앙모하는 성심이 우러나와서 서원을 설립하여 제사를 올렸으며, 조손(祖孫)을 함께 제향하고 뭇 현인들을 차례로 올려 배향한 지 이미 100년이 지났으니, 세상에 보기 드문 감회와 융숭히 보답하는 뜻에서 내리는 조정의 은전을 받아야 하는데 편액을 은혜롭게 내리시는 일이 지금까지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서원이 영남(嶺南)에 있어 스스로 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만, 선비들이 개탄하는 것과 세도(世道)에 흠이 되는 바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국초(國初)에 김극일(金克一)이 거상(居喪)에 지극히 효도하니 영남인들이 서원을 세워 제향을 드리고 손자인 정랑 김일손(金馹孫)과 정언 김대유(金大有)를 배향하였습니다. 현묘(顯廟) 신축년(1661, 현종2)에 특별히 자계(紫溪)라는 호칭을 하사하여 은총을 베푸셨는데, 성조(聖祖)의 작상(爵賞)을 무겁게 하고 은례(恩禮)를 간략히 하는 통치 법규로서도 오히려 지나치게 특이한 예우를 행한 것은 하나는 김극일의 효도 때문이고 또 하나는 두 손자의 현명함 때문이었습니다. 성송국을 김극일에 비교해 보면 김극일이 성조에서 이미 얻은 것을 성송국이 오늘날에 어찌 얻을 수 없겠습니까. 성송국과 김극일은 똑같이 효성스러웠으며, 현명한 후손은 김일손과 김대유보다 몇 배나 더 왕가(王家)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시는 효도와 본보기가 되시는 덕으로 현묘께서 이미 행하신 아름다운 법을 우러러 따르시고 미천한 신(臣)이 현인을 높이는 간절한 마음을 굽어 따르시어 영화로운 편액을 내려 주기를 청한 것을 속히 윤허하신다면 어찌 사림(士林)들만이 우러러볼 뿐이겠습니까. 참으로 성조의 거룩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청원은 사림들의 공통된 의론임을 알 수 있으나 편액을 내리는 것은 본래 수교(受敎)가 있고 금령이 장고(掌攷)에 공경히 실려 있다. 사적이 선대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기에 합당한 한두 사원(祠院)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감히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으니,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주-D001] 마침내 …… 졌습니다 : 성송국(成松國)이 아버지가 죽자 들것〔轝〕이나 말을 메운 수레〔驂〕로 영구를 옮기지 않고 나무로 지게를 만들어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 직접 받들어 졌다고 한다. 《雙溪遺稿 卷5 勿溪書院碑銘》[주-D002] 성삼문이 …… 것 : 1453년(단종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이후 단종(端宗)을 폐위하자, 성삼문(成三問)이 단종을 복위하려다 모의가 드러나 죽은 일을 가리킨다.[주-D003] 방효유(方孝孺)와 경청(景淸) : 명 혜제(明惠帝)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이다. 방효유는,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조카인 명 혜제의 황위를 찬탈한 뒤 그에게 조서(詔書)를 짓도록 하였는데, 명을 따르지 않고 저자에서 사지가 찢겨 죽었다. 경청은 연왕 주체가 황제가 되자 그를 죽이기 위해 품속에 칼을 감추고 조회를 하였다가 발각되어 사지가 찢겨 죽었다. 《明史 卷141 方孝孺ㆍ景淸列傳》[주-D004] 우리 …… 하셨는데 : 1791년(정조15) 2월 17일에 정조가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할 때 과천(果川) 민절사(愍節祠)를 지나다가 감회가 일어나 관원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21일에는 단종에게 절의를 바친 사람들을 합쳐서 하나의 사판(祠版)으로 만들고 장릉(莊陵)의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제단을 만들어서 매년 한식(寒食)에 함께 제사를 지내게 한 일이 있었다. 《日省錄 正祖 15年 2月 21日》[주-D005] 상주서원(尙州書院) : 원문은 ‘南州書院’인데, 《쌍계유고(雙溪遺稿)》 권5 〈물계서원비명(勿溪書院碑銘)〉과 《승정원일기》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南’을 ‘尙’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6] 영묘(英廟)께서 …… 기록하셨습니다 : 영조가 개성(開城)에 행차하였다가 두문동(杜門洞) 입구에 머물러 72인의 현인을 사제(賜祭)하고 어제(御製) 어필(御筆)로 두문동에 비석을 세운 일이 있었다. 《承政院日記 正祖 9年 11月 24日》[주-D007] 당저(當宁) …… 하셨습니다 : 1783년(정조7) 개성 유수 서유방(徐有防)이 상소함에 따라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모(孟某) 등을 사당을 세워 치제(致祭)하라고 분부한 바 있다. 《開城府 邑誌》 《承政院日記 正祖 7年 7月 26日》[주-D008] 근자에 …… 없었습니다 : 1797년 10월에 유생 유홍휴(柳鴻休) 등이 상언(上言)함에 따라 표절사(表節祠)에 성사제(成思齊)와 박문수(朴門壽) 두 사람을 추가 배향하는 일을 의논하여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였는데,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이견이 없다고 아뢰었다. 《承政院日記 正祖 21年 10月 4日, 23日》[주-D009] 증명할 …… 이상 : 원문은 ‘文獻豈不足徵’인데, 앞뒤의 문맥이 통하지 않아 《승정원일기》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豈’를 ‘旣’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강 :
京外儒生兪益柱等一千二十九人疏請高麗侍中 成松國書院賜額賜批
목
疏略曰竊伏觀我朝祠院之設殆乎郡邑相望列聖朝扶奬培植之典褒崇報施之擧猗歟摯矣逮至聖上臨御尙賢表節之盛德至意卓越百王無遠而必屆雖微而必擧獨此一門踵美八賢竝配之高麗侍中 成松國妥靈之院則尙稽朝家表揚之典豈勝士林欠缺之忱也哉臣等謹按松國孝行錄則松國是昌寧人也父爲中尹朝正于松京死于邸松國奔焉將載柩而返也哭而痛曰爲人子父病不知父歿不視吾寧躬負父屍小洩至恨遂屛輿負行至十數日抵昌寧界適天大雪止宿於靑山院曉而雪霽將復登程有虎迹匝于柩側無自來而有所去異而躡之西至麥山絕絕處雪消一席有若開壙於是葬焉遂爲吉兆至今傳以爲孝感未幾通仕籍官至侍中云其後數百年間孝子忠臣碩輔醇儒相繼輩出樹倫常於千秋賁文治於一代蔚爲聖朝之名家肅廟壬辰多士倡議亟就麥山之北勿溪之上建祠以享松國英廟己酉卽祠爲院仍以七世孫承旨 忠文三問 參奉 耼壽九世孫文貞守琛 司贍寺正運縣監 悌元十世孫縣監 允諧文簡渾配而侑之當宁丁未又以守琛之弟贈直提學 守琮追配焉又以松國之玄孫高麗直提學 思齊六世孫都總管勝追享焉蓋三問遭値靖難盡忠所事節媲夷齊義幷方景肅廟 英廟兩朝旣復其官又立其祠愍節之額忠文之諡長第宣賜且我殿下興感於輦路煥宸藻而酹之築壇於莊陵配忠靈而享之曠世之盛典畢擧而無餘憾矣耼壽 三問之再從弟也及其父校理 熺辭連靖難之獄竟至刑配而後不見天日以終其身與金時習 南孝溫諸人竝稱生六臣肅廟朝建院于咸安宣以西山之額當宁壬寅贈秩易名恩榮略同於三問矣守琛早遊先正臣趙光祖之門得其嫡傳至孝之行高蹈之操稱美於先正臣李滉所撰之墓文列聖朝屢贈至右議政後之學者仰之若景星 慶雲此乃據實也守琮趨向端正見識高明父喪廬墓三年躬執祭奠之具先正臣趙光祖每論當世士必以宗琮爲首左贊成 金安國題其墓曰節孝與兄守琛竝享于坡山書院運是守琛之從弟而不屑爵祿高尙其志淸風姱節能使頑廉而懦立宣廟賜祭之文有曰謙抑自藏衆善之集又曰百代之下人皆瞻仰大哉王言褒寵備至亦已享於報恩書院 悌元卽耼壽之從孫也纔成童有志聖賢之學絕意外誘精思力踐州司上其孝朝廷擧其賢宰報恩而旣歸邑人編敍善政爲之書而行于世亦配于公州忠賢之院允諧乃運之從子而隱居求志其學一於力行先正臣李珥薦于朝之言曰逸民之有才德者每朝命至輒閉門不出配食於南州書院渾以守琛之子其學一以考亭爲法功程嚴密道德純備繼前開後爲世儒宗仁祖朝配食于坡山肅廟朝從祀于聖廡思齊際我朝之受命入於萬壽山名子以杜杜門晦跡失死靡改感而相從者七十二人世號其居曰杜門洞 英廟幸松京設壇致祭立碑紀實當宁癸卯先從曺林孟三賢名姓之著聞特建表節祠而妥享近日守臣請以思齊竝躋表節祠而大臣獻議無異辭焉勝與子三問同日殉節父子之名與日爭光而肅廟復其爵當宁辛亥贈以贊成諡以忠肅業已享於魯恩之院我聖朝扶植世敎崇奬道義之典至矣盡矣今距松國之世幾五百載矣文獻豈不足徵則其學問之造詣道德之成立固難臆料淺深而若以信蹟之所載論其誠孝之所感神天默應符驗昭著如右所陳幸値我殿下孝理之治八域含生之類日遷善而不自知則惟此松國之孝閱百歲而不泯者亶合褒之以崇典而況乎精英鍾于一家休美毓於後嗣以言其節義則炳耀聖世如彼其卓然以言其道德則矜式斯文若此其炳然此莫非積孝成仁之餘慶所發也當時人士以秉彛同得之性起前代慕仰之誠設院而薦俎豆祖孫合享群賢列躋已乘百年之久宜蒙朝家曠感之典崇報之恩而美額之寵頒迄于今闕焉此殆由於院在嶺外無以自達而其爲衿紳之所慨惜世道之所欠闕容有極哉伏聞國初以金克一居喪至孝嶺人建院而享之以其孫正郞馹孫正言大有配之顯廟辛丑特賜紫溪號而寵之以聖祖重爵賞簡恩禮之治規猶侈異禮者一則爲克一之孝也一則爲兩孫之賢也以松國而方之於克一克一之所已得於聖祖者松國豈不得於今日也哉松國克一均是孝也而賢孫之儀於王家者不翅五六倍於馹孫大有則以我聖上繼述之孝儀式之德仰遵顯廟已行之美憲俯循微臣尊賢之至懇亟允華額之請則豈惟士林之聳瞻實爲聖朝之盛擧矣批以爾等之請可見士論之同然而宣額自有受敎禁令之敬載掌考除非事蹟之合於述志如一二祠院者不敢輕擧爾等退修學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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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 만력(萬曆) 병오년에 세웠고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유성룡(柳成龍)ㆍ정경세(鄭經世)
옥성서원(玉城書院) 숭정(崇禎) 임신년에 세웠다. : 김득배(金得培) 호는 난계(蘭溪), 고려 상락군(上洛君)이다. ㆍ신잠(申潛) 기묘년의 명현(名賢) ㆍ김범(金範) 명종 때의 유일(遺逸)이다. ㆍ이전(李㙉) 호는 월간(月澗)이며 현감을 지냈다. ㆍ이준(李埈) 전(琠)의 아우이다. 앞에 있다.
근암서원(近嵒書院) 을사년에 세웠다. : 홍언충(洪彦忠)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 ㆍ이덕형(李德馨)ㆍ김홍민(金弘敏) 호는 사담(沙潭), 전한(典翰)을 지냈다. 범(範)의 아들이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ㆍ홍여하(洪汝河) 호는 목재(木齋),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고종후(高從厚)의 외손이다.
속수서원(涑水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다. : 신우(申佑) 안렴사(按廉使)이다. ㆍ손중돈(孫仲暾) 좌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 ㆍ김우굉(金宇宏) 호는 개암(開巖), 부제학을 지냈다. ㆍ조정(趙靖) 자(字)는 안중(安仲), 호는 금간(黔澗),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백옥동영당(白玉洞影堂) 임진년의 병화(兵火)에 불타고 그 뒤 을해년에 중수했다. : 황희(黃喜)ㆍ전식(全湜) 호는 사서(沙西), 이조 참판을 지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ㆍ김충(金冲) 호는 서대(西臺)이다. ㆍ고인계(高仁繼) 호는 월봉(月峯), 벼슬은 사예(司藝)이다. ㆍ송량(宋亮) 호는 우곡(愚谷)이다.
봉산서원(鳳山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다. : 노수신(盧守愼)ㆍ심희수(沈喜壽) 선조 때의 정승 ㆍ
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연(連)의 조카이며 사부(師傅)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오류신고)
흥암서원(興巖書院) 임오년에 세우고 을유년에 어필(御筆)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俊吉)
충렬사(忠烈祠) 기축년에 세웠다. : 권길(權吉) 상주(尙州)의 판관(判官)이다 ㆍ김종무(金宗武) 찰방(察訪) ㆍ정기용(鄭起龍)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ㆍ박걸(朴傑) 호장(戶長)을 지냈고, 임진년에 권길과 함께 죽었다. 따로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한다.
연악서원(淵岳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박언성(朴彦誠) 호는 낙지정(樂志亭),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ㆍ김언건(金彦健) 호는 운정(芸亭), 감찰에 증직되었다. ㆍ강응철(康應哲) 호는 남계(南溪), 찰방이다.
화동서원(化東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운계서원(雲溪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신석번(申碩蕃) 호는 백원(白原), 장령(掌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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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卷四下 / 慶尙道 / 尙州牧 *〈磻溪先生年譜〉 1656년(孝宗7)
流寓
李敏道。元河間府人。順帝末避兵東來。以有功於國,封商山君,命以尙州爲貫籍。
趙云仡。高麗末,以典法摠郞辭職,來居露陰山下,自號石磵棲霞翁,佯狂自晦。出入必騎牛,著《騎牛圖贊》、《石磵歌》以見意。與慈恩寺僧宗林爲方外交,超然有世外之想。詳見楊州。
成允諧。本朝漢城人。隱居圓通山下。宣祖嘉其行義,累除王子師傅、泰仁縣監,皆不就。允諧德器渾厚,外坦夷而內方嚴。其季父運嘗曰:“允諧氣稟加人,晩年成就,非吾所及。”
學校
鄕校。在州南五里。有南樓。宣德初判牧曺致建。
道南書院。在州□□□洛江上。萬曆中州之士子建。有先賢祠,祀鄭夢周、金宏弼、鄭汝昌、李彦迪、李滉,以盧守愼配食。
靈川書院。在州□□□。萬曆中州士以申潛爲牧使,有興學之功,建書院,立祠祀之。
愚伏書院。在州西三十里。有溪山之勝,鄭經世築書室講學,扁曰愚伏堂。後人仍建書院,立祠祀經世。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卷四下 / 慶尙道 / 咸陽郡 *〈磻溪先生年譜〉 1656년(孝宗7)
學校
鄕校。在郡北。有昭昭堂。
灆溪書院。在郡東北十五里,灆溪之東。立祠祀鄭汝昌。
新溪書院。在郡東北十三里,灆溪之西。爲盧禛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