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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과 색(色)의 동일성 증명 - (심은섭시인·문학평론가)
선시의 대중화
무엇을 쓰든 간에 ‘쓴다’는 것은 잘 정리된 생각을 언어라는 수단으로 기록하는 일이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어휘는 판단과 그 판단의 요소인 개념, 그리고 판단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한 추론의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어떤 관념에 도달하기 위한 의식의 정신적 과정,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과 같은 따위의 정신 작용이다. 다른 말로는 사유(思惟), 사고(思考)라고 한다.
이런 ‘생각’의 어휘가 지닌 그 의미를 요약해 보면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대한 기억,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관심을 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예컨대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 시인이 관심이 있는 장르의 시를 쓰는 것, 즉 좋아하는 형식, 내용, 목적, 경향 등에 따라 쓰는 것은 시인의 취향으로써 여타 다른 글쓰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가령 지적인 시를 좋아하는 시인은 주지시를 쓰기 마련이고, 감정적인 시 쓰기를 좋아하는 시인은 주정시를 쓰게 된다. 또 문학은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인은 부조리한 사회문제와 잘못된 사회규범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인 참여시를 쓸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은 오직 문학에 종사해야 한다는 순수한 목적의식을 가진 시인은 순수한 시를 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인이 어떤 경향이나 목적 등의 시를 쓴다는 것은 그 시인의 시대정신과 자기 인식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여겨진다.
권현수 시인의 시 쓰기도 자기인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권 시인이 추구하는 선시(禪詩)와 관련하여, 여러 문예지에서 ‘선시’와 관련된 그의 시의식의 경향을 많이 다룬 것을 보기도 하고 들은 바도 있다. 이런 일들은 권현수 시인 자신이 쓴 선시에 대해 여러 비평가로부터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고, 또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그 만큼 평가를 받을 만한 시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방증이다. 앞글에서 언급한 권현수 시인이 쓴 선시에 매겨진 가치는 ‘선시’를 ‘일반 대중화’하는 데 앞장서 있다.
모두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시’는 선종의 선승들이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를 짤막한 율문으로 나타낸 시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선(禪)’과 ‘시(詩)의 만남이다. 그런데 권현수 시인은 사실 불가에서 수계 받아 불교로 귀의한 수행자는 아니다. 그런데도 권현수 시인이 선시를 쓰는 것은 선사상에 심취함으로써 시의식의 뿌리가 선(禪)에 닿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고격(高格)의 선시를 많이 창작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선시세계라는 영역의 시 쓰기에 천착하는 일도 곧 시인이 가지고 있는 불교의식과 밀접한 연관성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선시 쓰기에 천착하는 권현수 시인의 선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이점이 발견된다. 그 특이점은 세 개의 영역으로 집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어(禪語)의 절제와 응축
권현수 시인이 2021년에 상재한 시집 『시간을 넘어 여기가 거기』(시와세계, 2021)의 ‘시인의 말’에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또 ‘시작이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이어서, 어디서 오지도 않고, 어디로 가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같이 짧은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언어의 절제와 응축, 그리고 상징을 통해 권현수 시인은 자신의 시사상과 철학, 그리고 정신적 깊이를 표출하는 결정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시는 응축의 문학이다. 또한 배설의 문학이며, 여백의 문학이다. 특히 권현수 시인은 짧은 단시(短詩)임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의 긴 여운을 남기는 임펙트 요법이 기대 그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일들을 다음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버린 하루를
공차기 하는 너
지나가는 바람결에
마른 대이파리 흩날린다
5월인데.
- 「어느 날」 전문
시는 문학적인 형식으로서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 중의 하나가 형식이나 내용을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어(詩語)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로 지목되는 것은 함축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것도 일반적인 시론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시의 형식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특별한 경우이지만 형식이든 내용이든 함축이나 압축을 조건으로 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권현수 시인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응축과 함축을 기본 전제로 삼는 선시로 시의 가치를 몸소 입증하고 있다.
선시는 깨달음을 갖게 하는 목적을 가진다. 큰 깨달음이든 작은 깨달음이든 그 어떤 것도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그 깨달음은 외부에 의해 깨달음을 가져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성으로 얻어낸 성찰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선시를 읽고 자신의 자각으로 얻어낸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시작품 속에 육화시켜 놓은 시인의 의도를 스스로 탐구하여 얻어내는 깨우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선시를 읽으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시를 읽는다고 깨달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압축했거나 함축된 시어나 시행 속에 시인이 숨겨놓은 의미를 독자 스스로 파악할 때만이 가능하다. 응축이나 압축되지 않은 시, 다시 말해서 설명 형식의 시는 큰 깨달음을 주지 못한다. 함축된 시행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독자가 애써 파악할 때 무릎을 '탁' 치며, “이런 내용이었구나.”라는 일순간에 엄습해 오는 순간적 깨달음이 운명까지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위의 「어느 날」에 숨겨진 의미 역시 필요한 그 이상의 욕망에서 벗어난 ‘비움’이다. ‘내가 버린 하루를/공차기하는 너’라는 것에서 ‘나’와 ‘너’는 등가의 개념이다. ‘내가 버린 하루’는 곧 내가 버린 욕망이고, 이처럼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버린 ‘나’의 욕망을 ‘너’는 그 욕망으로 공차기 놀이를 하고 있다. 내가 버린 욕망은 너에게도 무익한 욕망인 것으로 ‘나’는 ‘너’이고, ‘나의 비움’이 ‘너의 비움’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어느 날」에 나타난 ‘나’는 ‘너’이다. 그러므로 권현수 시인은 ‘너’와 ‘나’를 동일한 인물로 규정함으로써 ‘지나가는 바람결에/마른 대이파리 흩날’리는 ‘5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소꼬리 털로 만든 큰 붓으로
허기진 마음의 등짝에
점 하나를 찍으려 하였더니
기억 속의 어제는 쉰내가 나고
기대 속의 내일은 풋내가 나네
- 「점심點心」 일부
위의 시 「점심(點心)」에 나타난 ‘점심(點心)’은 일반인이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낮에 먹는 음식의 뜻이 아니다. 불교 선종의 선원에서 배고플 때 조금 먹는 음식을 말한다. 불가에서 사용되는 ‘점심’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시 「점심(點心)」을 살펴보면 시어나 시행이 함축적이고 응축된 문장으로 구성된 시이다. 일반적으로 선문선답의 형식을 취하는 선시는 압축된 문장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권현수 시인의 「점심(點心)」도 일반적인 서정시보다 대체적으로 짧은 단시(短時)의 형태로 작시(作詩)한 이유이다. 이 시는 오히려 절제된 시어와 단문(單文)의 형식으로 직조되어 있어서, 더더욱 성찰과 반성이라는 주제를 전경화(foregrounding)하여, 미적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의 선시는 선(禪)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의 경지를 짤막한 율문으로 나타낸 시를 말한다. 따라서 선시는 짤막한 율문의 시다. 그래서 응축하고 함축적으로 쓴 「점심(點心)」을 우리가 선시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다.
선시로 규정하는 여러 기준이 있지만 유독 짧은 율문의 시(詩)만 선시로 분류하는 것은 아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요구하는 조건은 짤막한 율문의 시이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요구하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선시로 분류된다. 「점심(點心)」은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선시의 조건을 충족하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 응축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1행의 ‘큰 붓’이 상징하는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한다면 권현수 시인이 「점심(點心)」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가 무엇인지 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 편의 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외연적인 분석을 통해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포적인 분석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포적 분석으로 「점심(點心)을 살펴보면 첫 행의 ‘큰 붓’은 절대 욕망의 상징이다. 서정자아는 거대한 욕망으로 ‘허기진 마음의 등짝에/점 하나를 찍으려 했더니’ 오히려 ‘기억 속의 어제는 쉰내가 나고/기대 속의 내일은 풋내가 나네’라고 했다. ‘큰 붓’과 ‘쉰내/풋내’의 대조는 사뭇 떨쳐버리지 못하는 욕망의 굴레를 자성의 목소리로 비판의 근간으로 삼는다. 매우 가치가 있는 자기감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세계(대상)에 대해 이해와 교섭을 통해 해석하고, 무수한 느낌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그러한 느낌과 사유를 기저로 삼을 때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러한 시안(詩眼)의 깊이로 대상을 바라본다. 따라서 권현수 시인은 어떤 특별한 일이나 극적인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것에 의해 강한 통찰력과 직관의 섬광을 받아 시적 발상의 충경(忠敬)을 얻어내고 있다.
‘이뭣고!’
춘성스님 주장자 높이 들어
법상을 내려치시니
“멍멍멍멍멍”
댓돌 아래 놀란 강아지 소리
묻지 않는 질문이고
대답 없는 대답이다
만 가지 생각으로 어지러운
내 머리 위에 떨어지는 죽비소리다
“멍멍멍멍멍”
도봉산에서 멍멍經 소리를 듣는다.
- 「멍멍멍멍멍」 일부
시적 발상이 매우 참신한 「멍멍멍멍멍」이다. 또한 해학성과 골계미를 동시에 갖춘 시다. 그래서 쾌락적이며 교시적이다. 서정자아는 ‘길 없는 길을 따라/문 없는 문을 지나/망월사 설법전에 오’르는데 ‘길 없는 길’과 ‘문이 없는 문’을 따라가고 지나간다. 이런 일들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상황 전개이다. 짤막한 시행이지만 의미는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시시포스가 들어 올리던 거대한 바윗돌보다 무게가 있다.
이 시의 형식은 14행 3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멍멍멍멍멍”은 한 행이면서 2연 전체를 이룬다. “멍멍멍멍멍”은 묻지 않는 질문이고, 대답 없는 대답’이라고 애매성과 모호성을 드러낸 표현이다. 그 애매성과 모호성 속에서 독자들은 상상력으로 그 해답을 찾는다.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제각각 다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권현수 시인은 “멍멍멍멍멍”을 ‘멍멍經’으로 치환했다. 아무 사람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아니다. 고정관념을 두 동강이 내는 창의력이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하늘이 까맣다고 생각하면 까맣게 보이고, 청명한 하늘이라고 생각하면 청명한 하늘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멍멍멍멍멍」를 통해 분명하게 인지되는 것은 권현수 시인이 지니고 있는 불심(佛心)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시라는 점이다. “멍멍멍멍멍”을 ‘멍멍經’으로 들리는 것도 또한 깨달음이다. 이렇게 늘 성찰과 자성으로 깨닫는 삶을 영위해 온 권현수 시인의 귓전에 들리는 개 짖는 소리도 마땅히 불경(佛經)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영어사전에 세렌디피티(serendipity)란 단어가 있다. 이 뜻을 직역하면 무엇이든 우연히 잘 찾아내는 능력이라는 뜻과 운이 좋은 발견이라는 뜻도 있다. 덧붙여 말하면 우연한 상황, 우연한 발견 등으로 인해 생기는 뜻밖의 재미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뜻밖의 발견은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따라서 권현수 시인이 “멍멍멍멍멍”을 ‘멍멍經’으로 발견한 것, 그것은 세렌디피티는 질량을 알 수 없는 시인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심오한 불심(佛心)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불심이 언어예술이라는 선시를 창작해 낸 것이다.
돈오적(頓悟的) 사유방식
선시의 기원은 게송(偈誦)에서 비롯되었다. 게송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가타(gatha, 伽陀)의 음역인 게(偈)와 중국어 풍송(諷誦)의 송(誦)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로 운율의 형식을 갖춘 일종의 경전이다, 게송은 불교에서 붓다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한시 형식의 노래이다. 부연하면 게송은 불교 경전의 내용을 시의 형태로 되풀이 하여 설명한 것이다.
불경에서는 3가지의 문체로 분류한다. 첫째는 ‘장행(長行)’ 또는 ‘계경(契經)’이라 하여 경의 뜻을 풀어 쓰는 산문이다. 둘째는 ‘중송’ 또는 ‘응송(應頌)’이라 하여 경의 산문을 요약 서술하는 시가의 형태이다. 셋째는 ‘가타’ 또는 ‘게송’이라 하여 불경의 산문과는 관계없이 불교적 교리를 시가로 표현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게송이라 함은 둘째와 셋째의 중송과 가타를 함께 일컫는다. 이러한 명제를 놓고 볼 때 권현수 시인의 시는 게송과 같은 선시의 일종으로 선문선답(禪問禪答)의 형식을 갖춘 경전과 같은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어느 한 生에
나
풋감으로 떨어져
네 소매 자락 부여잡고
늘어진 적 있었네
투둑!
감꽃 떨어지는 소리.
- 「감물이 들다」 전문
예시한 권현수 시인의 「감물이 들다」는 2연 7행의 짧은 시작품으로 삶에서 얻은 깨달음을 읊은 오도송(悟道頌)이다. 그러나 짧은 율문의 시이지만 시인은 깨달음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배우고 있다. ‘어느 한 生에/나/풋감으로 떨어’는 깨달음이다. ‘나(인간)’에서 ‘풋감’으로 윤회된 것은 축생의 색계가 된 것이다. 축생은 불교의 윤회사상 중의 하나이다. 시인은 「감물이 들다」에서 ‘풋감’으로 윤회된 근원적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가 추구하는 본질은 불교적인 삶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적시한다. 그러므로 권현수 시인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또는 ‘인생이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시를 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단연코 개인의 탐욕으로, 시비나 다툼을 벌이기보다는 종교적인 자비와 사랑, 그리고 박애와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는 시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감물이 들다」는 시인 자신이 깨달은 바를 암묵적으로 드러낸 시다. 이처럼 시인은 선과 악, 성찰과 반성, 가난과 부, 봉사와 헌신 등과 같은 인간의 삶을 작품에 반영하기도 하고, 삶을 이탈한 자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혜안의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선시의 역할은 더할 나위도 없이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갈등을 증폭시킬 줄만 알고 그 갈등을 해소하는 조절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사회와 만연된 개인주의,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나 규범, 개인이 지닌 인성의 우물이 메말라가는 현실에서 인성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선시, 그렇게 필연적이며, 효용성의 선시를 쓰며, 갈등과 부조리로 상처투성인 이 사회를 치유하려는 역할의 선봉에 서있는 권현수 시인이다.
‘禪’이 추구하는 본질은 마음의 깨달음이다. 동시에 자아와 세계의 본질을 깊이 있게 탐구하기도 한다. 또한 풍부한 상상과 심도 있는 투시력을 발휘하여 깊고 미묘한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앞서 말한 명제에 대입하여 권현수 시인의 선시를 쓰는 행위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눈먼 저는 오늘도/대장경판 하나 머리에 이고/도량만 돌고 또’(「나는 일찍이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후반부) 도는 시인으로 규정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앞글에 인용된 「나는 일찍이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는 시의 제목에 권현수 시인의 시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즉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다. 다시 말하자면 불립문자의 뜻은 진리는 언어 문자를 초월해 있다는 것으로써 언어 문자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문자는 깨달음의 방편이나 수단일 뿐, 진리의 깨달음은 문자를 떠나 곧바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서 본성을 보는 일이다. 또 교외별전은 경전의 말씀 외에 따로 전함이 있다는 말로써 불법을 전해 줄 때 언어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전해 주는 것을 말한다.
또한 권현수 시인은 자신이 쓴 선시로 직지인심(直指人心)을 한다. 즉 선종의 교리를 직접적으로 연마하거나 계행(戒行)을 통해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시로 지도하여 불과(佛果)를 이루게 한다. 권현수 시인의 시 의식은 선시의 작품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시라는 작품 안에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감물이 들다」와 같은 선시로 본래 의도했던 면목을 찾으면서, 그런 선시의 시작(詩作)이 곧 성불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한 치 높이 자갈도
절벽이라고
아우성리치며 떨어지는
저 물소리
개울물 소리.
- 「백척간두」 전문
지금 「백척간두」를 바라보며 느낀 바는 ‘인연’의 의미를 함의한 대표적인 시라는 점이다. 「백척간두」 시의 제목이면서 시적 대상인 ‘백척간두’와 작품 속에 ‘시어로 사용된 ’자갈‘이라는 두 개의 단어, 즉 두 인연을 대조법으로 설명한 시이다. ‘인연’의 의미는 사람마다 주장하는 바가 분분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또는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을 말한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이 인(因)과 연(緣)의 화합에 의해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하는 설(說)이다. 더 나아가 시 「백척간두」는 불가(佛家)에서 중요시하는 ‘인연설(因緣說)’과 유관성이 매우 높은 시다.
인(因)이라는 것은 원인을 이루는 근본 동기를 말하며, 연(緣)이란 것은 인(因)을 도와 결과를 낳게 하는 작용이다. 가령 ‘이쑤시개는 키(身長)가 작다’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도 비교할 수 있는 키가 큰 전봇대가 있으므로 하여 ‘이쑤시개는 키가 작다’라는 결과가 성립되는 것이다. 또 선(善)은 악(惡)이 있으므로 하여 증명이 된다. ‘남자’라는 존재도 ‘여자’라는 비교 대상이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이 「백척간두」는 ‘자갈’이 작은 존재라고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백척간두’라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며, 반대로 ‘백척간두’가 크다는 것을 비교할 수 있는 ‘자갈’이 있으므로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설이다. 요컨대 인(因)·연(緣)·과(果) 세 개의 요소 가운데 과(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인(因)을 중시하는 주장이 인연설(因緣說)이고, 연(緣)을 중시한 입장이 연기설(緣起說)이다.
한 치의 높이밖에 되지 않는 자갈이 절벽이라고 말한다면, 절벽이라고 믿고 ‘아우성치며 떨어지는/저 물소리’는 무엇인가? 더한 것은 ‘저 물소리’는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도 아닌 ‘개울물소리’가 아닌가. 권현수 시인은 2연 5행 31자(字)로 쓴 「백척간두」의 단시(短詩)로 방하착(放下著)에 사로잡혀 오만방자한 우리들의 교만을 지적하기도 하고, 불가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인연설과 연기설을 전경화하고 있다. 인과 연이 결합하면 과(果)가 생산된다. 그러므로 권현수 시인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신이 아닌 우리들이 자기중심주의 세계로부터 탈피하여, 더불어 사는 세상에 육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백척간두」를 통해 강설하고 있다.
권현수 시인이 「백척간두」를 통해 우리들에게 인성의 폭을 높이거나 확장해 주는 것이 광의적 동양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연설이나 연기설뿐만이 아니다. 「백척간두」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설파했던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라는 어록 한 줄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기억을 먹고 자라
두려움의 강물로 떠내려가는
뗏목하나
강을 건너면 나
뗏목을 버리리라
너를 버리리라
강을 건너면.
- 「그때에」 전문
방하착(放下著)의 의미를 화두로 삼아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가 앞에서 논의했던 「백척간두」 뿐만이 아니다. 시 「그때에」도 「백척간두」와 같은 맥락의 시이다. 「그때에」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뜻은 목적을 이루었으면 그 수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강을 건너면 나/뗏목을 버리리라/너를 버리리라’라고 화자(persona)가 절대적인 방하착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방하(放下)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해탈하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집착을 일으키는 여러 인연을 놓아버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권현수 시인의 방하착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며, 또한 모든 소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때에」의 시작품에서 시인이 방하착을 개인이 실천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방하착의 대상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이해시킨다.
욕망은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욕망을 가진다고 해도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욕망을 실현할 능력을 갖추지 않고, 욕망을 갖는 일이 선행될 때 반드시 불행이 초래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런 불행을 사전에 예방이라도 하듯이 권현수 시인은 시인으로서 선시를 통해 무작정 욕망을 가지려는 사람들이나 그 욕망으로 인하여 불행해질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색(色)과 공(空)의 경계
권현수 시인에게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그의 사유는 끝도 시작도 없다. 시작이 없으므로 끝이 없다. 그는 인간의 삶은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전환되거나 변동하는 유기체로써 돌고 돈다는 윤회사상의 절대 숭배자로 비친다. 또 지나치게 윤회사상에 편승하거나 함몰되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권 시인은 선시를 통해 모든 인간은 언제라도 ‘A’에서 ‘B’로, 혹은 ‘B’에서 ‘A’나 ‘C’로 윤회될 가능성을 제시하며, 생전에 올바른 행실로 살아갈 것을 유도한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거친 없이 치닫기만 하는 현대인들에게 스스로 자성하게 하여 정신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권유하며, 긍정의 삶을 주도할 수 있는 행동으로 옮겨지도록 유도하는 넛지효과(nudge effect)의 마케팅을 하고 있다.
나 언젠가
나 없는 거기에 간다면
언젠가가 없는
언젠가 너머
거기에서 나, 너를 만나리라
나 언젠가
나없는 거기에 가면.
- 「기원」 전문
위의 예시로 삼은 「기원」이 의미하는 바는 가는 것과 오는 것에 대한 동일성의 증명이다. 다시 말해서 권현수 시인의 의도는 ‘간다’는 것과 ‘온다’는 두 개의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을 선문선답하는 자기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이 「기원」의 ‘간다’와 ‘온다’를 일반적인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살펴보면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권현수 시인의 처지에서 살펴보면 ‘간다’는 것은 ‘온다’는 것이고, ‘온다’는 것은 ‘간다’는 뜻이다. 즉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이 「기원」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세상은 무(無)의 세계이며, 공(空)의 세계라고 노래한 시이다. 권현수 시인의 이런 시의식은 유독 「기원」에서만 국한되어 나타난 것은 아니다. 다음의 「지금을 찾아서 2」에서도 ‘공’과 ‘색’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나의 ‘지금’은 여기에 있고
너의 ‘지금’은 거기, 안드로메다에 있어서
너와 나, 여기가 거기
250만년을 함께 하였구나
안드로메다를 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 「지금을 찾아서 2」 전문
예시한 「지금을 찾아서2」의 공간적 배경은 안드로메다 은하다. 이 안드로메다는 권현수 시인이 ‘안드로메다은하’를 줄인 말로 추정된다. 이것은 지구로부터 약 780 킬로파섹(250만 광년) 떨어져 있는 나선형 은하이다. 은하의 명칭은 은하가 보이는 별자리, 즉 안드로메다자리의 명칭을 따서 붙여졌다. 여기서 안드로메다자리는 그리스 신화의 안드로메다 공주의 이름을 따 붙여진 별자리이다. 권현수 시인이 「지금을 찾아서2」에서 의도하는 것은 안드로메다 은하와 지구는 동일한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은 물리적인 거리만 존재 뿐 ‘나(지구)의 지금은 여기에 있고, 너(안드로메다은하)의 지금은 거기’에 있다.
또 ‘나’와 ‘너’의 시간은 ‘지금’이고, ‘나’의 공간은 ‘여기’이고, ‘너’의 공간은 ‘거기’이다. 그런데 250만 광년 동안 ‘너와 나, 여기가 거기’로 존재해 왔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개의 공간은 각각 독립된 장소가 아니라 동일한 의미의 공간이다. ‘여기’의 공간은 시인이 현존하는 삶의 공간이고 ‘거기’의 공간은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후의 공간이다. 즉 권현수 시인의 시의식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윤회사상에 맞닿아 있다. 시인의 시적 사유는 생과 사를 동일한 공간으로 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시 의식이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고 주장하는 시가 바로 「지금을 찾아서 2」이다.
범어(梵語)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권현수 시인이 이원론적 사유를 거부하며, 일원론적 사유를 수용하는 시적 태도이고, 선과 악의 해체이고, 남(男)과 여(女)의 해체다.
몇몇 생生의 흔적을 따라 가노라면
그 길이 곧
그 길이다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여기다.
- 「수레바퀴를 따라」 후반부
결론적으로 권현수 시인의 시세계는 ‘무관계가 관계다’로 요약된다. 그의 시의식은 ‘무관계가 관계다’라는 것도 ‘있음’과 ‘없음’도 모두 인연으로 본다. 또한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다는 사유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인연으로 생겨난 것을 우리는 공하다(因緣小生法 我設卽是空)’고 말한다. 왜냐하면 중연(衆緣)이 갖추어지고 화합하면 물질(色)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물질은 중인연(衆因緣)에 속하므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공도 또한 공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있음’이라든가 ‘없음’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고, 유/무, 양변(兩邊)을 모두 떠나 있으므로 중도라고 부를 수가 있(『선시의 적기 수사법 강설』, 송준영, 2023)기 때문이다.
또 권현수 시인이 「수레바퀴를 따라」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가 선시를 쓰는 이유도 ‘공’과 ‘색’을 구분하지 않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추구하는 시적 경향도 ‘그 길이 곧/그 길이다/여기가 거기고/거기가 여기다’의 시행 몇 줄로 시세계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권현수 시인은 「수레바퀴를 따라」를 통해 지금까지 천작해온 ‘공(空)’이 색(色)이고 색(色)이 ‘공(空)이라는 데리다 해체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권현수 시인을 상호관계성(相互關係性)의 시 의식을 지닌 시인으로 보는 이유이다.
결어
권현수 시인의 7편의 시편에서 찾을 수 있는 시 의식은 대체적으로 ‘인연’과 ‘비움’, 그리고 ‘계층사회의 부정’이다. ‘여기’가 ‘저기’이고, ‘나’가 ‘너’이고,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다. ‘여기’가 ‘저기’이고, ‘나’가 ‘너’라는 것은 언제든지 ‘나’가 ‘너’가 될 수도 있고, ‘너’가 ‘나’가 될 수 있다는 인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인연설에 시 의식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점도 발견된다.
동시에 권현수 시인의 시세계는 『잡아함경』 12권 「인연경」(『동국역경원』, 344~345쪽)에 ‘이것이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이것이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이것이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이것이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와 같은 맥락의 시원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권현수 시인의 시세계는 ‘이것’과 ‘저것’의 주체가 상호의존적 관계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는 의존성(依存性)의 원리에 의해 시를 쓰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또 ‘나’가 ‘너’라는 동일성의 주장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상존하는 수직적 사회가 아니라 비대칭의 수평적 구조의 사회를 추구하려고 한다. 앞에서 일간 언급한 바와 같이 권현수 시인은 대부분의 시편에서 프랑스 자크 데리다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비평 용어로써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차용하여 추구했던 차이(差異)와 연기(差延), 다시 말해서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는 상호관계성을 드러낸다. ‘여기가 거기고/거기가 여기다’라는 애매성과 모호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특성을 지녔다.
선과 악, 유와 무 등과 같은 단어들은 서로 반상(反常)되지만, 권현수 시인의 선시는 이것을 초월하려고 한다. 그의 선시는 공(空)으로서 어떤 경계(境界)도 요구하지 않거니와 어떠한 장벽도 허용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시인의 선시(禪詩) 세계는 그 자체가 공과 색의 동일성 증명이다. 즉 해체다. 더 나아가 이 해체는 파괴(fracture)가 아닌 건설(construction)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권현수 시인의 선시의 시세계는 ‘공(空)’과 ‘색(色)’을 해체하여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고,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은 ‘없음’이고, 이 ‘없음’은 해체된 상호관계성이고, 경계를 허물어 새롭게 건설한 또 다른 무(無)/공(空)의 세계이다. 그래서 A. 데이트는 “시인의 언어는 단순한 전달(communication)이 아니라 영적 교섭(communion)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이 영접 교섭을 통해 인문적 요소가 살아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권현수 시인은 오늘도 선시 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The End
심은섭 시인
--------〈약 력〉-------------------
▪ 심은섭
▪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 2008년 『시와세계』 문학평론 당선
▪ 시집 『물의 발톱』 외
▪ 평론집 『한국 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외
▪ 시론집 『비대상시론』 외
▪ 편저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외
▪ 2006년 『제1회 518문학상』 수상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