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살아가는 방법과 비판과 지혜를 다루는 학문이다.
최근 한국에서 ‘인문학’이라는 말처럼 오용되고 남용되는 말은 없어 보인다.
이는 ‘인문학’이 들어간 수많은 책들의 제목만 일별해도 알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인문학’, ‘부모 인문학’, ‘광고 인문학’, ‘사장의 인문학’, ‘돈의 인문학’, ‘연애 인문학’에다 심지어 ‘팬티 인문학’까지 있다.
조만간 ‘고3 인문학’이나 ‘조기유학을 위한 인문학’도 나올 법하다. 모든 것이 인문학이 되어버릴 때, 바로 그때가 인문학이 사라지는 시점이다.
도시 곳곳에 빽빽한 대형 십자가들이 역으로 종교적인 것이 상실된 시대를 표상하듯이,
긴장감도, 비판정신도, 부끄러움도 없이 모든 곳에 사용되는 ‘인문학’이야말로 그것이 실은 하나의 ‘비즈니스’일 뿐임을 보여준다. 장사만 된다면 자본주의는 혁명도 사랑도 비판정신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낸다.
‘창조경제’라는 말을 팔아먹기 위해, 자본가를 위해, 스타강사가 되기 위해, 베스트셀러를 제조하기 위해 너도나도 ‘인문학’을 갖다 붙일 때, ‘인문학’은 자신의 탐욕을 고상하고 희망찬 말로 치장하는 만능 가림막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자살률 세계 최고에 독서시간 세계 최저인 나라에서 ‘인문학’이 이토록 인기 있다는 역설이야말로 현재의 ‘인문학’이 허상임을 보여준다.
근대 인문학은 르네상스에서 기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르네상스’ 하면 무슨 호텔 이름처럼 풍요롭고 화려한 이미지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 시대의 인문학자들이야말로 중세적 신의 질서, 억압적 권력, 무지의 관성에 맞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지적 전사들이었다.
진정한 인문학은 이 시대의 가장 불편한 문제를 제기하는 일, 가장 인기 없는 학문을 묵묵히 계속하는 일, 가장 주변부의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 속에 있다.
이 시대는 ‘인간’의 가치가 헐값으로 떨어진 총체적 야만의 시대이기에 그렇다. 이런 암울하고 절박한 시대를 쉽고 실용적이고 희망찬 말들로 포장하여 팔아치우는 오늘의 ‘인문학’, 그것이야말로 실은 가장 먼저 처리되어야 할 쓰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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