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년 12월 15일 오후 8시 19분, 이스라엘 감옥의 독방에 갇혀 있던 한 사내가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죄수
X'로만 알려진 그가 누구인지, 어떠한 이유로 이 독방에 갇혔는지, 그리고 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교도관들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고, 보안상의 이유로 모든 언론에 보도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 사건에 접하면서 나는
즉각적으로 조르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라는 말이 생각났다. 호모 사케르란 고대 세계에서 공동체 안에서 죄를 지어 공동체에서
배제되었고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호모 사케르는 인간과 신들의 공동체로부터 모두 버림받은 존재이지만 또한 배제의 형식으로 공동체에
속한다. 역설적으로 법에 의하여 법질서의 외부에 있는 방식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내 기억 속에 '호모 사케르'로
간주될 수 있는 또 한 명의 유대인이 있다. 이스라엘은 1960년대 초반부터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 원자력연구소에서
핵무기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개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용기 있는 이스라엘 기술자에 의해 폭로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9년 동안 기술자로 일했던 모르데카이 바누누였다. 1986년 바누누(당시 33살)는 자신이 일했던 디모나 지하
제2작업장에서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생산라인을 찍은 필름 두 통을 영국기자에게 건네주었다. 이스라엘이 그동안 섬유공장으로 위장한
채 핵무기를 만들어 왔음이 분명해졌다.
그후 바누누는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의 여자 정보원인 신디의 유혹을 받아 이태리로 유인되었다가 사라진 후 12년 독방 생활을 포함해서 18년 징역형을 살았고, 2004년 봄에야 풀려났다.
그
러나 이스라엘 당국은 석방 후에도 외국인과의 접촉을 금하고 국외 출국을 금지 시키는 한 편 그의 신변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발표함으로 누구든 배반자인 바누누를 죽여도 좋다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내렸다. 바누누는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한 교회에
갇혀서 지내다가 창틀 사이로 외국 언론과 접촉했다고 다시 감방에 갇혔다.
'죄수 X'의 의문의 죽음 후 2년이 흐른
2013년 2월 12일 호주의 국영방송인 ABC에서는 '죄수 X'는 호주국적의 34세의 벤 지기어이며, 모사드 요원이었다고
보도함으로써 세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죄로 재판을 받았으며 왜 죽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2월 방송에 이어 후속 편으로 제작된 5월 7일 방송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알려졌다. 지기어가 이스라엘의 적인 레바논의
헤즈볼라의 정보원과 위험한 정보를 가지고 위험하게 거래하다가 자기 보다 더 고수였던 상대방을 만나 탓에 의도가 들어났고 이스라엘의
안보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 죄로 비밀 재판에서 22 년형을 선고 받고 독방에 수감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간덩이가 부은
스파이어였던 지기어는 위험한 정보를 가지고 놀다가 위험하게 죽은 것이었다.
몇 해 전에 이스라엘 정보부대 모사드가
팔레스틴 무장단체 하마스의 지도자를 암살한 사건이 발생한 사건이 보도가 되었다. 철저한 비밀 유지로 악명 높은 모사드가 작전을
칠칠치 못하게 해서 탄로가 나버린 것일까?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세상이 변해 버린 것이다. 즉 , 아무리 용의 주도한 모사드
비밀요원들일지라도 증거가 될 단서를 남겨두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건물과 거리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휴대폰·신용카드사용 내역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전산화된 여행 기록을 순식간에 확인할 수
있고, 생체 정보가 담겨 있고 기계로 해독이 가능한 여권을 사용해야 하는 시대에 단서를 남기지 않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007 첩보 영화처럼 비밀요원들이 더 이상 영원히 꼬리를 잡히지 않는 상태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기어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도 이런 방법으로 풀려져서 ABC의 보도가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정보는 곧 권력이요
돈이다. 80 년대 말 역곡역 근처 부동산 사무실에 갔다가 근처의 땅이 모두 조선일보 직원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역곡에 전철역이 들어선다는 계획이 세워지는 단계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근처의 땅을 모조리 사두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부자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중앙정보부가 힘을 쓸 때는 곧 정보가 중앙이었던 시절이었다.
정보에는
우체통으로 무작위로 날아드는 우편물 같은 쓰레기 정보에서 특수한 분야에 특수한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까지 다양한 정보가
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해당 분야에 정보를 분석할 능력이 없으면 전문가 구실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나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마땅히 기독교 정보에 관한 전문가이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정보의 근원인 성경에 대하여 얼마나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의 전문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은 성경에 대하여 우체통으로 무작위로
날아드는 우편물 같은 쓰레기 정보 수준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예를 들면 20 세기 중반 사해문서의 발견으로 성경 속에
숨겨진 있던 암호를 풀 새로운 단서가 발견되었지만 다시 사해문서는 가톨릭의 손으로 넘어가 문서에 대한 정보를 가톨릭이 독점해서
자기들 편에서 필요한 정보만 공개하고 있는 사정이다.
하나님의 예수를 보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신 사건 속에는 무한한
정보가 담겨있다. 그 속에는 우리가 풀어야할 수많은 단계별 암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기독교 시장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져서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셔서 죽은 다음 천국으로 인도한다. “는 가장 단순한 해석이 독과점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전에 예수를 한 번 면회도 해보지 못한 바울이 유대교의 입장을 가지고 유대교를 상대로 설명하려 애썼던 해석이었을 뿐이다.
30 년 전 고등학교 교목을 할 때 이었다. 6.25가 끼어있는 주간에 하루는 교무실에 들어갔더니 분위기가 살벌했다. 6.25의 성격 문제를 놓고 50대의 교감 선생과 20대 후반의 젊은 교사와 한 판 붙은 것이다.
교감은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 6.25를 이해하고 있었고 젊은 교사는 당시 소개되기 시작한 미국 (소련이 아니고) 군사 학자 부르스 커밍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었다.
교감은 나를 보자 마치 원군을 만난 듯 반기면서
“목사님! 마침 잘 오셨소. 아니 이 선생이 6.25를 남침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야기 좀 해주시요.” 했다.
나는 단 번에 교무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위기를 읽을 수가 있었다.
“제 생각에는 교감 선생님이 옳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 선생도 옳고요.”
“아니? 목사님이 무슨 황의 정승이요?”
“아니요. 교감 선생님은 교감 선생님이 갖고 있는 자료에 의하여 옳고, 이 선생님은 이 선생님이 가진 자료에 의해서 옳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어떤 자료가 객관적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해서만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료가 부족하면 치우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고 풍부한 자료를 가져야 만이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언
제나 자신이 겪거나 아는 것이 유일하다고 믿는 데서 모든 대립과 갈등이 비롯된다. 그러나 내 생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지옥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자신의 절대적 옳음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분노와 절망, 증오가 바로 지옥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단테의 신곡에 의하면 지옥으로 가는 문은 넓고 천국으로 가는
길은 좁은 문이란다. 천국의 문은 왜 좁은 것일까? 내 생각으로는 각자가 그리는 천국이 달라서 한 번에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없기
때문에 그럴 것 같다. 자신이 믿는 천국에 천국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려고 하면 바로 그 순간에 지옥이 생기는
것이다.
첫댓글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해서만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료가 부족하면 치우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고 풍부한 자료를 가져야 만이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없이계신이님의 글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에 대한 개관적인 자료가 너무 부족합니다.
사실 얼마전 그러니까 며칠 전 인터넷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마르다와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으며 이스라엘 왕위를 넘보다가 실패해서
빌라도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어느 지방으로 망명을 해서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고 예수의 무덤이 현재까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도 지금도 생존하고 있다는 내용을 영국의 BBC방송에서 심층 보도를
했고 이에 대하여 반발이 일어나 결국은 재판까지 가게되어 기독교인인 판사가 방송내용이 맞다고 판결을 내렸다는 뉴스입니다.
판사가 판결전 내가 기독교인이지만 아무리 방송내용을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유럽 특히 영국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이탈과 타 종교로 개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재판의 내용이 국내 중앙일간지에도 보도가 되었었구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엄청난 반발이나 비난이 쏟아질 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믿으려고 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과 진실을 바탕으로 두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학문도 어떤 학문이던지 그 중 특히 수학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바탕에 두고 발전해왔음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왜 1+1=2 인가에 대한 물음이 없고 그에 대한 객관적인 증명을 하려는 시도가 없었다면
사과가 땅에 떨어진다는 만고의 자연현상에 대한 물음이 없었고
그에 대한 객관적인 증명에 대한 시도가 없었다면
수학이나 과학이라는 학문이 지금에 결과를 가져왔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세상 학문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는
하나님 이라고 하는 신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물음이나 객관적 증명에 대한 노력을
그저 믿음 없는 자의 무지함으로 치부를 해버리고
또한 그러한 노력이나 시도를 이단시하거나 마녀사냥하듯이 정죄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봅니다.
이것이 내가 믿고자 하는 기독교의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아는 객관적인 기독교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기독교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 기독교가 설명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재 까지도 말입니다.
앞으로 100년 200년 1000년이 흐르고 난 뒤 과학과 수학이 얼마나 어떻게 발전할지 모르지만
현재의 기독교 신학은 과연 그 때에 가서 어떻게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모든 사실과 진실에 대한 물음과
의문에 대하여 죄악시 하고 무지하고 믿음없는 자의 헛된 망상쯤으로 여긴다면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호 로고스 앤 사르크님이 수많은 자료를 가지고 검증하고 연구해도 그 의문은 더해만 가지 좀처럼 풀리지 않을것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물음이나 증명에 대한 노력을 하여서 과연 어떤 결론에 다다를지가 궁금합니다.
물론 그렇게 학문적 접근을 한다면 훌륭한 신학자가 되어서 앞길이 탄탄대로를 달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베드로나 요한이 그런 성경연구를 정진해서 깨달음에 다다랐나요
그리고 바울이나 디모데나 초대교회 교인들이 성경사본 수백 수천가지를 연구분석하여서 진리를 깨달았나요
아니 다 떠나서 호 로고스 앤 사르크님이 믿는다는 기독교에 예수님이 성경사본 몇가지를 읽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생전에 예수를 한 번 면회도 해보지 못한 바울이 유대교의 입장을 가지고 유대교를 상대로 설명하려 애썼던 해석이었을 뿐이다.
=> 뭐 이런류의 글들이 많이 떠돌고 또 그런소리를 많이 듣다보니 이제 들어도 별로 시큰둥해집니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모든것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신앙적인 믿음일 뿐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온 모든 내용도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없는 모든 내용은 사실이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자유주의 신학이 대세가 되다보니 창세기 앞부분도 단군신화같은 설화에 불과하고
여러기적들도 사실이라고 말할수 없다고 하게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구약은 이스라엘 잡귀를 믿는 토속종교이요
예수그리스도는 억압받는 민중해방을 위한 혁명가인데 사람들이 개인의 구세주로 오도했다고 주장하게되고
성경은 믿을만한 객관적사실이 아닌 수많은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인데 어처구니 없는 설화와 소설들과 오류덩어리라하는것이지요
예수가 구세주라는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독선과 편집일뿐이요 모든 종교는 구원이 있고 우리만 진리라는것은 맞지않다고 합디다.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성령의 영감에 대해 이야기하면 객관적으로 증명하라고 들이댑니다.ㅎㅎ
증명해서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것은 사실처럼 이야기 하지마라~!!!!
참 합리적이지요(?)
예수님이 이땅에 살아계신 모습으로 다시와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객관적 사실로 입증해보여라고 하겠지요
아니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면 당신의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이 다 이성과 논리로 수긍하도록 객관적 사실로 증명해 보이시요 따지겠지요.
그냥 믿다니 그건 개인의 신념일뿐 말도 안된다 더군다나 그걸 사실이라하는것은 용납할 수 없다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설명을 하실까요?
믿음이 과학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면 그건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는데로 믿고 판단하는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믿는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고 이성과 논리로 구원받는다 생각하는 사람에게
저 같은 사람은 꼴통이요 시대에 덜떨어지고 편협하고 몰지각한 사람으로 보일것입니다.
이성과 논리로 신을 알 수 있다면 저는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성과 논리로 신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하고 증명한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은사람이 살아나고 장님이 눈뜬것보다 제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신학을 신봉하는 사람에게 저는 깝깝한 사람이겠지요. 그래서 그냥 침묵만 하려다 이렇게 바보취급당하려고 작정합니다.
노무현만 바보가 아닌가 봅니다..ㅠㅜ
네 맞습니다.
FirstLove님 말씀 또한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깨달음이나 앎이 늘어날 수록
하나님은 당신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진실에 대하여
수학이나 과학보다도 더 정확무오하시다 하는 것에 대하여도 접근하시도록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그리스나 로마의 또는 그외 기타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는 수 많은 신화중에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진실이라면 그것은 또한 반드시 사실적으로 진실하게 이야기가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어집니다.
적어도 제 개인적인 어떤 작은 깨달음일지라도 앎일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사실과 진실이라
는 진리 안에서 이야기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하여 그렇다 라고 인정하고 넘어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넘어야 할 산으로 제게 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한 의문과 해답은 그 어느 누구도 말 할 수 없는 오직 주님만이 그것은 이것이다 라고 말씀 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요 ^^
신앙의 길은 끊임없이 다가 오는 산을 넘고 또 넘고 하는가 봅니다.
ㅈ이제는 어느 정도 올라왔다 싶으면 또 다시 현재까지 올라온 만큼의 산이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산일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들고요 ^^;
개인적으로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마지막 산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 오를 때마다 많이 힘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까지 온 것이 그분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그 과정은 힘이 듭니다.
아마도 성경의 흐름을 따른다면 일곱번 정도의 산을 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과 의도를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어떤 가식이나 포장도 하나님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생각이 듭니다.
신앙여정이 내가 가면 너무나 힘들고 주님이 가시면 너무나도 쉽습니다...
저는 열심히 걸음마 연습중입니다. ^^
로고스님 예수님 등에 엎혀 날아가시는 날이 오시기를 축복합니다. ^^
FirstLove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