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를 시작한 지 40년. ‘컴퓨터 세터’로 불리던 국가대표 시절을 거쳐 이탈리아 배구의 영웅으로, 그리고 한국 배구의 부흥을 이끈 명장으로 김호철 감독은 배구와 평생을 함께했다.
이젠 배도 불룩하고 몸이 무거워져 코트 위를 날아다닐 수는 없다. 하지만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코트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벅차오른다.
에디터 배만석 포토그래퍼 최해성
시즌이 끝나고 텅 비어버린 현대캐피탈 배구단 연습장엔 적막함만이 선수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 고요함을 깨며 들어선 김호철 감독. 윗옷을 벗어던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선수들을 독려하던 호랑이 감독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마냥 허허로운 웃음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삼성화재의 그늘에 가려 늘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현대캐피탈 배구단을 2년 연속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한 명장 김호철. 하지만 올 시즌은 그에게 최고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팬들이 지켜보는 안방에서 삼성화재가 샴페인 터뜨리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했다.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긴 거지. 원래 스포츠라는 게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건데 한 팀만 계속 우승하면 재미없잖아.” 비록 우승컵을 내주며 패장이 됐지만 팬들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던 김호철 감독이 돌아온 2003년부터 한국 배구가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꿈꾸던 신명나는 배구. 패배의 슬픔도 잠시, 김호철 감독의 눈은 벌써 다음 시즌을 바라보고 있었고, 휴대전화는 연신 울어댔다.
팬이 없는 스포츠는 죽은 거야
시즌이 끝나 한가할 줄 알았는데 전화가 무척 많이 온다. 시즌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다 미뤄 놓거든. 별로 중요한 일은 없어. 쓸데없이 바쁘기만 한 거지. 전화는 주로 기자들한테 많이 와. 하하. 패장한테 뭐 그리 물어볼 게 많은지.
우승컵을 빼앗겨 안타까움이 클 것 같은데. 안타깝다기보다는 선수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더 많았어. 시즌 시작할 때부터 용병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정신력으로 버텼거든. 시합이야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고. 계속 우리가 우승하면 재미없잖아. 하하.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고. 어느 팀이 이길지 모르는 경기가 더 재미있는 거 아냐?
마지막 경기에서는 몸싸움까지 벌어졌는데, 뭐가 문제였나? 경기를 하다 보면 서로 감정이 격해질 수도 있어. 근데 문제는 심판한테 있었다는 거야. 한국 배구의 축제 마당에 왜 일본 심판이 있어야 했는지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교류를 하는 건 좋지만 진행이 매끄럽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니까.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한테 해준 얘기는? 뭐 고생 많았다고 했지. 좋은 용병이 있었으면 편하게 시합했을 텐데 그걸 못 해줬으니 미안하기도 했고. 그러고 나서 딱 한마디 했어. “우리 집안에서 남한테 축제 자리 내준 수모는 절대 잊지 말자. 내년에는 꼭 우승컵을 되찾아오자.” 최선을 다해준 건 고맙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배구를 시작한 지 40년이 넘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했으니까 벌써 그렇게 됐네. 원래 육상 선수였는데 갑자기 학교에 배구팀이 생겨서 하게 됐지. 여러 명이 함께 공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어 보이더라고. 하하.
배구는 키 큰 선수들만 하는 거 아니었나? 왜 이래. 나도 중학교 때까지는 장신이었어. 신문에도 ‘장신 세터’라고 나왔었다니까. 물론 그 이후로 성장이 멈춰서 그렇지. 지금 키가 그때 키야. 하하. 고등학교 가니까 바로 ‘단신 세터’로 바뀌더라고.
작은 키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물론이지. 배구에서 가장 큰 장점이 바로 키거든. 키가 안 크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다른 걸로 대신했지. 혼자서 점프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때는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 물론 맞기 싫어서 연습한 것도 많았지. 하하. 잘하든 못하든 일단 맞으면서 하루를 시작했으니까. 하루라도 안 맞으면 잠이 안 올 정도였어.
맞으면서 실력을 쌓았다? 요즘 선수들은 부족한 게 없지만 그때는 모든 게 부족했거든. 대신 정신력 하나는 끝내줬지. 그게 다 맞아서 생긴 정신력이었거든. 흔히 말하는 ‘헝그리 정신’ 있잖아. 지금 애들은 아마 이해 못 할 거야. 선후배 간의 규율도 얼마나 심했는데. 스포츠가 신사적인 경기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전쟁이야. 어쨌든 승패가 갈리는 게 스포츠니까. 특히 한국에서는 결과가 중요하잖아. 과정은 보지도 않고. 경기에서 지면 감독에게 돌아오는 화살이 말도 못 해.
혹시 우승 못 했다고 안 좋은 얘기라도 들은 건 아닌지. 특별히 그런 건 없었어. 물론 우승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된 거지. 2년 연속으로 이기고 나니까 나부터 좀 소홀해졌었거든.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원위치로 돌아간다는 건 아니고 선수들 스스로가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만들려고. 지금까지는 무조건 내가 끄는 대로 따라왔지만 이제 선수들이 끌고 가야 하니까. 그렇게 감독과 선수가 조화를 이뤄야 스포츠가 아닌 예술이 탄생하거든.
스포츠가 아니라 예술을 한다? 내가 현대캐피탈 감독을 맡으면서 다짐했던 게 있었어.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재미있는 경기를 하자. 누가 봐도 현대캐피탈이 하는 배구를 보면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원래 예술이 그런 거 아냐? 사람들한테 즐거움을 주는 거. 그래서 이벤트도 얼마나 많이 하는데. 요즘 뭐냐 그… 그래, 소녀시대 애들 노래에 맞춰 춤도 따라 하고. 하하. 팬이 없는 스포츠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인지 배구 인기가 부쩍 높아졌다. 아예 코트에 드러눕기도 하던데. 김호철이 외국물 좀 먹었다고 들었는데 다른 감독들하고 똑같이 하면 얼마나 욕하겠어. 그래도 명색이 ‘컴퓨터 세터’라고 불리던 사람이고, 이탈리아에서 선진 배구를 배우고 왔다는데. 경기장에서 벤치에 안 앉아있고 호들갑을 떠는 게 다 그런 이유 때문이야. 처음엔 설치고 다닌다고 욕 먹었지.
근데 지금은 다들 일어나서 하잖아. 하하. 그렇게 하면서 경기를 졌으면 모르겠는데 계속 이기니까. 우승도 하고. 팬들은 선수들한테 대신 욕해 주니까 좋아하는 거고. 아무리 좋아하는 선수라도 경기를 못하면 욕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 근데 작전타임에 감독이 불러서 대놓고 삿대질하고 욕하니까 속이 얼마나 후련하겠어.
김호철의 쌩쑈(?)를 보는 게 배구의 또 다른 재미라고 하더라. 그런 팬들도 있지만 선수들 주눅 든다고 싫어하는 팬들도 있더라고. 그래도 난 뒤끝은 없어. 뭐라 욕해도 1분을 안 가. 평소에는 얼마나 친하게 지내는데. 나도 선수 출신이라 그 맘을 다 알거든. 당근과 채찍은 늘 따라다녀야 돼. 욕하고 나선 다독이고, 다독이고 나선 또 욕하고. 하하.
나도 프로, 불러주면 어디든 못 가겠어
아직도 ‘감독 김호철’보다는 ‘컴퓨터 세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때가 한국 배구의 전성기였으니까. 멤버가 아주 대단했지. 강만수, 이인, 장윤창, 강두태, 문용관, 유중탁… 정말 화려했어. 그런 멤버들이 있었으니까 나도 같이 뜰 수 있었지. 2m가 넘는 선수들 사이에서 쪼그만 애가 왔다갔다 하니까 더 기억에 남았을 테고. 그때도 얼마나 난리였는데. 일단 코트에 들어가면 선배고 뭐고 할 것 없이 고함을 지르고 거침없이 했기 때문에 당돌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
이탈리아엔 어떻게 가게 된 건가? 유럽에 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하던 때였지. 1978년에 세계선수권대회 때문에 로마에 갔었는데 너무 좋아서 눈에 확 꽂힌 거야. 근데 마침 이탈리아에서 오라는 제의를 받고 81년에 가게 된 거지. 배구도 배구지만 이탈리아에 가고 싶었거든. 하하. 물론 돈도 10배나 더 받았고. 당시에는 이탈리아보다 우리가 배구를 더 잘했어. 그러니까 키가 작아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지. 3년 동안 팀을 우승시키는 바람에 아주 대접을 제대로 받으면서 살았어.
배구 때문이 아니라 놀러 간 것 같은데. 하하. 그래서 실컷 구경 다녔어. 매주 토요일에 시합을 하고 훈련은 월요일 오후에 시작하니까 주말만 되면 집사람이랑 같이 엄청 돌아다녔어. 새벽에 일어나 차를 끌고 나가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밤이 돼서야 돌아왔으니까.
외국에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구단에서 준비를 다 해줬으니까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어. 내가 한마디만 하면 뭐든 다 해줬으니까. 특별대우를 받았다고나 할까? 경기 때문에 외국에 많이 다녀서 먹는 것도 익숙했고. 피자나 스파게티 같은 건 이미 먹어 봤잖아. 딱 하나 어려웠던 게 말이었지.
용병 출신이라 용병을 다루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지 않나? 어떤 구단에서는 용병이라고 하면 정말 껌뻑 죽는데 그건 말이 안 되지. 돈 주고 데려온 용병한테 왜 쩔쩔매야 돼? 어차피 용병은 실력으로 말할 수밖에 없어. 난 용병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고. 우리나라는 합숙을 하잖아. 용병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힘들어하는 게 바로 합숙이야. 외국에서는 따로 사는 게 당연하거든. 그래서 우리나라 애들한테도 합숙을 안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는데 다들 싫어하더라고. 하하. 어쨌거나 정말 쓸 만한 용병을 데려오는 게 참 어려운 숙제야.
선수로서는 물론이고 감독으로서도 이탈리아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더라. 선수로 뛸 때도 그랬고 감독 맡아서도 우승을 했으니까. 여기와는 시스템이 달라서 선수나 감독들의 이동이 많아. 좋은 선수나 감독은 그냥 돈을 주고 데려가는 거야. 우리처럼 한군데 들어가서 계속 있는 게 아니라. 삼성맨이다, 현대맨이다 이런 건 아마추어 때나 하는 얘기지. 그래서 지금은 이탈리아 배구가 우리보다 훨씬 낫잖아. 근데 거기도 문제는 있어. 지나치게 실력만 따지니까 팀에 12명이 있으면 그중 10명이 용병인 거야. 자국 선수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거지. 그래서 프로팀은 인기가 많아도 대표팀은 엉망이야.
이탈리아에서 계속 러브콜이 온다던데. 그쪽에서 한창 잘나갈 때 왔으니까. 베네통 회장이 친구인데 들어와서 청소년 팀을 맡아 달라는 거야. 거기 4~5개 팀이 있는데 총괄하면서 선수를 키워 달라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 고민 중이야. 선수들도 그렇지만 나도 프로잖아. 프로라는 건 조건이 맞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잖아. 성적이 안 좋으면 잘릴 수 있듯이 나도 꼭 현대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는 거지.
순탄하게 살았다고? 배구가 날 괴롭혔지
가족이 이탈리아에 있어 ‘기러기 아빠’로 지내지 않나? 데려오고 싶었는데 절대 안 온다더라고. 딸은 프로팀 배구 선수고 아들은 이탈리아 골프 대표라서 오기도 힘들었지. 그래도 나만 가라고 하니까 어찌나 서운하던지. 하하. 근데 가족이 없어서 팀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술을 별로 안 좋아해서 친구들도 만날 일이 별로 없었고. 사실 그것 때문에 친구들한테 욕도 많이 먹었지만. 하하. 그래도 우승하고 나서는 거하게 한잔 샀어.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가 많겠다. 그거야 말할 필요도 없지. 매일 전화는 하는데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못 써주니까. 내가 한국에 올 때가 애들 사춘기였는데 제대로 못 챙겨 줬잖아. 집사람이 잘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빠가 해야 할 역할이 따로 있는 건데. 시즌이 끝나고 나면 꼭 가서 보는데 볼 때마다 애들이 부쩍부쩍 크더라고. 이제는 대화하기도 힘들다니까.
아이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게 있나?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라고. 잘못을 했더라도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해. 그걸 숨기다 보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너희는 항상 한국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하지. 잘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어도 무슨 일이 생기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욕을 많이 먹거든. 그래도 절대 서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하라고. 옷 하나를 입어도 제대로 갖춰 입고, 뭘 하든 정확하게 행동하라고 당부하지.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스스로를 평가한다면. 일단 노력은 많이 해. 하하. 아무래도 떨어져 지내니까 아이들 얘기를 최대한 존중하려고 하고. 집사람한테는 정말 미안한 게 많아. 세 명이 전부 운동을 하니 얼마나 챙겨야 할 게 많았겠어. 더구나 같이 살 때는 내가 고집이 엄청 셌거든. 물론 지금은 팔불출이라고 할 정도로 끔찍이 아끼지만. 하하. 집사람이 내 정신적 지주야. 하하. 다시 태어나도 집사람하고 결혼할 거야. 정말이라니까.
당신에게 배구란 어떤 의미인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어느덧 배구가 내 반쪽을 다 차지하고 있더라고. 아직 열정이 남아 있는지 배구장에만 와도 너무 즐거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체육관에서 선수들을 보는 순간 다 잊어버리거든. 하하. 그렇게 2~3시간 뛰고 나면 얼마나 개운한지 몰라. 김호철한테서 배구를 빼면 뭐가 남겠어. 아무것도 없어.
지금 행복한가? 음… 예전에 어떤 기자가 살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웠던 적이 없는 거야. 내가 너무 순탄하게만 살아왔나? 하하. 어떻게 살면서 즐거운 일만 있었겠어.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사실 어려움을 잊기 위해 배구에 더 매달려 살았던 거 같아. 근데 가장 어려운 게 배구였어. 하하. 그래도 배구를 하고 있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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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철 1955년생. 밀양 출신. 초등학교 때 배구에 입문해 1975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대표 배구선수로 활동하며 ‘컴퓨터 세터’로 명성을 날렸다. 1981년 이탈리아 배구팀 파르마에 입단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이후 이탈리아 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최우수선수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선수 생활을 마치고 이탈리아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다 2003년 귀국, 현대캐피탈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배구 대표팀 감독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05-06시즌과 06-07시즌 2년 연속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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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 감독님.. 멋져부러~~ ♩♬
김호철 감독의 매력이 느껴지는 인터뷰네요... 스타선수가 명장이 되기가 쉽지 않은데 두가지를 모두 갖췄으니 역시 훌륭한 배구인이세요!!!^^
뭔가 전율(?)이 느껴지는 김호철 감독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