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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조국은 임을 기억하라!!"~++
아! 그날 임들은 강을 건너 산을 건너 저만치 갔다네 조국을 구했고 우리를 구했네 그여명의 그시간 임들은 어둠속으로 달려갔다네 맨몸으로 달려갔다네! 그렇게 가신 지가 반세기기 넘었건만 돌아오시지 않았네 이렇게 성장하여 주렁주렁 열매가 열렸건만 그모습은 어디갔는가 이리저리 찾아보건만, 조국은 하늘이 푸르고 날개를 달아 이렇게 아름답건만 오늘도 보이지않네......... 구국정신은 산야를 덮었고 빛나는 햇살이되었네 오늘도 이조국을 바라보고잇네, 임들의 그 정신이 조국을 발전시켰네 임들이시여! 고이 편히 잠드소서. 조국은? 영원토록
임들을 "영웅" 이라고 부를것이네ㅡ!!.
[++ㅡ6.25 "한국전쟁" 돌아보기ㅡ++] 韓國戰 參戰記-1950. 7. 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파병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韓國戰 參戰記-작전상항도 韓國戰 參戰記-San_Diego.1950. Black Star. 한 장교의 그의 아내가 자동차에 조용히 앉아서 장교가 한국으로 타고 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USIA). 韓國戰 參戰記-6.25 전쟁 때 서울로 탱크를 앞세우고 남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는 인민군 韓國戰 參戰記-1952.철원 양구 펀치볼 UN군.. 韓國戰 參戰記-How a man died on the way to Maeson Dong.September 2, 1950. Sgt. Turnbull. (Army) 韓國戰 參戰記-비목-작시.작곡한 한명희~ 화천 군생활시 이끼 낀 무명 용사의 돌 무덤을 본 감희를 쓴것. 碑木은 화천 북방지역인 949고지,백암산 등은 6.25.韓國戰爭(1951년) 당시 내가 6사단 7연대 소대장으로 34명으로 새벽 4시에 출동~공격-중공군과 치열하게 전투~고지를 점령하고 보면~병력 반이 손실.. 전사자는 현지에 임시 매장하고 전진한곳.. 6.25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
개요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반도 분단의 결과이며, 한반도의 분단은 급조된 미국의 정책결정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의 정상이 참석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일본 예속은 부당하다고 인정하고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합의했으며, 1945년 2월 얄타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등 3개국의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는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에 의한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 후 독립시키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한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시에 일어날 막대한 인명피해를 우려하여 소련의 조기참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은 참전을 계속 지연시켜오다가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한 지 2일 후인 1945년 8월 8일 대일선전포고와 더불어 만주일대에서 한반도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미·소 양측이 우려했던 일본 관동군은 극히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예상 외의 빠른 속도로 남진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제일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부대가 오키나와[沖繩]와 괌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북위 38˚선을 미군과 소련군의 경계선으로 정하고 그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로 제의했다.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에 분할 점령당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22일 평양에 진주했고,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2일 후 서울에 진주했다.
분할 점령시 미·소 양측은 한반도의 장래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양측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위 38˚선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인 것으로 설정한 반면, 소련은 북위 38˚선을 정치적인 경계선으로 항구화시켜 그 북쪽을 소비에트화하려고 했다.
미군과 소련군은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US-USSR Joint Commission)를 구성하고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서울에서 회의를 개최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함에 따라 한반도문제는 1947년 9월에 국제연합(UN)으로 이관되었다. UN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취급하기 위하여 UN 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UNTCOK)을 구성했다.
UN은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5월 31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UNTCOK가 선거감시임무를 맡도록 했다. UNTCOK는 UN 결의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1948년 1월 한반도에 도착했으나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지역에는 소련의 거부로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UN 총회의 결의는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UN은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고, 1948년 5월 31일 미군 점령하의 남한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결과 의회가 구성되고 의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 행정부를 구성하여 1948년 8월 15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정부가 탄생했다.
북위 38°선 이남에서 UN의 감시하에 대한민국정부가 구성되자 소련은 8월 25일 38˚선 이북지역에서 소련식의 선거를 실시하고 1948년 9월 9일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 발족을 선포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설정한 북위 38˚선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냉전체제로 말미암아 최첨단으로 대립하는 가장 긴장된 양극체제의국경선으로 변했다.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2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치 상태는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과 지리산·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덧붙여 1948년 11월 17일 오대산 부근으로의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전까지 38°선 일대에서도 10여 차례의 북한 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세력에 의한 전복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전쟁준비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조직적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모든 사설군사조직을 해체한 소련군은 11월부터 각 도 인민위원회에 보안청을 조직하고 이를 통제하는 보안부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946년 1월 철도보안대 창설, 같은 해 8월 보안기간요원훈련소 창설,
1947년 5월 보병 2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 및 인민군 총사령부 창설을 거쳐 1948년 2월 8일 육군 3개 사단과 해·공군의 기본체제를 바탕으로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다. 조선인민군 창설 후 남한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우위를 확신한 소련은 1948년 12월 25일까지 북한주둔 소련군의 철수를 발표함과 동시에 미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남한주둔 미군을 철수시킬 것을 촉구했다.
1948년 후반부터 1949년 8월 사이에 중국공산군 소속 한인 의용군 2만여 명의 편입으로 북한군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고, 1949년 9월부터 남침 전까지 소련으로부터 대대적인 군사원조로 북한은 총 19만 8,380명의 병력과 242대의 T-34전차, 200여 대의 항공기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주변정세 북한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그 세력을 급격히 팽창시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한을 둘러싼 정치적·외교적 상황은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 항복 당시 한반도의 경제상태는 92%의 전력, 71%의 석탄, 83%의 금속제품, 70%의 광석이 북한지역에서 생산되고 있었으며, 1948년 5월 14일을 기하여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하자 남한 산업시설의 겨우 5%만이 가동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한 사회의 불안은 더욱 증대되었다.
1949년 9월까지 중국공산군은 중국대륙을 석권하고 국민당군(장제스 휘하의 군대)을 대륙으로부터 축출함으로써 사실상 중국내전을 종결지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해 조·소경제문화협정을 체결했고, 소련과 중국은 1950년 2월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은 소련과 중국 양 후원국으로부터 원조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한편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 철수로 한반도 내의 남북한간의 군사력 균형은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북한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군사력 불균형에 못지 않게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을 할 수 있도록 자극했던 외교적인 사건이 계속되었다. 즉 1949년 3월 D. 맥아더 장군이 한 영국기자와의 회견에서 한반도가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음을 암시하는 설명을 한 것과,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의 전국신문기자 클럽(National Press Club)에서 당시 D.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연설 가운데 극동에서의 미국 방어선은 한반도를 배제, 대륙으로부터 후퇴를 뜻하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공표함에 따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듯한 징후를 보인 것이다.
또한 1950년 1월 9일 극히 소액의 대한군사원조법안이 미 하원에서 부결된 사건은 미국 국무부뿐만 아니라 미국 국민이 한국 방어에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결국 이와 같이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정세는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6.25전쟁의 발발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자 미국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북한의 남침 보고를 받은 미 행정부는 이 사건을 UN의 틀 안에서 해결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즉각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침략문제를 제기했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뉴욕 시간)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상임이사국의 일원인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북한의 남침을 '평화의 파괴' 행위임과 동시에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6월 27일 북한이 6월 25일의 결의를 무시하고 남침을 계속함에 따라 UN 회원국들은 북한군을 격퇴시키 위해 한국 정부에 가능한 모든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행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 내에서의 분쟁이 타이완이나 기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국 제7함대로 하여금 타이완과 중국 본토 간의 전투행위를 차단시키도록 하면서 조심스럽게 한반도의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트루먼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부 및 국방부의 참모들은 미국의 참전을 위한 어떠한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상황만을 보고할 따름이었다.
민(民)·군(軍)의 참모진들로부터 참전을 위한 건의가 없는 상황하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6월 27일 맥아더 장군에게 해·공군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북한군을 남한에서 격퇴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한국 전선을 시찰한 후 워싱턴에, 북한군을 격퇴하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상황 보고를 했다.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6월 30일 지상군의 투입을 명령함으로써 지상군 사용에 대한 제한은 해제되고 해·공군도 북한지역에까지 작전지역을 확대했다.
1950년 7월 7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으로 하여금 UN군 사령관을 임명하도록 요구함과 동시에, UN 회원국에는 그들의 파견부대를 미국 장성 가운데 임명한 UN군 사령관의 지휘하에 둘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함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7월 8일 맥아더 장군을 UN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UN군이 구성되고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타이,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 육해공군의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으며, 단일 지휘체계하에서 국제경찰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6.25의 전쟁결과 6·25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다,
"나는!, 이 순간에도 조국이 부르면 죽음을 담보로 달려 간다!!" 물러감은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겹하다! 한 번 버린 조국은.. .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아~~~ 대한민국이여~!!!.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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