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아닌 역할로 도드라져야
극단 따뜻한 사람의
<12인의 성난 사람들>
김 문 홍 극작가, 연극평론가
늘 느끼는 일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배우가 보여서는 안 되고 그 배우가 맡은 역할이 보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특히 무대 위에서 여러 명의 배우와 함께 섞이어 연기할 때는 더욱 그렇다는 점이다. 그 속에서 대사하지 않을 때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 대사하고 있는 배우의 장면 연기를 흩트리지 않아야 하면서 자신의 역할 연기에 몰입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출은 지금 대사하고 있는 배우의 연기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배우들의 마임과 표정에 더욱 민감해야 할 것이다.
극단 따뜻한 사람의 <12인의 성난 사람들>(레지날드 로즈 작, 허석민 연출, 2024.8
9.〜8.11, 소극장 6번출구)은 그런 연극이다.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가 도드라지냐, 아니면 그냥 묻혀 버리고 마느냐를 판별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객석의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대사하는 배우를 눈여겨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배우들이 얼마나 그 순간 자신의 역할에 몰입되어 있는가도 살핀다. 지금 이 장면에서 대사가 없지만 각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자기만의 반응연기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야 한다.
이 작품은 전체 얼개로서의 특별하고 뚜렷한 서사구조는 없다. 닫힌 공간에서 12명의 배심원들이, 자기 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한 소년에게 무죄와 유죄의 평결을 내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거기에는 하나의 족쇄가 있는데, 그 평결의 방식이 만장일치여야 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평결로서의 유죄와 무죄에 초점을 두고 있기보다는, 각각 다른 배심원들의 시각을 통해 그들이 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초점심도를 맞추고 있다. 관객은 여러 연기를 관찰하고 보는 재미가 쏠쏠할 수밖에 없다. 그려면서 서사의 진행에 따라 관객 자신은 어떤 시각으로 사건과 인간을 바라보는가의 자기 성찰의 시간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허석민 연출의 특징은 무대와 상황을 규격화하고 감정이입을 목표로 하는 사실주의적 관점보다는, 한 사건과 인간에 대해 관객의 냉철한 객관적 판단을 요구하는 서사극의 소외 효과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연기는 철저하게 사실주의적 관점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지만, 주제를 해석하는 연출의 현실 인식은 객관적 거리감을 통한 관객의 판단과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 역시 극사실주의에 가깝게 아주 정교하고 세세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끔 한다. 정교한 무대 장치를 통해 무대를 규격화하고, 정통사실주의적 연기보다는 장식적 요소를 일체 배제한 미니멀리즘을 통해 관객에게 동화(同化)보다는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소외(疏外)를 지향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발단 부분의 유죄 평결의 상황에서 후반부 무죄 평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좀 더 치밀하게 계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유죄 평결의 분위기에서 무죄 평결로 결정 나는 과정까지의 각 인물의 심리적 변화가 섬세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서사 과정의 템포와 리듬 설정에 소홀해 지루해 보이기 쉽다는 점이다. 인물의 등퇴장이 많으면 그것 자체로 장면 사이에 리듬이 설정되는데, 경비 외에는 인물의 등퇴장이 거의 없어서 아주 정밀한 리듬과 템포가 의도적으로 설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면의 긴장과 이완의 관계를 파악하면 모두 해결되는 일이다.
12명의 배심원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는 아주 좋은 앙상블을 보이고는 있지만, 연기 톤이 인물 각자의 성격과 환경,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명확하게 차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쉽다. 그중에서도 대사의 전달력과 화술의 입체성이 좋고 시종일관 성격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8번 배심원 역할의 김신효와 4번 배심원 역할의 박유진, 그리고 9번 배심원 역의 이경진의 연기가 돋보인다. 특히 그중에서 서사의 추동력이 되는 8번 배심원을 연기한 김신효와 대사의 전달력과 역할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 박유진의 연기가 단연 돋보였다. 이경진은 과장을 조금 억제하고 일상적인 연기를 했더라면 좋았을 듯하다. 대사 전달력의 정확함과 역할의 성격을 절제된 연기로 잘 보여준 5번 배심원 역의 박지혜의 연기도 초점심도가 아주 돋보였다. 아무리 화가 나거나 흥분하는 연기를 하더라도 대사의 전달력은 좋아야 하는데 그것이 아쉬웠다.
극단 따뜻한 사람의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무대 장치라는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대신에 오롯이 배우들의 연기로 승부하겠다는 작품의 콘셉트, 무대 위 인물에 대한 일치감으로서의 감장 이입보다는 객관적 거리감으로 관객의 성찰과 비판을 유도한 서사극적 형식의 차용이 돋보인 무대였다. 그러나 배우의 앙상블과 연기가 그 장식적 요소까지 대신해야 하는데 그것까지는 못 미친 점, 서사 전개에 따른 긴장과 이완에 따른 리듬과 템포 설정이 정밀하게 계산되지 못한 점 역시 아쉬웠다. 그러나 배우 연기의 앙상블, 관객에게 편안한 관극 경험을 선사하면서도 성찰과 비판의 현실 인식을 보여준 점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극단의 이름과 걸맞은 휴머니즘의 연극을 보여준 점역시 극단의 연극적 이념에 부합해서 좋았던 것 같다. 극단의 이름과 걸맞은 휴머니즘의 연극을 보여준 점 역시 극단의 연극적 이념에 부합해서 좋았던 것 같다. 현재 부산연극에서 이만한 배우의 ‘합’을 보여준 무대는 그리 흔치 않다. (『예술부산』 2024년 9월호)
첫댓글 작품 분석을 해주시니
연극에 대해 몰입도가 커집니다.
멋진 선생님!
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