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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한 남자는 어떤 양치기가 모든 양들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이를 본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양들을 분간할 수 있지요? 양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목자는 자기 양들 중에서 흠 없는 양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각각의 결점으로 자기의 모든 양을 구분했습니다.
목자는 그 남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출처] 양을 아는 목자 / 예화 |작성자 천리향
양들이 목자를 알아보는 이유는, 아기가 사람을 잘 알아보는 이유와 같습니다.
전에 보조교사로 아이들 풀장 물놀이 갈 때 따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 아기가 허리밖에 안 차는 물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저는 장난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일어서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때 유치원 교사가 물로 뛰어들더니 아이를 집어 올렸습니다.
아기는 물을 먹어서인지 마구 울어댔습니다.
아기들은 자기들 허리밖에 차지 않는 물에서도 익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마 진짜 교사와 보조 교사와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위주로 생각했고, 교사는 아기들 위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저를 따라오지 않습니다.
가장 완전한 관상가들은 아기들이라고 합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왜냐하면 가장 약할 때 누구를 믿어야하는지 가장 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에제키엘 예언자가 활동할 때 이스라엘의 목자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먼저 자기 배를 불리고 양들을 본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목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자신의 배부름을 먼저 생각하면 타인의 배고픔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할 때부터 스위스 치즈 마니아가 되어 지금도 막대한 양을 수입하여 먹는다고 합니다.
북한 주민들은 굶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덕분에 그렇게 살이 찌는 것이란 소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김정은만 배부른 게 아닙니다.
사제인 저도 몸무게가 많이 나갑니다.
굶고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저를 목자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먹여야 하는데 자신 먼저 먹는 목자들!
우리가 북한 주민을 보는데도 그렇게 가슴이 아픈데
하느님이라면 제 때에 음식을 받지 못하는 양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북한 사람들은 누가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면서도 그 지도자들을 섬겨야 하는 것이 더 가슴 아픕니다.
어쩌면 어떤 신자들이 사제들을 바라볼 때도 마음이 탐탁지 않지만 그런 모습으로 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이런 목자에게 목숨을 걸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서 양떼들이 더 이상 먹이가 되지 않도록 구해내어 그들을 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저희 논문 지도 교수님은 사제관에 가난한 사람들을 데려와 함께 사셨습니다.
옷은 주워 입으셨고 매우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때는 ‘한국 들어가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며 결심했지만
정작 너무 풍족하게 살고 있어서 항상 죄책감이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목자의 모습은
자기 배만 불리는 김정은의 모습이 아니고,
그렇게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모습이 아닙니다.
양을 배불려서 자신은 말라 있는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된 목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그런 모습으로 갈 용기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버드대 심리학 엘렌 랭어 교수에 따르면, 우리는 기대한대로 늙는다고 합니다.
즉, 나이가 들기 때문에 눈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늙을수록 눈이 나빠질 것이다’라는 기대가 실제로 우리의 시력 감퇴를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계 거꾸로 돌리기’라는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이 실험은 70대 노인들을 20년 전의 생활 환경에서 20년 전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것은 20년 전의 생활 환경에서 20년 전처럼 행동하니, 실제로 50대와 같은 체력 향상을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의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지레 맞춰놓은 인생의 시계대로 움직이려고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쉽게 인생의 시계를 말하면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적이 꽤 많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내 모습이었지요.
그보다는 새로운 나를 기대하면서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그만큼 후회할 것들을 내 삶에서 없앨 수 있지 않을까요?
미국의 유명 잡지 <뉴월드 라이브러리>의 창업자인 마크 앨런은
매일 아침, 5년 주기로 더 발전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5년 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5년 후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5년 후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실제 5년 후에 그 상상이 현실로 된 것입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향을 두고 적극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 못했던 것은 내 생각에서 나온 부정적인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면 이상한 포도밭 주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 열두 시와 세 시부터 일한 사람, 마지막으로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어떻습니까?
똑같이 주었으니 공평하다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일한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딱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불평불만을 던질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딱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어떻습니까?
그 포도밭 주인이 참으로 공평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에 처사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지금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 때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부정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긍정적인 것인가요?
생각의 차이가 바로 나의 5년 뒤를 바꿉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매사에 감사하라>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 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을 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어떻게’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마태 6,23)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맨 먼저 온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오전 여섯 시쯤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일한 일꾼들입니다.
맨 나중에 온 이들은, 오후 다섯 시쯤부터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입니다.
밭 임자는 일꾼들이 일한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모든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품삯으로 줍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이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는 것은 정당한 항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가르침을 주기 위한 비유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교 사제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사도 6,7)
그런데 유대교 사제들은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 사람들입니다.
(물론 모든 사제들이 예수님 박해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당시의 사제들은 박해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제들 가운데에도 예수님 박해에 가담했던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일에, 유대교 사제들이 개종해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것을 보고,
일부 신자들이 “어찌 박해자들이 우리와 똑같은 신앙인이 될 수 있는가?”라고 반발하고 항의했다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기뻐하면서 유대교 사제들을 환영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일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박해자였다가 사도가 된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처음에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믿지 않았고, 그를 두려워했습니다(사도 9,26).
아마도 바오로 사도를 공동체의 형제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신자들을 하루 종일 일한 일꾼으로,
박해자였든지 아니었든지 간에 뒤늦게 개종하고 신자가 된 사람들을 맨 나중에 온 일꾼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면,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한 신자를 하루 종일 일한 일꾼으로,
인생 말년에 세례를 받은 신자를 맨 나중에 온 일꾼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똑같이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불공평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투덜거리고 항의한다면?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 말은 꾸짖는 말이 아니라 타이르는 말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한...)
어찌 되었든지 간에 맨 처음에 온 이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기 때문입니다.
밭 임자가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최저생계비’를 보장해 주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은 다른 곳에서 놀다가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일을 구하기 위해서 고용주를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실업 상태에 있다가 겨우 일을 구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최저생계비를 받아야 먹고살 수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꾼이 똑같은 품삯을 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뜻이 됩니다.
남들보다 더 뛰어난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을 받거나 못 받거나 그런 차이는 있지만, 받았다면 똑같은 구원입니다.
남들보다 더 우월한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모두가 다 똑같은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원래 하느님 나라는 어떠한 차별도 차등도 차이도 없는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오래 했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 많이 고생했다고 해서, 더 좋은 나라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나뿐인 나라입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탈렌트의 비유’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줄 때,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줍니다(마태 25,15).
종들이 받은 탈렌트는 품삯이 아니라 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할 일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종들과 주인이 셈을 할 때,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받는 ‘상’이 같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23)
그들이 받은 진짜 ‘상’은 주인의 ‘기쁨’과 ‘칭찬’입니다.
많은 일을 한 종에 대해서도, 적은 일을 한 종에 대해서도, 주인은 똑같이 기뻐하면서 칭찬합니다.
이것은 포도밭 일꾼들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으로 받은 것과 같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적용하면,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은 ‘능력에 따라’ 더 많은 탈렌트를 받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모두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초대>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사려고 집을 나서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데려와 일을 시킵니다(20,1-2).
그는 그 뒤로도 네 차례나 아무도 써주는 사람이 없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이들에게
정당한 삯을 주기로 하고 자기 포도밭에 가서 일하도록 해주었습니다(20,3-7).
저녁때가 되어 종일 일한 사람이나 몇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 모두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되자 사람들은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포도밭 주인이 말합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20,14-15)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한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이 비유는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기시던 당신을 비난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한 답변으로서
그들도 공덕과 보상만 생각하지 말고 천민들을 반겨 마땅함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세상의 분배 정의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하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지요.
포도밭 주인이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품삯을 주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 포도밭으로 보내기 위하여’
하루 중 무려 다섯 번이나 나갑니다.
그렇게 초대하시는 목적은 포도밭 일 때문이 아니라 영혼 구원 때문이었고,
결코 세상의 잣대로 저울질할 수 없는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마음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율법 준수와 수고, 나의 선행의 대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의 결과일 뿐입니다.
불러주시는 것도 품삯을 주시는 것도 온전히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어떤 선물을 주실지 따지거나 다른 이들이 받은 선물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도밭은 주님의 집이요, 포도밭 일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집주인인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시는 일은
그 자체로 가장 고귀한 소명이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음이 바로 비할 데 없는 구원의 선물이지요.
따라서 하느님의 선물을 옹졸한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주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좌우되고 물량적 계산에 익숙해져 있는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처신은 그와는 전혀 다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선업이나 공덕에 비례하여 보상하시기도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은혜를 베푸시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뜻대로 처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아무도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서로를 주님 포도밭으로 초대합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이기적인 잣대로 저울질하지 말고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탐욕 때문에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처사에 대해 불평하고 다른 이들이 받는 은총의 선물에 대해 시기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자유와 사랑, 선과 정의의 포도밭으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날이길 기도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착한 목자 -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주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오늘 화답송 후렴은 언제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예전 어느 분이 묘비명을 청했을 때 지체없이 추천한 성구입니다.
착한 목자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현현인 예수님 역시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착한목자로 한평생을 사셨습니다.
예전 수도장상의 조언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장상은 언제나 사목적 입장에서 수사님들을 돌봐야 합니다.
아무리 자식이 못됐다 해도 자식을 내보내는 부모는 없습니다.
장상도 부모와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부모같은 마음으로 수사님들을 대하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사실 예로부터 왕의 이상은 착한목자였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착한목자 영성은 누구나 추구해야 할 영성입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착한목자 하느님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데려 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곳곳에서 목격되는 현실이 아닙니까?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마침내 개입을 선언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바로 이 예언의 실현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선한 포도밭 주인은 그대로 착한목자 하느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보셨습니다.
하나하나의 사정에 정통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관심은 포도밭에 일찍 일하러 온 사람들보다 맨 나중에 온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임자와 같다.’
얼마나 부지런한 주님을 상징하는 밭 임자인지요.
아침 일찍부터 일꾼들을 사서 포도밭으로 보낸 밭주인은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쯤에도 나가 일거리가 없어 서성이는 이들을 자기 포도밭에 보냅니다.
끝까지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내시어 그 삶의 자리로 보내시는 착한목자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일당의 지급에서 발생했습니다.
누구나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급했기 때문입니다.
맨 먼저 온 이들의 불평이 타당해 보입니다.
일꾼과 주인과의 대화가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 일꾼 ;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대로 루가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 나오는 큰 아들이 연상됩니다.
착한목자 주님의 깊고 넓은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대로 자신만 생각하는 옹졸하고 편협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주인 ;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바로 이것이 착한목자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의 잣대로 잴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착한목자로 상징되는 자비로운 포도밭 주인은
‘일한 시간과 양’이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이의 ‘딱한 처지’를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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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을 찾아 나서실뿐 아니라, 잃은 양을 끝까지 기다리시는 착한목자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소망은 모든 이들의 구원입니다.
늘 스물 네 시간 가슴 활짝 열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집인 교회나 수도원은 늘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착한목자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착한 목자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언뜻 보면 포도원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한 듯 보이지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모두 같은 품삯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대에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은 생활이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그날그날 벌어서 생활해야만 했기에, 이른 새벽부터 장터에 나와 일을 시킬 사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아무도 일을 주지 않기에 오후 늦게까지 장터에 서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주인이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똑같은 삯을 준 것은 공평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일할 의무가 있으며,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지요.
이런 이유로 주인은 모든 일꾼에게 품삯을 관대하게 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봉사한 시간이나 결실보다 봉사의 동기와 정신이 더 중요합니다.
늦게 일하러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삯을 정하지 않았지요.
그저 자신들이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인의 처분만 바랐던 것이지요.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우리 역시 봉사를 한다고 주님께 그에 따른 대가를 바란다면 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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